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솔로몬 왕조 시대 이야기

다윗은 주변 여러 나라들을 정복해 영토를 확장하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대외 무역을 통해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두 왕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1. 다윗의 트랜스요르단 지역 초기 원정 (기원전 1000년경)

1) 다윗의 트랜스요르단 지역 초기 원정

“암몬 자손들은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을 사게 된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암몬 자손들은 사람을 보내어, 벳 르홉의 아람인들과 초바의 아람인 보병 이만 명, 천 명의 군사를 거느린 마아카 임금, 그리고 톱 사람 만 이천 명을 고용하였다(2 사무 10, 6).”

2) 아람 연합군의 패배과 다윗의 라빠(라빠 브네 암몬) 정복 (기원전 1000-990년경)

사무엘하 8, 2-11과 역대기하 18, 2-11과 10, 1-19; 11, 1; 12, 26-31; 역대기상 19, 1-19; 20, 1-3의 기록을 서로 연관시킴으로 다윗이 트랜스요르단(현재 요르단 지역) 정복을 연대순으로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

사건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 것임이 분명합니다.

a) 모압을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은 다윗은 아르논 북쪽 평지를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2 사무 8, 2; 1역대 18, 2).

b) 암몬의 새로운 왕 하눈은 조문하러 온 다윗의 신하들을 모욕함으로써 이스라엘 군대가 지나치게 국경 가까이에 주둔해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지요(2 사무 10, 1-5; 1역대 19, 1-5). 그 후 그는 트랜스요르단 북부와 레바논의 베카 골짜기에서 발전하던 아람 왕국들, 곧 (아람) 벳 르홉과 (아람) 초바,마아카, 그리고 톱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2 사무 10, 6; 1역대 19, 6-7). 이들 연합군은 메드바 동쪽에 집결함으로 모압 평지에 대한 다윗의 주도권에 도전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습니다(1 역대 19, 7). 이에 다윗은 요압의 지휘 아래 군대를 파병했습니다. 요압은 적군들이 양쪽에 있는 것을 보고 동생인 아비사이와 지휘권을 나눴ㅅ브니다. 아람족은 요압에게 대패했고, 암몬족은 자신들의 견고한 성읍으로 퇴각했습니다.

c) (아람) 초바 왕 하닷에제르는 패한 것에 분노해 자기가 통치하는 모든 속국과 아람의 왕국들과 유프라테스 강의 아람족들 중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들은 헬람에 집결했고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를 거느리고 그곳에서 그들을 맞았습니다. 다윗이 승리하자 하닷에제르의 속국들은 하닷에제르를 버리고 다윗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2 사무 10, 15-19; 1역대 19, 16-19).

d) 이제는 라빠 암몬(라빠브네 암몬) 차례였습니다. 그 이듬해 추수가 끝난 후 다윗은 요압의 지휘로 군대를 보내어 라빠를 공격했고, 요압은 오랜 기간의 포위 끝에 항복을 받아냄으로 다윗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2 사무 11, 1; 12, 26-31; 1역대 20, 1-3).

e) 하닷에제르가 유프라테스 강변의 식민지를 되찾으려고 하자 다윗은 그 본토를 공격하여 군사 대부분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로써 다윗은 명목상 아람 연맹의 우두머리가 되어 다마스쿠스에서 통치자들을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f) 이렇게 되자 하닷에제르의 가장 큰 적이었던 오론테스 강의 하맛 왕 토이가 다윗에게 화친을 청해왔습니다(2사무 8, 9; 2역대 18, 9-11).

g) 이제 이스라엘은 남부 에돔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아비사이가 직접 군대의 승리를 이끌기는 했지만 아마도 요압의 지휘 아래에서 이루어진 듯합니다(시편 60 참조). 또한 에돔 땅을 관할할 감독관들이 임명되었고(1역대 18, 12-13; 2사무 8, 13-14), 당시 에돔 왕실 출신으로 아이였던 하닷은 이집트로 망명하여 정치적인 보호를 받았습니다(1 열왕 11, 15-20).

3) 다윗의 에돔 정복과 하닷의 이집트 도피

“… 다윗 임금은 이것들도 에돔, 모압, 암몬의 자손들, 필리스티아인들, 아말렉, 이 모든 민족들에게서 거둔 은과 금과 함께 주님께 바쳤다. 츠루야의 아들 아비사이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인 만 팔천 명을 쳐 죽였다. 그가 에돔에 수비대를 두자, 에돔 전체가 다윗의 신하가 되었다. 주님께서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도와주셨다(1역대 18, 11-13).”

