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은 유다 지파가 상속 받은 지역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 이곳에는 예수님 탄생 기념 성당과 목동들의 들판, 그리고 우유 동굴 성당이 있는데요. 이들 성당에 대한 특징과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글의 순서
- 1. 베들레헴 탄생 성당 (The Church of Nativity)
- 2. 우유 동굴 성당(Milk Grotto Church)
- 3. 베들레헴 근처의 목동들의 들판(Shepherd’s Field)
1. 베들레헴 탄생 성당 (The Church of Nativity)
성탄절이 되면 우리의 생각은 성자의 탄생을 둘러싼 다른 사건들과 상황에 미칩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묵상하노라면… , 마리아, 요셉, 아기 예수가 우리의 마음속에 특별히 자리 잡습니다(호세 마리아 성인, Christ Is Passing By, 22항).
1) 베들레헴의 특징과 역사
베들레헴은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 기원전 3000년 무렵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원전 1350년 무렵 이미 팔레스티나의 이집트 총독이 파라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등장하는 베들레헴은 그 후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정복됩니다. 성경에서 베들레헴이 처음으로 언급(당시에는 ‘비옥한 곳’이라는 뜻을 지닌 에프라타로도 불렀다)된 곳은 창세기인데, 족장 야곱의 둘째 아내인 라헬의 죽음과 장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라헬은 이렇게 이렇게 죽어, 에프라타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가에 묻혔다(창세 35, 19).”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지파가 가나안 땅을 나누어 가질 때 유다 지파는 베들레헴을 할당 받았으므로,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선택한 이사이 가문의 막내아들 양치기 다윗이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때부터 베들레헴은 다윗 왕조와 관련이 있었고, 미카 예언자는 그 작은 고을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 끝까지 위대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미카5, 1-4)
이 구절 가운데 일부는 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사 7, 14; 9, 5-6; 11, 1-4 참조) 및 다윗의 후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성서의 다른 텍스트(1 사무 7, 12; 12-16; 시편 89(88), 3-4 참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탈무드’에 나와 있는 구절(페사힘 51, 1; 네다림 39, 2 참조)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 전통에서는 미카 예언자의 말을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예언으로 보았습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역시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 시대에 메시아가 나실 곳이 어디인가에 대해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견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요한 7, 42)”
그러나 해로 대왕이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 보았을 때, 미카의 예언을 분명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마태오복음서 입니다. “유다 베들레헴 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 해놓았습니다. ‘유다땅 베들레헴 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마태 2, 5-6).
1 세기 초, 베들레헴은 인구가 천 명이 채 되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산비탈을 따라 얼마 안 되는 집들이 흩어져 있었고, 주위를 에워싼 성벽은 지어진 지 거의 천 년이 되었으므로 제대로 보수가 되지 않거나 거의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농사와 목축으로 생계를 이어 같습니다. 산기슭의 넓은 평야에는 밀과 보리가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지요 .이런 까닭에 히브리어로 ‘빵집’을 뜻하는 베들레헴(Beth-Lechem)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을 것입니다.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는 그 고장의 농사 절기에 따라 시간이 단조롭게 흘러갔습니다. 그러다가 그 작은 고을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유명해지게 된 전래 없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루카 복음사가는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 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다마 자기 본향으로 갔다. 요셉도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게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루카 2, 1-5)”
나자렛에서 베들레헴 까지는 150km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특히 만삭의 몸이었던 마리아로서는 그 여정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집들은 누추했습니다. 팔레스티나의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주민들은 천연 동굴들을 헛간이나 마구간으로 사용했고, 산비탈을 더 깊이 파고 들어 갔어요. 예수가 태어난 곳은 바로 이러한 동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 6-7)”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세상의 왕이자 역사의 주인인 예수가 그렇게 철저히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하느 님의 섭리었습니다.심지어 제 아무리 가난한 가정이라도 아들을 출산하기 위해 기꺼이 준비했을 법한 것 조차도 가지지 못했지요. 예수를 맞은 것은 포대기와 구유가 전부였습니다.
