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의 실루바 성모 발현 성지는 루터교와 깔뱅주의가 한창 확장을 해 나가던 시기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던 성지입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실 때의 상황과 배경,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 1. 리투아니아 실루바 성모 발현 성지 소개
- 2.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 3. 성모님의 발현
- 4. 성모님 발현 장소
- 5. 성모님 발현 시현자
- 6. 실루바 성모님 발현 공인 과정
- 8. 실루바 성모님 발현 성지 소개
- 9. 성모님 발현 성지로 가는 길 안내
- 10. 실루바 주변 성지들 소개
1. 리투아니아 실루바 성모 발현 성지 소개
실루바는 유럽에서 가장 늦게 가톨릭을 받아들인 리투아니아의 성모님 발현 성지입니다. 리투아니아에서 가톨릭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도 전에 루터교와 깔뱅주의가 들어와 가톨릭 교회가 위기에 놓여 있었지요. 그 시기에 바로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겁니다. 리투아니아는 북쪽에 있는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함께 발트 3국으로 불립니다. 이 세 국가들은 매우 비슷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 국가의 종교는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요. 발트 3국은 오랜 기간 동안 개신교의 지배를 받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주 종교는 루터교인 반면, 리투아니아는 성모님의 발현을 통해 신자들이 회개하고 가톨릭 신앙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실루바 성모님상)
2.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1387년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 대공은 독일 기사단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유럽 국가들 중에 가장 늦게 가톨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비타우타스 대공과 함께 가톨릭 전파에 공을 쏟고 다신교 최고신인 페르쿠나스의 신전까지 무너뜨렸습니다. 비타우타스 대공은 주변 나라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그가 살아있는 동안 리투아니아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답니다. 그는 그 승리는 가톨릭 신앙에서 왔다고 생각해 가톨릭을 국교로 삼기 위해 온 열정을 다했지요. 따라서 리투아니아는 아주 강력한 가톨릭 국가가 되었습니다. 비타우타스 대공을 위해 일했던 게드가우다스가 실루바에 최초의 가톨릭 성당을 지어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여행을 갔다가 호데게트리아(인도자) 성모화를 선물로 받아 와 실루바 성당에 모셨습니다.
1532년 실루바의 영주 자비샤가 깔뱅주의를 따르며 모든 주민을 깔뱅교로 개종하게 했습니다. 가톨릭 미사가 금지되고, 가톨릭 재산은 모두 몰수되어 깔뱅교도에게 넘겨졌지요. 이후로 모든 성당 문이 닫히고, 사제가 추방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실루바는 깔뱅주의에게 완전히 지배되고 말았지요. 실루바 성당의 마지막 사제였던 홀룹카는 게드가우다스의 성모화와 미사 도구, 토지 등 성당의 재산이 비타우타스 대공에 의해 가톨릭에 봉헌되었음을 증명하는 문서들을 철제 궤짝에 넣어 봉인하고 바위 옆에 묻었다고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깔뱅교도들은 성당을 폐쇄하고 무너뜨렸습니다. 깔뱅주의가 지배한 후 80년이 지나면서 실루바에서는 가톨릭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다시피 했죠. 마을 주민 중 나이 많은 노인들 일부만이 그곳에 성당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었답니다.
3. 성모님의 발현
1608년의 어느 여름에, 작고 초라한 실루바 마을 외곽에서 양떼를 몰던 4명의 목동들 앞에 성모님이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큰 바위 위에 맨발로 서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성자를 안으신 채 슬픔에 잠겨 아무말 없이 그저 눈물만 흘리셨지요. 그 눈물이 바위 위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모님은 푸른 망또를 걸치고 있었고, 길고 밝은 갈색 머리가 목 주변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밝은 빛이 성모님과 성자 예수님을 둘러 싸고 있었지요. 성모님은 잠깐 후에 사라지셨어요. 이렇게 첫 번째 발현은 짧게 끝났습니다. 성모님이 발현하실 때 서 계셨던 큰 바위는 바로 훌룹카 신부가 76년 전에 성모화와 중요한 문서들을 파묻어 보관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이를 목격한 목동 중 하나가 달려가서 깔뱅교 목사에게 성모님의 발현을 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목사는 비웃으며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했지요. 그러나 발현을 목격한 다른 목동들이 가족과 이웃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발현하신 성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목동들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성모님을 보기 위해 바위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이 사실을 들은 목사도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따라 나섰답니다.
