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의 옛이름은 사울로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했었습니다. 그는 다마스쿠스에 가서 그리스도교인들을 색출하라는 파견을 받았지요. 하지만 다마스쿠스 가까이 다다랐을 때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을 했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전교 여행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1. 바오로 사도의 활동과 전교 여행
1)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여정(기원후 36-38년)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사도 9,15)”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에는 타르수스 출신 바리사이인 사울도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여 대사제의 파견을 받았지요.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사울은 환시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상태로 다마스쿠스에 이르렀고, 유다라는 사람이 그를 맞아들였습니다.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보내심을 받아 사울에게 왔는데, 그는 안수하여 사울의 시력을 회복시키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 후 사울은 다마스쿠스의 여러 회당에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다가 일부 유다인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시 밖으로 몰래 몸을 피한 그는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곳의 공동체는 잠시 주저했지만 곧 그를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헬라파 유다인들로 인해 또다시 생명이 위태로와 지자 바오로는 지중해의 카이사리아로 갔고, 거기서 다시 고향인 타르수스로 떠났습니다.
2) 바오로 당시의 다마스쿠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사도 9,11)”
고대 도시 다마스쿠스는 아마나 강과 파르파르 강에서 물을 끌어온 오아시스에 위치해 있었는데, 헬라 시대에 완전히 다시 설계되어 셀레우코스 제국의 주요 성읍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다마스쿠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히포타모식(Hippodamic, 바둑판 모양의 도시) 성읍들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도시 주위는 성문이 있는 성벽이 두르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성문들마다 보초가 있었기 때문에 광주리를 타고 성벽 아래로 내려졌을 바오로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직사작형 모양의 이 도시에는 두 개의 주요 도로가 나란히 길게 뻗어 있었습니다. 이 중 하나가 사도행전 9, 11의 “곧은 길”로, 바오로 당시 나바테아 총독의 관전(2코린 11, 32)로 사용되고 있던 왕궁과 극장을 지나갔습니다. 나란히 뻗어 있는 두 번째 도로는 아고라(장터)와 주피터 신전을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주피터 신전은 한때 하닷의 신전이었으나, 나중에 성요한 성당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우마야드(Umayyad) 회교 사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3) 바오로의 안티오키아 여행과 예루살렘 방문 (기원후 40-46년)
시리아의 수도이자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던 안티오키아는 오래전부터 유다인 공동체가 있어,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파하는 근거지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 처음으로 파견된 사도는 바르나바였습니다.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즉 크리스토스(메시아, 기름부은 받은 이)를 따르는 무리라 불리게 된 곳이 바로 이 안티오키아였지요. 이곳의 공동체는 클라우디우스 (Claudius) 황제 시대에 흉년이 들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도 했습니다(사도 11, 27-30).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무사히 자리 잡자 바르나바는 타르수스로 가서 바오로를 데리고 돌아와 일 년간 교회 기반을 견고하게 세우는 일에 힘썼습니다.
사도행전은 당시 ‘헤로데 왕 (아그리파스 1세)’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하여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은 (기원후 44년)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준비한 구제 헌금을 전달한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사도 12, 12)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4) 바오로의 제1차 전교 여행 (기원후 46-48년)
“오랜 논란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에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다른 민족들도 내 입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나를 뽑으신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사도 15,7)”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바오로는 바나바, 마르코와 함께 전교 여행을 시작했는데, 사도행전에는 이 전교 여행이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여행에서는 안티오키아 항구 셀레우키아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가서 먼저 살라미스에서 전교를 한 후 이곳의 수도인 파포스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파포스에 주둔해 있던 로마 총독 세르기우스 바오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불러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마술사 바르예수(엘리마스)의 방해가 있었지만 그는 바오로가 했던 기적을 목격하고 믿게 되었습니다(사도 13, 6-12). 파포스에서의 사목 후 사도행전 기자는 지금까지 사울이라 불리던 사도를 바오로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이 바오로로 바뀐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바오르는 이 새로운 이름을 통해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세르기우스 바오르가 베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진행하여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갔는데, 여기서 요한 마르코가 그들을 떠나면서 바오로는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사도 15, 38). 계속해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간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안식일에 그 지역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공동체에 큰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선조들의 종교를 지켜온 이곳의 유다인들은 지도자들에게 호소하여 사도들을 쫓아냈으며, 같은 일이 이코니온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계속해서 데르베와 리스트라로 갔습니다. 리스트라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를 고쳤는데, 이곳 사람들이 바오로 일행을 신으로 여기고 제사하려는 것을 겨우 말릴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팜필리아로 돌아와 아탈리아에서 배를 타고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갔습니다.
소아시아 중남부를 관통한 1차 전교 여행지는 갈라티아 지방 일부였습니다. 아마도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함께 ‘예루살렘 공의회’(사도 15, 1-29)로 떠나기 전에 안티오키아에서 보낸 것으로 보이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간’의 수신자들이 바로 이 여행 중 방문한 공동체들일 것입니다.
