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베호 성모 발현성지는 아프리카에 위치해 있습니다. 르완다 오지의 작은 마을 키베호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던 여러 배경과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 성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 1. 르완다의 키베호 성모 발현지 개요
- 2. 키베호의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 3. 키베호에서의 성모님 발현
- 3. 세 시현자가 본 환시
- 4. 성모님의 발현 장소
- 5. 성모님 발현 목격한 시현자들
- 6. 르완다 대학살에 대하여
- 7. 키베호 성모님 발현 성지의 공인 과정
- 8. 키베호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의미
- 9. 르완다 키베호 성모님 발현 성지 소개
- 10. 키베호 발현 성지 찾아가는 길
1. 르완다의 키베호 성모 발현지 개요
키베호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성모님의 발현이 지역 주교에게 공인을 받은 성지입니다. 1962년 르완다는 벨기에로부터 독립했습니다. 하지만 르완다 정부의 만연한 부패, 군부의 쿠데타, 그리고 반정부 단체의 무력 투쟁으로 20년 동안 혼란과 분열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톨릭 교회도 위기에 그만큼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때 르완다의 가난한 오지의 작은 마을 키베호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앞으로 가다올 더 큰 불행한 일을 예언하시면서 이를 막기 위해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후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디어 내면서 르완다 국민들은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왔습니다.
(르완다의 기베호 성지 모습)
2. 키베호의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1918년 11월에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독일에 의해 엄청한 피해를 입은 벨기에는 독일의 식민지인 르완다를 위임받아 1923년부터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르완다는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후투족(85%), 소수민족인 투치족(14%), 그리고 트와족(1%)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벨기에는 후투족과 투치족을 서로에 대해 반감을 갖도록 유도해 식민 통치를 했습니다. 따라서 종족 간에 편견과 증오가 생겨나 훗날에 르완다 대학살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벨기에가 르완다에서 식민 통치를 하면서 가톨릭을 전파하는 일에도 주력을 했습니다. 르완다에 파견된 선교사 레옹폴 클라세 주교는 벨기에의 식민정책에 협조하면서 가톨릭 선교에 힘을 썼습니다. 그리하여 르완다 인구의 80%가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 정도로 가톨릭 신앙을 부흥시켰습니다.
1962년 벨기에가 아무런 후속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르완다에서 완전히 철수하면서 르완다는 어정쩡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2년 7월 유엔(UN)의 감독아래 국민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 선거에 후투족 대통령이 나오며 투치족에 대한 박해와 50만 명에 이르는 투치족이 해외로 피난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20년 동안 정부가 너무 부패하고,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망명한 투치족의 반정부 무력 투쟁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르완다는 극심한 혼란과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1980년부터 2년간 전국에서 공공 기물의 파손이 만연했지요. 가톨릭이 받은 모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예수상과 성모상이 곳곳에서 훼손당하거나 도난당했고, 성직자도 소수만 남았습니다. 르완다의 가톨릭은 가난한 평신도들에 의해 겨우 유지되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순간에 1981년부터 1989년까지 키베호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3. 키베호에서의 성모님 발현
1) 알퐁신(Alphonsine Mumreke)에게 발현하시다
(키베호의 성모님 상)
가) 1981년 11월 28일, 토요일
