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다 왕국의 말기 상황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기에 있었던 네부카드네자르 원정과 바빌로니아로 끌려갔지만 시온으로의 귀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유다 백성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 1. 파라오 느코 2세의 하란 원정/ 네부카드네자르의 마지막 유다 원정/ 유다 왕국의 말기 상황
- 2. 바빌로니아 유배/ 유다인들이 이집트로 달아나다/ 이스라엘 지파의 회복에 대한 환상
- 3. 바빌론 왕국의 흥망성쇠/ 시온으로의 귀환/ 포로기 이후의 예루살렘
1. 파라오 느코 2세의 하란 원정/ 네부카드네자르의 마지막 유다 원정/ 유다 왕국의 말기 상황
1) 네부카드네자르의 원정 (기원전 605년-601년)
이집트는 바빌로니아가 칼그미스를 정복할 때까지 4년간 레반트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칼그미스에서 원정을 하던 바빌로니아의 왕세자 네부카드네자르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 서둘러 바빌론으로 들어가서 왕위를 계승한 후 원정을 마무리 짓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그는 기원전 605년 칼그미스를 함락시킨 후 퇴각하는 이집트 군을 하맛 땅까지 추격하여 그 일대를 황폐화기켰습니다(예레 46, 1-2). 이듬해에는 남쪽으로 진군해 아스클론을 점령하였는데(기원전 604년), 이런 상황에 불안했던 유다에서는 단식을 선포하고(예레 36, 9), 여호야킴은 네부카드네자르의 종이 되어 3년간 조공을 바쳐야만 했습니다(2열왕 24, 1; 2역대 36, 9). 기원전 603년 바빌로니아 군이 또 다른 중요 도시를 점령했는데, 이곳은 가자 또는 에크론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기원전 602년에는 한 차례의 원정이 더 있었는데, 주요 목적은 조공을 거두는 것이었습니다. 기원전 601년 느코가 네부카드네자르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기록에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왕이 ‘서로의 가슴을 쳤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전쟁이 무승부로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아무튼 네부카드네자르는 바빌론으로 물러갔고 이듬해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여호야킴은 안심하고 조공을 보류했던 것 같습니다(2열왕 24, 1).
2) 파라오 느코 2세의 하란 원정 (기원전 609년)
“요시야 시대에 이집트 임금 파라오 느코가 아시리아 임금을 도우려고 유프라테스 강을 향하여 올라갔다. 요시야 임금이 그와 맞서 싸우러 나가자, 파라오 느코는 므기또에서 요시야를 보고 그를 죽여 버렸다. (2 열왕열왕 23,29)”
기원전 610년 프삼메티코스가 죽고, 그의 아들 느코 2세가 뒤를 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파라오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하란을 탈환하려는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슈르우발리트(Asshur-uballit)를 돕기 위해 칼그미스로 진군했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믹돌에서 ‘시리아인들’과 맞닥뜨린 느코는 그들을 물리쳤고 그 후 카디테스(Kadytes)를 정복했다고 하는데, 예레미야 47,1은 이 내용을 확인시켜 줍니다. 요시야는 느코의 출정이 성공할 경우 이제 막 쟁취한 왕국의 독립을 유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는 므기또에서 전투를 벌여 이집트의 진군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 위험한 도전으로 전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요시아가 리브나 출신의 아내로부터 얻은 아들 여호아하즈가 그 “백성들”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석 달 후 느코는 그를 폐위시키고 그의 형 여호야킴을 왕으로 세웠습니다(2열왕 23,30-35).
