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파라오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했던 시기는 중기, 후기 청동기 시대에 속합니다. 당시의 문헌들이 발견되어 그 시기의 가나안 땅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파라오들의 활동과 가나안 성읍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 1.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가나안 (기원전 20-19세기)
- 2. 투트모스 3세의 첫 번째 가나안 땅 원정 당시의 가나안 성읍들 (기원전 1482년경)
- 3. 아마르나 시대와 아마르나 서신에 기록된 가나안 도시국가들 (기원전 1350-1334년경)
- 4. 이집트의 출정과 아마르나 서신에 기록된 예루살렘과 쉐펠라의 도시들 (기원전 1350-1334년경)
- 5. 세티 1세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시리아에서 히타이트와 싸우다(기원전 1291-1271년)
- 6. 라메세스 2세의 가나안 시대와 원정 (기원전 1270년 이전)
- 7. 메르넵타의 가나안 북쪽 지역 출정 (기원전 1207년)
1.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가나안 (기원전 20-19세기)
기원전 3000년 대가 끝나갈 무렵, “아무르인들 (‘서쪽’을 뜻하는 이름, 수메르어로는 마르투 (Martu)”로 불리는 서부 셈어를 사용하는 큰 유목민 무리가 대거 이동하여 시리아 북부의 문명 중심지들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남부까지 침입했습니다. 이들은 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하여 마침내 큰 도시들을 점령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만큼 강력해졌다. 이는 우르 제3 왕조 (Ur III)가 이끌던 상업 제국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아무리 (아모리)인들의 강력한 통치자는 함무라비(Hammurabi)였으며, 그의 선조는 바빌론 왕조를 창건했고, 그의 통치는 기원전 18세기에 끝이 납니다.
이곳보다 남쪽에 있는 여러 도시국가들은 모두 멸망해 정치, 문화적인 공백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에 시리아와 요르단 동편 목초지에 거주하던 유목인들이 이 지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목초지를 유랑하면서 도기나 구리를 제련하는 전통을 유지했습니다. 이들이 남긴 중요한 유적들은 성경의 네겝(남쪽 지역) 남쪽 산악 지대나 요르단 동편의 평원 정착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아직 중앙 집권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혼란스러운 중간기에는 가나안 (요르단 서쪽)의 어디에서도 도시 국가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고, 이집트와도 교류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중간기의 유목민들은 기원전 2천 년경에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조금 더 발달한 문명을 가진 아무르 사람들이 가나안 북쪽에 다시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교역이 해로 및 육로를 통해 재개되자 팔레스타인 해안가와 주요 간선에 위치한 성읍들을 강화하고 요새 화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중기 청동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도시 문명이 시작되었지요. 이 문명은 이스라엘 백성과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정복될 때인 후기 청동기 시대까지 800여 년에 거쳐 유지되었습니다.
한편 이집트는 제12왕조(기원전 1991-1784년)가 통치를 하면서 이집트 문화는 물질, 문화적으로 최고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가나안과 페니키아 해안 지역 너머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아무르 상인들이 삼각주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가나안 사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바로 이 시기의 것이지요. 주요 문헌은 “저주문서”인데, 이는 그릇 또는 포로 형상의 점토상에 쿠쉬 (수단), 리비아, 레테누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시리아), 이집트 내부에 잠재된 파라오의 대적들의 명단을 새기고, 그들을 저주하고, 욕설을 하는 내용을 덧붙인 것입니다. 이외에도 이집트의 영향권에 있는 도시들과 민족들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지도자들은 희랍어로 “이민족 통치자”를 뜻하는 힉소스(Hyksos)라고 불렸습니다. 저주 문서 중 가장 초기 문헌은 기원전 20세기 중반에 접시에 새긴 것이고, 가장 후기 문헌은 기원전 19세기 말경에 작은 조각상에 새긴 것입니다. 초기의 저주 문헌에 기록된 레테누(시리아) 지역의 지명은 몇 개 되지 않지만 남쪽에 위치한 예루살렘, 아스클론, 그리고 르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성읍의 통치자는 두 명, 또는 3-4명이 나오기도 합니다. 반면에 후기 저주 문헌의 레테누 장에는 64개의 성읍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통치자가 각 성읍에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정치, 사회 제도가 더 중앙 집권화된 지방 군주제로 발전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의 통치자들의 이름은 아브 (‘ab), 엘(‘el), 암무(‘ammu), 그리고 하닷(hadad) 등으로 나오는데, 이는 서부 셈족의 특징으로 그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아무르인들의 이름과도 일치합니다.