토요일인 이날 12시 35분에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에서 남서쪽으로 120km 떨어진 가난하고 작은 마을 키베호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당시 키베호에는 세 명의 수녀들이 운영하는 한 전문학교가 있었는데요. 그 학교 식당에서 점심 급식 봉사를 하던 고등학교 1학년 소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나의 딸아, 나의 딸아!”라는 소리에 “저 여기 있어요.”라고 답하면서 복도로 나갔습니다. 복도에는 기도하는 자세로 두 손을 가슴 위에 합장하고 흰옷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려오는 파란 베일을 쓴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피부색은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유색 인종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그 소녀는 알퐁신으로 17세의 소녀였습니다. 알퐁신은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은 다음에 물었어요. “당신은 누구신가요?” 여인은 그 지역 언어로 “나는 말씀의 어머니이다(Ndi Nina Jambo)”라고 당신의 신분을 밝히셨습니다. 그러고는 어떤 종교를 선호하는지를 물으셨지요. 알퐁신은 바로 그 여인이 성모님이신 것을 알아채고는 “저는 하느님을, 그리고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를 주신 하느님의 어머니를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다. 너의 친구들이 믿음이 많이 부족하니, 나도 그들도 믿음을 갖기를 원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떠나려고 하자 알퐁신은 “성모님을 찬양하라. 오소서, 성령님”이라고 찬미하였고, 이에 성모님께서는 미소를 지으며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이어 알퐁신은 무려 15분 동안 탈혼 상태에 빠져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알퐁신은 개어난 후에 수녀와 교사에게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죠. 그들은 오히려 알퐁신이 미쳤다고 조롱하면서 키베호 출신이 아니라서 특별해 보이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나) 1981년 11월 29일, 일요일
다음 날일 일요일에도 성모님 발현이 있었습니다. 12월에는 매우 토요일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알퐁신이 성모님을 만날 때마다 탈혼 상태에 빠지자 학생들과 교사들은 알퐁신에게 성냥불을 갖다 대거나 바늘로 찔러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발현이 낮 시간 학교 식당에서 일어났다면, 그 이후 발현은 저녁에 기숙사와 학교 교정, 알퐁신의 방에서 일어났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다음에는 언제 발현하실지 알려 주시고는 하였습니다. 성모님의 발현 소식은 르완다 전국으로 퍼지고, 사람들은 성모님께서 알려 주신 발현 날짜에 키베호로 몰려들었습니다.
다) 1982년 3월 20일~21일
알퐁신은 사람들에게 “내가 죽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무엇을 묻지도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알퐁신의 신비로운 체험은 18시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신부와 수녀, 그리고 적십자사 의료진 모두가 알퐁신이 깊은 잠에 빠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알퐁신의 몸은 곧게 누워 있었는데요. 그녀의 몸은 상당히 무거워서 들어 올릴 수가 없었고, 모아 쥔 두 손도 풀어 분리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알퐁신이 신비로운 여행을 하는 동안 지옥과 연옥, 천국을 보여 주셨습니다.
라) 1982년 4월 2일
성모님께서 알퐁신에게 사람들의 회개와 죄의 극복을 위하여 묵주 기도를 바치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마) 1983~ 1989년 11월 28일
성모님께서 “나의 아들이 머지않아 다시 돌아올 것이므로, 너의 영혼은 그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발현 후 정확히 만 8년이 되는 1989년 11월 28일에 마지막으로 발현하셔서 정치가들을 향해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국민들의 압제가가 되는 대신에 국민들을 구원하여라.” 그리고 성모님은 알퐁신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발현한 것은 네가 원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나탈리(Nathalie Mukamazimpaka)에게 발현하시다
가) 1982년 1월 12일
교사들과 학생들이 “성모님께서 알퐁신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나타나신다면 발현을 믿을 것입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성모님께서 응답하여 20세인 나탈리에게 발현하셨습니다. 나탈리도 역시 탈혼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나) 1982년 3월 2일
카베호에는 늘 물이 부족했습니다. 1월 2월에 기숙사에서 악마와 연관된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수녀들은 그 세력을 내쫓기 위해 루르드 성수를 사용했는데요. 이제 더는 성수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당과 마을에 필요한 물이 꼭 필요한 상황에서 수녀들은 성모님께 요청해 축복받은 물을 얻자고 나탈리에게 말했습니다. 3월 2일에 나탈리는 발현하신 성모님께 축복받은 물을 요청했습니다. 그러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물의 원천을 달라고 말씀드렸지요. 성모님께서 특별하게 행동을 취하시지는 않았지만 성당 언덕 아래에 있는 샘에서 물이 충분히 나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를 축복받은 물이라고 생각하고 교구에서도 다시 축복을 하였답니다.
