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교회 역사와 이해: 이집트 콥틱 교회(Coptic Church)

이집트 콥틱 교회는 가장 오래된 복음서를 기록한 성 마르코를 콥틱 교회의 설립자로 보고 있습니다. 이집트 콥틱 교회는 무엇보다도 헤로데 왕의 유아 학살을 피해 성 가족이 이집트로 피난 왔었던 추억을 매우 소중히 하고 있지요. 그래서 콥틱 전례중의 영광송에는 성 가족이 이집트 땅으로 입성함을 항상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콥틱 교회의 역사와 기원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글의 순서



1. 이집트 콥틱 교회의 어원과 의미

‘이집트 인(Egyptian)’ 과 ‘콥트 (Copt)’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aigyptos’라는 이집트 사람을 일컫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헬라 사람들은 이집트 또는 나일강을 지칭할 때 이 말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Hak-ka-Plab (Ptah 신의 집 또는 신전이란 뜻, 즉 멤피스를 지칭한다고 한다)’이란 단어의 발음이 변천되어 내려온 말이라고 합니다. Ptah 신은 이집트 신화에서 창조의 신으로서 가장 높이 숭상되었던 신이었지요. ‘Hak-ka-Plab’이란 단어의 접두사를 빼고 접미사만을 발음하면서, gypt란 어근만 남아 오늘날 ‘Egypt,’ 또는 ‘Copt’란 말을 사용하고 아랍어로는 ‘Qibt 또는 Gybt’로 쓰이고 있습니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콥트(Copt)’란 단어를 아랍어나 셈족 어에서 그 어원을 찾습니다. 미즈라임의 아들 ‘쿠프타임(Kuftaim, 노아의 손자들 중의 하나)이 나일강 계곡에 처음으로 정착한 후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던 테베에 근접한 고대 마을에 자신의 이름을 지칭하는 ‘Quft, 또는 Guft’이란 이름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랍어로는 이집트를 ‘daral-Qibt’라 부르는데, 이 말은 ‘콥트의 고향, 마을’을 뜻하므로 오늘날 아랍 사람들은 그 어원이 그리스도교적이라 하여, ‘콥트’라는 말을 당연히 ‘그리스도교인’들을 뜻하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지요. 이런 전승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콥트’와 ‘이집트인’을 동의어로 받아들여, ‘콥틱 교회’는 ‘이집트 교회’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콥틱 교회는 이집트 교회라고 생각을 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이집트 카이로에 위치한 이집트 콥틱 교회

(이집트 카이로에 위치한 이집트 콥틱 교회)

2. 이집트 콥틱 교회의 특징

어찌 보면 이집트 사람들도 우리 나라 사람들만큼이나 종교성이 강한 민족인 것 같습니다. 고대의 3대 문명 발생지 중의 하나인 나일강의 문명 아래서 수리, 천문학 등 과학을 발전시켰던 반면, 고대 신화에 전승도 풍부하게 전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별 갈등이 없었습니다. 기원전 14세기경부터 전해오는 유일 신에 대한 신앙(유일하신 하느님), 유명한 신들인 오리시스, 이시스, 그리고 호루스 신의 삼위일체적인 성격(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삼위일체), 영에 의한 잉태 즉, Ptah 신이 Apis 신을 잉태하고 낳음(동정 마리아의 성령에 의한 예수 잉태와 낳음), 죽음 뒤의 사후 세계(천국의 삶), 그리고 영원한 삶의 상징인 ‘앙카(Ankh, 십자가와 접목)’등은 그리스도교의 사상과 유사하므로, 그들이 이 사상을 자신들의 신앙에 접목시키기에 전혀 이질적이거나 새로운 것들이 아니었답니다. 이러한 사상들은 헬라 제국의 왕조들 중의 하나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 아래 동방과 서방의 문화를 혼합시키기를 열망했던 그들의 시도에 의해 종교적 혼합주의가 탄생해 양쪽 신화에 큰 혼란을 가져옵니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전 우주적인 새로운 신 ‘세라피스’를 창조해 인격화시켜 오리시스나 아피스를 대신하게 하고, 그리고 이 신을 그리스의 제우스와 플루토에 연관시켜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집트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음에 따라 나라는 비참하게 궁핍해지고, 백성들은 삶에 대한 목적과 소망을 잃어 갔습니다. 이때 바로 그리스도교가 그들을 영적으로 위로하고 위안을 주어 다음 세계에 대한 이상을 심어 주면서 복음이 마치 불길이 나일 계곡을 휘덮듯이 그리스도교가 그들 안에 급속히 전파되었던 것이지요.

3. 이집트 콥틱 교회의 기원

콥틱 교회는 무엇보다도 헤로데 왕의 유아 학살을 피해 성 가족이 이집트로 피난 왔었던 추억을 매우 소중히 하고 있습니다(마태오 2, 13-15 참조). 그래서 콥틱 전례중의 영광송에는 성 가족이 이집트 땅으로 입성함을 항상 노래하고 있고, 콥틱력으로 바손(Bashon)월 24일의 전례 찬양 시는 구체적으로 성 가족의 이집트 입성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오! 이집트와 여인의 아들들과 여인과 함께한 이들아! 은총을 받은 이들, 창세 전부터 계시던 이가 너희에게 오셨으니…”

더욱이 이들은 성 가족이 상부 이집트로 향해 여행을 할 때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장소들을 지목하고 성당을 지어 지금도 기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정확한 장소라고 확증은 할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헤로데 왕이 있었고, 그가 유아 학살을 자행하고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던 해에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2000년 전 당시 유대아 땅에서 이집트로의 여행길이 얼마나 험난했을지 짐작을 해 볼 수도 있지요. 한편 성 토마스 사도에 의한 복음서는 세 살의 예수님이 죽은 물고기를 다시 살게 했다는 기적을 증언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 가족의 이집트 피신에 관한 여러 이야기와 기적들이 전해 내려오면서 이집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새로운 복음이 재빨리 전파되는 것에 일조를 했을 것입니다.

