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인의 성읍과 압살롬의 모반

글의 순서



1. 레위인 성읍 (기원전 975-940 년경)

“너희가 레위인들에게 내줄 성읍들에는 살인자가 피신할 수 있도록 너희가 정한 도피 성읍 여섯이 들어 있어야 한다. 이 밖에도 너희는 마흔 두 성읍을 내주어야 한다. 그래서 너희가 레위인들에게 내줄 성읍은 모두 마흔여덟 성읍이 된다. 곧 그 성읍들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들이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의 소유 가운데에서 내주는데, 큰 지파에서는 많이 떼고 작은 지파에서는 적게 떼어라. 저마다 받은 상속 재산에 따라 레위인들에게 성읍들을 얼마씩 내주어라(민수 35, 6-8).”

레위인의 성읍 목록도 통일 왕정 시대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명단에 속한 모든 성읍들은 마침내 다윗의 통치 아래서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예속되었지요.

레위인의 성읍들

왕국의 분열 이후 북 이스라엘 지역의 레위인들은 자신들의 성읍을 버리고 유다로 이주해 들어왔습니다(2역대 11,13-14). 또한 솔로몬왕 때는 아코 평야의 성읍들을 티로 왕 히람에게 주기도 했습니다(1열왕 9,10-13). 당시에 필리스티아 수중에 있던 게제르를 정복하지는 않았지만 에프라임족이 그 주변 지역을 점령해 들어가면서부터 토착 주민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켰습니다. 나중에 시아문(Siamon)으로 추측되는 파라오가 게제르를 정복하고 가나안 원주민들을 죽였는데(1열왕 9,16),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침략 행위로 두 나라의 관계는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협상 조약 조건으로 파라오는 자신의 딸을 솔로몬에게 시집보내며 예물로 게제르를 주었습니다. 이러한 군사적 대치 상황은 다윗 통치 말이나 솔로몬 통치 초기에 발생했음이 분명하며 어쩌면 청년 솔로몬이 말년의 다윗과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었던 때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통치 40년에 레위인들의 행정적인 역할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1역대 26,31).

총 48개의 레위인의 성읍에 대해서는 여호수아 21장과 역대기 상권 6, 54-81, 두 본문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역대기 상권 본문이 더 복잡한데, 이것은 다윗 왕정이 이스라엘 왕국 전체를 감당하게 되면서 아론 가족과 다른 레위인의 중요성과 영향력이 커졌음을 시사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21장은 여호수아 전반에 서술된 열두 지파 조직과 좀 더 도식적으로 연결 되어 있습니다. 레위인의 성읍들이 열두 지파에게 각각 네 성읍씩 동등하게 분배되어 매우 균등해 보이지만, 확인 가능한 성읍들이 실제로 분포한 모습을 보면 각 지파 지역들마다 다양한 기능을 부여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론 계열의 사제들은 유다, 시메온, 벤야민 지파에서 주요 성읍들을 분배 받았는데, 그 중 헤브론은 도피처였고 본래 칼렙족의 것이었지요. 이들이 유다 산악 지대 남부에 정착함으로 크나즈족 (크나즈족, 유다 남부 지역에 살았던 이방 민족)의 충성을 확보 할 수 있었습니다. 리브나와 벳 세메스는 필리스티아와 맞닿은 서쪽 경계를 지켰고, 벤야민에 있는 성읍들은 예루살렘 북쪽과 북서쪽의 주요 진입로를 수호했습니다. 크핫 자손은 소렉 골짜기를 따라 필리스티아와 마주한 경계와 게제르와 벳 호론을 경유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주요 진입로를 책임졌지요.

또한 이즈르엘 골짜기 남쪽에 있는 몇 개의 주요 성읍과 아담 나루에서 사마리아 중부에 이르는 거대한 와디 엘 파라(Wadi-el- Far’ah) 입구 가까이에 있는 요크느암도 얻었습니다. 도피처 스켐도 물론 크핫 자손의 땅이었습니다. 게르손 자손의 성읍은 새로 조직된 이사카르 땅을 포함한 갈릴레아와 바산에 있었는데, 머지않아 이들은 아세르 지파에 주어진 성읍들을 티로 왕에게 내어 주게 됩니다. 므라리 자손은 이즈르엘 골짜기 북부 일부 지역을 담담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중요 정착지는 트랜스요르단(현재 요르단)에 있었습니다. 크핫 자손들 중 이츠하르 가문은 특별한 ‘관리이자 판관으로서 이스라엘의 일반 행정’을 담당했지요(1역대 26,29). 크핫 자손들 중 헤브론 가문은 시스요르단(현재 이스라엘)과 트랜스요르단 양쪽에서 ‘주님의 모든 일과 임금을 섬기는 일’을 맡아 하였습니다(1역대 26,30-32).

