고대 근동에서의 이스라엘

고대 근동은 청동기 시대(기원전 3300~기원전 1300/1200)에서 철기 시대(기원전 1300/1200~기원전 600) 초기까지 약 2 천년 이상 기간의 오늘날 중동에 속하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 시기의 이스라엘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 중요성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근동 지역을 가리키는 지도

글의 순서



1. 고대 근동: 두 문명의 발상지

인류의 중요한 4대 문명과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도

(인류의 주요한 4대 문명 발상지 중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 기원 위치)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고고학 탐사도 더불어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결과로 고대 성지 지도 대부분을 세부적으로 명확하고 정확하게 그릴 수 있게 되었지요.

이집트의 나일강 문명과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의 비옥한 지역인 메소포타미아 문명 연결하는 지역을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부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뜻은 희랍어로 ‘강과 강 사이’의 지대를 의미하지요. 이는 거대한 산맥들에서 흘러나오는 두 개의 큰 강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물줄기가 넓은 평원에 물을 공급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농업이 발달했답니다. 성경에서 “큰 강”은 보통 유프라테스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지역은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그리고 이라크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서쪽은 지중해와 맞닿아 있어요. 그리고 동북쪽으로는 거의 통행이 불가능한 높은 산들, 곧 레바논 산 (3,088 미터), 아마누스 (가장 높은 봉우리 해발 3240미터), 타우루스 (가장 높은 봉우리 해발 3,756미터), 아라랏 (가장 높은 봉우리 3,896 미터), 그리고 자그로스 (가장 높은 봉우리 4,409미터) 산맥들로 둘러 싸여있습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남동쪽으로는 광활한 시리아-아라비아 사막이 펼쳐져 있고, 남서쪽으로는 파란 광야 또는 시나이 반도와 연결되고 있지요. 이는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구분해 줍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가나안은 이 지역에서도 협소하고 덜 비옥한 지역에 속했습니다. 땅은 평지보다는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땅은 시리아보다도 더 작고 강우량이 적은 메마른 땅입니다. 강우량은 한 계절에만 집중해 내리고, 이마저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점차 줄어들어 사막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강들은 바닥이 깊고, 강폭이 좁아 관개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유량도 적어 배들이 다닐 수가 없는 상태였지요.



이렇게 비옥한 초승달 지대 끝자락에 위치한 가장 작고 메마른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 즉 이스라엘은 고대에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나일강 문명을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었지요.

이 두 문명은 각각 큰 강을 끼고 위치했기 기원전 4천 년경 말 무렵부터 문명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두 지역은 유사한 지리적, 경제적인 배경에서 발전했는데, 크고 긴 강줄기가 범람하고 흐르면서 비옥하고 넓은 충적 평야가 형성된 것입니다. 또 강은 그 지역에 교류를 통해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 주었어요. 이렇게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땅에 물을 공급해 줌으로써 그 지역의 세력을 모으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각 세력은 저마다의 조직을 갖추고, 세력을 통합할 힘을 갖은 강력한 왕국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지요. 이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영역 외부로까지 세력을 뻗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는 수메르, 아카드, 미탄니와 히타이트 민족들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후에는 아람 민족까지 연달아 출현하게 되었어요. 아람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따라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을 ‘아람나하라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집트는 거의 독립적으로 일찍부터 통일 국가를 이루고 발전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초기 왕조에서 중기, 후기 왕국으로 왕조들만 교체될 뿐이었지요.

이런 강력한 왕국들 사이에 위치한 가나안/이스라엘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왕국들과 이집트 왕국이 교류, 교역을 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교량 역할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역사상으로 여러 원정군들이 잇달아 이 땅을 휩쓸고 지나가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작고 힘없는 이 지역의 거주민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런저런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쩌면 가나안/이스라엘은 두 거대한 문명이 이룩한 문화 발달에 어느 정도 이바지를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2. 고대 근동의 국제 도로들

고대 근동의 주요 도로길

(고대 근동의 주요 무역로)