(실루바 성모 성지 대성당 앞 성모님 상)
깔뱅교 목사는 이 기적을 가톨릭의 음모라고 생각하고는 아직도 로마의 미신을 믿고 있다면서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소행이라고 경고하고 나서 막 자리를 떠나려고 하던 순간에, 가슴 저리게 우는 소리를 그 목사도 듣게 되었습니다. 목동들이 이야기한 모습처럼 성모님께서 다시 발현하시어 그 목사도 결국 목격자가 된 것이었죠. 성모님의 발현을 직접 목격한 그 목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잠시 진정한 후에 용기를 갖고 성모님께 물었다고 해요. “당신께서는 왜 울고 계십니까?” 이에 성모님은 슬픈 목소리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 바로 이 땅에서 경배를 받았다. 하지만 이제 이 신성한 땅이 그저 농사나 짓고 가축을 놓아기르는 곳으로 전락했다.”라고 대답하시고는 사라지셨습니다.
성모님은 이후로도 여러 차례 발현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요. 성모님이 성자 예수님과 함께 실제로 나타나셨다는 이야기가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그동안 가톨릭 신앙을 거의 잊어버리고 살았던 사람들은 성모님의 메시지에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기 시작했지요. 성모님의 발현은 강력하게 영향을 끼쳐 깔뱅교를 따르던 마을 주민 전체가 회심했답니다. 그리고 주변 마을 주민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가톨릭교회로 돌아 오는 기적이 일어났지요.
1629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는 1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실루바에 모여 성체를 받아 모시는 감동적인 전례를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4. 성모님 발현 장소
성모님께서는 실루바 성당이 파괴되기 전에 훌룹카 신부가 궤짝을 묻어 숨겨 놓은 바위 위에서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그 바위 위에 발현하신 것은 궤짝 속에 숨겨 놓았던 성모화와 각종 문서와 성물 등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가를 알게 하는 것이었어요. 또한 가톨릭을 떠났던 이들에게 다시 돌아오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이 발현하실 때 서 계시던 바위)
1612년 카자케비추스 신부는 발란시우스 주교의 명으로 성모님 발현을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소경이 된 어느 노인에게도 들렸습니다. 100세가 넘은 그 노인은 약 80여 년 전에 훌룹카 신부와 함께 큰 바위 옆에 궤짝을 묻어 숨겼던 사람이었어요. 그는 이 일이 있었던 밤을 기억해냈지요. 카자케비추스 신부와 마을 사람들은 그가 궤짝이 묻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도록 발현 장소로 인도했습니다. 그곳으로 가면서 바위에 가까이 이르자 그는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어요. 노인은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무릎을 꿇고, 궤짝이 묻혀 있는 자리를 가리켰습니다. 함께 하던 사람들은 땅을 파고 궤짝을 꺼내 열어 보았습니다. 그 속에는 성모화와 여러 개의 황금 성물, 예복, 교회 증서, 그리고 기타 문서들이 완벽하게 보전되어 있었다고 해요.
1663년 사피에가 주교는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성스러운 바위 위에 작은 경당과 제단을 지어 봉헌했습니다. 1770년에는 런던에서 대리석으로 만든 성모상을 가져와 바위 위의 제단에 봉헌했지요. 그런데 그 앞에서 기도를 한 신자들이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건강을 회복해 그 성모상은 ‘병자들의 건강’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 성모상은 현재 대성당 제단의 오른쪽에 있는 경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1908년 성모님 발현 300주년을 맞이해 새로운 경당을 성스러운 바위 위에 짓기로 했습니다. 1924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 44미터 높이의 흰색 경당이 봉언되었지요. 경당의 동서남북 네 면에 1979년부터 2년 동안 세 명의 화가들이 성모님 발현을 표현한 프레스코 벽화를 그렸습니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바위는 경당의 중앙 제단 아래에 그대로 남아 있고, 가까이 가서 직접 만지며 입맞춤을 할 수 있습니다.
