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순서
- 1. 벨기에의 보랭 발현 성지 (Beauraing, 1932)
- 2. 보랭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 2. 보랭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 1) 1932년 11월 29일, 화요일
- 2) 1932년 11월 30일, 수요일
- 3) 1932년 12월 1일, 목요일
- 4) 1932년 12월 2일, 금요일
- 5) 1932년 12월 4일, 일요일
- 6) 1932년 12월 5일, 월요일
- 7) 1932년 12월 6일, 화요일
- 8) 1932년 12월 8일, 목요일
- 9) 1932년 12월 17일, 토요일
- 10) 1932년 12월 21일, 수요일
- 11) 1932년 12월 23일, 금요일
- 12) 1932년 12월 24일, 토요일
- 13) 1932년 12월 29일, 목요일
- 14) 1932년 12월 30일, 금요일
- 15) 1932년 12월 31일, 토요일
- 16) 1933년 1월 1일, 일요일
- 17) 1933년 1월 2일, 월요일
- 18) 1933년 1월 3일, 화요일
- 4. 성모님 발현 장소
- 5.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시현자들
- 6. 보랭의 성모님 발현지 공인 과정
- 7. 보랭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의미
- 8. 보랭 발현 성지 소개
- 9. 보랭 성모 발현 성지 찾아가는 길
1. 벨기에의 보랭 발현 성지 (Beauraing, 1932)
보랭은 벨기에 남동부에 위치해 프랑스와 맞닿은 국경 지대 마을입니다. 이곳은 사실 성모님께서 방현하시기 전까지는 지도에도 나오지 않았던 장소였답니다. 벨기에 사람들이 전쟁 위협과 대공황으로 경제적인 위기에 놓이자 마르크스주의에 빠져서 냉담하여 가톨릭 교회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모님께서 보랭에서 발현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그해에 순례자들이 2백만 명 이상이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성지가 조성된 이후 10개월 동안 170만 명이 방문해 루르드 보다 더 많은 방문 기록을 보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보랭 성지는 바뇌 발현 성지와 함께 벨기에 사람들의 가톨릭 복귀와 일치라는 의미 있는 결실을 보여 준 성지이기도 합니다.
2. 보랭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특히 1914년 8월에 벨기에를 침략하여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그 후 ‘벨기에의 강간’이라 불리는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전쟁 중에 대략 6천 여명 이상의 벨기에 민간인들이 살해를 당했고요. 1만 5천 여명에서 2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강제 이주, 기아, 그리고 구금으로 사망했습니다. 전쟁 이후, 벨기에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독일과 벨기에 사이에 중립지대를 만들고 제1차 런던 조약의 중립 보장을 확실히 하였습니다.
하지만 독일에서 히틀러가 등장하면서 다시 정세가 불안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히틀러는 1921년 국가사회주의의 독일 노동자당 당수가 되었지요. 1932년에는 대통령 선거에서 36.8%까지 득표를 했습니다. 히틀러는 베르사이유조약을 파기하고, 강한 독일을 재건하고, 사회 정책의 대대적인 확장을 주장했습니다. 그러고는 1933년 드디어 독일 총리가 되었습니다. 한편 러시아는 1917년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고, 1922년에 주변국들을 흡수했습니다. 그리하여 소련, 즉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결성했지요. 이후 사회주의 이념이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벨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른 적이 있는 알베르 1세가 여전히 왕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독일의 변화에 불안을 느껴 소련의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해 전쟁터가 된 리에주와 나무르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 심해졌지요. 따라서 가톨릭 신자들이 냉담에 빠지고 가톨릭을 증오하는 이들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더해 1929년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며 경제적으로도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더욱 현혹되어 가톨릭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득세하였습니다. 이렇게 벨기에와 가톨릭이 상당한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보랭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2. 보랭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성모님은 보랭에서 1932년 11월 29일부터 1933년 1월 3일까지 36일 동안 저녁 6시에서 10시 사이에 거의 날마다 발현하셨습니다. 발현하시면서 성모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33번이나 보여 주셨지요. 이 발현을 목격한 시현자들은 드장브르(Degeimbre) 가족의 14세 앙드레(Andree)와 9세 질베르트(Gilberte), 그리고 브아쟁(Violin) 가족의 15세 페르낭드(Fernande)와 13세 질베르트(Gilberte)와 11세의 알베르(Alberte)라는 5명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던 과정을 날짜별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932년 11월 29일, 화요일
