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동방 교회는 네스토리안 교회라고도 불립니다. 이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이름이지요. 단성론자, 또는 비칼체돈 교회로 불리는 교회 중 하나인 시리아 동방 교회의 특징과 기원,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글의 순서
1. 시리아 동방 교회의 기원과 특징
동방 시리아 교회는 또한 네스토리안 교회라고도 불립니다. 이는 428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라는 이름을 따서 불려진 이름이랍니다. 엄격히 말해, 이 교회의 기원을 살펴보려면 네스토리우스 이전의 에큐메니칼 공회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시리아 교회의 첫 주교는 열 두 사도 중의 하나였던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사도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초기 그리스도 신자들은 어떤 국가적인 분파나 정치적인 이유로 나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네스토리우스 주교가 5세기에 공회에 의해 단죄되기 이전에 이들은 그들 자신을 네스토리안 양성론자(Nestorian Diophysitism)들이라고 지칭했던 그리도스교의 한 공동체였다고 볼 수 있지요. 첫 4세기 동안 이 공동체는 종교적으로 안티오키아의 시리아 교회와 일치를 이루며 한 분파로서 아시아의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국경 사이에 이동이 가능한 접경지역에 자리를 잡고 거주 했습니다. 이 지역은 오늘날의 튀르키에, 이라크와 이란의 국경에 해당합니다. 초기의 교회 주교들은 다른 초기 공동체들과 마찬가지로 유다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시리아 동방 교회를 포함한 동방 교회(Oriental Churches, 아르메니아, 이집트 콥트 교회) 지도자들의 회의, 2022년)
2. 시리아 동방 교회의 전교와 성장
그러나 선교 활동이 활발히 전개됨에 따라 다른 민족과 종족, 그리고 이방인들이 개종하면서 급성장을 하자 유다인식의 주교 전통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독립된 정책을 취합니다. 비잔틴 교회가 이를 허용하자 이들은 예루살렘 관구의 영향에서 벗어나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안티오키아에 관구를 두게 되지요. 교회들은 서방과 동방으로 나뉘어 자치적으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안티오키아의 시리아 정교회 (Anthiochene Orthodox Church)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고, 그리스와 시리아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안티오키아의 주교단들은 처음부터 이원성(duality)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조짐은 결국 서방 시리아 교회와 동방 시리아 교회로 갈라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동방 시리아 교회는 동 아나톨리아, 쿠르디스탄, 상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페르시아 등의 시리아 동쪽 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하면서 교세를 확장해 나갑니다. 그리고 이들은 앗시리안 (Assyrian)이라 불리기를 자처하고, 그리스로부터 이단으로 단죄를 받습니다. 이들은 전례에 있어서 그리스 교회의 권위와 전례의 요소들을 배제하고 고대의 언어이며 후에 시리아어로 알려진 특별한 방언인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비잔티움의 박해를 벋어나 페르시아 제국의 보호 아래 페르시아에 뿌리를 내리고, 동방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엄격한 수도원적인 금욕 생활과 식을 줄 모르는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은 중세기에 페르시아, 투르키스탄, 그리고 중국에 이르기까지 선교를 통해 아시아 전역을 그리스도교화시켰다고 하니 놀랍기만 합니다. 초기 중세기까지만 해도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중세 시대의 시리아 동방 교회; 출처-위키 메디아)
3. 시리아 동방 교회의 쇠락
그러나 이런 부흥도 얼마 지나지 않아 중세 말기 이슬람 세계 아래에서 잔혹한 박해로 인해 회복할 수 없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끊임없는 박해 속에서 고통을 당해왔지요. 지난 한 두 세기 전에 그들이 쿠르디스탄 산악 지대를 끼고 있는 우르미아 호숫가 근처의 작은 마을들에서 재발견되었을 때, 그들은 고갈되고, 소모되어 있었고, 그들의 자원은 한정되고, 우민화 정책에 의한 그들의 무지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그들의 전멸을 현대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잉카, 아즈텍 문명, 그리고 미국의 인디언 부족들에 비교를 하곤 합니다. 그러나 교회사적으로 그들의 찬란했던 중세기의 부흥과 선교에 대한 열정과 믿음, 성스러움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시리아 동방 교회의 기원에 관한 전승들
