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후 유다인들이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헬라화가 더디게 진행이 되자 안달이 났던 에피파네스는 유다인 성전을 제우스나 디오니소스 신전으로 바꾸고 그들에게 제사를 바칠 것을 강요하고 유다 율법을 폐기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마카베오 가문을 중심으로 경건한 유다인들은 강력한 저항을 했지요. 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 1. 마카베오 저항의 시초/ 벳 호론 전투/ 엠마오 전투
- 2. 벳 추르 전투와 성전 재봉헌하다/ 유다 마카베오의 초기 원정/ 시몬의 갈릴래아 서쪽 원정/ 해안 평야와 이두매아에서의 유다
1. 마카베오 저항의 시초/ 벳 호론 전투/ 엠마오 전투
1) 마카베오 저항의 시초 (기원전 167년)
“그 무렵에 요야립 가문의 사제로서, 시메온의 손자이며 요하난의 아들인 마타티아스가 예루살렘을 떠나 모데인에 자리를 잡았다. … 모든 민족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처럼, 당신도 앞장서서 왕명을 따르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아들들은 임금님의 벗이 될 뿐만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릴 것이오.”. 그러나 마타티아스는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하여, 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우리가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 그가 이 말을 마쳤을 때, 어떤 유다 남자가 나오더니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왕명에 따라 모데인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그것을 본 마타티아스는 열정이 타오르고 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달려가 제단 위에서 그자를 쳐 죽였다. 그때에 그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 제단도 헐어 버렸다. 이렇게 그는 전에 피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지므리에게 한 것처럼, 율법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그러고 나서 마타티아스는 그 성읍에서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 계약을 지지하는 이는 모두 나를 따라나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성읍에 남겨 둔 채 산으로 달아났다.(1마카 2,1.18-28)”
안티오코스와 참모진들은 친 헬라파 유다인들 중에서도 극단주의자들을 주의깊게 지켜보면서 유다 민족 대부분이 그리스 문화를 수요할 준비가 되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헬라화가 더디게 진행이 되자 안달이 난 안티오코스는 하느님이 전을 제우스나 디오니소스 신전으로 바꾸기로 결심했지요. 그는 이들을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동일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따라서 역사상 최초의 종교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금지되었고, 유다인들을 다른 신들을 섬기도록 강요받았다. 친 헬라파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자기들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아크라(Acra)’라는 요새와 그 옆에 있는 그리스 양식의 새로운 도시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박해로 폭동이 일어났는데, 예루살렘이 아니라 리따 지역의 작은 유다인 마을 모데인에서였습니다. 율법을 수호하기 위한 경건한 유대인의 모임 하시딤(Hasidim)의 지도자인 츠레다의 요세 벤 요에제르 같은 일부 지도자들이 인근 마을들에서 모여들었습니다. 하시메온 가문의 사제 마타티아스(Mattathias)와 그의 아들들은 제우스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안티오코스의 명령을 거부했지요. 마타티아스는 왕의 관리뿐 아니라 왕명에 따르려던 유다인들까지 죽이고 그곳의 제단을 헐어버렸습니다. 모데인은 지방 수도인 리따에서 가가와 보복을 당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을은 달아나 ‘사마리아 근방(고프나)’의 산악지대로 갔을 것이며 이곳에서 하시딤과 합류했습니다. 마타티아스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이곳에서 은신하면서 나아가 이방 신들의 제단을 뒤엎었습니다. 또한 유다인들 망루들을 선동하여 셀레우코스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친 헬라파 사람들에게 맞서도록 했지요. 그러자 사마리아에 주둔해 있던 셀레우코스 군이 지휘관이자 고프나 일대의 지방관인 아폴로니오스(Apollonius)가 반란을 진압하러 내려왔습니다.
마타티아스가 사망한 후 군 지휘를 맡은 유다 마카베오(Judas Maccabeus)는 (아마도 레보나[Lebonah] 오르막길에서) 그의 군대를 공격하여 무찔렀어요. 아폴로니오스는 전사했고(1 마카 3,12), 이에 셀레우코스 당국은 리따와 고프나를 유대 지역에서 제하고 사마리아에 편입시켰습니다.