아버지의 요청으로 페르낭드와 알베르는 수녀원 부속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질베르트를 데리러 가면서 이웃집 친구인 앙드레와 작은 질베르트를 불러 함께 갔습니다. 저녁 6시 반 경에 아이들은 수녀원에 도착해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을 본떠 만든 성모 동굴이 있는 정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알베르가 먼저 들어가 초인종을 눌렀지요. 수녀님이 질베르트를 데리고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알베르가 문득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정원 옆을 지나가는 철도 교량 위에 강렬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는 것이 보였어요. 여인은 0.5m 정도 공중에 떠서 철도 제방 위를 걸어 다녔는데요. 두 발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막 수녀원에서 나온 질베르트도 빛나는 여인을 보았어요. 하지만 질베르트와 함께 나온 발레리아 수녀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답니다. 발현을 목격한 아이들은 두려운 마음에 집으로 도망쳤어요. 그들이 부모에게 이런 일을 말해 주었지만 믿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2) 1932년 11월 30일, 수요일
이전과 같은 시간에 네 아이가 평상시대로 같이 질베르트를 데리러 갔다가 빛나는 여인을 또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제방 위를 걷다가 내려와서 성모 동굴 쪽으로 갔습니다. 아이들이 이 사실을 부모에게 다시 알렸지만 부모를 화만 냈지요. 누군가가 아이들에게 겁주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3) 1932년 12월 1일, 목요일
발현에 관한 이야기가 온 마을에 전해졌습니다. 드장브르네 어머니는 아이들을 놀려 먹는 사람을 찾으려고 수녀원에 함께 갔습니다. 아이들은 수녀원의 성모 동굴 가까이에서 흰옷에 흰 베일을 쓰고 구름 위에 서 있는 여인을 다시 보았는데요. 여인의 머리에서 황금빛 광선이 나와 마치 왕관을 쓴 것 같았답니다. 아이들은 즉시 무릎을 꿇고 성모송을 외웠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비롯한 어른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요. 어머니는 막대기로 사방을 휘저으며 동굴 쪽으로 갔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엄마, 더 이상 앞으로 가면 안돼요. 바로 앞에 여인이 있어요!”라고 소리치자 여인은 곧장 사라졌습니다.
4) 1932년 12월 2일, 금요일
아이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다 여인을 목격했습니다. 여인은 20세 정도로 보였고, 미소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오른팔에 묵주가 들려 있고, 두 손은 마치 기도를 바치는 것처럼 합장하고 있었는데요. 이후에는 항상 같은 장소에서 나타났다고 합니다. 여인의 키에 대해서는 90~120cm라고 나오는 자료도 있고요, 또는 단순히 작았다고 하는 자료도 있지만 대부분의 자료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성모송을 바쳤습니다. 알베르가 물었어요. “당신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인가요?” 그러자 그분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저 고개만 끄덕이셨습니다. 알베르는 다시 물었어요. “무엇을 원하시나요?” 성모님은 처음으로 입을 열어, “항상 선해야 한단다.”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성모님은 사라지셨다가 얼마 후 다시 발현하셔서 항상 선할 것인가라고 물으셨지요. 그러자 앙드레는 “네, 우리는 항상 선할 것입니다!” 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성모님은 두 팔로 아이들을 안아 주시는 듯한 모습을 보이시고는 사라지셨습니다. 아이들이 이 사실을 본당사제 람베르토에게 전했습니다. 하지만 신부는 아이들이 머리로 상상한 것을 마치 정말로 보고 들은 것처럼 착각한다고 여겨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5) 1932년 12월 4일, 일요일
주일인 일요일에도 아이들은 눈이 먼 노인과 장애가 있는 아이와 함께 수녀원 정원에 있는 성모 동굴에 가서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성모님과 대화를 제일 많이 했던 알베르가 성모님께 두 사람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지만 성모님은 치유 대신에 저녁마다 이곳에 와서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과 함께 와서 기도를 봉헌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성모님의 모습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보였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성모님은 아이들에게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12월 8일)에 꼭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 1932년 12월 5일, 월요일
이날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알베르가 치유의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침묵하셨지요. 아이들은 실망하여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7) 1932년 12월 6일, 화요일
이날은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성모님은 당신을 위한 대축일인 8일에 다시 오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벨기에 언론사들이 기자를 파견해 성모님 발현 관한 기사를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발현을 목격한 아이들과 보랭 주민들이 인텨뷰 요청을 수없이 받기도 했지요. 이제 벨기에 전지역에서 보랭 성모님의 발현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8) 1932년 12월 8일, 목요일
이때는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날이어서 이전보다도 더 많은 1만 5천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큰 기적을 기대하기도 했지요.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6시 10분 경에 수녀원에 도착해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찬란한 빛을 발산하면서 나타나셨는데요. 이에 작은 질베르트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옆에 있던 한 의사가 왜 우는지를 묻자 질베르트는 “성모님이 너무 아름다워서요.”라고 답했지요.