다) 1982년 8월 5일
성모님께서는 나탈리에게 “너에게 말한다. 내가 너를 부르지만 너는 귀머거리 상태로 있을 뿐이다.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언제 할 것이냐? 너는 발현 장소에 두 개의 성전을 짓도록 하라는 나의 말에 무관심하다. 너는 표징을 주는데 너는 믿지 않고 그대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탈리가 교회 당국에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성당 건축을 위해 진행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1983년 12월 3일까지 나탈리에게 발현하셨습니다.
3) 마리 클레어(Marie Claire Mukangango)에게 발현하시다
가) 1982년 3월 2일
성모님께서는 21세인 마리 클레어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마리 클레어는 믿음이 가장 없는 학생 중에 한 명이었지요. 그녀는 모범적이지 않았고, 신앙생활에도 열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알퐁신을 바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메시지를 전해주시려고 회개가 필요한 마리 클레어를 선택하셨던 거지요. 그리고 그녀는 신비한 힘에 사로잡혔습니다.
나) 1982년 4월 2일
성모님께서는 마리 클레어에게 “회개하여라, 회개하여라, 이 시대의 사람들은 모든 것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회개를 위하여 성모칠고 묵주기도를 봉헌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다) 1982년 5월 31일
성모님께서 마리 클레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수난과 그 어머니의 슬픔을 묵상해야 한다. 회개의 은총을 얻기 위해 매일 묵주기도와 성모칠고 묵주기도를 암송해야 한다.”
라) 1982년 9월 15일
성모님께서 “성모칠고 묵주기도를 바쳐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마리클레어에게 전 세계에 성모칠고 묵주기도를 알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리 클레어에게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인 그날이 성모님을 목격하는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3. 세 시현자가 본 환시
1) 1982년 8월 15일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학교 운동장에 모여 발현에 참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모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는 못했죠. 오로지 시현자들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시현자들이 전하는 성모님의 말씀을 전할 때 군중들이 잘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멀리서도 시현자들의 모습이 보이도록 연단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이 되자 거의 2만 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발현이 끝나갈 무렵 시현자들이 군중을 축복해 달라고 성모님께 요청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곧 탈혼 상태에 빠졌습니다. 시현자들은 탈혼 상태에서 꽃을 보았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 꽃에 물을 주라고 하시면서, 싱싱한 꽃은 마음을 하느님께 돌린 사람이고, 시든 꽃은 마음이 세속의 일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1982년 8월 19일
성모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전쟁을 예언하시며 이 끔찍한 전쟁을 피하기 위해 회개와 기도, 고행과 금식을 권고하셨습니다. 그리고 8시간 동안 시현자들에게 비극적인 장면을 환시로 보여주셨습니다. 환시에서는 피의 강과 불타 버린 나무들, 서로 죽이는 사람들 머리가 잘려 나간 몸통, 그리고 버려진 시체들이 있었습니다. 세 시현자들은 르완다가 하느님께 돌아가지 않는다면 피의 강을 이룰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환시와 예언에 대하여 처음에는 단순히 끔찍하고 놀라운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12년 후 1994년에 내전이 터지면서 불과 3개월 만에 시현자들이 환시에서 본대로 약 80만 명이 살해되어 피의 강에 버려졌습니다.
4. 성모님의 발현 장소
키베호는 르완다 제2의 도시 부타레에서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외진 곳에 있는 마을입니다. 이러한 마을에서 베네비키라 자매회에서 봉사하는 본당과 학교가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국가 르완다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 중 하나지만 가톨릭의 명맥이 그나마 남아 있는 키베호를 선택해 나타나신 겁니다.