2) 벳 호론 전투 (기원전 166년)
“저들이 방자하고 무도하게 우리와 우리 아내와 아이들을 없애 버리고 약탈하려고 덤벼들지만, 우리는 우리의 목숨과 관습을 지키려고 싸우는 것이다. 그분께서 친히 우리 앞에서 저들을 무너뜨리실 것이니, 너희는 저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유다가 말을 마치고 세론과 그의 군대를 급습하자, 그들은 유다 앞에서 무너졌다. 유다는 벳 호론 내리막길을 달려 들판까지 뒤쫓아 갔는데, 그들 가운데 팔백 명이 쓰러지고 나머지는 필리스티아 땅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하였고, 주변의 민족들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유다의 명성은 임금에게까지 알려지고, 민족들마다 그가 한 전투들을 두고 이야기하였다. (1 마카마카 3,20-26)”
아폴로니오스가 참혹하게 패전하고, 예루살렘에 고립되어 있는 친 헬레 파 사람들의 고통이 커져간다는 소식이 들리자 셀레우코스군의 지휘관 세론(Seron)은 점점 거세지는 반란을 진압해야 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구하러 가면서 리따에서 벳 호른 비탈길을 따라가는 전통적인 경로를 택했지요. 유다 마카베오는 힘겹게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는 세론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소탕해버렸습니다. 패잔병들은 해안 평지로 달아나 ‘필리스티아 땅’까지 후퇴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루살렘의 봉쇄를 돌파하려는 셀레우코스 군의 두 번째 시도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3) 엠마오 전투 (기원전 165년)
“이어서 엘아자르에게 큰 소리로 성경을 봉독하게 한 다음, ‘하느님의 도우심’이라는 표어를 정하고, 그 자신이 제일 부대의 지휘관이 되어 니카노르와 교전하였다. (2 마카 8,23)”
당시 페르시아, 메디아와 전쟁 중이던 안티오코스 4세는 유프라테스 서쪽의 제국 운영을 세론의 상관인 리시아스 (Lysias)에게 일임했습니다. 세론이 패배하자 리시아스는 강력한 군대를 일으켜 도리메네스(Dorimenes)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Ptolemy)와 니카노르(Nicanor), 고르기아스(Gorgias) 지휘 아래 두었습니다. 이들 군지휘관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산길에서 묶이게 될 것을 염려하여 엠마오에 진을 쳤고, 이두매아 그리고 얌니아와 아조도(필리스티아 땅) 지역에서 온 병력이 이들에게 합류했습니다.
유다 마카베오는 곧 성지인 미츠파에서 사람들을 집결시켰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은 물론 해안 지역과도 연결되는 요충지였습니다. 셀레우코스군의 장수들은 결국 반란군들을 수색하기로 하고, 고르기아스가 군사 5천과 기병 천명을 이끌고 어둠을 틈타서 출발했어요. 그는 아크라에서 온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반란군 진영으로 나아가 기습 공격을 하여 유다를 사로잡으려고 했지요. 적군이 나뉘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 마카베오는 미츠파를 떠나 엠마오 남쪽 부근에서 야영했습니다. 새벽녘 총 3천 명의 유다 군이 시리아 군 진영으로 진격했습니다. 셀레우코스 군은 전투태세를 갖추었지만 패배하여 예루살렘 진입로에 있는 강력한 요새인 가자라까지 쫓겨갔습니다. 유다는 수하들이 무분별하게 적을 추격하지 않지 않도록 했지요. 적은 계속해서 얌니아와 아조도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었지만, 유다는 고르기아스와 맞서기 위해 엠마오로 돌아왔습니다.
고르기아스는 야간 행군 끝에 버려져 있는 유다 군 진영을 발견했습니다. 쓸데없이 수하들만 지치게 만든 것이죠. 엠마오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언덕에서 자기 진영이 화염에 휩싸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반란군을 피해 해안 지역으로 후퇴했습니다. 이로써 예루살렘에 포위된 친 헬라파 사람들을 구하려는 세 번째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2. 벳 추르 전투와 성전 재봉헌하다/ 유다 마카베오의 초기 원정/ 시몬의 갈릴래아 서쪽 원정/ 해안 평야와 이두매아에서의 유다
1) 벳 추르 전투와 성전 재봉헌하다(기원전 165년)
“유다와 그 형제들은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 하고 말하였다.(1마카 4,36)”
리시아스는 유다인들을 향한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셀레우코스 군대를 위태롭게 하여 세 차례나 패배하게 만든 좁은 산길과 가파른 언덕길 대신 이두메아 분수령을 따라가는 경로를 택했지요. 새로운 원정은 마리사의 해안길을 따라갔는데, 당시 마리사(마레사)에는 유다인들의 적인 친 헬라파 시돈 사람들과 이두메아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리시아스는 안심하고 마리사에서 행군하여 유다의 국경 요새인 벳 추르 맞은 편에 도달했습니다.
마카베오 쪽에서는 내부 연락망을 통해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적들을 맞으러 벳 추르에서 나와 그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지요. 리시아스는 후퇴했고, 유다와 그의 군대는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아크라 요새는 여전히 적의 수중에 있었지만 성전산은 유다인들이 재탈환했습니다. 유다 일행은 이제 성전을 정화하고 오랫동안 황폐해 졌던 곳을 재건했습니다. 3년 반 동안 중단되었던 하느님께 대한 제사가 다시 시작되었고, 메노라의 등불이 성전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원전 165년 키슬래브 월 25일에 처음으로 하누카(Hanukkah, 성전 봉헌 축일)를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시온 산(성전산)을 요새화하는 한편 벳 추르의 진지를 굳건하게 하여 “백성들을 이두메아(에돔)으로부터 지켜주는 요새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2) 유다 마카베오의 초기 원정 (기원전 163년)
“그래서 그들은 저희 가운데에 사는 야곱의 후손들을 없애기로 작정하고, 그 백성을 죽이고 제거하기 시작하였다.(1마카 5,2)”
유다의 승리에 주변 민족들이 분노하자 그는 몇 차례의 방어전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먼저 아크라베타의 이두메아인들을 공격했는데, 이들은 자기들과 함께 살고 있는 유다인들을 압제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또한 요르단 건너편의 브온족에게도 동일한 군사적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어렵게 이룬 군사적 업적은 길앗의 유다인들을 구해준 것이었지요. 큰 요새 성읍인 보소라, 보소르, 알레마, 카스포, 마켓, 카르나임과 톱(Tob) 땅에 있는 유다인들이 박해를 당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곳의 많은 유다인들이 다테마 요새로 달아 났는데, 그곳에 포위 당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자기 형제 요나탄과 8천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그들을 구출하러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곧장 길앗으로 가는 대신에 길앗 동쪽의 나바테아인들과의 우호 관계를 이용하여 사막(광야)를 가로지르는 길을 선택했고, 사흘의 행군 끝에 갑자기 보스라 성문에 나타났습니다.