이후로 아이들은 1시간 30분간 탈혼 상태에 빠졌습니다. 의사 메스트리와 그의 요청을 받은 몇몇 의료진이 참석해 아이들을 검사해 보았습니다. 아이들을 꼬집어 보고 때려 보아도, 눈에 불빛을 비추어도 보고, 심지어는 불이 붙은 성냥을 손에 올려놓거나 날카로운 핀으로 찔러 보아도 아무 반응이 없고 상처도 나지 않았습니다. 묵주기도 마지막 단을 바치자 성모님은 사라지셨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님과 떨어져 수녀원에 가서 의사에게 검사와 심문을 받고, 며칠 동안 교차 심문 과정이 반복 되었다고 합니다.
9) 1932년 12월 17일, 토요일
성모님께서 당신이 서 계신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올 수 있도록 작은 경당을 세우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0) 1932년 12월 21일, 수요일
이날에는 성모님께서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동정녀 마리아이다.” 라고 당신의 신분을 밝히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머지 않아 마지막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11) 1932년 12월 23일, 금요일
“당신은 여기에 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성모님께서는 “나는 사람들이 순례를 올 수 있게 하려고 왔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12) 1932년 12월 24일, 토요일
성탄 전야에 6천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이 치유의 기적을 요청하였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리고 성모님의 발현도 짧게 끝났습니다.
13) 1932년 12월 29일, 목요일
성모님께서 당신의 두 팔을 펼치시고 가슴에서 빛줄기가 주위로 퍼져 나가는 황금 성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이었지요. 이로써 보랭 성모님은 ‘황금 성심의 성모(Virgin with Golden Heart)”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4) 1932년 12월 30일, 금요일
이날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많이 기도하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5) 1932년 12월 31일, 토요일
성모님께서는 아이들에게 당신의 황금 성심을 다시 드러내 보이시면서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6) 1933년 1월 1일, 일요일
성모님께서는 큰 질베르트에게 “항상 기도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마지막 발현은 이틀 후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7) 1933년 1월 2일, 월요일
성모님께서는 “나는 내일 너희 각자에게 따로따로 비밀을 이야기를 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8) 1933년 1월 3일, 화요일
이날은 성모님의 발현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날입니다. 약 3만 5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지요.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자 아이들은 기쁨에 넘쳐 환성을 질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아이들에게 저마다 따로 비밀을 말씀해 주셨답니다.
먼저 앙드레에게는 “나는 하느님의 어머니요, 하늘의 여왕이다. 항상 기도하여라. 잘 있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질베르트에게는 “나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겠다. 잘 있거라.”라고 말씀하셨지요. 알베르와 작은 질베르트에게는 간단하게 “잘 있거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페르낭드는 그때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 낙담하고 있었어요. 바로 그 순간에 사람들은 천둥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비로소 페르낭드에게도 성모님이 보였습니다. 성모님은 페르낭드와 다음과 같이 대화를 했습니다. “너는 나의 아들을 사랑하느냐?” “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네.” “너는 나를 위하여 너 자신을 희생하여라.” 성모님께서는 페르낭드에게 작별의 표시로 황금 성심을 보여 주시면서, “잘 있거라.”라고 말씀하신 후에 사라지셨습니다.
위의 내용은 총 33번의 성모님 발현 중에 중요한 18번의 발현을 정리한 것입니다.
