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교회 역사와 이해: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모습과 5개 관구, 교리 논쟁

성지 이스라엘을 순례하다 보면 우리나라에서 접해 볼 수 없는 각 교회들의 생소한 모습에 어리둥절해지곤합니다. 화려한 금색의 촛대와 향로들, 이콘들 그리고 독특한 건축 양식들… 동방 교회인 에티오피아 정교회, 콥틱 교회, 아르메니안 정교회, 희랍 정교회, 그리고 시리아 정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예수님의 무덤 성당을 방문하면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듭니다. 각 동방 교회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고자 합니다.

글의 순서



이스라엘에서의 수업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은 것 중 한 과목은 “동방 교회의 역사”입니다. 동방 교회에 전혀 알지 못했기에 매우 생소했습니다. 그래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듯이 동방 교회들의 역사를 하나하나씩 알아가는 시간이 신선했지요. 그리고 배경 지식이라든가 문화를 전혀 모른 채 뜨거운 논쟁과 토론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대양 육대주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그렇게 진지하게, 때로는 신앙 논쟁으로 격한 논쟁을 벌인 수업 시간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교수님의 설명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방 교회들을 무조건 이단으로 치부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 신학 논쟁으로 갈라진 교회의 역사에 안타까워하고, 역사를 통해 대대적인 박해를 견디면서 면면히 신앙 전통을 유지해 교회의 모습에 경의를 표하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수업 시간에 있었던 모든 주제들은 “뜨거운 감자”였던 것이지요. 각 교회들의 복잡한 역사와 전통을 한 마디로 정의하고 이해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주 기초적인 역사를 배우면서도 가장 인상적이고, 앞으로도 결코 잊지 못할 것이고, 내 안에 난제로 남았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항은,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교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각 나라의 상황과 문화와 전통을 통해 그에 맞게 교회를 존재하게 하시고, 그 속에서 일을 하시며 당신의 현존을 나타내고 계심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교회들에 알지 못한 이들에게는 무척 생소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만 동방 교회들이 정치적, 신학적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고 거대한 이슬람 세계 안에서 그 전통을 잃지 않고, 아름다운 전례와 신앙을 유지해 오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그들 안에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신앙의 신비여!’라는 말씀을 실감하게 하기도 합니다.

1.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모습

1) 성령 강림 이후의 그리스도교인의 생활과 전교

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원시 그리스도 공동체의 삶을 사도행전을 통해 그려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마태오 28, 16-20) 제자들을 중심으로 모여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가르치고, 물건을 서로 나누고(사도 2, 42-47; 5, 32-37), 또한 각 지역으로 흩어져 (사도 8, 2-3)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박해를 통해 사도들이 흩어져 유다, 사마리아, 그리고 안티오키아 등 각 지역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사도 바오로에 의해 로마까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것을 그리고 있지요.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오로 사도와 같은 선교사들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또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복음이 전해진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인’ (사도 11, 26)이란 별명이 붙여집니다.

초대 그리스도교회의 5개 관구들: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2)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5개 관구가 설립되다

초대 그리스도 교회 시대에 여러 도시들 중 교회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던 다섯 개의 도시가 있었는데, 그 도시들은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현 이스탄불), 예루살렘과 로마였습니다. 안티오키아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화되고 ‘그리스도 인’이란 이름을 얻은 첫 번째 도시이기도 하지요(사도 11, 19-26). 전승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의 교회는 마르코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고대의 도시 비잔티움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보호 아래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수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루살렘은 그리스도 교회 선교의 심장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15장) 로마는 사도 바오로가 네로 황제에게 순교를 당했고, 베도로 사도가 순교한 곳이었으므로 또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정치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 도시들은 부흥하면서 313년 신앙의 자유 칙령 이후 각 종교 회(council)들이 개최되어 교회를 위한 행정적 중심부가 됩니다. 325년 크리스챤 황제인 콘스탄티누스는 예수님의 신성성 (예수님의 하느님 아들 되심)을 두고 공방전을 벌였던 아리안주의와 정통 크리스챤들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니체아 공회를 개최합니다. 니체아 공회를 통해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로마는 다시 그리스도 교회의 중요한 중심 도시로 떠오릅니다.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두 번째 에큐메니칼 공회로 콘스탄티노플은 관구(patriarchate)가 되면서 로마 다음으로 두 번째로 중요한 도시가 됩니다. 에페소에서 열렸던 세 번째 공회에서 사이프러스섬을 자치구(autocephalous (that is, self-governing)로 만듭니다. 칼체돈 (Chalcedon)에서 열린 네 번째 공회에서 예루살렘은 관구(patriarchate)로 승격됩니다. 사실 관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로마였지요.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 각각 도시들은 제국을 가늠하는 중요한 관할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개의 도시들은 1054년에 동방 교회로 분리가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지역들은 서방으로 재빠르게 퍼져 나갔던 이슬람 제국의 영향하에 놓이게 됩니다. 모하메드가 죽은 지(632년) 15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이슬람 군대들은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점령하므로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 관구들은 이슬람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됩니다.