하란에서 바빌로니아를 몰아내려던 느코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레반트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은 것은 아니었지요. 느코는 백성들이 선택한 유다 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택한 계승자를 세운 후 그 나라에 막대한 조공을 부과했습니다. 이는 비록 이 지역에 대한 우선권을 가진 아시리아가 바빌로니아의 격한 공격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느코 자신이 지중해 동부 연안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3) 네부카드네자르의 원정 (기원전 605-601년)
“이집트에 대하여. 이는 유다 임금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킴 제사년에, 유프라테스 강 근처 카르크미스까지 갔다가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에게 패배한, 이집트 임금 파라오 느코의 군대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예레 46,2)”
이집트는 바빌로니아가 칼그미스를 정복할 때까지 4년간 레반트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칼그미스에서 원정 중이던 바빌로니아의 왕세자 네부카드네자르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서둘러 바빌론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이어받은 후 원정을 마무리 짓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그는 기원전 605년 칼그미스를 함락한 후 후퇴하는 이집트 군을 하맛 땅까지 추격하여 그 일대를 황폐화시켰습니다(예레 46, 1-2). 다음 해에는 남쪽으로 진군하여 아스클론을 점령하였는데(기원전 604년), 이에 불안을 느낀 유다에서는 단식이 선포되었고(예레 36,9), 여호야킴은 네부카드네자르의 종이 되어 3년간 조공을 바쳤습니다(2열왕 24,1; 2역대 36,6). 기원전 603년 바빌로니아 군이 또 다른 중요한 도시를 점령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가자, 에크론인 듯합니다. 기원전 602년에는조공을 거두기 위한 한 차례의 원정이 더 있었습니다. 기원전 601년 느코가 네부카드네자르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기록에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왕이 ‘서로 가슴을 쳤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전쟁이 무승부로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어쨌든 네부카드네자르는 바빌론으로 물러갔고 그 다음해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여호야킴은 안심을 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고 있었습니다(2 열왕 24,1).
4) 유다 왕국의 말기 상황 (기원전 599-586년)
네부카드네자르는 기원전 600년에 바빌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인 기원전 599년에는 바빌로니아 군을 보내 아라비아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칼데아, 아람(또는 에돔?), 모압, 암몬 사람으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해 아라비아 사람들을 유다를 압박 했습니다(2 열왕 24,2). 기원전 598년에는 바빌로니아 군대가 ‘유다의 도시’ 곧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위해 보내졌습니다. 그들은 키슬레브 월(기원전 598년 12월 17일-기원전 597년 1월 15일)에 바빌론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사이 유다에서는 기원전 598년 마르케스반 월 12(12월 8일)에 여호야킴이 죽었고 그의 어린 아들 여호야킨이 어머님인 느후스타의 보호를 받으며 왕좌에 올라 있었습니다. 에돔 혹은 다른 민족이 남쪽에서 유다를 공격 해 왔는데, 예레미야 13,19은 “네겝 성읍마다 문이 닫혔는데 열어 줄 자 아무도 없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그려주고 있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직후 네부카드네자르가 도착했지요. 기원전 597년 아다르 월 2일(3월 16일 토요일)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약 한 달 후인 기원전 597년 니산 월 10일 4월 22일 네부카드네자르는 여호야킨과 그의 측근들을 바빌론으로 사로잡아 오게 하고, 요시아의 다른 아들 치드키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1 열왕 24,10-17; 2 역대 36,6-7.10).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기원전 596년 다시 한번 레반트 지역으로 칼데아 군대를 보냈지만, 기원전 595년에는 바빌론에서 일어난 내란을 진압해야 했지요. 그는 2년 후 다시 서쪽 지역에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집트가 외교적으로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던 듯합니다. 에돔, 모압, 암몬이 사절들이(아마도 반 바빌론 동맹 결성과 관련한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고(예레 27,3.12; 28,1), 느코의 후계자 프삼메티코스 2세는 페니키아로 갔습니다. 이 일로 치드키야는 바빌론으로 호출되었으나(예레 51,59) 가까스로 네부카드네자르에게 충성을 확신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그의 왕조는 한동안 바빌론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아라드 서신에 언급되고 있는 키팀은 칼대아인들에게 고용된 키프로스인 용병들로 보이는데, 이들은 네겝을 순찰하면서 아랏 같은 유다 요새들에게 물자를 제공받았습니다.