보소라를 점령한 유다는 사람들을 이끌고 밤새도록 행군하여 아침에 다테마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적들은 그곳을 급습하려던 참이었지요. 유다는 길앗의 지휘관 티모테오스(Timotheus)를 군대를 삼면에서 공격했습니다. 적들은 자신들을 공격한 이들을 알아보고 도망갔습니다. 유다는 계속해서 알레마, 카스포, 마켓, 보소르와 길앗의 나머지 성읍들에서 포위된 유다인들을 구출했습니다. 곧이어 유다의 부하 장수인 도시테우스(Dositheus)와 소시파테르(Sosipater)가 톱 땅의 카락스를 정복했습니다.
그동안 티모테오스는 자신의 군데를 재편성하고 아랍원군 아마도 이트래인들(나바태아인들은 유다인들을 지지함)로 군을 증원했습니다. 그는 라폰 근처에서 유다와 막닥뜨렸으나 이 전투에서도 패하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카르나임을 정복하고 아타르가티스(Atargatis) 신전을 불태운 후 유다인 피난민들을 이끌고 긴 행군을 시작하여 에프론과 스키토폴리스(벳 산)를 지나갔습니다. 에프론은 그들의 진입을 거부했다가 단번에 정복되었고, 스키토폴리스 주민들은 환영했습니다. 유다 일행은 기뻐하며 노래와 춤을 추며 시온으로 올라갔습니다. 티모테오스와는 야세르에서 한 차례 더 충돌했지만 여기서도 유다인들이 승리했습니다. 티모테오스는 전장에서 쓰러졌고, 야세르는 점령 당했습니다.
3) 시몬의 갈릴래아 서쪽 원정
“시몬은 갈릴래아로 가서 이민족들과 여러 차례 맞서 싸웠다. 이민족들이 그 앞에서 무너지자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성문까지 쫓아갔다.(1마카 5,21-22a)”
유다가 길앗 원정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그의 형제 시몬은 3천 명을 이끌고 갈릴래아로 진격했습니다. 갈릴래아의 유다인들이 톨레마이스(아코), 티로, 시돈의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적들을 흩어버리고 니므린에서 톨레마이스 성문까지 추격했습니다. 그는 갈릴래아와 아르바타(그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의 유다인들을 무사히 예루살렘으로 피신시켰지요. 이 원정 후에도 유다인들이 계속해서 이즈르엘 (에스드렐론, Esdaelon) 골짜기와 갈릴래아 지역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 주시해 봐야 할 일입니다.
4) 해안 평야와 이두매아에서의 유다(기원전 163년)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더 나아가 남쪽 땅에 있는 에사우의 자손들과 싸워, 헤브론과 거기에 딸린 마을들을 쳐부수고 요새들을 허물며 둘레에 있는 탑들을 불태워 버렸다.(1마카 5,65)”
유다와 시몬이 각각 길앗과 갈릴래아에 있는 동안 유대아에 남아 있던 두 지휘관, 아자르야와 즈카르야의 아들 요셉은 얌니아 원정에 도전했습니다. 얌니아에는 (엠마오 전투의) 고르기아스가 머물고 있었는데, 어쩌면 이두매아 지방관으로서 뒤에 남겨졌던 것일 수도 있지요. 이 전투에서는 유다 군이 전패를 했다. 길앗에서 돌아온 유다는 직접 이두매아로 갔습니다. 그는 헤브론과 마리사(마레사)를 공격한 후, 아조도 성문까지 이르러 그곳의 이방 신전을 허물었습니다.
또 다른 원정에서는 잔혹한 속임수로 유다인 동료 주민들을 익사시킨 요빠 주민들에게 보복을 했습니다. 유다는 요빠 항구를 파괴하고 배들을 불태웠지요. 그는 또 얌니아 주민들이 요빠의 만행을 따라 유다인들을 몰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얌니아 항구에도 같은 보복을 했습니다. 이어서 마레사 부근에서의 또 다른 원정에서는 고르기아스를 거의 사로잡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결국 고르기아스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유대 평지 오돌람(아둘람?)으로 물러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