4. 성모님 발현 장소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면 벨기에는 곧바로 전쟁터가 되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 파리가 직선으로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한 리에주와 나무르는 전쟁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을 수 밖에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인근 주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던 것이지요. 더군다나 대공항의 여파로 주민들의 경제적인 상황은 예전보다도 훨씬 더 어려워졌습니다. 이런 불안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주민들은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결국 가톨릭에 냉담해져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정신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된 거지요. 이럴 때 성모님께서는 나무르 인근의 가난한 마을 보랭에서 거기다가 가톨릭에 냉담하고 사회당을 추종하던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발현하신 겁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던 동굴)
성모님께서는 처음 두 번은 수녀원 옆에 있는 철도 제방 위에서 나타나셨는데요. 그 후, 서른 한 번은 수녀원 정원에서 발현했습니다. 당시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을 통해 5명의 아이들과 성모님의 모습, 즉 왕관, 황금 성심, 묵주, 복장, 손의 위치, 허리띠가 없고 작은 구름을 확인해 볼 수 있고, 주변 배경도 파악할 수 있답니다. 그림에서 뒤쪽으로 철도의 교량과 제방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을 본 떠 만든 성모 동굴이 보입니다. 가운데는 산사나무 앞쪽으로 빛나는 성모님이 구름 위에 떠 계신 모습으로 위치해 있습니다. 그림을 통해 보면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장소는 현재 야외 정원에서 성모상이 세워져 있는 위치로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당시의 성모 동굴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아 더 이상 볼 수가 없는데요. 이 동굴은 언제 없어지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네요. 다섯 명의 아이들은 성모님의 발현이 다 끝난 후에도 매일 야외 정원을 방문해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나무르 교구의 앙들레마리 샤뤼 주교는 1946년에 정원에 성모상을 세우고 축성하였습니다. 또한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장소에서 30m 떨어진 곳에 발현 기념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이 성당은 1947년 8월 22일에 착공해 1954년 8월 21일에 봉헌되었지요. 발현 기념 경당 밖의 측면에는 야외 미사를 할 수 있는 제대가 마련되어 있는데요. 날씨가 좋은 날에는 여기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또한 경당 내부에도 제대가 있어 미사를 봉헌할 수 있습니다.
5.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시현자들
보랭의 성모님 발현 시현자들은 이전의 시현자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전이 시현자들은 성직자, 수도자가 되거나 성모님의 메시지를 널리 알리는 소명을 다하기 위해 일생을 봉헌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결혼하였고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알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런 비범하지 않은 모습도 우리 신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한 방식이기도 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루르드의 베르나데트나 파티마의 루치아처럼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시현자로서 평생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먼 곳에서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가다가 생을 마감하는 모습은 감동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안쓰러운 연민의 감정이 들기도 합니다.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다섯 명의 시현자들)
이런 의미에서 성모님 발현 목격 시현자가 다섯 명이나 되는데도 이들 중에서 단 한 명도 가족들과 떨어져 살지 않았지요. 그들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평범한 삶이 충실히 살았다는 점에서 보랭의 시현자들이 새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의 가족을 성가정으로 만들어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소명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앙드레 드장브르(1918~1978)와 질베르트 드장브르(1923~ 2015)는 세 자매 중 둘째와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드장브르 가족은 원래 보랭에서 살았지만 근처 보네슈로 이주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13년 동안 농장일을 하였다고 하는데요. 그 가족은 늘 가난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세 자매들과 함께 다시 보랭으로 돌아왔지요. 그러고 나서 2년 후에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것입니다.
앙드레는 1941년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요.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다섯 명의 아이들 중에서 가장 먼저 60세의 나이에 선종했습니다. 앙드레의 동생이면서 시현자들 중 가장 어렸던 질베르트는 1947년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이탈리아에서 살다가 남편과 함께 고향 보랭으로 돌아왔지요. 그러다가 2015년 92세의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질베르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성모님의 발현과 관련해 1시간 가량의 동영상을 남겼답니다.
