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는 마타티아스의 셋째 아들 유다를 가리킵니다. 요나탄은 마카베오인 유다의 뒤를 이어받아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1마카베오서에 보면 요아립 가문의 사제이고, 시메온의 손자인 요하난의 아들 마타티아스가 모데인이라는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타티아스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요. 그들은 가띠라고 불리는 요하난, 타씨라고 하는 시몬, 마카베오라고 하는 유다, 하우아란이라고 부르는 엘아자르와 막내인 아푸스라고 불린 요나탄입니다. 요나탄 시대의 영토 확장과 주변 지역을 정복한 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 1. 유다 광야의 요나탄과 바키데스의 요새/ 벳 바시 포위 공격과 미크마스의 요나탄/ 요나탄 시대의 영토 확장
- 2. 요빠 첫 정복과 얌니아 전투/ 요나탄의 코엘레 시리아 원정/ 하초르 전투/ 하맛 원정
1. 유다 광야의 요나탄과 바키데스의 요새/ 벳 바시 포위 공격과 미크마스의 요나탄/ 요나탄 시대의 영토 확장
1) 유다 광야의 요나탄과 바키데스의 요새 (기원전 160-155년)
“그때부터 요나탄은 지휘권을 받아 자기 형 유다의 후계자가 되었다. (1마카 9,31)”
엘라사에서 패한 후 마카베오 가문은 더 이상 고프나 산악지대에 본거지를 둘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요나탄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세우고 신속하게 유다 사막 트코아 광야에 모여 아스파르 못가에 진을 쳤습니다.
유다 광야는 아득한 옛날부터 억압당하는 이들의 피난처이자 반란이나 모반을 한 사람들의 은신처이기도 하였습니다. 요나탄은 이곳에서 자신의 따르는 이들을 모았습니다. 겉보기에는 후퇴하여 요르단 강 예리코 근처 황무지에 몸을 숨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키데스는 이곳으로 가서 요나탄을 공격했습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요나탄은 자기 무리들과 함께 후퇴했습니다. 그는 요르단 강을 헤엄쳐 건너면서 요르단 건너 편에서 피난처를 구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요나탄은 바키데스와 전투를 벌이기 전부터 요르단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기습 공격으로 형 요한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나탄은 그들 중 한 민족의 사막 대상(Desert Caravan)를 전멸시켜 원수를 갚았습니다.
바키데스는 유다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북쪽과 남쪽으로 두 겹의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북쪽 방어선은 유다 경계 북쪽을 따라 이어졌는데, 요세푸스에 따르면 여기에 타푸아(세이크 아부 자라드[Sheik Abu Zarad])와 트코아가 포함되었습니다. 또한 일부 학자들에 의해 유다 사막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파라톤(파란, Pharan)과 타므나도 포함되었습니다. 남쪽 방어선은 유다의 심장부를 관통하여 게제르, 엠마오, 벳 호론, 베텔, 예리코를 포함하였습니다. 남쪽 지역은 요새 도시 벳 추르를 통제하였습니다. 바키데스는 이러한 대비책과 아크라(Acra, 가자라(Gazara), 벳 추르의 요새들이 구축되어 있는 방어 체계로 반역하는 유다를 무난히 통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2) 벳 바시 포위 공격과 미크마스의 요나탄 (기원전 156-152년)
“그는 진군하여 벳 바시를 향하여 진을 치고 여러 날 그곳을 치면서 공격 기구들을 만들었다. (1 마카마카 9,64)”
이에 자극을 받은 바키데스는 중장비를 갖추고 벳 바시를 포위 공격해 왔습니다. 이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공성구 유물들이 유다 사막에 있는 키르벳 벳 바시(Khirbet Beth-bass) 부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전략가인 요나탄은 우연히 유랑민 두 부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카베오 상권에는 그 이름이 오토메라와 파시론으로 되어 있는데, 이 이름은 이외 다른 어떤 자료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중 오도메라는 오늘날까지 키르벳 벳 바시 지역에 살고 있는 베니 타마레(Beni Ta’amare)라는 베두인 부족의 이름과도 유사합니다.