2. 투트모스 3세의 첫 번째 가나안 땅 원정 당시의 가나안 성읍들 (기원전 1482년경)
투트모스 3세 (기원전 1504-1450년)는 투트모스 1세의 손자로 제18왕조의 왕들 중 가장 활동을 많이 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장모인 하투셉수트(Hatshepsut, 기원전 1503-1483년)의 섭정 기간에 최소 한 번은 누비아를, 레테누 (시리아지역)로도 한 번 정도는 출정을 하여 가사(현재 가자 지역)를 재정복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의 첫 출정의 목적은 레반트 남부 지역의 통치권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왕들의 동맹 수장은 오른테스 강 유역에 위치한 케데스 왕과 므기또 왕이었지요.
이집트 군대는 삼각주의 동북쪽 경계에 있는 실레(실루, Sillu)에서 출발하여 열흘 동안 240km의 거리를 행군하였습니다. 그리고 레테누의 중심 기지이고, “왕의 전리품”이라 불리던 가사(가자)에 도착했습니다. 이는 매일 24km를 걸어서 시나이 북부 해변에 위치한 많은 군수기지들 한 장소에 진을 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투트모스 3세는 샤르한에 자신의 최북단 주둔군이 진을 치고 있다고 언급했는데, 이곳은 가사(가자) 지역 부근이거나 그 너머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샤르한 지역의 북쪽의 유르자에서부터 모든 도시들이 이집트에 대항하여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 주요 기지인 샤론 평야의 야함까지는 열하루가 걸렸다고 하는데, 실레에서 가사까지 열흘 여정이 절반에 불과한 거리였지요. 아마도 이집트 군은 요빠나 게제르 등과 같은 가나안 남부 일부 도시들에서 투트모스 3세 자신의 통치권을 강력하게 하기 위해 시간을 소요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투트모스 3세는 야함(Yaham)에서 므기또와의 전쟁에 대한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7개월의 포위 공격 끝에 므기또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므기또 왕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불모로 끌려갔습니다.
투트모스 3세는 단독 통치자로서 그의 첫 출정 내용을 카르나크 신전 내벽에 새겨 놓았습니다. 정복한 각 성읍들의 목록은 상형 문자로 기록하고, 뒤로 손이 묶인 포로들의 몸통 형상을 타원형으로 단순화하여 그림으로 표현해 놓았지요. 본래 명단에는 120개의 성읍이 있었는데, 이들 중 반 정도는 확인이 가능하며 가사(가자)에서 케데스 사이에 분포해 있다. 특이한 점은 레바논의 해안 성읍들과 스켐, 가나안 남부 산악 지역의 예루살렘이 빠져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아마 이 도시들이 이집트에 대한 봉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가나안 성읍들 목록은 작은 지리 문서들로 분류되어 그 전체나 일부가 공문 사절들의 순방 일정을 소화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작은 목록에 해당하는 성읍들은 서로 근접해 있는 것 같지만, 잘 정열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목록에 있는 성읍들을 어떤 행정 양식에 따라 체계적으로 정리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성읍들 이름 옆에는 ‘산,’’계곡’ 같은 지리적 특징들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원전 15세기 중반의 이 목록은 그 당시 수많은 가나안 성읍들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읍들 대부분은 주요 골짜기나 평야를 따라 정열 되어 있지요. 이러한 투트모스 3세의 목록과 아마르나 (Amarna) 서판, 그리고 후기 파라오들의 성읍들 기록을 종합해 보면 청동기 말기 때의 가나안에 정착한 도시들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3. 아마르나 시대와 아마르나 서신에 기록된 가나안 도시국가들 (기원전 1350-1334년경)
아마르나 서판으로 알려진 쐐기문자 문서 모음은 후기 청동기 고대 근동의 문화와 정치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텔 아마르나 고대 유적은 이집트 노아몬(테베, 오늘날의 룩소르)과 놉(멤피스, 오늘날의 미트 라히나와 그 주변 유적지)의 사이 중간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아멘호텝 4세(Amenhotep IV, 아케나톤, 이크나톤, 아케나텐)가 건설한 고대 수도가 있었던 곳이지요. 그는 이곳을 아케나텐(Akhenaten)이라 불렀는데, 그 의미는 “태양 원반(아텐)의 지평선”이란 뜻입니다. 그의 즉위 4년이 되던 해에, 이 건설 사업을 시작했고, 6년 무렵에는 가족들과 그의 측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킨 것이 분명합니다. 19세기-20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발굴을 통해, 이 도시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태양 원반, 즉 아텐(Aten) 신에게 바쳐진 수많은 탁월한 신전들과 웅장한 건축물들이 세워졌음이 증명되었습니다.