당시 3명의 수녀가 운영하고 있던 전문학교에는 교사 6명, 학생 120명이 있었습니다. 성모님 발현은 1981년 11월 28일 학교 식당 복도에서 처음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부터 1982년 1월 16일까지는 기숙사에서만 일어났습니다. 그 후로는 기숙사와 학교 운동장에서 발현이 있었죠. 그런데 기숙사에서 발현하실 경우 시현자와 학교생활에 대해 사적인 대화도 했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 특별히 발현 시간을 예고하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지요. 그런 경우에는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비신자들도 그 자리에 함께 하였습니다. 언론계와 의학계, 신학계 관계자들도 참석했다고 합니다. 시현자들은 성모님과 대화를 나누고 난 후 이를 그대로 군중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성모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없던 사람들은 시현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요. 어떤 이들은 이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성모님을 특별히 공경하는 5월 성모 성월이 되면 키베호를 찾아 오는 순례자들이 급증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위해 1993년 기숙사 중 하나를 임시 경당으로 봉헌하여 사용했습니다. 2007년에 재보수하여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기숙사는 현재 발현 기념 경당과 주임신부 집무실과 본당 사무실, 회합실로 변경되어 있습니다. 경당은 중앙에 자리했으며 오른쪽에는 본당 사무실과 주임신부 집무실, 왼쪽에는 회합실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실 당시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던 학교 운동장은 건물 바로 앞에 있습니다. 현재 발현 광장으로 불리는 이곳에는 발현 성모상을 중심으로 미사와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의자들이 놓여 있습니다.
5. 성모님 발현 목격한 시현자들
성모님 발현 진위 조사위원회가 보고서를 제출하고 나서 1년이 지난 뒤 1983년 11월에는 성모님 발현을 목격하였다는 시현자들이 무려 14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성모님뿐 아니라 예수님도 보았다고 주장하는 시현자들도 있었지요. 그러나 2001년에 20년 동안 진행해 온 조사를 마무리하면서 오로지 3명만이 성모님 발현과 관련이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주교도 단 3명만을 시현자로 확정했지요. 그리하여 2001년 6월에 성모님 발현을 공인하였습니다.
1) 시현자 알퐁신
알퐁신은 1965년에 출생해 12세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1981년 10월 키베호 전문학교에 입학하고, 1989년 7월에 고등학교 교육 과정을 마쳤습니다. 알퐁신은 신앙심이 깊었고, 성모님을 공경하는 마음도 매우 컸습니다. 미사도 매일 꼬박꼬박 참례하는 학생이었지요. 1994년 콩고로 피난을 가능 등 온갖 힘든 일을 겪었지만 교구의 지원으로 장학금을 받아 계속 학업을 이어 갔습니다. 신학을 교리교육을 전공으로 공부한 후, 2003년 6월에 성 클라라 수도회에 들어가 2006년 7월에 수녀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시현자 나탈리
나탈리는 1964년 출생해 4세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키베호 전문학교를 4학년까지만 다녔습니다. 더 이상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답니다. 1982년 6월 24일 성모님께서 키베호에 머물라고 말씀하신 뒤에 계속 키베호를 지켰습니다. 심지어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이 있었을 때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구가 그녀의 안전을 걱정해서 조치를 취해 그해 7월에 키베호를 잠시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1996년 12월 다시 돌아와 순례자들을 환대하고 성지를 관리하는데 헌신했습니다. 키베호 성모상을 제작하는데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3) 시현자 마리 클레어
마리 클레어는 1961년에 태어나서 5세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1983년 7월에 키베호 전문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습니다. 1983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쳤고, 1987년 9월부터는 키갈리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987년에 국무총리실에서 일을 한 유망한 청년과 결혼을 했지만 자녀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르완다 대학살 때 남편이 잡혀가는 것을 막다가 안타깝게도 살해를 당했습니다. 남편도 납치를 당한 후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6. 르완다 대학살에 대하여
