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고타(Golgotha, Calvary)

골고타는 ‘해골 모양의 지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입니다. 오늘날 이곳은 주님 무덤 성당 내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골고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1. 골고타의 위치와 특징

십자가의 길의 제9처는 골고타 언덕에서 아주 가깝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전승과 일반 신자들의 신심에서 시작된 노정을 따라 예수님이 십자가르 ㄹ지고 가신 길을 따라왔습니다. 이제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성지 예루살렘에서 가장 거룩한 지점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실제 장소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다가”가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곳입니다. 

골고타 언덕과 무덤

골고타 언덕과 예수님의 무덤은 10여 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곳 전역이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에게는 예수 부활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주님 무덤 성당 안에 있습니다. 순례자들 눈에는 건물 구조가 매우 특이해 보이는데, 심지어 혼란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밖에서 보면 몇 채의 다른 건물들이 서로 포개어져 있는 모습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유명한 것은 첨탑이 없이 상단이 평평한 종탑, 건물과 테라스와 서로 크기가 다른 두 개의 돔이 어지럽게 삐죽삐죽 솟아 있는 모습인데, 이로 인해 예루살렘의 독특한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성당 내부는 벽으로 막히거나 트여 있는 크고 작은 제단과 경당들이 계단으로 연결되어 서로 다른 층으로 들어서 있는 복합 건물이지요.

이렇게 놀라운 외관을 띠게 된 원인은 성당의 파란만장한 역사 때문입니다. 그토록 수없이 지어졌다가 파괴되어 재건되고, 화재와 지진과 복구를 되풀이한 건물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성당의 소유권 또한 (1342년에 성지보호관구를 설치한 프란치스코 수도회로 대표되는)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콥트 교회, 시리아 교회, 에티오피아 교회가 공동으로 소유하며 각자 권리들을 갖고 있습니다. 

2. 해골산 또는 골고타

복음에서 전해주는 내용을 보면, 병사들은 예수님을 끌고 나와 골고타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마르15, 22;마태27, 33;루카23, 33;요한19, 17 참조). 이는 번역하면 ‘해골 터’라는 뜻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님을 가운데로 하여 이쪽 저쪽에 하나씩 못 박았습니다(요한19, 18). 이곳은 도성 가까이(요한19, 20), 즉 성벽 바깥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습니다(요한19, 41).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그날은 유다인들의 준비일이었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습니다(요한19, 42). 

십자가의 여러 형태

고고학 발굴로 골고타 언덕 가까운 곳, 주님 무덤 대성당에서 갈 수 있는 곳에서 같은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무덤들이 드러났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 당시에는 그 지역 전체가 예루살렘 밖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대 율법에 의하면 도성 안에서는 매장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지역이 버려진 채석장이라는 사실이 몇몇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는데, 그 채석장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 바로 골고타 언덕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곳의 지면이 많은 돌 조각들로 울퉁불퉁한 것으로 묘사한 초기의 몇몇 증언과도 일치합니다. 종합해 보면, 오늘날 주님 무덤 대성당은 거의 옛 예루살렘 도성의 중심에 있기는 하지만, 십자가형이 행해진 장소는 성벽이 보이는 외곽에, 혼잡한 도로가 있는 곳, 좀 더 작은 바위들 사이에, 울타리로 둘러쳐진 정원과 무덤이 있으면서 몇 미터 높게 솟아있는 암반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3. 골고타의 역사적 근거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장소의 위치를 자세히 기억하고 있어서 여러 수난을 겪었음에도 장소가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35년 로마에 맞선 유대인들의 2차 항쟁이 진압되고 나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의 모든 흔적을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새로운 도시 알리야 카피톨리나를 건설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새로운 도성에 포함되었던 골고타 언덕과 주님 무덤 대성당 지역은 완전히 허물고 밀어버린 뒤 그 자리에 이교도 신전을 세웠습니다. 395년 예로니무스 성인은 예전의 전승을 인용하여 이러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치세 때까지 180여 년의 시간 동안 부활의 현장에서는 유피테르 신상에 경배를 했고, 십자가 언덕에는 이방인들이 세운 베누스 대리석 신성이 서 있었습니다. 박해의 주인공인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우상으로 성스러운 장소들을 더럽힘으로써 부활과 십자가를 믿는 우리의 신앙을 파괴하려고 했습니다.(예로니무스, Letters,58(Ad Pauline presbyterum),3).”

그리스도인들이 경배하지 못하게 골고타 언덕 위에 지었던 그 건물 덕분에 어찌보면 4세기까지 그곳이 보존될 수 있었지요. 325년 예루살렘의 마카리우스 주교는 성지 위에 지어졌던 로마의 신전들을 완전히 허물어버리게 해 달라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요청하여 허락을 받아 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과 골고타 언덕이 드러나자 황제에게 요청하여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과 골고타 언덕이 드러나자 웅대한 계획이 착수되었습니다. 황제는 마카리우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대의 현명함으로 그 작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하고 준비하여 성당 건물 자체로 그 아름다움을 능가할 건물이 없을뿐더러 제국 안의그 어떤 도시에 있는 건축물이 능가할 수 없을 만큼 멋진 내용물을 만들어 내기 바라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Vita Constantini, 3, 31).”

문헌 자료와 고고학 조사(특히 20세기에 실시된)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의 대성당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란히 배열된 세 개의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세 구역을 열거하자만 중앙에 예수 부활 경당, 골고타 언덕의 바위가 있던 곳에 자리해 있으며 삼면 주랑현관으로 둘러싸인 탁 트인 사각형 안뜰, 마르티리움(신앙을 중거한 장소)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앙 회중석, 네 개의 측량, 아트리움을 갖춘 성체 성사 거행을 위한 순교자 기념 성당입니다. 대성전은 336년에 봉헌되었지요. 고대의 영화를 보여주는 이 건축물 가운데에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614년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손상을 입었고, 수도사 모데스투스에 의해 복구 되었습니다. 그러다 이후에 지진과 화재로 훼손되었다가 1009년에 알 하킴 칼리프의 명령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11세기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모노마쿠스 황제에 의한 재건, 12세기 십자군에 의한 공사, 이후 연이은 변형 덕분에 현재의성당 형태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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