4) 다윗 왕국 (기원전 1000-970년경)

“하닷하제르를 따르던 모든 임금들은 자기들이 이스라엘에게 패배한 것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한 뒤에 이스라엘을 섬겼다. 그리고 아람인들은 두려워서 더 이상 암몬 자손들을 돕지 않았다(2 사무 10, 19).”

다윗 왕국 시대의 상황

이스라엘 왕국의 군사력과 정치력은 다윗 통치 아래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고대 근동의 강력한 왕국들이 침체기를 맞으면서 ‘비옥한 초승달 지대’ 서편 땅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이라는 탁월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군사, 정치 지도자를 통해 이 같은 유리한 상황을 잘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람 초바와 충돌한 이후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강대국이 되었지요. 다윗과 솔로몬 통치 아래 이스라엘 제국의 규모는 솔로몬과 관련된 성경 구절에서 드러납니다. “그(솔로몬)는 팁사에서 가자에 이르기까지 유프라테스 서쪽 지역 전체를 곧 유프라테스 서쪽 임금들을 통치하고 사방 모든 지역에서 평화를 누렸습니다(1 열왕 5, 4).” 히브리어로 ‘유프라테스 서쪽’은 ‘강 건너편’을 뜻하며,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이 지역을 일컫던 이름입니다. 이처럼 다윗과 솔로몬의 세력은 유프라테스 강 큰 굽이에 위치한 팁사에서부터 가나안의 남쪽 경계에 있는 필리스티아의 가자에까지 미쳤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백성, 정복한 왕국들, 속국 왕들의 세 가지 주요 요소로 구성된 행정적으로 복잡한 제국이었어요. 제국 중심에는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가 있었고, 여기에 다윗이 점령한 가나안-아모리 지역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들 주위로 정복당하여 조공을 바치는 에돔, 모압, 암몬, 아람-다마스쿠스, 그리고 아람 초바 왕국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 에돔과 다마스쿠스 같은 일부 지역에는 이스라엘 총독이 임명되었지만(2사무 8, 6.14), 현지 왕실의 일원이 이스라엘 왕의 감독 아래 다스리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들도 암몬의 경우와 같이 총독이었습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윗을 도우러 트랜스요르단에서 왔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라빠 암몬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2사무 17, 27)는 아마 다윗에게 정복당하기 전에 죽은 암몬 왕의 아들인 것 같습니다(1 역대 19, 1). 마지막 요소인 속국 왕들은 이런저런 방법으로든 다윗의 통치를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여기에는 필리스티아와 압살롬의 외조부가 왕으로 있던 그수르(2 사무 3, 3; 13, 37) 등 트랜스요르단 북부 여러 왕국들이 포함되었습니다. 하맛 왕 토이(2사무 8, 10)나 티로왕 히람도 이와 비슷한 처지였던 듯합니다(2 사무 5, 11).

2. 다윗과 솔로몬 통치 시기 이스라엘의 패권 (기원전 1000-930년경)

“그는 팁사에서 가자에 이르기까지 유프라테스 서쪽 지역 전체를, 곧 유프라테스 서쪽 임금들을 통치하고 사방 모든 지역에서 평화를 누렸다(1 열왕 5, 4)”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령 하는 이야기에는 새롭게 수립된 이스라엘 왕국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포함된 지역은 모두 다윗 왕조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있는 땅이었지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토

1) 요압의 인구 조사 (기원전 980년경)

욥의 인구조사 여정(2사무 24, 5-7)이 그다지 완전하지는 않지만 전반적인 경로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로에르에서 출발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평지를 점령할 때마다 전통적으로 모압과 경계를 이루던 지역입니다. 그리고는 가드 지파 땅(모압 왕 메사의 비문에 의하면 평지 서부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임)을 지나 야세르에 이르렀고 계속해서 길앗을 통과 했습니다.

인구 조사 여정의 다음 장소는 ‘닷딤 훗시’인데 원문이 파손되어 분명하지는 않지만 주요 그리스어 역본은 그곳이 바산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요압이 이곳에서 단으로 갔고, 계속해서 ‘야안’ (다나얀, ‘야안’은 ‘이욘’의 소리 자리가 전환된 철자로 추측됨)으로 갔다고 보면 꽤 정황이 맞습니다.