성지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역사에서 주요 대로(큰도로)들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가나안 지역의 정착지들은 고대 근동의 국제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 중에 가장 중요한 도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이집트로 뻗어있는 해안 도로였지요.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중심 도시들이 이 대로에 건설되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이 대로를 오가던 무역대상들은 지역 토산물을 비롯해 값비싼 물건들과 사치품들을 실어 날라 주었습니다. 각 도시들은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이 일은 그들에게 꾸준한 수입원이 되었어요. 하지만 이 도로가 무역과 상업에만 이용되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강대국들은 이 도로를 따라 끊임없이 군사 원정을 강행하고, 정복을 하였지요. 전쟁과 약탈 후엔 도시들이 파괴되었고, 폐허의 흔적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성지에 속한 지역은 대부분 남쪽, 아니면 북쪽에서 침입해 오는 외세의 지배 아래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정복자들이 원한 것은 주로 이 대로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었지요. 평지가 별로 없고 대부분의 산악지대로 이뤄진 가나안의 지형은 이곳을 지나는 도로의 경로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가나안/팔레스타인의 주요 국제 도로는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연결되고, 해안선을 따라 북으로 시리아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해변 길입니다. 이 도로는 남쪽 레반트 지역을 남에서 북으로 따라 올라가다 나할 카나 (Nahal Kanah)에 이르러 강가 진흙과 늪에 막혀 동편의 아펙으로 우회해 올라갑니다. 그 후에 샤론 평야 북동쪽으로 바꾸어 므기또와 연결된 아루나 골짜기나 아니면 도탄 계곡을 경유하여 이즈르엘 평야로 이동합니다. 이곳에서 벳 산을 지나 북쪽으로 하초르와 레바논의 베카 계곡으로 가거나, 요르단 강을 건너 다마스쿠스로 갔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 도로 중 이집트에서 사나이를 가로지르는 길을 “호루스 신(god)의 길 (the Way of god Horus)”라고 불렀습니다. 탈출기 13, 17에서는 이 길을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지나는 길”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그러나 이 유명한 국제 도로의 이름은 성경 이외의 다른 고대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제2 국제 도로는 ‘왕의 대로 (임금의 큰길: 민수 21,22)’로 트랜스 요르단 (요르단 동편) 사막을 끼고 있는 고원을 지나는 대로입니다. 이는 이집트와 다마스쿠스를 이어주는 제2의 도로이지요. 이 도로에서 아라비아로 가는 간선 도로들이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또한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2차 도로와 지역 도로들은 주로 지역 교통로로 이용되었습니다. 또한 유사시에 국제 무역상들이 지나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3. 고대 근동의 가나안/ 이스라엘 지리적 특징

이스라엘, 요르단 단층과 습곡

성지 (Holyland, 현재 이스라엘과 요르단)는 지형의 변화가 매우 큽니다. 이런 까닭에 각 지역 간의 기후도 매우 두드러지게 다르게 나타나지요. 성지와 시리아 지역의 지형은, 북부 시리아에서 레바논 계곡, 요르단 계곡, 아라바 광야를 지나 엘랏, 그리고 아프리카 남동부 해안까지 펼쳐져 있는 깊은 지구대(두 단층 사이의 땅이 내려앉아 생긴 크고 긴 띠 모양의 땅)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계곡은 서부 ‘시스 요르단 (Cis-Jordan)’ 이스라엘 또는 팔레스타인과 동부 ‘트랜스 요르단 (Trans-Jordan)’으로 구분해 줍니다. 이 지역은 가까운 거리임에도 두 지역의 고도 차이는 상당히 큽니다. 예를 들면, 헤브론과 모압 지역의 직선거리는 58km 정도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이 지역을 횡단하려면 해발 910m인 헤브론에서 해수면보다 낮은 사해 지역 (해발 -420 정도)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해발 900m인 모압의 높은 평지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렇게 편차가 큰 고도 때문에 험준한 절벽 지대인 유다 광야 끝자락에 메마르고 황량한 아라바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건너편은 비옥하고 물이 풍성하게 나오는 트랜스 요르단 (오늘날의 요르단) 고원 지대를 이루고 있지요. 이러한 지형과 기후의 극명한 차이로 인해 가나안 땅에서 다양한 소수 민족들이 그들의만의 문화를 간직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정착했습니다. 그들은 거의 모든 시대를 통틀어 통합을 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분열을 계속했지요.

성경에는 성지를 지형과 기후에 따라 정확하게 구분하고, 정리한 구절들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신명 1, 7; 여호 10, 40; 여호 11, 16; 판관 1, 9 등). 그리고 행정, 지리적으로 유다 지파의 성읍들을 정리한 내용의 예들이 나옵니다. 네 개의 중요한 지대들 곧, 네겝 (남방) 지역, 산악 지대, 쉐펠라 (평지), 스텝 지대 (건조한 지역 중에서도 나무가 없는 초원 지대) 또는 광야 (여호 15, 21.33.48.61)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 가나안/이스라엘의 주변 사막 환경