투트모스 4세는 가나안에 몇 개의 단편적인 기념물들을 남겨 자신이 가나안에 머물렀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카르나크에서 발굴된 제물 목록에는 게제르에서 사로잡아온 포로들이 나열되어 있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지요. 그리고 미탄니는 이집트와 화친을 맺었습니다. 이는 아나톨리아(소아시아)에서 히타이트 제국이 부흥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는 통치 기간이 길었지만 레반트 지방으로 출정을 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인 아멘호텝 4세(Amenhotep IV, 재위 기원전 1350-1334년)가 건설한 수도 아케타톤에서 발견된 쐐기문자 기록보관소에는 아멘호텝 3,4세와 당대의 다른 ‘강대국’ 간의 주고받은 국제 문서들도 있었습니다. 미탄니에서 온 서신들과 가나안에서 온 일부 서신들은 노아몬이 수도일 당시에 아멘호텝 3세에게 보내 것들이었지요.
시리아와 가나안의 중부의 도시 통치자들이 보낸 서신 대부분은 아멘호텝 4세에게 온 것들이었습니다. 이 서간들은 가나안의 여러 도시국가들과 이집트 통치자 사이의 정치, 사회적 관계에 관련된 많은 사실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히타이트 제국이 북시리아에 출현하자 가나안의 통치자들은 크게 동요를 했습니다. 가나안의 중요한 행정 중심지는 가사(가자), 수무르, 쿠미디 세 곳이었으며, 누비아 출신 구스인(에디오피아 지역)들과 에게 해에서 온 세루다뉴(Sheridan)가 도망자(이탈자, 아피루) 및 유목민(수투, Sutu 와 샤수, Shasu)들과 더불어 용병으로 수비군에서 복무했습니다.
부랑자들과 무법자들(아피루, 도시국가 사회에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레반트의 산악지대를 피난처로 삼았지요. 이들의 피신처 중 한 곳은 암미아(Ammia) 근방 북부 레바논 해안 뒤쪽의 산악 지대에 있었습니다. 아멘호텝 3세의 통치시대 때, 압디 아 쉬르타(Abdi-Ashirta)라는 사람이 이들을 모아 이집트에 봉신으로 있던 도시들을 굴복시키자, 이집트는 해상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그 후 아멘호텝 4세 때에는 이집트는 북쪽 변방에 히타이트의 위협에서 보호하고자 압디아쉬르타의 아들인 푸바알루(Pu-Baalu)와 아지루(Aziru)가 이끌고 있는 아피루인들을 이끌고 아무르지역에 국가를 세우고 통치자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아피루 용병들에 의한 왕조가 세워져 100여 년동안 유지가 되었다. 이 왕조 국가는 히타이트 제국에 속했지만 잠시 이집트에 굴복해 지배를 당했습니다.
이집트의 아마르나 왕조 시대에 가나안 지역의 스켐 통치자 라바유(Lab’ayu)는 남쪽으로 예루살렘, 남서쪽으로는 게제르, 서쪽으로는 가드파달라, 북서쪽으로 므기또 등의 도시국가와 인접해 있는 도시들을 다스렸습니다. 라바유는 스켐 출신이 아니었지요. 그를 공격한 적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의 고향에 있는 가족과 재산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스켐 주변 언덕들은 해안 평야나 계곡보다 인구 밀도가 낮아 정치적인 난민들이나 도망자(아피루)들이 이곳으로 피신해 왔습니다. 라바유의 아들이 이런 무법자들과 어울리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었고, 그는 이집트 관리로부터 심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므기또에 주둔해 있던 이집트 상비군 부대가 이집트 국내 정치적인 이유들로 인해 본국으로 귀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라바유는 가드파달라 (Gath-padalla)의. 통치자를 강제로 동참시켜, 도탄 계곡의 성읍 아라부와 부르쿠나, 그리고 다아낙 옆의 가드림몬을 공격하고 수넴을 파괴하였습니다. 라바유의 군대는 아피루 무법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가 정복한 성읍들에서 주민들을 몰아내고 농토를 차지하였습니다.