앗시리안 혹은 시리안 전통은 그들 교회의 역사를 사도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심지어 에뎃사(Edessa)는 예수님 공생활 시대에 복음화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기원을 세 가지 전승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동방 박사 전승
동방 박사들이 우르하이 왕국(the Kingdom of Urhai) 또는 에뎃사 (동방의 페르시아 제국과 서방의 로마 제국을 접경한 자치지구로서 그 지역 주민들은 아람어를 구사함.)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아마 조로아스터 종교의 사제들로서 신적 계시를 따르고 믿었던 사람들이라고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바빌론 포로기에 아람어를 구사했던 유다인들은 조로아스터교의 비전을 언젠가 유다인들의 왕인 메시아가 지상 세계에 내려와 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해석해 주었다고 합니다. 앗시리안 교회는 이 동방 박사들이 숫자상으로 3명이 아니라 12명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4명이 한 그룹으로 편성돼 3그룹이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4인 1조가 되어 금, 유향, 그리고 몰약을 아기 예수님께 드렸다고 전합니다.
2) 에뎃사 왕 아브가르 5세와 예수님의 서신
에뎃사의 왕인 아브가르 5세 (Abgar V the Black)가 예수님과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하는 전승입니다. 비록 역사성에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아브가르 5세에 관한 이야기가 초대 그리스도교 문헌에 전해 내려온다고 합니다. 아브가르 왕은 그의 사신을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로마 총독인 사비누스(Sabinus)에게 보냈습니다. 사신들인 마리얍(Mariyab)과 샴샤그람(Shamshagram)이 임무를 마치고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을 지날 때, 한 예언자가 병을 고친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들은 그 예언자가 어쩌면 자신들의 왕의 문둥병을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난(Hannan)이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예수님께 보내, 에뎃사에 와서 자신들의 왕을 고쳐주고, 그의 백성들에게 새 복음의 소식을 전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합니다. 이 편지의 이야기는 참으로 감동적이지요. 아브가르 왕은 “예루살렘 지역에 나타나신 착하신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당신에 관한 이야기와 당신이 사람들을 고쳐주고, 죽은 사람을 살려 주시고, 맹인을 고쳐주시고, 절름발이가 걷고, 각종 질병을 고쳐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당신은 하늘에서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롱만 하고 있으니… 제게 오셔서 속히 고쳐 주시길 간청합니다.”라고 썼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나를 보지 않고 믿는 당신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성경에 나를 본 이들은 나를 믿지 않고, 나를 보지 않은 사람이 나를 믿고 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나에게 당신께로 와서 병을 고쳐줄 것을 요청했지만 나는 여기서 나를 보내신 분의 모든 일을 완수하고, 나를 보내신 분께 가야 합니다. 그러니 제가 그분께로 가면, 내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을 당신께 보내면, 그는 당신의 병을 고쳐주고 당신과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것입니다.”이었다고 합니다. 카이사리아의 주교 에우제비오는 4세기경에 익명의 저자에 의해 “Doctrins of Addai”를 그리스어로 번역을 했는데, 그곳에 예수님과 아브가르 왕의 서신의 이 이야기가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 널리 알려져 라틴어, 아르메니아어, 그리고 아랍어로도 번역되어 읽혀졌다고 합니다.
3) 성 토마스 행전
제 2경전인 “성 토마스의 행전(Acts of St. Thomas the Apostle)”을 바탕으로 나왔습니다. 성 토마스 사도가 순교를 한 후 그의 유해가 앗시리아의 땅인 메소포타미아에 묻혔다고 하지요. 이렇듯 앗시리안 교회의 여러 역사적 전승들은 그 교회적 기원이 고대로부터 매우 오래되었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