이어서 그들은 시돈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을 따라 상부 갈릴래아를 가로지르며 ‘티로의 견고한 성읍’을 지났는데, 이곳은 이집트와 앗시리아 비문에 ‘우수’로 알려진 곳인 듯합니다(그리스어로 ‘팔레오타이루스’(Palaeotyrus, 즉, ‘고대 티로’를 의미한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가장 흥미로운데,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 곧 가나안 정착 초기에는 정복하지 못했던 모든 성읍들(판관 1,27-35)입니다. 이것은 정복 이전부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던 가나안족들의 사회, 정치적 요소들이 결국 새롭게 통일된 이스라엘에 굴복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히위, 가나안 사람의 이러한 성읍들을 어떻게 정복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어떤 고대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레위인의 성읍 분포와 솔로몬의 행정구역을 통해 최종 정복 결과를 알 수는 있지요. 가난한 성읍들은 주로 아코 평야, 이즈르엘 골짜기, 그리고 도르 지역 및 게제르와 요빠 사이의 내륙을 포함하는 샤론 평야에 밀집되어 있었습니다. 요압이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유다 남쪽 곧 네겝의 남쪽 경계 지역으로 이곳에는 카인, 여라므흐엘, 시메온 사람들과 같은 비주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최근 다윗에 의해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압은 지방의 새 중심지인 브에르세바로 갔는데, 이곳은 오늘날의 브에르세바와 브소르 골짜기가 있는 유다 네겝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다윗 집안의 가계도와 솔로몬 일생

2) 단 지파의 상속 지역 (기원전 980년경)

“그들이 상속 재산으로 받은 영토 안에는 초르아, 에스타올, 이르 세메스, 사알라삔, 아얄론, 이틀라, 엘론, 팀나, 에크론, 엘트케, 기브톤, 바알랏, 여훗, 브네 브락, 갓 림몬, 메 야르콘, 라콘, 그리고 야포 맞은쪽 지역이 들어 있다(여호 19, 41-46).”

단 지파가 산악 지대에서 평야 지대로 내려오지 못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지만(민수 19,47; 판관 1,34; 18,1),여호수아서는 아얄론 골짜기와 소렉 골짜기에서 항구 성읍인 요빠에 이르는 해안 지역을 단 지파의 상속 재산으로 규정합니다 (19, 41-46).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장악하게 된 것은 다윗 시대 이후였습니다. 초라와 에스타올 근처에는 단 지파 거주지가 있었고, 오노와 로드 (1 역대 8, 12) 그리고 갓 림몬(1 사무 7, 14; 2 사무 4, 2-3)에는 벤야민 지파 사람들 일부가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에프라임 사람들이 이 지역에 나타났는데(판관 1, 35), 게제르에서 가나안 주민들을 쫓아내지 않고 함께 살았습니다(판관 1, 29). 이러한 일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킬 수 있었던 때에 일어났으며 오직 통일 왕정 시대에만 가능했을 것이죠.

기원전 11 세기에 필리스티아는 소렉 북쪽으로 아펙까지 확장해 나갔고(1 사무 4,1), 기원전 909 년에는 기브톤을 장악했습니다(1 열왕 15, 27). 다시 말하면, 단 지파 성읍 목록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만 점령했던 땅으로 보이며, 실제로 솔로몬의 행정 구역 중 제2 구역을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그 명단(여호 19, 40-46)에 오노, 로드, 하딧, 츠보임, 마카스와 벳 다곤 등이 누락되어 있기는 하지만, 1 열왕기서 4, 9의 성읍 목록보다는 더 완전합니다.

주요 그리스어 역본을 통해 아조르에 대한 자료와 더불어 서쪽 경계에 관한 좀 더 온전한 정보를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여기에는 ‘서쪽에서(문자적으로는 바다로부터) 야르콘과 요빠 맞은편 경계’라고 되어있습니다. 성경에서 야르콘은 단 지파 정착 지역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개천, 즉 오늘날의 나할 아얄론 (Nahal Ayalon)을 뜻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오늘날의 야르콘(Yarkon)은 성경의 가나 시내가 서쪽 즉, 바다 쪽으로 연장된 것으로 봅니다(여호 17, 9). 레위인의 성읍 여섯 개가 이 땅에 있었고, 또 하나가 근처에 있는 아래 벳 호론에 있었지요. 단 지파의 남쪽 경계(여호 15, 10-11)는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의 새로운 국경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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