라바유가 므기또를 점령하려 했다가 실패를 하고 맙니다. 이집트 왕은 이 지역의 통치자들에게 라바유를 생포한 뒤 이집트로 호송하여 심문을 받게 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라바유는 한나돈에서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던 중 기나(오늘날의 제닌?)에서 매복되어 있던 이들에게 공격을 받아 결국 죽었습니다.
그 후 이집트는 므기또의 비리디아로 하여금 사람들을 데려다 버려진 수넴 들판(이즈르엘 평야 쪽)에서 일을 시키도록 했는데, 여기에는 요빠 사람들을 일부 동원해 노동을 시켰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함므로써 이집트는 전에 받은 세수(조공)를 유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4. 이집트의 출정과 아마르나 서신에 기록된 예루살렘과 쉐펠라의 도시들 (기원전 1350-1334년경)
가나안 남쪽의 산지는 예루살렘의 통치 아래 있었는데, 이곳의 통치자인 압디케바(‘Abdi-Kheba)는 누비아 용병 수비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마르나 서신을 통해 압디케바와 해안 평야에 위치한 이웃 나라들 간의 분쟁에 대해 알 수가 있습니다. 분쟁의 이유는 쉐펠라(낮은 언덕)에서 중부 산악 지대로 진입하는 경로의 통제권에 관한 것 때문이었지요.
압디케바는 크일라의 지도자들에게 뇌물을 주어 가드의 지배자인 듯한 슈와르다타(Shuwardata)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엘라 계곡을 비롯해 크일라에서 벧수르, 베들레헴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통제권을 요구했습니다. 슈와르다타는 이에 반대하면서 파라오의 허락을 받아 빼앗겼던 성읍들을 무력으로 되찾고자 했습니다. 슈와르다타와 게제르의 밀킬루는 가드갈멜의 타구로부터 지원을 받아 산악지대로 가는 다른 도로들을 통제했던 루부테(라빠)와 또 다른 성읍 벧니닙(Beth-Ninib, 벧호른으로 추정)을 점령했습니다. 압디케바와 그의 적들은 서로를 ‘무법자들’곧 아피루라고 부르고 있지요. 쉐펠라에서 이러한 분쟁이 계속되면서 아얄론과 초라 같은 다른 성읍들도 말려들게 되었습니다.
아마르나 서신들은 총 349개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70개 정도의 서신들은 파라오가 내린 어떤 명령에 대한 답신들이지요. 그중에는 이집트의 사신들이 파라오의 명령을 담고 있는 두 개의 ‘공문서’가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유사한 서신들이 영국 발굴단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아스클론의 지배자 이디야(Yidiya)에게 보낸 것들이었습니다. 또 이디야가 보낸 분명한 답신도 있지만, 실제로 이러한 출정이 있었는지는를 증명할 만한 확실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 서신에 나타난 연대는 대부분 아마르나 서신이 다루고 있는 시대 중에서도 후기에 속합니다.
5. 세티 1세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시리아에서 히타이트와 싸우다(기원전 1291-1271년)
기원전 14세기 말, 투탕카멘(Tutankhamen), 아이(Ay)와 호렘헤브 (Horemheb)는 이집트는 가나안에 영향력을 행사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이집트 내에서의 정치적인 불안은 호렘헤브의 뒤를 이은 라메세스 1세(Ramesses I)가 제19왕조(기원전 1293년)를 세우면서 안정되었습니다. 힉소스의 옛 성읍인 아바리스가 “라메세스의 집” 곧 페르라메수(또는 피람세스)란 이름으로 삼각주 동부에서 부활하여 새 왕조의 수도가 되었지요.