대사제 알키모스는 기원전 159년에 죽었습니다. 이는 그가 이방인들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성전 바깥뜰에 둘러친 담을 헐어버림으로써 하시딤을 성나게 한 후였습니다. 바키데스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갔고, 2년 간은 평화가 지속되었습니다. 그 후 바키데스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모데인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요나탄과 그 무리를 잡으려고 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습니다. 마카베오 가문은 베들레헴 남동쪽에 버려져 있던 요새 벳 바시를 점령했습니다 사막 부근이기는 하지만 정착 지역 안에서 발생한 일이기에 이러한 행동은 대담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요나탄과 그를 따르는 무리는 유다인 거주 지역 내에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이곳은 분수계를 따라 나 있는 도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요나탄은 이들을 강하게 설득하여 바키데스를 공격하는 일에 가담시켰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시몬은 벳 바시에서 반격을 하여 바키데스의 공성 보루를 불태웠습니다. 이에 바키데스는 협상의 자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국의 내부 상황은 불안정했고, 데메트리오스 1세를 적대하는 세력들의 음모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155년 경 협약이 맺어져 요나탄은 미크마스에 정착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동안에도 친 헬라파 사람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키데스의 군대가 유다를 떠난 후 요나탄은 예루살렘과 벳 추르 요새를 제외한 전역으로 자신들의 힘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에서 전쟁이 멈추었다. 미크마스에 자리를 잡고 백성을 다스리기 시작한 요나탄은 이스라엘에서 사악한 자들을 없애 버렸다.(1마카 9.73)”
3) 요나탄 시대의 영토 확장 (기원전 152-142년)
“그는 관습상 임금의 친족에게만 주는 금 죔쇠를 요나탄에게 보내고, 에크론과 거기에 딸린 모든 지역을 그의 몫으로 내주었다. (1 마카마카 10, 89)”
요나탄은 셀레우코스 왕조가 약화된 틈을 타 유다를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알렉산드로스 발라스(Alexander Balas)가 톨레마이스를 침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데메트리오스 1세는 위기감을 느끼고 요나탄에게 셀레우코스 군 지휘관의 특권을 주었습니다. 그는 하스모니아 가문이 군대를 모으고 무기를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도 했지요. 또한 아크라에 갇혀 있던 유다인 인질들을 돌려 보내 주었습니다. 이러한 특권들로 요나탄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건하게 할 수 있었고, 성전산의 방비 시설을 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크라와 벳 추르를 제외한 유다의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발라스도 요나탄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를 대사제로 임명했습니다. 요나탄은 기원전 152년 초막절 축제 기간에 처음으로 대사제직을 수행했습니다. 이번에는 데메트리오스가 그의 환심을 얻기 위해 유다인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사마리아 관할 아래에 있던 세 지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요나탄은 둘 중 약자인 알렉산드로스 편을 들었고, 기원전 150년 알렉산드로스가 데메트리오스 1세를 물리쳤습니다.
같은 해에 알렉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톨레마이스 만남에 요나탄도 함께 하였으며, 알렉산드로스는 그에게 유다의 지휘관이자 지방관을 뜻하는 ‘스트라테고스(Strategos)와 메리다르케스(Meridarches)’라는 직함을 부여했습니다. 요나탄이 얌니아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 2세의 군대를 물리치자 알렉산드로스는 악카론(에크론) 지방의 소유권을 그에게 주었습니다(기원전 147년). 그 후 데메트리오스 2세도 요나탄을 적이 아닌 동맹으로 두는 편이 낫다는 것을 깨닫고 리따, 아라마테아, 아페레마 등 세 지방을 사마리아에서 유다로 양도해 주었습니다. 데메트리오스 2세에 반대하여 일어난 안티오코스 6세의 섭정 프리폰(Tryphon)도 요나탄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기원전 144년이 ‘네 지방’의 유다 합병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승인 문구에는 그동안 요나탄이 ‘트랜드요르단’ 곧 토비아스 가문의 땅이었던 베레아를 추가로 장악했음이 암시되어 있다. 여기서 네 번째 지방은 악카론(에크론)이나 아크라베타(Acrabeta)였을 것입니다.
2. 요빠 첫 정복과 얌니아 전투/ 요나탄의 코엘레 시리아 원정/ 하초르 전투/ 하맛 원정
1) 요빠 첫 정복과 얌니아 전투 (기원전 147년)
“요나탄은 자기 뒤에 복병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적군은 요나탄의 군대를 포위하고 그의 병사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활을 쏘아 댔다. 그러나 병사들은 요나탄이 명령한 대로 꿋꿋이 버티었다. 마침내 적의 군마들이 지치게 되었다(1 마카 10, 80-81).”
기원전 147년 숙적인 알렉산드로스 발라스에 승리를 거둔 데메트리오스 2세는 아폴로니오스(Apollonius)를 코엘레시리아(Coele-Syria)의 지휘관으로 임명하면서 알렉산드로스 발라스를 지지했던 유다에 강력한 조치를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얌니아에 진을 친 아폴로니오스는 요나탄에게 “돌 한 개 자갈 하나 없는 곳이며 숨을 곳도 없는 평지”에서 싸우자고 도전했지요. 그는 유다군이 산악 지역의 비정규전에만 강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카베오 군은 더욱 강해져 있었어요. 요나탄은 만 명을 이끌고 평지로 출정했고, 시몬도 대대를 이끌고 합류했습니다. 마카베오 군은 출정을 시작하면서 시몬도 이끌고 합류했습니다. 마카베오 군은 출정을 시작하면서 요빠가 스스로 성문을 열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이 아폴로니오스는 얌니아와 아조도 사이에 매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 성읍 사이의 길에 기병 연대를 숨겨두고 후퇴하는 척했습니다. 요나탄이 그를 추격하여 두 군이 충돌하자 매복군이 후방에서 유다 군을 공격했습니다. 이어지는 전투에서 유다 군은 그 탁월함을 입증했습니다. ‘요나탄 군’은 적의 말이 지칠 때까지 종일 버텼으며, 저녁 무렵 시몬이 기병대를 공격하자 그들은 해안 지역으로 달아났습니다. 살아남은 아폴로니오스 군은 요나탄의 추격을 받으며 아조도로 퇴각했습니다. 유다 군은 아조도를 점령한 후 아스클론으로 진격하였는데, 이곳은 요나탄을 정중히 맞아들였지요.