콥틱 교회는 가장 오래된 복음서를 기록한 성 마르코를 콥틱 교회의 설립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의 첫 성인이고 영광스런 순교자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선교 여행에 잠시 동행을 했었던(사도 13, 5.13) 요한 마르코는 초대 교회의 4명(바오로, 실라스와 바르나바와 마르코)의 선교사 중의 한 사람으로 바르나바의 4촌 동생이었다고 합니다(사도 15, 36-40 참조). 그의 부모는 키레네(Pentapolice, 현재 리비야의 동쪽 지중해안의 도시)에 살았던 유다인들로서 매우 엄격한 종교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버르버(Berber)족들이 공격해 재산과 토지를 탈취당하고 나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새로 선출된 이집트 콥틱 교회의 대주교

(새로 선출된 이집트 콥틱 교회의 대주교)

4. 이집트 콥틱 교회의 설립자 마르코 복음사가

요한 마르코는 예수님의 탄생 후 얼마 되지 않아 태어난 것 같습니다. 그는 그 당시에 매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는데, 히브리어 외에도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도 정통했다고 합니다. 사촌 형인 바르나바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지만 사도 베드로나 바오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곧 예수님의 사목에 합류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보내신 70인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집에 모였고, 성령께서 기도하고 있었던 그들 위에 강림하셨던 것입니다. 마르코는 그의 복음서를 라틴어나 그리스어로, 그리고 바오로 서간들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성 요한 크리스토모스는 그가 이집트에서 그리스어로 복음서 원본을 집필했다고 말합니다. 마르코는 복음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선교 여행을 함께 했고, 이탈리아나 로마에서는 베드로와 매우 친밀한 관계여서 베드로는 그를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가 주로 사목을 했던 곳은 단연 아프리카였지요. 지중해를 가로질러 그의 부모가 살았었던 키레네(그 당시에 많은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 이곳에 거주했음)를 방문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기적과 믿음의 씨앗을 뿌리고, 그는 바빌론이나 고대 카이로를 거쳐 이집트의 지중해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로 여행을 했습니다.

헬라 문화의 영향 아래 이방 신과 우상 숭배가 만연했던 이 도시가 마르코를 환영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하지만 그가 전한 복음은 순식간에 전파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신자가 되고 교회가 세워졌지요. 이에 대하여 이방 신을 믿는 사람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서기 68년, 부활 주일이 공교롭게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세라피스 신을 기념하는 축제일과 같은 날이었습니다. 성난 군중들은 세라피온이란 신전에 집결을 한 다음, 부활 주일을 기념하고 있었던 바오칼리스(Baucalis)의 성당을 공격했습니다. 이곳에서 마르코는 붙잡혀 성난 군중들에 의해 목을 밧줄에 묶여 거리로 끌려 다녔습니다. 밤새 감옥에 갇혀 있다가 다음날에도 하루 종일 거리로 끌려 다니다가 결국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신자들이 마르코의 시신을 거두어 성당 제단 아래에 묻어 두고 기념을 했지만, 이슬람이 침입하고, 로마의 통치권에서 벗어난 후, 828년에 베니스의 상인들이 목이 없는 성인의 유해를 베니스로 밀수해 가서 지금은 베니스의 웅장하고 화려한 산 마르코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5. 이집트 콥틱 교회의 부흥과 쇠락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탄압으로 인해 수많은 순교자들이 마르코의 뒤를 이었습니다. 그러나 314년 이후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후 신학교(교리 학교)가 세워지고, 많은 저명한 신학자들과 교부들을 배출하고, 재빠르게 성장을 해 알렉산드리아는 그 때 당시 5개 관구 중의 하나가 있는 그리스도교의 도시가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러 신학 논쟁이 거듭되고 에큐메니칼 공회에서 공방전을 거듭하고, 거기에다가 정치적인 세력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안티오키아 학파와는 다른 독자 노선을 걷게 되지요. 다른 동방의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콥틱 교회도 이슬람 세력 아래에서 수많은 박해를 견디어 냅니다. 콥틱의 영광이 쇠퇴기를 향해 치닫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중세기의 칼리프 알 하킴이란 술탄에 의한 박해일 것입니다. 스스로 피에 굶주린 광기의 살인자라고 지칭하면서 그는 수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를 비롯해 유다인이나 무슬림까지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이때 이집트는 물론이려니와 성지의 예수님 무덤 성당 등 많은 성전의 건물들이 그의 손에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이집트에서 십자군 시대, 마믈룩 시대, 그리고 오스만 터어키의 지배 아래에서 교회가 엄연히 생존해 왔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동방 교회들의 초기 역사를 대략적으로 수박 겉핥기 식으로 살펴보았지만, 예수님 승천 이후로 지중해를 중심으로 사도들과 순회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생생한 현장을 느껴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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