이 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인 세티 1(Seti I)는 매우 활동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가 가나안에 대한 영향력을 재확인하는 일을 시도하고, 레반트 지역 통치권을 두고 히타이트와 맞붙었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 1년 즉 기원전 1291년의 첫 출정에 대한 기록은 카르낙의 다 주실(대열 주실) 북쪽 벽 부조와 벳 산의 석비, 그리고 여러 신전의 지형 목록 등에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시나이 북쪽을 가로지르는 세티 1세의 모습이 새겨진 부조는 북동쪽 시나이 지역의 샤슈(Shasu) 유목민들을 물리치고 위풍당당하게 돌아오는 모습을 타나내고 있습니다. 또한 이 부조에는 신왕국 시대 동안 이집트 사람들이 사용한 일련의 전초지와 보급 창고들도 그려져 있습니다. “적군 샤수가 반란을 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적장들이 쿠르루(Khurru) 산지에 함께 모여 대기하고 있는데, 소란을 피우며 싸우기 시작하더니 그들 중 하나가 자기 동료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왕국의 법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라는 전문이 이집트 진영에 도착했습니다. 세티 1세는 성가신 이 유목민들을 진압하고, 가나안의 주요한 군사로를 따라 힘을 행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유목민들이 산악 지대로 침투해 들어가는 동안에도 도시국가들은 해안과 평야 지대에서 번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벳 산에서 발견된 석비에 새겨진 새티 1세의 첫 원정 당시의 한 부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맛의 비열한 원수가 큰 무리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는 이집트 군이 주둔해 있는 벳 산을 점령하고, 페헬 사람들과 연합하여 르홉의 통치자를 봉쇄했습니다.” 세티는 3개 여단을 보내 벳 산을 재탈환하고, 자신의 충직한 신하인 르홉의 봉신을 포위망에서 풀어주고, 야노암의 동쪽 지역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또 다른 석비는 야룸타 산지의 아피루 반란자들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야룸타 산은 벳 산 북쪽 고원 지대에 위치한 이사카르의 레멧(여호 19,21)이나 야르뭇(여호 21,29)으로 추정됩니다.
6. 라메세스 2세의 가나안 시대와 원정 (기원전 1270년 이전)
케데스 전투에서 거의 패하다시피 한 라메세스는 가나안에서의 동요를 잠재워야만 했습니다. 기원전 1271년, 람세스 재위 8년에 기록된 룩소르 부조에는 그가 가나안의 갈릴레아와 아무르의 여러 성읍을 진압했던 일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나르 엘-켈브에 있는 또 다른 승전비는 기원전 1269년 라메세스 재위 10년의 것입니다. 여기에는 해안길 여행 일정과 지형지세 목록이 기록되었고, 연대를 알 수 없는 부조에는 아코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모압 땅과 세이르 산까지 남, 동쪽에서의 그의 활동도 기록하고 있다. 람세스는 종종 샤수를 물리친 것을 자랑했습니다. 이러한 승리의 전적 일부를 종족이나 지명에 따라 정리해 두기도 했지요.
세티 1세의 재위 초기에 가나안의 팀나 계곡에서 구리를 풍부하게 채굴하게 되었습니다. 이 구리 광산 개발은 제20 왕조까지 계속되어 번영했는데, 요르단 동편 남부에서 소위 “미디안”토기가 출토되어, 광산 일부 인부들이 이 지역 주민이었음이 입증되기도 했습니다.
앗시리아가 히타이트 동쪽 변방에서 독립적으로 출현하면서 히타이트의 새로운 성가신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집트와 화해를 하기 위해 준비하여, 라메세스 2세 재위 21년 (기원전 1258년)에 평화 조약을 비준하였습니다. 아무르(아모리)는 케데스처럼 히타이트의 속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가나안 북부 경계 지역의 지정학적인 상황은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민수 34,1-12).
풍자적 서신 형태로 그려진 당시의 교과서에는 어떤 이집트 서기의 삶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가지 직무를 수행했는데, 특히 외교 특사 직무를 수행하려면 전차병 훈련도 받아야 했지요. 이 교과서의 지리를 다루고 있는 부분에는 이집트 사절이 꼭 알아야 할 가나안 주요 도정 중 일부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는 페니키아 해안길을 따라 레바논의 베카, 다마스쿠스, 하부 갈릴레아 지역에 이르는 경로이지요. 요르단 강 여울목에서 벳 산을 지나 므기또에 이르고, 다시 아루나 산길을 지나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흥미롭습니다. 전차병들은 이 까다롭고 험한 길의 수풀에 매복한 부족민들로 인해 위험에 처하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그리고 항구 도시인 요빠는 젊은 여자 사기꾼들과 말 도둑 등이 있어 훨씬 더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이집트의 보급 기지가 있어서 전차를 수리하고 무기를 보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장에는 세티 1세의 카르나크 부조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 시나이 북부의 해안 요새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라메세스 2세의 흉상과 미이라 모습)