2) 구유 동굴 경당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베들레헴의 중요성에 대해 무척 잘 알고 있었습니다. 2세기 중반 무렵, 팔레스티나 출신인 유스티누스 성인(St. Justina)은 베들레헴 주민들 사이에서 예수님이 태어난 마구간에 대해 대대로 전해지던 기억들을 언급했습니다(유스티누스 성인, Christ Is Passing By 31항 참조). 3세기 초에는 오리게네스(Origen)가 그 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조차 예수님이 태어난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부분과 일치하여, 베들레헴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태어난 동굴과, 동굴 안에 포대기에 감싸여 누워있던 구유로 안내합니다. 그리고 이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명합니다. 그들은 ‘이 동굴이 그리스도인들이 추앙하는 예수가 태어난 곳이오.’라고 알려 줄 것입니다.(오리게네스, Contra Celsus 1, 51)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살았던 모든 흔적을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주님 무덤 대성당과 골고타 언덕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다양한 성지에 이교도 신전을 건설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 재위까지 180여 년 동안, 부활하신 장소에는 유피테르 신상이, 십자가 언덕에는 베누스 여신의 대리석 석상이 세워졌다.(예로니무스 성인, Letters, 58(Ad Paulinum prebyterum), 3)”
베들레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예수가 태어난 장소는 아도니스 신을 섬기는 성스러운 숲으로 바뀌었어요. 예루살렘의 치릴로 성인 마구간이 포함된 그 지역이 숲으로 뒤덮인 것을 보았고,(예루살렘의 치릴로 성인, Catechesis, 12,20, “몇 년 전까지 이곳은 숲이 차지하고 있었다.”), 예로니무스 성인 역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소중한 이러한 장소를 더럽히려는 시도를 비꼬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소유가 된,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이자, 시편에 ‘땅에서 진리가 솟아났다’고 노래한 베들레헴이 탐무즈(봄과 식물의 신)나 아도니스의 숲으로 뒤덮이고, 수년 전 그리스도의 우렁찬 첫울음이 울려 퍼지던 동굴에는 아도니스를 애도하는 소리로 가득 찼도다.((예로니무스 성인, Letters, 58(Ad Paulinum prebyterum), 3)”
이렇게 꾸준히 이어진 전통을 기반으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마구간 위에 거대한 성당을 지었습니다. 339년 5월 31일에 열린 봉헌식에 참석한 이들 가운데에는 이 모든 과업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후원했던 헬레나 모후도 있었습니다.
이 최초의 성당은 529년 사마리아의 반란으로 약탈당하고 파괴되어 거의 없어졌습니다. 평화가 찾아들자 베들레헴에서 요새를 쌓고, 유스티니아누스 항제는 같은 장소에 처음 성당과 비슷하면서도 더 웅장한 새 성당을 짓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성당은 외세의 잦은 침략으로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와 비잔틴 제국의 다른 성당들이 파괴되는 와중에도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건재하게 서 있습니다. 614년 팔레스티나에 있는 거의 모든 성당과 수도원들을 파괴한 페르시아인들이 베들레헴 성당만은 그대로 남겨두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성당 안에서 페르시아의 복장을 하고 있는 세 명의 동방박사가 그려진 모자이크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또한 1009년 이집트의 칼리프가 쳐들어왔을 때에도, 1099년 십자군이 도착한 이후 벌어진 수많은 전투에서도 거의 손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역사적 부침을 겪은 뒤, 1347년 마구간과 성당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지보호관구의 관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리스 정교회와 시리아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 또한 이 성지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지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오늘날까지 그곳을 계속 돌보고 있습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성당 앞의 광장에서부터 몇 개 안 되는 작은 창문이 난 육중한 벽과 부벽 때문에 중세의 요새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입구는 한 번에 한 사람만, 그것도 몸을 숙여야만 간신히 통과 할 수 있을 만큼 작지요. 2011년 자정 미사에서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이 성당 입구에 대해 언급 했습니다.