5) 네부카드네자르의 마지막 유다 원정(기원전 588년 1월 15일-기원전 586년 7월 19일)
“그때에 바빌론 임금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성읍을 모두 공격하고 있었는데, 유다에서 요새 성읍들 가운데 남은 성읍이라고는 라키스와 아제카뿐이었다아제카 뿐이었다. (예레 34,7)”
기원전 589년 프삼메티코스 2세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왕이 된 호프라는 시리아에 대한 간섭을 재개했습니다. 그는 치드키야를 설득하여 바빌론을 모반하도록 했습니다. 칼대아인들은 재빠르게 반응했지요. 예루살렘은 치드키야 9년 10월 10일, 곧 기원전 588년 1월 15일에 포위되었습니다(2 열왕 25,1; 예레 39,1; 52,4; 에제 24,1-2). 호프라의 참전으로 잠시 바빌로니아의 포위가 풀렸으나 이내 이집트가 참패하면서 포위가 재개되었습니다(예레 37,3-15). 이 모든 일은 기원전 587년 중에 발생했습니다(예레 32,1). 유다 곳곳의 다른 성읍들도 파괴되었습니다. 네겝 지역은 에돔의 침략을 받게 되어 아랏과 키나에서부터 남쪽 라못(Ramoth-negeb)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에돔이 그곳에 이르지 못하도록” 병력 증원을 요청했습니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라키스와 아제카 만 남게 되었습니다(예레 34,7). 그러나 곧 라키스의 호샤야후(Hoshayahu)라는 군인이 그곳 사령관 야우시(Ya’ush)에게 (봉화를 통해 통신을 주고받던) 아제카에서 신호가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했습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라키스도 함락된 것이 분명합니다. 기원전 586년 7월 19일 마침내 예루살렘 방어벽이 무너지고 멸망합니다(2 열왕 25, 2-4; 예레 39,2; 52,5-7). 치드키야는 달아났으나 예리코 근처에서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2. 바빌로니아 유배/ 유다인들이 이집트로 달아나다/ 이스라엘 지파의 회복에 대한 환상
1) 바빌로니아 유배 (기원전 597-582년)
“네부카드네자르가 유배시킨 백성은 제칠년에 삼천이십삼 명이었고, 네부카드네자르 제십팔년에 예루살렘에서 끌고 간 사람은 팔백삼십이 명이었다. 네부카드네자르 제이십삼년에는 느부자르아단 친위대장이 유다인 칠백사십오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렇게 해서 모두 사천육백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예레 52, 28-30)”
예레미야서는 세 차례에 걸친 유다인들의 유배와 관련하여 상당히 정확한 수치를 제공하며 끝을 맺습니다(예레 52, 28-30). 세 번의 유배는 각각 기원전 597년, 586년, 582년에 이뤄졌는데, 이 중 제3차 유배는 네부카드네자르가 서쪽의 코엘레-시리아(시리아 남부), 모압, 암몬을 원정하면서 수행된 것으로 보입니다(요세푸스, [고대사, 10,181-182]). 신 바빌로니아의 쐐기 문자 서판 중 특히 니푸르에 있는 무라슈 은행의 서고에서는 유다인은 물론 사로잡혀 온 다른 민족들에 대한 자료들도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2) 유다인들이 이집트로 달아나다(기원전 586년경)
바빌로니아는 전에 ‘왕궁의 시종’이었던 아히캄의 아들 그댤야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댤야는 미츠파를 중심지로 삼았지요. 모압, 암몬, 에돔 등의 이웃 나라로 달아났던 유다인들은 그가 있는 미츠파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암몬 왕 바알리스가 느탄야의 아들이며 유다 왕족인 이스마엘을 선동하여 그달야를 죽이게 했습니다. 이 일은 기원전 586년의 일곱 번째 달인 10월에 일어났습니다. 그 후 유다 지도층은 바빌로니아의 보복이 두려워 이집트로 도망가기로 결정했지요. 이들은 (바알 츠폰을 숭배하던) 타파네스에 정착했고 결국 용병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다 피난민들의 거주지 중 하나가 엘레판틴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곳에서 페르시아 시대의 아람어로 기록된 가계 및 공동체 관련 문헌들이 발견되었습니다.
3) 이스라엘 지파의 회복에 대한 환상 (기원전 573년)
“너희는 이 땅을 이스라엘의 지파에 따라 나누어 가져야 한다. (에제 47,21)”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유다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597년에서 시작하여 사로잡혀 간 지 25년째 되던 해 니산 월 10일, 즉 기원전 573년 4월 28일에 에제키엘은 재건된 성전의 환상(에제 40,1)과 더불어 이스라엘 지파가 회복될 것이라는 환상(에제 47,13-48,29)을 받았습니다. 환상 속에서 각 지파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띠 모양의 영토를 분배받는데, 이것은 실제의 지리적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지요. 여기서 북쪽 경계선은 ‘다마스쿠스 경계선과 하맛 경계선 사이’(에제 47, 16)라고 분명하게 언급한 부분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경계는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 확보된 것이었습니다. 청동기 말부터 헬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공인된 ‘가나안’ 땅의 경계였다는 것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남쪽 경계는 유다 왕국의 경계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민수기 34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장차 여호수아 시대에 얻게 될 기업의 경계를 이 경계 내에서 정하였고, 에제키엘은 환상 속의 미래를 비춰보고 있는 것입니다.