라메세스 2세의 가나안 북부 원정 (기원전 1275-1274년)
세티 1세의 활발한 정복 정책은 그의 아들 라메세스 2세에게 계승되었습니다. 나르 엘-케브(Nahr el-Kelb 또는 the Dog River) 상류 절벽의 비문은 라메세스 2세 재위 4년 (기원전 1275년) 말에 기록된 것이지요. 라메세스 2세는 해안을 따라 올라가서 아무르(아모리)를 다시 이집트에 복속시킴으로, 다음 원정지인 시리아 중부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듬해 기원전 1274년의 출정은 여러 신전 비문과 부조들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그의 영웅적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군대는 “이집트 땅을 지나듯 안전하게” 가나안 남부를 통과했고, 암키(Amki)땅 ‘라메세스 성’의 이역 기지에서 리타니 강과 오론테스 강 사이의 분수령을 지났습니다. 라메세스는 히타이트 황제 무와탈리스(Muwatalli)가 알레포로 철수했다는 샤수 베두인 첩자의 거짓 보고를 믿고 참모들과 함께 선두에서 군을 이끌고 줄을 지어 계곡을 행군하여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히타이트 군대는 케데스의 높은 언덕 뒤에 숨어 있었어요. 라메세스의 친위대와 아몬 여단이 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라 여단이 행군하는 동안 히타이트 군이 전차로 측면을 급습했습니다. 라메세스는 스스로 방어를 했다고 주장하지만, 아무르에서 온 이집트 정예 부대가 때마침 도착했다고 밝히는 곳도 있습니다. 이들은 해안길을 따라 올라와 라메세스와 합류하기로 했을 것이고, 히타이트의 공격에서 람세스를 구출해냈습니다. 다음 날, 히타이트와 라메세스 군대는 맞붙었고, 람세스는 승리를 했다고 장담했지만 전장에서 퇴각한 것은 히타이트가 아니라 바로 그 였지요. 이집트가 남쪽으로 퇴각한 후에 히타이트의 장군이자 무와탈리스의 동생이며 이후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핫투실리스(Hattusillis)가 다마스쿠스 지역까지 행군하면서 그 지역을 전멸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히타이트는 속국 아무르(아모리)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7. 메르넵타의 가나안 북쪽 지역 출정 (기원전 1207년)
라메세스 2세의 67년의 나머지 긴 통치 기간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웠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왕국의 경제는 풍요로운 번영을 누리게 되었지요. 하지만 라메세스는 모압과 세이르 산의 샤수를 진압하기 위한 원정 때문에 부득이하게 증세를 할 수밖에 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라메세스의 아들 메르넵타는 리비아(서북 아프리카지역)인들과 크레타/에게 해 지역 사람들이 연합하여 삼각주 서쪽을 침투하려는 계획에 맞서야만 했습니다. 이 출정과 관련된 그의 부조와 비문에는 리비아인들과 연합한 “해양 민족”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아카와사, 투루사, 루쿠, 사르든, 스크루사로 표시되어 있고, 다른 명단에는 아카와사는 ‘포피’가 없는 해양 국가 출신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메르넵타의 승전비 맨 하단에는 가나안 땅에서의 군사 원정을 시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자들이 ‘평화’를 간구하며 엎드리네.
아홉 활 중 머리를 드는 자가 아무도 없네.
테헤누(Thehenu)가 약탈당하고, 카티(Khatti)에는 평화가 임했도다.
온갖 재앙이 가나안을 덮쳤도다.
아스클론이 정복되었구나.
게제르는 포위당했고 야노암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버려져 더 이상 열매가 없다.”(메르넵타 석비 중 26-27행)
아스클론, 게제르, 그리고 야노암은 도시 국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스라엘은 순수한 민족 도시가 아닌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가리트 왕국의 경계와 주변 나라들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의 후기 청동기와 연관된 20세기 최고의 고고학적 발견은 *라스 에쉬삼라(Ras esh-shamra) 언덕에서 발견한 고대 우가리트 유적이었어요. 해안에 위치한 미네트 엘베이다는 고대의 루코스 리멘(Lentos Limen)으로 보통 마하두(Ma hadu)로 알려진 우가리트의 주요 항구 도시였습니다. 금 등의 귀금속과 상아로 만들어진 도기, 무기, 조각상, 사치품 등 각양각색의 물건들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해안지역에서 이루어진 발굴들 중에 단연 최고입니다. 정치 및 외교적 문서들에 의하면 우가리트는 이집트와 동맹을 맺은 하나의 독립국이었다가 후에는 히타이트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우가리트 문헌은 후기 청동기 시대 특히 기원전 14-13세기의 역사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페니키아 해안을 포함하여 가나안 성읍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주로 무역의 성격을 띠고 이루어졌습니다. 아코, 아스돗, 아스클론뿐만 아니라 비블로스, 베이루트, 시돈, 그리고 티로와의 왕래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