5. 성모님 발현 시현자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이들을 네 명의 목동과 깔뱅교 목사로 한정하고 있지만, 발현 경당의 벽화를 보면 함께 했던 마을 사람들도 목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아일랜드의 노크(1879년)에도 있었답니다. 하지만 노크에서의 발현 시현자들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지만, 실루바의 경우엔 자료가 거의 없어 시현자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없어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6. 실루바 성모님 발현 공인 과정
1612년 발란시우스 주교가 성모님 발현을 조사하면서 중요한 문서와 성모화가 보관되었던 궤짝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경이 치유되는 기적도 일어났었지요. 주교는 이 문서와 성물들을 증거물로 빌뉴스 법원에 가톨릭 재산 반환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재판소 판사들이 대부분 개신교도들이어서 거의 10여 년이 걸렸다고 해요. 하지만 그 증거들이 너무 명확했기 때문에 1622년에 빌뉴스 법원은 어쩔 수 없이 가톨릭교회의 재산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소경이 치유 받았던 기적으로 인해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왔다고 해요. 성모님을 기리는 축제가 다시 열렸고, 주교에 의해 다시 여러번에 걸쳐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교황들은 다음과 같은 지지 의사를 밝혔습니다.
가) 1774년 교황 비오 6세가 성당을 준 대성당으로 승격하고, 주교의 조사 결과를 수용하여 성모님 발현을 교령으로 공인하였습니다. 1775년 8월 17일 교황청은 성모화에 대한 대관식을 허락하였지요.
나) 1993년 9월 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발트 3국 독립 2주년을 맞이해 이곳을 순방 중에 실루바에 방문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 축성)
7. 성모님 발현의 의미
발트 3국의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그리고 라트비아는 국가 면적, 인구, 문화와 풍속이나 심지어 사람들 생김새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주로 루터교를 믿고 있지만, 리투아니아의 주된 종교는 가톨릭입니다.
1387년 리투아니아의 통치자였던 요가일라는 독일 기사단의 침략에서 벗어나려고 가톨릭을 받아들였어요. 하지만 가톨릭이 정착하기도 전에 루터교와 깔뱅주의가 잠식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리투아니아의 가톨릭 신앙은 점점 설자리를 잃고 위기에 빠졌지요. 바로 이 시기에 성모님께서 실루바에서 발현하신 겁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바로 이 땅에서 경배받았다.”라는 성모님의 말씀은 다시 가톨릭 신앙으로 복귀하라는 준엄한 명령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 강한 울림으로 다가와 회개와 회심의 시작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빌뉴스 법원에서 ‘가톨릭 재산을 반환하라’고 내린 선고는 전 국민이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다시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오는 현상이 전국에서 불길처럼 일어났습니다. 개신교에서 벗어나 원래의 가톨릭 국가로 회복하게 된 것이지요.
발트 3국 세 나라는 오랜 기간 동안 루터교와 깔뱅주의에 지배되었지만, 리투아니아는 개혁파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고 오늘날까지 온전히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리투아니아는 현재에도 가톨릭 신자 수가 전 국민의 80%에 이른다고 합니다.
8. 실루바 성모님 발현 성지 소개
실루바 마을은 비록 작지만 성지는 제법 크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우선 중앙에는 장방형의 대규모 성지 광장이 있는데 이 광장의 양 끝에는 성모 탄생 기념 대성당과 발현 기념 성당이 있습니다. 1937년부터 이 광장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도중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중간에 중단되었었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 성모님 발현 400 주년 기념을 위해 재조성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지요.
광장에는 두 개의 중요한 성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하나는 성모님 상이고, 다른 하나는 1993년 성지를 방문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성상입니다. 2003년 9월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 기념관이 완공되었어요. 사제들의 피정이나 회의실, 순례자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옆에는 실루바 순례자 센터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바위 옆에 묻혀 있었던 궤짝과 성모님이 발현하실 때의 모습을 그린 성화 등 발현과 연관된 것들이 전시되어 있지요. 또한 이와 관련된 책자들도 많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광장 가장자리에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1624년, 원래 실루바 성당에 있던 자리에 카자케비추스 신부가 작은 목조 성당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성당은 여러 해를 거치면서 증축되었고, 성당 제단에는 땅에 묻혔다가 발견된 성모화를 모셔져 있습니다. 1786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는 성모화 속 성모님과 성자 예수님께 금으로 된 왕관을 봉헌하는 대관식이 거행되었죠. 이를 축하하는 행사가 3일간 열렸다고 합니다. 이 대관식에 12명의 주교와 3만 명의 신자들이 참석했고, 행사 마지막 날에는 현재 벽돌로 이루어진 성모 탄생 대성당이 봉헌되었습니다. 대성당 제단에 모셔진 성모화 양쪽에는 성모님의 베필인 성 요셉 성인과 아버지인 성 요아킴의 성상이 있습니다.