3. 바빌론 왕국의 흥망성쇠/ 시온으로의 귀환/ 포로기 이후의 예루살렘
1) 바빌론 왕국의 흥망성쇠 (기원전 626-539년)
칼데아인들이 공식적으로 바빌론을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26년 나보폴라사르가 왕권을 주장하면서부터였고, 통치권을 공고히 한 것은 기원전 623년 무렵이었습니다. 이전까지 그는 칼데아인들의 우두머리로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을 아시리아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애써왔습니다. 그 후 10년 간 나보폴라사르와 메디아의 키아사레스 2세는 아시리아에 맞서기 위해 동맹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메디아가 아슈르를 함락하고(기원전 614년) 니네베가 메디아-바빌로니아 연합군에 함락되면서(기원전 612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축출된 아시리아 왕조가 하란에 자리 잡게 되었지요(기원전 610년). 기원전 609-605년까지 바빌로니아는 칼그미스에서 이집트의 느코 2세의 지원을 받고 있던 아시리아 망명 정부에 맞서 전쟁을 계속하였습니다. 나보폴라사르가 죽은 뒤 왕위에 오른 그 아들 네부카드네자르는 곧바로 칼그미스를 정복했습니다. 그 후 키악사레스가 아르메니아(이전의 우라르투)와 카파도키아 정복에 전념하는 동안 네부카드네자르는 ‘하티 땅’(지중해 동부 연안)에 대한 통치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전쟁했습니다. 이집트는 군사 및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레반트 지역에 대한 바빌로니아의 패권에 도전했지만 실패했습니다(각각 기원전 601, 587년과 기원전 593, 587년). 유다(기원전 586년), 암몬과 모압(기원전 582년) 등 소규모 국가들이 멸망당한 것이나 13년간 티로를 포위 공격했다는 것(기원전 585-572년)은 이 지역의 피정복 민족들이 바빌로니아의 지배에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이집트의 모반자 아마시스(Amasis)가 바빌론의 골칫거리였던 파라오 호프라를 몰아내었습니다(기원전 570년). 그러자 삼각주 지역을 침공하고, 약탈했지만(기원전 568년), 그곳에 자신의 거점을 마련하지는 못했지요.
기원전 562년 아멜 마르둑(Amel-Marduk)이 네부카드네자르의 뒤를 계승해 왕이 되었습니다. 니산 월 첫날, 신년 축제 직전에 이 새로운 왕은 여호야킨을 석방해 주었습니다. 이때는 ‘사로잡혀간 지 37년 12월 27일’ 곧 기원전 561년 4월 2일이었습니다. 2년 뒤 반란이 일어나 아멜 마르둑은 살해당하고, 그의 처남 혹은 의형인 네르갈사레셀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카파도키아 원정에서 처참하게 패한 후에 바빌론에서 죽었고(어쩌면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라바시마르둑(Labashi-Marduk)이 뒤를 이었으나 얼마 후 기원전 556년 3월 쿠데타로 처형되었습니다. 군사 정권은 하란 출신의 나보니도스(Nabunaid)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월신(달을 숭배)인 신(Sin)을 숭배하는 여사제로 아시리아 왕족 혈통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보니도스는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Astyages)가 키루스와 맞붙어 싸우는 사이 하란을 빼앗았습니다. 이는 어쩌면 키루스(키루스 2세)와 결탁하고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보니도스는 무너져가는 바빌로니아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군을 하맛으로 이동시키고 서부 지역(하티 땅)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모집한 후 아라비아 북부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했습니다. 그는 테이마에 사령부를 세우고, 아들인 벨샤르우수르(Bel-shar-usur)를 바빌론의 섭정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이후 10년 동안 그는 남쪽으로 원정을 해 야스리브(Yathrib, 이슬람의 메디나)에까지 진출했습니다. 나보니도스는 여섯 개의 오아시스(오늘날 여섯 개로 발견됨)에 바빌로니아인과 하티 땅 민족들로 구성된 수비대를 주둔시켰습니다(마호메트 시대[6세기 후반-7세기 전반])에는 이 여섯 개 중 다섯 개가 유대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막에서 10년 동안 지내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꿈란의 유대인들에게서 발견된 아람어 문서에서도 나타나며 다니엘(다니 4,28-37)의 배경이 되고 있는데, 다니엘서에서는 나보니도스가 아니라 네부카드네자르 2세입니다.
