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이르러 고고학 답사와 조사를 통해 고대 근동 초기와 기원전 3천년대의 모습이 밝혀져 왔습니다. 초기 인류가 요르단 계곡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당시의 인류는 어떤 삶과 문화를 남겼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1. 고대 근동 초기 문명의 발자취
현대에 이르러 고고학 답사와 조사를 통해 성지 (이스라엘과 요르단) 최초의 문명이 밝혀져 왔습니다. 얼마 전 요르단 계곡에서 착수된 조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가나안/이스라엘)에 인류가 출현한 것은 적어도 50만 년 전인 홍적세 전기입니다. 이 초기 인류는 요르단 계곡이 현재의 깊이로 침강 (침하)되기 이전의 레반트에서 거주했다고 합니다. 가르멜 산과 갈릴레아 지방의 동굴들에서도 홍적세 인류의 뼈가 발견되었지요. 이는 유럽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보다 더 고등한 인류 유형으로 학명은 “초기 팔레스타인 사람”이란 뜻의 “팔레오안드로푸스 팔레스티넨시스 (Palaenthropus Palaestinensis)”입니다.
중석기 시대 (기원전 1만 년전-8천 년경)의 동굴 생활이 끝나갈 무렵은 유럽의 마지막 빙하기 말기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에 레반트 (역사적으로 근동의 팔레스타인 (고대의 가나안)과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이 있는 지역) 지역에서는 최초의 정착이 시작되었고, 이후로 기후의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이 지역의 최초의 문명은 중앙 산악 지대 서쪽 경사면에 있는 와디 엔나투프 (Wadi en-Natuf)의 동굴들 이름을 따라 나투피안 (Natufian)이라고 불렀다. 이 시기는 채집과 수렵에서 초기 농경과 가축 사육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이었지요.
레반트 지역에서 동굴 생활을 끝내고 도시나 마을을 이루고 거주하게 된 혁명적인 변화는 예리코 성 발굴에서 잘 나타납니다. 예리코는 그 당시 기술과 건축에서 뛰어난 발전을 이룩한 도시 중의 하나였어요. 이는 농경지 근처의 여러곳에 흩어져 있는 일반적인 다른 유적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초기의 문명들은 문명이 절정에 다다른 후에는 쇠퇴와 몰락이 반복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초기 문명들은 항상 평화롭고 순조롭게 이어간 것만은 아니었지요. 새로운 정복자들은 정복지의 거주민들을 추방하거나 또는 함께 살아갔습니다.
금석병용기시대 (기원전 4천 년대)에는 가나안 땅 여러 곳에서 정착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주로 비옥한 계곡이나 사막 가장자리의 목초지에 거주지들이 세워졌습니다. 석기시대와 청동기가 함께 사용되기 시작한 이 시대 말기의 문화를 가술리안 (Ghassulian) 문화라고 합니다. 이는 유적이 최초로 발견된 요르단 계곡 남동부의 작은 언덕들의 이름인 테레일랏 가술 (Teleilat Ghassul)에서 빌어 온 것이지요. 후에 이 문화의 흔적은 브에르세바 근방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 유명해졌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벽이 없는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들은 목축, 농업, 그리고 구리 세공을 포함한 가내공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어요. 유대 광야의 “보물 동굴 (Cave of the Treasure)에서 발견된 청동기 저장소는 그 시대 사람들의 놀라운 기술력과 아름다운 예술적 업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에 남겨진 유물을 통해 볼 때 그 당시 근동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뛰어난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듯 합니다. 초기 문명 지역 중 가나안 (팔레스타인)은 기원전 4천 년대 말까지 상당히 앞서고 있었습니다.
시대 | 연대 | 메소포타미아 | 시리아-팔레스타인 | 이집트 |
신석기시대 (석기시대 후기) | 5000 4000 3 500 3150 2850 | 자르모 하수나, 니네베I 사마라 니네베II | 예리코 IX 비블로스 A 라스 삼라 V (우가리트) 아무크 | 엘파윰 A |
금석병용기시대 | 텔 할라프 | 므기또 XX 하맛 L 야르묵 (샤아르 하골란) 예리코 VIII | 데이르 타사 엘바다리 | |
텔 엘무베이드 에렉(우루크) | 텔 레일랏 가술, 브에르 세바 | 엘 암라 나가다 I | ||
청동기시대 | 젬뎃 나스르 | 청동기시대 초기 I | 엘 게르제, 나가다 II |
(고대 근동 초기 문명들의 비교 연대표)
2. 기원전 3천년대의 고대 근동 모습
고대 근동에 처음으로 거대한 제국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천 년대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 키쉬 (Kish), 라라크 (Larak), 라가쉬 (Lagash), 움마 (Umma), 에렉 (Erech), 그리고 우르 (Ur)등의 강력한 도시국가들이 집중해 있었습니다. 처음에 이 지역은 수메르라고 불렸는데, 후에 성경은 신아르 땅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이 수메르 문명은 중동 지역에 문명의 토대를 마련했고, “서쪽 땅”다시 말하면, 시리아와 가나안 (팔레스타인) 지역과 더 나아가 이집트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시 이집는 제1왕조보다 앞선 제0 왕조(원왕 조)의 몇몇 왕들에 의해 이미 통일왕국을 이룬 상태였습니다. 이때부터 이집트는 가장 강력한 왕국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멀리 북쪽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집트를 최초로 통일한 왕으로 짐작되는 나르메르(Namer)는 가나안/팔레스타인 남부 일부 지역에 쳐들어 간 것으로 보입니다. 침입의 목적이 정복인지 교역이 목적인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지요. 나르메르의 가르투슈 (Cartouche, 고대 이집트 왕의 이름을 둘러싼 타원형 장식)가 새겨진 화장용 팔레트가 이집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에 가나안 도시들 정복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담겨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답니다. 아랏, 텔 에라니 (Tel Erani)와 롯(Lod)등 그 외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 도기 파편들에도 나르메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고왕국 시대 이집트의 조직력과 영향력을 보여주는 예는 제2왕조에서 제5왕조의 왕들이 세운 거대한 피라미드들입니다..