“오늘날, 베들레헴에 있는 주님 성탄 대성당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황제들과 칼리프들이 드나들곤 했던 5.5미터 높이의 현관이 지금은 벽으로 넓게 둘러싸인 것을 보게 될 겁니다. 낮은 입구는 1.5미터 정도만 남아 있습니다. 입구를 그렇게 좁게 만든 목적은 아마도 공격으로부터 잘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말을 탄 채 하느님의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 위한 조치였을 겁니다. 예수님이 탄생한 곳으로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몸을 굽혀야 합니다. 이곳에 이르니 제게는 더 깊은 진실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 거룩한 날 이 진실은 저희 마음을 건드립니다. 아이의 모습이신 하느님을 발견 하려면 우리는 ‘각성된 이성’이라는 높은 말 등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의 그릇된 확신과 지적 자부심을 밀쳐 놓아야 합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2011년 12월 24일 강론)”
다섯 개의 통로를 갖추고 있는 라틴십자 형태로 지어진 성당은 길이가 54미터에 달합니다. 4열로 늘어선 분홍빛 대리석 기둥은 조화를 자아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의 성장 바닥을 뒤덮고 있던 모자이크의 흔적이 곳곳에 아직 남아 있고 벽에는 십자군 시대의 모자이크가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웅장한 성당의 중심은 뭐니 뭐니 해도 제단 바로 아래에 있는 구유 동굴입니다. 그곳은 동쪽으로 반원형의 둥근 지붕이 달린 아주 작은 경당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벽과 천장은 수세대 동안 그리스도인 신자들이 밝힌 촛불 연기에 그을려 검게 변해있지요. 제단 아래의 백동 별은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에서 태어난 장소임을 나타내고 있고, 라틴어로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에서 나셨다’(Hic de Virgine Maria Jesus Christus natus est)라는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
마리아가 포대기에 감싼 아기 예수를 뉘어 놓은 구유는 우유 동글 옆 작은 경당 안에 있습니다. 과거에는 은을 두르고, 현재는 대리석을 둘러 놓았지만 그것은 사실상 바위에 난 구멍에 불과합니다. 그 앞에는 주님 공현 장면을 보여주는 벽 장식을 갖춘 동방박사의 제단이 있습니다.
2. 우유 동굴 성당(Milk Grotto Church)
1) 우유 동굴 성당의 전승과 특징
베들레헴의 탄생 대성당에서 남쪽으로 50미터 즈음 되는 같은 거리에 우유 동굴 성당이 위치해 있는데요.
이곳은 우르누스성모의 우유 동굴 성당(라틴어: Crypta lactea; 아랍어: مغارةآلسثئ; 히브리어: מערת החלב)은 우르누스 성모의 동굴 또는 우유동굴이라고도 불립니다.
부드러운 흰색 바위로 움푹 파인 불규칙한 동굴인 이 성당은 그리스도교인들과 무슬림 순례자들에게 모두 성지입니다. 특히 아기를 갖은 엄마들과 아이를 갖기 원하는 여성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지요.
그리스도교 전통에 의하면, 이곳은 성가족이 헤로데 임금이 어린아이를 학살하기 전에 이를 피해 이집트로 도망치다가 피난처로 찾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이 이름은 동굴 바닥에 떨어진 성모 마리아의 “우유 한 방울”이 바닥의 색깔을 하얗게 바꾸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2) 우유 동굴 성당의 역사
동굴은 4세기부터 신심의 장소가 되었고, 동굴 바위 위에 최초의 구조물이 385년경에 세워졌습니다. 동굴에서 떼어낸 조각들은 7세기 경부터 유럽의 교회로 보내졌습니다. 이곳은 1375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승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1872년에 밀크 그로토 주변에 성당을 건립했습니다. 베들레헴의 주민들과 지역 장인들은 진주조개 조각으로 성당을 장식함으로써 이 장소에 대한 신심과 존경을 표현했습니다.