성지는 사막과 바다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지의 기후, 자연 환경은 이 둘의 영향을 모두 받고 있답니다. 동풍은 건조한 사막 바람만을 실어다 주는 반면에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생명을 주는 비를 몰고 옵니다. 지대가 높고 바다에 가까울수록 기후는 습해지지요. 가나안/이스라엘 땅 남쪽과 동쪽 지역은 광활한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지역은 지구의 건조 지대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은 정착지역과 사막 지대 또는 스텝 지대를 정확히 구분해 주는 자연 경계 물이 없지요. 그래서 고대로부터 광야나 스텝 지대에 살며 목축을 하는 이들은 이 두 경계를 드나들며 그들이 영역을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스텝 지대와 사막은 종종 성지 역사 특히 성조들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따라서 이곳과 관련된 내용들이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4. 고대 근동의 경제

고대 가나안 이스라엘 경제를 나타나낸 지도



고대 경제의 모든 기반은 식량 생산이었습니다. 식사는 오늘날보다도 훨씬 간단하고 단조롭고, 주로 토산물로 이뤄졌어요.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주로 강기슭의 평야 지대에서 곡식을 생산했습니다. 곡물과 식품들이 매매 거래되는 시장이 있었지만 그 거래의 양은 많지 않았습니다. 레반트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이라크 등을 포함하는 지역) 지역에서도 곡식 (주로 밀이나 보리)을 생산하기는 했지만, 주로 유목과 가축 사육이나 원예가 더 중요시되었지요.

고대 근동 지역 중 북부 평지에서는 주로 양을 기르고, 그외 소나 말을 기르는 지역도 있었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에서는 규모가 큰 낙타 사육을 했어요. 나귀는 기원전 2000년대가 끝나갈 무렵에야 사육되었고, 주로 짐을 나르는데 이용되었습니다.

금속 제련과 가공은 고대 근동 지역의 중요한 경제중의 하나였습니다. 무기와 각종 연장으로 가장 널리 사용된 금속은 구리와 철로, 주로 소아시아, 코카서스와 키프로스에서 생산되었어요. 신명기 8장 9절에 따르면 레바논 계곡이나 길르앗 산지 남부 등 변방 지역에 몇 개의 광산이 있었고, 특히 아라바 지역의 동, 서쪽에 구리 광산 (푸논과 팀나)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집트 남부의 푼트 (Punt) 지역은 중요한 금 생산지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솔로몬의 배들이 금을 실어 왔다는 오피르가 이 지역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향백 나무 등이 우거진 레바논과 시룐 (Sirion/Anti-Lebanon)의 산악지대는 가나안/이스라엘과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건축용 목재를 공급해주는 중요한 지역이었지요. 하우란과 세이르 산 (에돔 지역)의 숲은 그 지역의 목재로만 이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시기에 값비싼 옷감을 만드는데 필요한 ‘자주 염료’인 뿔고등 (Murex)의 생산지가 가까운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은 직물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가나안의 헬라어 명칭인 페니키아는 자주색을 의미하는 ‘피닉스 (Phoenix)’와 연관된 이름이기도 하지요. 시리아 북부 지역의 항구 도시 우가리트에서 발견된 기원전 14세기 문헌에서는 아코, 아스돗, 그리고 아스클론에서 수입한 직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우가리트 문헌들과 후기 아카드 문헌들에는 아스돗과 아스클론이 생선을 수출한 도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지중해 남부 해안 지역의 도시들에서 어장을 만들어 물고기를 키워 수출을 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어요. 소금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해와 소돔산에서 생산을 한 듯합니다. 이는 사해 서북쪽 지역의 이름이 ‘소금의 도시’라는 뜻의 ‘이르함멜라흐 (Ir-hammelah)’란 지명이 암시해 주고 있지요.

향료의 주 생산지역은 아라비아 남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기후를 갖은 사해 지역에서도 향료의 원료가 되는 여러 종류의 고무나무들을 재배했다고 합니다.

특정 지역의 가족이나 부족 공동체는 그들만의 기술들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그 공동체의 경제 기반이었으므로 사업상 기밀을 유지하였습니다. 요르단 계속 지역에 위치한 수콧은 자신들만의 특제품으로 금속기구들을 생산했습니다 (1열왕기 7, 46). 실제로 고고학 발굴로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상아는 쿠쉬 (Cush, 에티오피아 지역부근) 또는 누비아와 시리아 북부의 니이 (Niyi) 지방에서 생산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아 상감 기술은 가나안 땅에서 발달하였습니다. 이는 왕실이나 부유층의 건물이나 가구를 장식할 때 사용되었던 사치품이었어요. 가나안 시대에는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들이 상아 산업의 중심지였지만, 이스라엘 시대에는 주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하맛을 중심으로 생산되었습니다. 아모스 예언서에 의하면 어쩌면 사마리아도 생산 중심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모스 6,4).

이처럼 무역과 교역이 이루어지던 국제 도로을 끼고 있던 지역, 특히 가나안/이스라엘 지역 경제에서의 상업은 매우 중요했던 것입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