기원전 24세기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적 중심지는 남부의 수메르에서 북부 지역의 셈계 아카드(Akkad)로 옮겨갔습니다. 하지만 아카드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요. 아카드 제국을 세운 사르곤(Sargon I)은 남쪽으로 수메르와 딜문(오늘날의 바레인)을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아슈르 북쪽의 수바르투 지역, 더 나아가 아마누스 산맥과 지중해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알레포(Aleppo) 남쪽에 위치한 텔 마르디크(Tel Mardikh)에서 고대 도시 에블라가 발굴되었습니다. 이곳 청동기시대 전기 말의 서고에서 대부분 수메르어로 기록된 수많은 쐐기문자 서판들과 지역 셈족 방언으로 기록된 서판 일부가 발견되었습니다. 서판을 통해 볼 때 시리아 북부의 정치, 사회 생활상이 많은 부분에서 아카드와 연관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에블라 문헌들에서는 성경 역사나 지리와 관련된 사실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3천 년대의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이집트에 대한 사료들은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레반트 남부 지방(가나안 지역)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발견된 자료가 없어 여전히 “원시 역사” 속에 남아 있지요. 하지만 여러번의 발굴을 통해 기원전 3천 년대 청동기시대 전기의 가나안에도 매우 발전된 문화를 지닌 부강한 도시국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역사를 직접적으로 언급해 주는 유물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가나안의 부강한 도시국가들 중 므기또와 벧 예라는 성벽 두께가 7.6-9.1미터나 되는 튼튼한 성채로 둘려 싸인 3만-6만 1천 평 규모의 성곽도시들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밝혀진 것이 없지만 시리아와 가나안이 이 지역 문명의 부흥에 일종의 능동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3. 청동기 초기(기원전 3천년대)의 남부 레반트(Levant) 지역
청동기 초기인 기원전 3천 년대에는 가나안 땅에 여기저기에 정착지가 세워졌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괄목할만한 요새 도시들로 발전을 했습니다. 유적이나 유물을 통한 자료를 분석하여 상대 연대표는 점점 더 정밀해지고 있지요.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까지는 어디에서도 이를 직접적으로 증명할 만한 당시의 비문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역사적 연대들을 얻으려면 이집트와 연계시켜 알아볼 수 있겠습니다. 초기 청동기 1b 시기에는 성읍들이 발전했으며 남부 지역에는 이집트가 상업적으로 침투해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왕실 인물의 이름이 상형 문자로 새겨진 사각형의 기호인 세라크 (Serakh)가 발견되었습니다. 세라크에 대부분은 이집트 최초의 파라오로 알려진 나르메르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일부에는 그의 후계자인 아하 (Akha)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표가 있는 도기들을 통해 이집트 상인들이 나할 브소르(Nahal Besor)을 경유하여 들어와 북쪽의 로드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지요.
초기 청동기 2기에는 레반트 남쪽 특유양식의 도자기 그릇들이 이집트로 팔렸다는 증거가 나왔는데, 이 그릇들이 최초로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따라 아비도스 도기 (Abydos Ware)라 부릅니다.
(아비도스 도기의 모습)
초기 청동기 3기에는 멀리 북쪽 코카서스 산맥에서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이 가져온 도기는 겉은 검은색이고 유광 처리되어 있고 안쪽은 밝은 벽돌색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도기들이 터키 동부에서부터 아무크 평원 (Amuq Plain)을 지나 갈릴레아까지 길게 이어지며 발견되었습니다. 이 도기가 키르벳 케락 (Khirbet Kerak호르밧 베잇 예라 Hornet best Yerah)에서 최초로 발견된 까닭에 키르벳 케락 도기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도기들은 그 지역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아 단순히 외국의 도기가 수입되었다기보다는 특정한 민족들의 이주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4. 아무르인들 (아모리인)의 땅
유프라테스 강 중류에 위치한 마리(Mari)는 에블라시대 (기원전 2,000-1,600)에 큰 도시 왕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마리에 살았던 민족은 아무르인(아모리인)들인데, 이들은 전에 시리아 사막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목초지에 살던 민족이었지요. 기원전 2천 년대 초에 용병이었던 아무르인들은 나중에 시리와 북부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1,850년경에는 아무르 왕조들이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중심 도시들을 통치했습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통치자가 바빌론의 함무라비 (Hammurabi) 왕이었지요. 마리는 시리아의 알레포와 콰트나 등 중요한 왕국들에까지 정치적 영향을 확장했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4만 장 이상의 쐐기문자 서판을 통해 그때 당시 도시 귀족, 시골 농부, 유목민 등 당시의 사회 계층에 대한 많은 상황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을 제정한 아모리 족의 가장 유명한 임금 함무라비)
가나안 지역의 하초르는 유일하게 마리와 직접적으로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실은 마리의 여러 외교 문서들에 언급되어 있었고, 하초르에서도 마리에서 쓰던 쐐기문자 서판들이 발굴되었지요. 어떤 마리 문서는 콰트나의 왕이 레바논 베카 (Beqa)를 지나서 다마스쿠스로 군사를 출정시켰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일은 아마도 하초로와도 관계가 있는 일일 것으로 추축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