2.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교리 논쟁

1) 단성론자 또는 반 칼체돈 교회

동방 교회는 단성론 (monophysitism) 또는 반 칼체돈 교회라 불릴 수 있습니다. 단성론 (monophysitism)이란 헬라어로 ‘monos’ 즉 ‘하나, one, alone’와 ‘physis, 본성, nature’의 합성어로써 ‘그리스도에게는 오로지 한 본성만 있을 뿐이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안에는 하나의 본성만이 곧 인간의 본성을 흡수한 신적 본성만이 존재한다’는 이론이지요. 이 사상은 두 가지의 교리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본질적으로 신의 완전한 본성에 의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인데, 이는 “꿀 한 방울이 바다에 용해된 것”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교리는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 몸과 삶의 원리(living principle)를 갖고 있지만, 신적 로고스 (Divine Logos)는 오늘날의 ‘정신, 마음 (mind)’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누스(nous), 또는 사고 원리(thinking principle)’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티케스(Eutyches)나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에 의한 이런 극단적 교리는 “그리스도는 완벽한 신성과 인성을 갖고 있다”라는 입장을 표명한 칼체돈 공회와는 반대되는 이론이었지요. 그래서 칼체돈 공회 (451년 개최)와 동방 정교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나, 테오티코스(theotokos) 즉 ‘마리아는 신을 낳았다’라는 가르침에 반대해 크리스토코스(Christo-kos) 즉 ‘마리아가 이 세상에 낳은 것은 신이 그의 도구로 썼던 인간(신성의 기관이 되었던 인간)’이라고 주장해 이단으로 선고받은 네스토리우스 주의(Nestorianism)와 함께 다시 출현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의 7대 에큐메니칼 공의회들

2) 서방과 동방 교회의 신학 해석 차이로 낳은 분리

이러한 안티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간의 교리 논쟁은 정치권과 맞물려 여러 회의를 통해 통합을 바랐던 사람들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두 학파 간의 골 깊은 상처와 분열만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단성론자들과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안티오키아 학파로부터 분리되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역사적 예수를 중시했고, 강한 문헌학적, 역사학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 비평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합리적 명석함을 추구하고, 스토아처럼 윤리적-인격주의적 요소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반면에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가졌던 종교적 관심은 구원의 문제였습니다. 만일 예수의 인간성이 많든 적든 그 신성 속에 휩싸여서 그 결과 우리가 그를 동일성을 가진 것으로서 전체로써 예배할 수 있게 되지 않는 다면 구원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것은 예수의 마음 (nous)이 신적 로고스와 통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한마디로 불가능하므로 신비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본성을 논함에 있어서, 예수님은 한 본성만 가지고 있는 데, 이 본성은 하느님의 신성만이 아니고, 그리고 인성 홀로 만이 아니라 이 두 개의 본성을 가진 하나의 본성이라고 합니다. 이는 칼체돈 교회들의 고백과 반-칼체돈 교회들의 고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본성을 같은 의미로 그리고 같은 신학적 사실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동방교회들 특히 이집트의 콥틱 교회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표현 방법인 “로고스가 육화 되신 한 본성”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이는 서방교회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철학적 언어를 빌려 표현하려 했고, 동방교회는 이를 신비로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위의 글이 복잡하고 난해한 교리 논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신앙을 가지고 표현하는 방법론의 차이로 결국 서방과 동방은 분열의 조짐을 보였던 것이지요. 다음 호에는 이런 역사적, 교리적 배경하에 필자는 반-칼체돈 교회이었던 시리아 동방 교회, 이집트의 콥틱 교회, 아르메니아 동방 교회, 그리고 에티오피아 동방 교회 역사와 특징들을 차례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통해 갈라진 그리스도교 역사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통해 갈라진 그리스도교의 역사)

3) 인물 살펴 보기

  •  아폴리나리우스 (Apollinarius)-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s, “the Younger” (died 390))는 시리아의 라오디케아의 주교였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들에게 고전을 가르치는 것을 금했을 무렵, 그는 그의 아버지인 아폴리나리우스와 함께 구약 성서에 나타난 시들과, 플라토닉적 형식의 담론을 이용해 신약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했던 아리안주의(Arianism)에 온건한 적대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전적으로 마음 또는 정신(nous) 안에 있으므로 그는 구속자(redeemer)일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예수의 인간적 본성을 극단적으로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콘스탄티노플 공회(381)에서 단죄를 받았다.
  • 네스토리우스 (Nestorius)–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오키아 학교 시절에 모스에스티아(Mopsuestia)의 테오도레(Theodore)의 제자였다. 그리고 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429년에 테오티코스(Theotikos) 즉 마리아는 신을 낳았다는 교설에 반대하는 강론을 했다. 그래서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에게 비판을 받았고, 에페소 공회(431)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주장했다. 즉 마리아는 ‘신성의 기관이 되었던 인간’을 낳았다고 했다. 따라서 수난을 겪었던 것은 신성은 아니고 그리스도의 인간성인 것이다. 이는 결국 단성론자란 분파(Monophysite schism)를 낳고, 5세기경에는 서방의 비잔틴 교회와 동방의 시리아 교회로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시리아 언어권, 특히 에뎃사 학파(the school of Edessa)에서는 테오도레를 깊이 존경했던 터라 그의 제자인 네스토리우스에게 피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비잔틴에 적대적이었던 페르시아 왕은 계속 네스토리우스 분파를 보호하고 후원해 주었다(462). 결국 비잔틴 황제는 네스토리우스 이론을 따랐던 에뎃사 학교를 폐교시키고, 학교는 페르시아의 니시비스(Nisibis)로 옮긴다(489). 그가 저술했던 작품들은 에페소 공의회 후 150년이 지난 후 530년경에서야 에뎃사와 니시비스에 소개되나 아쉽게도 현재에는 남아있지 않다.
  • 유티케스 (Eutyches)– 유티케스(Eutyches, 380—456)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원로이자 수도원장 직을 지냈다. 그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에페소 공회(431)이었는 데, 그는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이단적이라고 맹렬히 비난을 했지만 그 자신도 이단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극히 제한적이고, 완전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는 사실상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이론과 흡사한 것이므로, 그의 열성적이고 심오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448년에 개최된 공회에서 그의 직위는 해제되고, 추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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