어찌 보면 인위적으로 지파들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이지만, 후대에 저자가 그 명단을 자신의 마음대로 창작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레위인의 성읍은 분명한 행정적인 이유로 분배되었습니다. 일부는 정치적, 또는 생태학적 경계 지역의 수비나 유지를 위해서, 일부는 토착 주민 대부분이 가나안, 아모리, 또는 히위 사람들인 지역에서 왕국의 통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요압이 실시한 인구 조사는 이스라엘 내륙과 국경 지역에서 새롭게 다윗 왕국에 편입된 인구를 등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왕국의 곳곳에 레위인의 성읍을 세우는 것은 솔로몬이 정비한 관료 조직을 실행하는 중요한 첫걸음이었지요. 유다 지파의 네겝에는 레위인의 성읍이 세워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윗이 명백하게 동일한 목적으로 레위의 형제 지파인 시메온을 이곳에 정착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남쪽 국경을 수비하고, 카인, 여라흐므엘, 크렛족 등의 충성심을 확고히 해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면서 레위 지파의 전체적인 구조는 새로운 왕조의 중앙 종교 제도와 기능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레위인의 성읍 중 여러 곳에 제사 중심지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요. 하지만 레위인들이 왕국 전역에 있는 모든 제사 장소를 맡았야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느보와 아타롯 같은 트랜스요르단의 제사 중심지들은 물론 단, 베텔, 브에르세바, 프누엘 등 그 외 많은 성읍들도 계속 번영했습니다.

2. 압살롬의 모반 (기원전 978년경)

“그 뒤, 압살롬은 자기가 탈 병거와 말들을 마련하고, 자기 앞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쉰 명이나 거느렸다. 압살롬은 일찍 일어나 성문으로 난 길 옆에 서 있곤 하였다. 그러다가 고발할 일이 있는 사람이 임금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마다, 압살롬은 그를 불러 “그대는 어느 성읍에서 오시오?”하고 물었다. 그가 “이 종은 이러저러한 이스라엘 지파에서 왔습니다.”하고 대답하면,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였다. “듣고 보니 그대 말이 다 옳고 정당하오. 그러나 임금 곁에는 그대의 말을 들어줄 자가 아무도 없소.” 그리고 압살롬은 이런 말도 하였다. “누가 나를 이 나라의 재판관으로 세워만 준다면, 고발하거나 재판할 일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찾아오고, 나는 그들에게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 줄 텐데!” 또 누가 그에게 가까이 와서 절할 때마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입을 맞추곤 하였다. 압살롬은 임금에게 재판을 청하러 가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2 사무 15,1-6)”

압살롬을 피해 다윗이 달아나다

각 지파의 나이 많은 지도자들은 다윗과 솔로몬이 수행한 행정상의 변화에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유력한 원로들, 특히 유다의 원로들의 지지를 등에 없고 아버지에게 모반을 일으켰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방인 호위병과 정예 전투 부대들은 다윗을 배신 하지 않았지요.

다윗은 레위인의 행정 중심지인 마하나임으로 피신했습니다. 민감한 동쪽 국경 지역이자 아라비아에서 다마스쿠스에 이르는 중요한 무역로가 지가나는 곳에 살았던 트랜스요르단 주민들은 중앙집권적 왕권이 절실하게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하나님은 야뽁강의 깊은 협곡에 위치하여 차독의 아들 아이마하츠가 에디오피아 사람을 앞질러 가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즉 에디오피아 사람은 조금은 직선 경로이긴 하지만 지세가 험난한 에프라임 수풀을 통과한 반면에 아이마하츠는 조금 더 돌아가지만 훨씬 수월한 요르단 평야 길과 야뽁 강 상류 길로 갔던 것이죠.

에프라임 숲의 참나무

다윗이 압살롬을 지지했던 유다지파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북쪽 지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비크리의 아들 세바가 모반을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지요. 여러 지파와 도시들을 자신이 새로 세운 왕국에서 통합하고자 했던 다윗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발전시킨 행정 체제나 군부 조직 등은 존립을 위해 다윗 왕정을 지지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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