한편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장인인 아스티아게스를 물리치고(기원전 550년) 메디아의 수도인 엑바타나를 약탈했지요. 그리고 할리스 강을 건너 진군하여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Croesus)를 물리치고 그 수도 사르디스를 점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크로이소스는 이전 동맹국인 스파르타와 이집트의 아마시스 그리고 라비네토스(나보니도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보니도스는 기원전 542년에 바빌론으로 돌아왔는데, 아마도 키루스가 아시리아 북부를 점령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하란에 있는 신(Sin) 신전을 재건하고 우르에 있는 신전을 재단장하였습니다. 바빌론의 신 마르둑 대신 신(Sin)이 더 높이 숭배되자 마르둑의 사제들과 (아마도 유대인들을 포함한) 다른 메소포타미아 지역 사회가 강하게 반발을 했고, 이런 상황은 키루스의 바빌론 침공을 앞당긴 것 같습니다. 키루스는 티그리스 강 유역에서 두 번에 걸쳐 승리한 후 시파르에 무혈입성했습니다. 마음이 변절한 총독 고비로스(Gobyrus)는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키루스 편에 가담하여 군대를 이끌고 바빌론으로 갔습니다. 그 달 29일 키루스는 바빌론으로 당당히 입성했습니다.
2) 시온으로의 귀환(기원전 538-445년)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이제 그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게 하여라. 그분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에즈 1,1-3)”
키루스 대왕은 정복한 나라들의 종교와 민족적 정체성을 허용해 줌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는 바빌론에 입성하자마자 정복지에서 약탈해 온 신상들을 본래의 신전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허용하는 포고령을 선포했습니다. 나보니도스가 이것들을 수도인 바빌론으로 가져다 놓았던 것이지요. 키루스가 제국 통치 원년에 내린 것과 비슷한 포고령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2 역대 16,22-23; 에즈 1,1-5). 여기에서도 유다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538년 세스바차르(아마도 여호야킨의 아들, 2역대 3,18)가 이끈 제1차 귀환한 사람들이 도착하여 제단을 세웠고, 귀환 둘째 해에는 성전의 기초를 놓았습니다(에즈 3,8-13). 하지만 주변 민족들의 방해로 성전은 다리우스 1세 때에야 비로소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다리우스 통치 2년(기원전 515년 3월 13일) 공사를 마무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다리우스 통치 6년 아다르 월 3일에 마침내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기원전 515년 3월 13일).
바빌로니아에 남아있던 유다인들과 귀환한 사람들 간의 교류는 종종 있었지만, 귀환인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그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재워 7년(에즈 7,7)인 기원전 458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에즈라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페르시아 왕은 하느님의 법을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에 살고 있는 온 유대인 공동체의 공식적인 법전으로 인정했습니다(에즈 7, 25-26).
3) 포로기 이후의 예루살렘 (기원전 440년경)
“그런 다음 나는 밤에 일어나 몇 사람만 데리고 나섰다. 나의 하느님께서 내 마음을 움직이셔서 예루살렘을 위하여 무엇을 하도록 하셨는지, 나는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짐승은 내가 타는 것만 끌고 나왔다. (느헤 2,12)”
기원전 5세기 중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시대에 귀환한 유다인들(에즈 4,12; 7,7)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 작업을 재개했는데, 분명히 당시 떠들썩했던 사건들, 이를테면 태수(太守) 메가비주스의 반란 등에 직면했을 것입니다. 지방 관리들과 지역 우두머리들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에게 항의하여 건축을 중단시키라는 명령을 받아냈습니다(에즈 4,21-22).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유다 총독으로 임명되어 이러한 상황을 보고받았습니다(느헤 1,3). 그가 야간에 성벽을 살펴본 이야기(느헤 2,12-15)나 성벽 재건에 참여한 이들에 대한 기록(느헤 3장)에는 성문과 망대는 물론 성벽 근처에 있는 수많은 건축물들이 묘사되어 있지요. 고고학 조사를 통해 포로기 이후의 예루살렘 규모가 왕정 시대에 비해 현저하게 작아졌음이 드러났습니다. 동쪽 돌출부에서만 사람들이 살았고 성벽은 경사면 위쪽에 세워져 더 높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