르완다 대학살이란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제작된 영화 ‘호텔 르완다’를 통해 대학살에 대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1993년 12월 후투족 출신인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은 투치족과의 공존을 위해 평화협정에 동의했습니다. 따라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갈등이 일단락되는 듯했습니다. 평화협정을 돕기 위해 유엔군이 파견되고 수많은 외신 기자들이 르완다로 왔습니다. 르완다의 최고급 호텔 밀 콜린스의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는 밀려드는 취재 기자들과 외교관들 때문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4년 7월 대통령이 전용기 피격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를 빌미로 후투족 강경파가 후투족 온건파와 투치족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위협을 느낀 폴은 투치족인 아내와 가족들을 호텔로 피신시켰는데요. 이후 호텔로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국제사회가 외면한 잔혹한 학살 속에서 차마 이웃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폴은 혼자서 힘겨운 싸움을 했습니다. 하지만 유엔군까지 철수하면서 호텔마저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폴은 호텔을 포기한 채 피난민들과 함께 르완다 탈출을 해 결국 1,268명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폴도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죠. 이를 극복하고 탈출을 하던 중에 극적으로 가족과 상봉하였습니다.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100여일 동안 후투족 강경파는 80여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1994년 7월 투치족 반군이 후투족 정부군을 몰아내고 키갈리를 점령해 학살은 종식되었습니다. 하지만 산업 시설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복을 두려워한 175만여 명의 투치족이 인근의 다른 나라로 탈출했습니다. 또한 생존자들의 70%가 학살 장면을 직접 목격했기에 그 트라우마로 큰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7. 키베호 성모님 발현 성지의 공인 과정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이후 키베호를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계속 늘어났습니다. 그러자 부타레 교구의 가하마니 주교가 1982년 3월에 의학 위원회를 구성했고, 5월에는 신학 위원회를 구성해 면밀하고 객관적인 조사를 벌였습니다. 1988년 8월 15일에 주교는 조사위원회의 1차 보고서를 검토했는데요. 발현을 아직 공인하지는 않았지만 발현 장소를 순례하고 그곳에서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허가했습니다.
1990년 9월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아프리카 대륙의 탄자니아, 부룬디, 르완다를 순방하던 중에 키갈리를 3일간 방문했습니다. 교황은 르완다의 종족 사이의 대립과 반목을 고려해 신자들이 성모님을 공경할 것을 권고했지요. 특히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분열에 대항해 더 열심히 기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1992년 키베호는 아우구스티노 미사고 대주교가 사목하는 기콩고로 교구 소속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같은 해 11월 28일 미사고 대주교는 성모님 발현 11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키베호를 ‘고통의 성모 성지’로 부르며 성당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이 일어나고 말았지요.
2001년 6월 29일 미사고 대주교는 기콩고로 대성당에서 르완다 주교단과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하면서 “발현을 거부하는 것보다는 발현을 믿을 이유가 더 많다.”라고 밝히고 키베호에서 일어난 성모님 발현을 공인했습니다. 이 공인은 21세기에 들어서 내려진 최초의 성모님 발현 공인이었습니다. 바로 이어서 2001년 7월 2일 로마 교황청은 미사고 대주교가 키베호의 성모님 발현을 공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8. 키베호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의미
가톨릭 교회와 신앙이 큰 위기에 놓일 때마다 성모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고 메시지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많은 신자들이 회심하고 본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성모님 발현의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키베호의 경우에는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후 더 큰 고통과 시련이 찾아왔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이어졌습니다.
당시 르완다 신자들은 성모님의 메시지에 따라 오랜 혼란과 갈등에서 벗어나 점차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메시지가 얼마나 절박한 것이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였지요.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증오하는 마음을 버리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지 않는다면 르완다에 피의 강이 흐르리라. 예수의 사랑만 있다면 다가올 재앙과 유혈 사태를 피할 것이다. 모든 국민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실천할 수 있도록 도움을 간구하라.” 종족간 비참한 대학살이 벌어진 후 르완다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끔찍한 대학상을 반성하면서 다시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였습니다.