5) 바오로의 2차 전교 여행 (기원후 49-52년)
“바오로는 아레오파고스 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17, 22)”
제2차 전교 여행에서 바오로는 실라스와 동행했고(티모테오는 이코니온에서 합류하게 된다), 바르나바와 마르코는 키프로스로 갔습니다. 바오로는 육로를 따라 이전에 방문했던 피시디아의 도시들을 돌아본 후 프리기아를 횡단하여 에게 해에 있는 트로아스(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그는 환상 중에 마케도니아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게 되지요. 필리피에 도착한 바오로는 많은 이방인들을 회심시켰는데, 그 중에는 “티아티라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사도 16,14)도 있었습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이곳에서 잠시 붙잡혔다가 바오로가 로마 시민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당국의 사과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테살로니카로 갔는데 이곳에서는 바오로를 대접했던 야손이 유다인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후 바오로와 실라스는 배를 타고 아테네로 갔습니다. 헬라 문화의 사상적 중심지인 이곳에서 바오로는 아레오파고스 언덕의 철학자들을 대상으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치는 제단을 화두로 던지면서 유명한 연설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후 바오로는 아카이아 지방의 수도인 코린토로 갔는데, 이곳에서 붙잡혀 총독 갈리오 앞으로 끌려가게 됩니다(그러나 갈리오는 종교 문제에 개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배를 타고 에페소로 갔고, 거기서 다시 유대아 지방의 카이사리아로 갔습니다. 사도행전 18, 22의 “바오로는 카이사리아에 내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교회에 인사한 다음, 안티오키아로 내려갔다.”라는 구절은 바오로가 이때 예루살렘에 들렀음을 암시해 줍니다. 성경에서 “올라갔다”거나 “내려갔다”라는 표현은 보통 예루살렘 순례와 관련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우회하여 예루살렘을 지나 안티오키아로 간 것은 아마도 그가 성전에서 서원한 것(사도 18, 18)을 갚아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6) 바오로의 제3차 전교 여행 (기원후 53-57년)
“그러나 몇몇 사람이 회중 앞에서 주님의 길을 헐뜯으며 고집스럽게 믿지 않으려 하자, 바오로는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날마다 티란노스 학원에서 토론을 벌였다. (사도 19, 9)”
바오로는 안티오키아를 떠나 갈라티아와 (갈라티아와 아시아 지방을 가르는) 프리기아 지방을 지나 아시아의 중심 도시 에페소로 갔습니다. 지난번에는 이곳에 (잠시 들렀다 가기는 했으나) 체류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2년간 ‘티란노스 학원’에서 가르치면서 아시아 교회들의 기반을 굳건히 했습니다. 바오로는 이곳에서 티모테오와 에라스토스를 마케도니아로 보냈습니다. 바오로의 전교 활동이 성과를 거두자 결국 ‘에페소 사람’ 증 아르테미스 숭배자들이 분노하여 온 시내와 극장에서 소동을 일으켰는데, 서기관이 나선 후에야 진정이 되었습니다. 그 후 바오로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로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필리피에서 출발하여 트로아스를 지나갔는데, 이곳에서 에우티코스라는 청년을 기적적으로 살려냈습니다. 계속해서 바오로는 배를 타고 아쏘스, 미틸레네, 키오스, 사모스, 멜레토스를 지나 코스, 로도스, 파타라로 갔으며, 여기서 페니키아로 가는 배를 타고 키프로스 남쪽을 지나 티로에 상륙했습니다. 그 후 바오로는 계속해서 프톨레마이스와 카이사리아 항으로 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그는 교회 지도자를 만났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성전에서 서원한 것을 갚으려는 네 사람의 비용을 내주고 그들과 함께 전례에 참석했습니다.
7) 바오로의 로마 여행 (기원후 59-62년)
“그러자 페스투스가 고문들과 상의하고 나서, “당신은 황제께 상소하였으니 황제께 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사도 25,12)”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바오로는 “아시아로부터 온 유다인”이 알아보고는 그가 성전을 더렵혔다고 비방하며 무리를 선동했습니다. 그는 그 상황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로마인들의 보호 감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군의 호위 아래에 안토니아 요새에서 지중해의 카이사리아로 보내져 총독 펠릭스에게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오로의 대담한 변론을 들은 펠릭스는 그를 구류해 두기로 결정했고, 바오로는 그 상태로 2년을 보냈지요. 새로운 총독 페스투스에게 다시 불려간 바오로는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황제에게 호소했고, 페스투스,는 법에 따라 그를 로마로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시돈을 경유하여 리키아의 미라(사도 27, 5)로 항해했습니다. 이곳에서 바오로 일행은 로마로 밀을 수송하는 알렉산드리아 배에 올랐습니다. 이 배의 선장은 항해가 가능한 시기가 지났음에도 날씨를 무시하고 출항했다가 크레타를 지나 아드리아 해 근처에서 광풍을 만나 결국 배가 몰타에서 난파되고 말았습니다. 바오로 일행은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에 항해를 이어갔습니다. 이들은 시라쿠사와 레기움에 들렀다가 푸테올리에 상륙하여 로마로 나아갔는데, 바오로는 이곳에서도 전교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시돈의 무덤 관에 새겨진 당시의 무역상인들이 항해 때에 이용했던 선박)
8) 요한 묵시록의 일곱 교회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 (묵시 1,11)
요한묵시록에는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 등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이들 교회에 주목한 이유가 무엇인지, 왜 다른 곳들은 빠져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암시도 없습니다. 서간들이 지도상에서 원을 그리는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다 하여 이것을 서신들의 전달 경로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서신들을 같이 읽어보면 소아시아 교회의 영적인 관심사들이 드러납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메시지는 각 서간들에서 반복, 중복되는 주제들을 통해 강조되고 있지요. 특히 음행과 우상 숭배를 우려하는 내용이 주목할 만한데, 이 항목들은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부과한 세 가지 제약 조건 중 두 가지에 해당합니다(사도 15, 28-29). 이러한 입장을 취한 것이나 성경의 내용을 자주 언급한 것에서 기록한 이가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 배경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서간들은 기원후 1세기의 최후 10여 년간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Domitian) 통치 아래에서 소아시아 교회들이 직면했던 영적 유혹들에 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