1886년에 거행된 대관식 100주년 기념식에는 러시아 제국의 온갖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40명의 사제와 4만 명의 신자들이 참석했습니다. 1993년, 대성방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라고 불렀습니다. 2004년 성모화에 봉헌된 왕관이 도난 당했습니다. 2006년 교황 베네딕도 16세가 로마를 방문한 주교에게 새로이 만들어진 왕과을 축복하여 전달했어요. 성모님 발현 400주년이 되는 해인 2008년에는 15만 명의 순례자들이 성지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교황 베네딕도 16세가 파견한 독일 쾰른 교구의 추기경 요아힘 마이스너 특사도 기념식에 참석했습니다.
9. 성모님 발현 성지로 가는 길 안내
실루바 성지로 가는 방법은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가거나, 또는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빌뉴스에서 가려면 버스터미널에서 샤올레이까지 가는 746번 버스로 약 3시간 정도 이동하다가, 중간에 실루바에서 내립니다. 또한 빌뉴스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샤올레이에 도착해 746번 버스로 실루바를 향해 갈 수 있지요. 기차는 하루에 5편이 있고, 약 2시간 10분 정도 소요가 됩니다.
리가에서 갈 경우에는 터미널에서 발트 3국 국가 간에 이동 버스인 럭스익스프레스(Luxexpress)를 타고 약 2시간 10정도 후에 샤올레이에서 내려, 다시 746번 버스를 이용해 실루바로 갑니다(1시간 소요). 렌터카를 이용하게 되면 리가나 빌뉴스에서 3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 구글에서는 Šiluva Pilgrim Information Center를 찾아 갈 수 있습니다.
10. 실루바 주변 성지들 소개
가) 십자가의 언덕
리투아니아 국민들이 구 소련의 지배를 받을 때였던 1944년에서 1990년까지 십자가를 봉헌하면서 조성된 곳입니다. 독립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고 조국의 독립을 명원하는 십자가 약 50만 개가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소련이 불도저로 밀어 철거하려고 했는데도 십자가는 계속 늘어났다고 합니다. 1993년 9월 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해 이곳은 희망, 사랑, 평화, 그리고 희생의 장소라고 축복을 했습니다. 순례자들은 십자가에 봉헌 내용을 써서 땅에 묻거나 걸어 두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샤울레이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도만타이에서 내려 20분 정도 걸어가면 성지가 나옵니다. 버스는 하루에 10편이 있다고 하는데요. 도만타이까지는 약 15분 정도 소요됩니다. 또한 리투아니아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순례길이 유명하지요. 빌뉴스에서 시작해 카우나스, 십자가의 언덕, 샤울레이, 실루바를 거쳐서 다시 빌뉴스로 돌아오는 순례길입니다.
나)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방문하면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도시 안에서만 무려 20개의 유명한 성당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곳이 가톨릭의 도시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지요. 빌뉴스는 요가일라 대공의 친조부인 게디미나스 대공에 의해 건설된 도시입니다. 이후 리투아니아의 수도로 정해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빌뉴스의 구도시는 여러 세기에 걸쳐 동유럽의 여러 지역과 깊은 문화 영향을 주고 받아 중세 시대의 도시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19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동재되었지요.
빌뉴스의 대표적인 성당은 1812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가던 원정길에서 빌뉴스에서 머물다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손바닥에 파리에 가져가고 싶다고 한 성 안나 성당, 프란치스코 수사들이 세운 성 베르나르디노 성당, 빌뉴스에서 가장 규모가 큰 빌뉴스 대성당(지하에 리투아니아 왕족의 묘지가 있다)이 있고요. 그리고 빌뉴스에서 가장 오래된 바로크 양식의 성 가시미로 성당, 성 테레사 성당과 성 요한 성당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빌뉴스 구도시에 있는 9개 성문 중에서 현재 새 벽 위에 작은 성모님 기념 경당이 남아 있는데요. 여기에는 검은 성모화 즉, 블랙 마돈나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 검은 성모화는 오랜 기간 동안 빌뉴스의 상징이 되어 왔지요. 이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병이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는데요. 그후로 더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고 있답니다. 이 외에도 스페인 몬세라토 수도원, 폴란드 야스나 구라 수도원, 스위스 아인지델른 수도원과 독일 알트와팅 성모 성지 등이 검은 성모상 즉 블랙 마돈나 성모화로 유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