2016년 11월 20일에는 스완다가 가톨릭교회도 스스로 반성하는 사과문을 내었는데요. “우리는 하느님께 봉사하기로 봉헌된 일부 교회 구성원들과 성직자들로서 그 대학살에 어떤 역할을 했던 이들이 있었다는 점을 사과한다.”라면서 모든 가톨릭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사과했습니다. 또한 다음 해 교황 프란치스코도 르완다 대통령 폴 카가메를 만난 자리에서 “당시 교회의 죄와 결함, 그리고 사제와 수도자들이 선교 사명을 저버리고 증오와 폭력에 굴복한 점에 대해 하느님께 거듭 용서를 청한다.”라고 거듭 사과를 했습니다.
9. 르완다 키베호 성모님 발현 성지 소개
키베호 발현 성지는 고통의 성모 성당과 발현 기념 경당, 발현 광장, 그리고 야외 제대 등 미사 봉헌과 연관된 건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묵주기도의 길, 십자가의 길, 순례자 숙소 등과 같은 기타 시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지 바로 옆에는 당시 시현자들이 다녔던 키베호 전문학교와 수녀들이 거주했던 수녀원 건물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키베호 전문학교는 성모님께서 직접 알려 주신 그분의 호칭을 따라 ‘말씀의 어머니 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키베호 성지 전경)
고통의 성모 성당은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서 요청하셨던 대로 바로 건립되어야 했지만 여러모로 지체되었었습니다. 1992년 11월 발현 11주년을 기념해 초석을 놓았지만 르완다 대학살이 벌어지면서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001년 성모님 발현이 공인된 후 다음 해 공사가 재개되었지요. 이렇게 하여 2003년 5월에 성전이 봉헌되었습니다. 제단 쪽에 있는 7개의 창과 입구쪽에 있는 장미창을 포함한 7개의 창은 성모칠고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외 제대와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 공간도 마련해 놓았는데요. 이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공인받은 성모님 발현 성지이므로 성모님과 관련한 축일에 많은 신자들이 순례 오는 것에 대비한 것입니다.
성지와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는 골고타 언덕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로 연결되어 있어서 각 처를 묵상하며 천천히 올라가면 키베호 성지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모님께서 성모칠고 묵주기도를 바치고 널리 알리라고 하셨기에 성모칠고 묵주기도의 길도 조성되어 있습니다. 고통의 성모 성당과 발현 경당 사이에 나 있는 길로 내려가면 성모칠고 묵주기도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성지에서 운영하는 순례자 숙소도 있는데요. 레지나 파치스 센터와 팔로틴 하우스(pallotines.sisters@gmail.com), 팔로티 하우스(pallottihouse@gmail.com)등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묵으면서 성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의 성모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성모님께서 키베호에서 발현하셔서 시현자들에게 전해 주신 메세지를 정리해 놓은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키베호에서의 발현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사람에게 일어나서 메시지가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데요. 이 메시지가 12가지 항목으로 요약되어 있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들은 이전의 여러 발현 장소에서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를 모아 놓은 종합편 같은 생각이 듭니다.
10. 키베호 발현 성지 찾아가는 길
먼저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로 가서 르완다 수도 키갈리(Kigali)로 입국할 수 있습니다. 키갈리로 가서 키베호로 가려면 먼저 부타레(Butare)로 가야 합니다. 여비가 좀 들어가지만 키갈리 공항에서 택시로 바로 키베호로 가는 방법이 편리합니다. 약 3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요금은 $100정도라고 하네요(택시에 따라 다를 수 있음).
부타레에 도착하면 터미널에서 키베호로 가는 버스를 예약합니다. 키베호 정류장에서 두 갈래 길 중 오른쪽 길로 약 10분 정도 걸어가면 기베호 성지가 나옵니다.
구글에서는 Shrine of Our Lady of Kibeho 로 검색해 찾아 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