마카베오군은 이 전투를 통해 이스라엘 땅 전역에서 가장 강력한 병력으로 부상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유다군은 팔랑크스(밀집 방진)로 조직되었으며 기병대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2) 요나탄의 코엘레 시리아 원정 (기원전 150년)
“요나탄은 기뻐하며 평화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1 마카 10,66)”
크레타 용병들을 해산시킨 후 데메트리오스 2세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습니다. 트리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그는 어쩔 수 없이 요나탄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요나탄은 안티오키아의 폭도들에 의해 왕궁이 포위되어 있는 데메트리오스를 보호하기 위해 3천 명의 군을 보냈습니다. 유다군의 승리로 데메트리오스 2세는 잠시나마 왕좌를 지킬 수 있었지요. 그러나 그는 상황이 안정되자 (예루살렘과 그 밖의 요새에서 자신의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했던) 요나탄과의 약속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사이 트리폰과 안티오코스 6세는 꾸준히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트리폰은 요나탄의 지지를 얻기 위해 시몬을 티로의 사다리(현재 로쉬 하 니크라)에서부터 이집트 시내(강)에 이르는 해안 평지를 관할하는 지방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요나탄과 그의 군대는 코엘레시리아 전 지역을 자유롭게 다녔으며, 아스클론에서 한 번 더 성대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자 주민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요나탄은 가자 외곽 지역을 초토화시켜 주민들이 그와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코엘레시리아를 종단하여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같은 시기에 시몬은 벳 추르를 점령했습니다. 이제 유다에서 예루살렘의 아크라만이 이방인의 수중에 남게 되었습니다.
3) 하초르 전투 (기원전 144년)
“그러고 나서 적군과 싸우러 돌아가 그들을 무찌르자 그들이 달아났다. (1 마카 11,72)”
데메트리오스의 지휘관들은 요나탄이 코엘레시리아에서 이룩한 대담한 위업을 보면서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가 그들의 대적인 안티오코스 6세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데메트리오스의 군대는 요나탄의 활동을 막기 위해 다마스쿠스 너머로 진격해 와서 갈릴레아 경계에 있는 카다사에 진을 쳤습니다. 요나탄은 게네사렛을 떠나 하초르 평지(고대 하초르 부근)로 올라갔습니다. 데메트리오스의 장수들은 얌니아에서 아폴로니오스가 사용했던 책략을 다시 시도했습니다. 카다사 산악지대에 군 일부를 숨겨두었다가 요나탄이 주요 병력과 전투를 시작하면 후면에서 그를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카베오의 군 대부분이 혼란에 빠졌지만 요나탄과 그의 장수 압살롬의 아들 마타티아스(Mattathias)와 힐파이(Hilphai)의 아들 유다만은 굳게 버텼어요. 그들은 결국 적을 격퇴하고 카사다까지 추격하여 그들의 진을 점령했습니다.
4) 하맛 원정 (기원전 143년)
“(아다르 월) 17(일)에 이방인들이 칼키스 땅과 벳 자브다이에 남아 있던 서기들에게 맞서 일어났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구원받았다. (단식 두루마리)”
정세가 자기에게 유리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요나탄은 로마와 스파르타에 사절을 보내어 이전의 동맹 관계를 다시 유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데메트리오스 군이 다시 그를 막아섰지만 이스라엘 땅에서는 한 번도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요나탄이 “적군이 자기 나라에 침입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기(1 마카 12,25) 때문입니다. 데메트리오스 군이 레바논 골짜기의 하맛 지방에 배치되었지만, 요나탄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코엘레시리아의 경계인 엘레우세루스 강을 건너 슬그머니 물러갔습니다. 요나탄은 박해당하고 있는 유다 주민이 아직 남아 있던 칼키스(Chalcis) 땅 벳 자브다이로 방향을 돌려 형제들을 해방시키고, 전리품을 빼앗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다마스쿠스로 이동하여 코엘레시리아를 횡단했습니다. 그 사이 시몬은 두 번째로 요빠를 점령했으며, 리따 부근의 해안 대로가 내려다보이는 아디다를 요새로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