3) 축복받은 성체를 영구히 모시는 수도원(Monastery of the Perpetual Adoration of the Blessed Sacrament)
2007년에 하느님의 어머니를 기리는 현대적인 성당이 세워졌죠. 이 성당은 성체 조배 수녀회가 담당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성당은 우유 동굴 성당과 터널로 연결되어 있어 지하 경당을 쉽게 방문할 수 있습니다. 2016년에는 ‘평화의 여왕’ 성체 궤가 지하 경당에 설치된 후로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는데요. 이 궤는 폴란드의 ‘평화의 여왕’ 공동체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성지 관구에 기증한 것입니다. 원래는 예루살렘 십자가의 길 4처 수도원에 있었지만,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평황의 여왕 성체 앞에서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수녀)
‘평화의 여왕’ 성체 궤는 폴란드 예술가 마리우스 드라피코스키(Mariusz Drapikowski)가 제작한 작품으로, 성 요한의 묵시록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닫혀 있는 궤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주위에 열 두 사도와 열 두 지파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의미하고, 열린 성소는 천상의 예루살렘을 상징하고 있지요. 묵시록의 두 증인을 나타내는 한 쌍의 올리브 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나무가지들은 다양한 십자가로 가득차 있는데요. 이는 공통된 줄기에서 나온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사도직을 상징합니다. 열린 성소의 중심에는 성모 마리아님이 그리스도의 성체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3. 베들레헴 근처의 목동들의 들판(Shepherd’s Field)
1) 목동들의 들판의 특징과 전승
베들레헴과 근방은 완만한 기복이 있는 풍경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계단식 언덕은 능선의 경사면으로 이어져 있고, 올리브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골짜기의 가장 평평한 부분은 밭으로 나뉘어져 있지요. 바위가 너무 많아 경작이 어려운 지역에는 소나무와 편백나무와 다양한 지중해 관목을 비롯해 여러 가지 식물, 관목, 나무 등이 산재해 있습니다.
이 지역은 사무엘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주었을 땅시, 다윗이 아버지의 가축을 돌보고 있었던 곳이며,(1사무 16, 1 -13 참조) 3대 전에는 증조할머니인 룻이 밀밭과 보리밭에서 보아즈의 일꾼들 뒤를 따르며 이삭을 줍던 곳이었습니다(룻 2, 1-17).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게 되었을 때, 이곳은 예수의 탄생 소식이 가장 먼저 알려진 곳이었지요.“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에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 8-12)”
복음에 나온 이야기에는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난 정확한 장소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오래 전부터 그곳이 베들레헴에서 2, 3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오늘날 그곳에 세워진 마을이 바로 벳 사후르(Bet Sahour, 야경꾼의 집) 입니다. 예로니무스 성인은 그곳에 믹달 에데르(Migdal Eder, 가축들의 기둥)라 불리던 성경 속 장소와 관련이 있다고 했는데,(예로니무스 성인, Letters, 108 (Epitaphium Sancts Paule), 10) 바로 라헬이 죽은 후 야곱이 천막을 쳤던 곳이지요.(창세 35, 21 참조) 비잔틴 시대 4, 5 세기 무렵에는 그 자리에 목자들을 기념하는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당은 성탄의 밤을 기념했고, 그곳의 동굴은 특별히 성소로 추앙을 받았어요. 수도원도 한 곳이 있었지만 십자군이 도착했을 당시에는 폐허 말고는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수백 년이 흐르고 근대에 들어와 벳 샤후르 지역에서 옛 전승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장소는 두 곳입니다. 한 곳은 서쪽의 카니삿 알 루왓(Kansas al-Ruwat)으로 알려진 곳인데, 현재의 베들레헴 교외입니다. 그곳에는 비잔틴 시대의 작은 성당 유적이 있었는데, 1951년에 파티마 성녀와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성녀에게 봉헌된 가톨릭 성당이 세워졌고, 1972년에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북동쪽으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다른 한 곳은 시랴르 알 가남(Siyar al-Ghanam, 즉 ‘목자들의 들판’)입니다. 