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교회 역사와 이해: 아르메니안 동방 교회 (Armenian Oriental Orthodox Church)

아르메니안 동방 교회가 역사적으로 고대 교회의 세계 보편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나름대로의 교회사적인 자부심을 지닐만한 독특한 특징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세계 최초로 국가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왕국과 국민이 한날한시에 동시적으로 그리스도 국가가 되고, 그리스도 인들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아르메니안 동방 교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아크타마르의 아르메니안 동방 교회 전경)

1. 예루살렘의 아르메니안 동방 교회 지역 모습

예루살렘의 구 도시(Old City) 북서쪽, 즉 시온 산 북쪽 지역은 아르메니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구역입니다.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고 비좁은 거리에 열을 지어 지나는 행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 간신히 좁은 도로를 지나다니는 버스들의 경적 소리, 그리고 높은 담장 넘어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정겨운 소리와 함께 이곳은 언제나 생동감이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담장 벽들 위에 아무렇게나 붙어 빛이 바랜 지도로 보이는 포스터들이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끕니다. 소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지도 위에 마치 그림물감으로 흩뿌려 놓은 듯한 크고 작은 붉은 점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1915년 오스만 터키 제국에 희생된 아르메니안 사람들을 기념하는 포스터로써, 붉은 점의 크기를 통해 각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대대적인 대량학살을 통해 희생되었는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그림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 짐을 느낍니다. 어찌 보면 아르메니안 사람들과 그들 교회에 관한 이야기는 거대한 박해의 시련 속에서 살아남은 영웅담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전례를 진행하는 아르메니안 동방 교회 사제들

(전례를 진행하는 아르메니안 동방 교회 사제들, 예루살렘)

2. 아르메니아의 특징

‘아르메니안(Armenian)’이란 단어는 원래 희랍어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이크(Haikh)’ 민족이라 부르며, 조국을 ‘하야스탄(Hayastan)’이라 칭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들의 시조(始祖)는 ‘하이크’로서 노아의 아들들 중의 하나인 야펫(Japheth)이라고 합니다(창세 7, 13). 그런데 사실 그들의 혈통은 인도 아르얀(Indo-Aryan)족에 속합니다. 이들의 초기 지리적 경계는 북쪽으로는 코카서스 산맥과 남쪽으로는 타우러스(Taurus) 산맥, 동쪽으로서 카스피안 해와 서쪽으로는 흑해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은 에덴동산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지요(창세 2, 10). 그리고 노아의 방주가 내려앉았고, 홍수로 황폐화되었던 땅이 다시 소생하기 시작했었던 아라랏 산이 위치해 있는 곳입니다(창세 8, 4). 그리고 아르메니안 사람들은 러시아 남부와 접경 지역에 있는 ‘에쉬미아진(Etshmiadzin)’이란 수도원에서 노아 방주의 일부를 지금도 소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제국의 경계에 위치한 지리적인 이유로 두 제국의 패권 싸움의 한 복판에서 고통을 당해야 했고,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역사 대대적으로 페르시아, 그리스, 아랍, 몽골, 이집트와 오스만 튀르크의 공격으로 괴롭힘을 당해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지중해와 이란 평원을 연결해 주는 즉 동방과 서방의 만남의 장소라고도 불릴 수 있었던 지리적, 교통적 편리성으로 중세에 이곳은 비단길(Silk Road)이 지나는 골목이었습니다. 결국 20세기 초반에 중요한 상업적, 정치적인 세력의 야욕에 의해 수없이 외부의 침략을 받아 결국 이 나라는 멸망합니다. 아르메니아 국가는 터키와 러시아를 접경으로 양쪽으로 나뉘고, 그 외의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중동, 인디아, 유럽 그리고 아메리카 등 세계 여러 나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지요. 그들 일부(약 2천 명 정도)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하이파, 요빠, 그리고 베들레헴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안 사람들은 상업, 기술 분야와 공업 부분에서 뛰어난 재주를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근면성으로 부를 일구어 다른 민족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3. 아르메니아 동방 교회의 기원과 전승

비록 아르메니안 교회가 역사적으로 고대 교회의 세계 보편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나름대로의 교회사적인 자부심을 지닐만한 독특한 특징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세계 최초로 국가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왕국과 국민이 한날한시에 동시적으로 그리스도 국가가 되고, 그리스도 인들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20 세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주변 이슬람 국가들의 대량학살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인 비극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안 사람들은 그들의 고유한 국민성을 간직하고, 그들의 언어와 사회, 민족적인 정체성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들 특유의 굴하지 않는 강한 끈기와 함께 그들 고유 언어와 종교가 그들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일 겁니다. 그들 중 일부가 로만 가톨릭이나 개신교로 전향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단성론을 지향하는 고대 동방 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복음화의 시초에 관한 여러 전승들을 갖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제자 타대오가 설립한 아르메니안 동방교회

아르메니안 동방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의 하나였던 타대오가 교회의 설립자라고 믿고 있습니다(마태 3, 10 참조). 타대오 사도는 서기 43-66년 경에 아르메니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60년경에 성 바르톨로메오가 그의 선교에 합류를 합니다. 그러다가 이들은 순교를 해 타대오 사도의 유해는 아르메니아 동남쪽에 위치한 아르타즈(Artaz)에 성 바르톨로메오는 알팩(Alpac)에 오늘날까지도 묻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타대오 사도는 아르메니아 교회의 사도적, 자치적으로 초대 총대 주교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2) 아르메니안 동방 교회가 일곱 명의 아르타즈 주교단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전승

또 다른 전승은 아르메니아 교회가 일곱 명의 주교들로 구성된 아르타즈 주교단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이들은 2세기까지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지요. 더 나아가 아르메니아 순교 열전은 사도 시대 때에 타대오 사도와 또는 성 바르톨로메오와 함께 죽음을 통해 그들의 세상 삶을 포기했던 무명 유명의 수많은 남녀 신자들이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카이사리아의 교회 학자 에우제비오(260-340 A.D)의 저서인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와 터툴리아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110년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교가 아르메니아에 전해져 사람들이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 황제가 아르메니아에서 그리스도교를 멸절시키고 마즈다이즘(Mazdaism)을 전파하려 했으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의 박해를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동방의 조르아스터교 등 이교들의 유혹 가운데서 아직 미숙했던 아르메니아 교회가 요동치고 있었을 때, ‘계몽가(Illuminator)’라는 별명을 가진 성 그레고리오가 교리적인 체계를 세우고 교회의 위치를 확고히 했습니다(3세기 말-4 세기 초). 그래서 그를 아르메니아 교회의 역사적인 실제 설립자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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