천연 동굴들이 많은 산비탈에 유적을 품고 있는 땅이 있었는데 그곳을 19세기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사들였어요. 1859년의 부분적 발굴에 이어 1951년과 1952년에 실시된 발굴로 4세기에서 8세기까지 사람이 거주했던 수도원 건물 두 채가 드러났습니다. 처음 지어졌던 수도원 성당은 6세기에 무너져, 같은 장소에 또 다른 성당을 지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출입구는 동쪽으로 약간 이동했는데, 이는 어떤 특별한 기억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수도원 경내에는 압축기, 우물, 곡식 저장소, 저수조 등 농사와 관련된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고, 수도원 안에 있던 동굴들은 농사용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곳에서 발견된 헤로데 왕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자기 파편으로 판단해 보건대 이것들은 예수님 시대 때부터 농사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망루가 있었던 흔적도 있지요.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지보호관구는 목자들의 들판이 이 유적들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 위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처음 알린 것을 기념하여 목자들의 들판에 대영광송(Gloria Excelsis Deo) 성당을 1953년에서 1954년까지 2년에 걸쳐 지었습니다. 10각형 형태와 경사진 벽으로 이루어진 외관은 유목민ㄷ르의 천막을 연상시킵니다. 안쪽에는 한 가운데에 제대가 서 있어요. 삼중 후진 벽에는 목동들에게 나타난 천삳르, 아기 예수에 대한 경배, 베들레헴에서 돌아오는 목동들 등 복음 속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돔형 천장 안쪽은 10명의 천사의 모습과 그들이 부르는 노래로 장식되어 있지요. Gloria in attissimis Deo et in terra pax hominids bone voluntatis(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 14).
2) 지극히높은곳에서는하느님께영광
목자들이 눈부신 빛에 둘러싸여 귀 기울이고 있을 때, 갑자기 천사 곁에 수만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 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 13-14)” 이 구절을 묵상하며 교황 베네딕도 16 세는 특별한 내용을 강조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위대한 천사들의 말이 실제로는 노래라는 것을 늘 알고 있습니다. 이 당시 천사들이 찬미한 큰 환희는 현재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순간 이후로 천사들의 찬미 가는 끊이지 않고 불려 온 것입니다.(요셉 라칭거/교황 베네딕도 16세, Jesus of Nazareth, the Infancy Narratives, New York, Image Books, 2012, p. 73)”
특별하게도 천사들의 찬미가는 대영광송 속에 들어가 수백 년 동안 올려 퍼졌고, 대영광송은 곧 교회 전례 속으로 편입 되었습니다. “2 세기 부터 천사의 말에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찬미하나이다, 흠숭하나이다, 영광을 바치나이다.’ 등 몇 마디 답창이 추가 되었고, 애초에는 성탄 미사에서 부르다 나중에는 모든 축일에 부를 교창으로 만들려고, ‘주 하나님, 하느님의 어린양, 성부의 아드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 등 다른 기도가 덧붙여졌습니다. 성찬의 전례가 시작 되는 부분에 삽입된 대영광송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구원의 유일하고도 변함없는 신비의 두 모습인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 성탄절과 부활절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을 강조합니다.(교황 베네딕도 16세, 2006년 12월 27일 접견)”
대영광송 이 절 예 포함되어 있는 날 미사에서 대영광송을 부를 때 , 성부의 뜻을 이루고,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고, 우리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소명을 회복시키려고 사람이 되신 예수를 묵상하기 위해 이러한 신비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몫입니다.(가톨릭 교리서 516-518 참조)
단지 말뿐이 아니라 온 삶으로 천사들의 찬가에 동참한다면, 그리스도를 본받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열망을 키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