부아쟁 가족의 아버지 헥토르는 철도국에서 일을 했는데요. 그는 어려운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보랭 중심가에 가게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 발현으로 가게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마리는 사회당에 아주 열성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가톨릭 신앙을 실천하지 않고 냉담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성모님 발현 이후 자녀들의 도움으로 가톨릭 신앙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페르낭드 부아쟁(1917~1979)은 지방 세무국에 근무하는 알베르 데스파스와 결혼했습니다. 그 자신은 가정 방문 간호사로 일하였지요. 슬하에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고, 나무르로 이주해 살다가 신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치원 교사가 된 질베르트 부아쟁(1919~2003)은 경찰관과 결혼했으나, 남편은 1953년에 임무 수행하다가 피살되었습니다. 미망인이 된 질베르트는 두 명의 아들과 함께 보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보랭에서 50년을 살다가 성모님의 마지막 발현일인 1월 3일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아쟁 가족의 막내인 알베르(1921~2003)는 아일랜드와 독일에서 군 생활을 했습니다. 그 후, 벨기에 오티그니에서 2년 동안 교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1948년 결혼한 후 같은 해에 벨기에령 콩고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세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1961년 알베르 가족은 보랭으로 돌아와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6. 보랭의 성모님 발현지 공인 과정
벨기에의 어느 알려지지 않는 마을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다는 소식이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습니다. 이 소식은 큰 파장을 일으켰지요. 벨기에의 보랭은 루르드나 파티마와는 다르게 성모님 발현 초기에 뚜렷한 기적이나 표징이 없었던 까닭에 진위 여부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33년 여름 58세인 틸만에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면서 발현의 진실성이 증명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아 냉담을 했던 아이들의 부모들도 회개하고 회심하여 성당에 다시 나갔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께서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올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의 말씀대로 순례자들이 끊임없이 방문했습니다. 1933년 8월 말에는 하루 15만 명이 보랭을 찾았고, 1933년에만 순례자들 수가 2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병자가 치유를 받는 등 다른 여러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나왔는데요. 특히 무엇보다 놀라운 기적은 냉담자들이 회심을 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랭 최대의 선물’이라고 말했답니다.
1933년 나무르 교구의 헤일렌 주교는 보랭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의 도움으로 치유된 2 건의 기적을 인정했습니다. 1935년 조사 위원회도 구성했지만 조사가 완료되기 전에 선종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1940년 5월 벨기에가 다시 독일에 점령당했습니다. 이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후임으로 온 샤뤼 주교는 1943년 2월 2일 보랭 성모님에 대한 공경을 승인해 순례를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1949년 7월 2일 샤뤼 주교는 보랭과 관련한 2 가지 중요한 문서를 발표했는데요. 이는 보랭의 발현에 초자연적인 특징들이 있음을 공인한 것입니다. 1985년 5월 1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해외 순방 중 직접 보랭 성지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7. 보랭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의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프랑스 파리를 공격하기 위해 가장 빨리 진격하기 위해서는 벨기에를 관통해야만 했습니다. 리에주와 나무르는 파리로 가는 주요 길목에 자리한 도시였지요. 실제로 두 도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벨기에는 두 도시에서 독일에 패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리에주 근처에는 바뇌 성지가 있고요, 나무르 인근에는 보랭 성지가 위치해 있습니다. 두 도시와 인근 지역은 독일군에 대항하다가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후 독일군의 보복 조치까지 일어났던 곳이지요. 그래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독일과의 마찰과 전쟁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1930년에 접어들며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1935년 베르사이유조약을 파괴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에 보랭이 속한 지역은 사회주의가 득세를 하면서 가톨릭 신자들이 냉담하고 가톨릭을 배격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던 겁니다. 성지가 조성된 이후 10개월 동안 무려 170만 명의 순례자들이 이곳에 방문했습니다. 같은 상황 속에서 루르드는 1년 동안 100만 명도 채 오지 않았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이것 또한 기적인 것이지요. 순례자들의 대다수는 벨기에 사람들이었어요. 따라서 그들이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사회주의자이자 무신론자였던 한 청년의 회심으로 말미암아 벨기에에 레지오 마리애가 설립되었습니다. 보랭에서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레지오 마리애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죠.
다른 발현 성지와 같이 보랭에서도 많은 치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성지에서의 기적의 특징은 육체적인 치유보다 영적인 치유와 회개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겠다.”라는 성모님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8. 보랭 발현 성지 소개
보랭 성지 대부분을 대성당과 성당, 경당이 차지하고 있는데요. 성지 입구에는 발현 기념 경당, 성지 내부에는 2층 대성당과 1층 성당이 있습니다. 발현 기념 경당의 측면과 성지 정원에는 야외 제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지 정원에 있는 야외 제대의 지하에도 경당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발현 기념 성당 외부 야외 제대)
대성당은 1968년 10월에 봉헌되었고, 그 규모는 2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성지 입구에 안내 센터가 있는데요. 여기서 기본적인 설명을 접해 볼 수 있지요. 성지 정원 옆에는 붉은 벽돌로 된 피정의 집이 있습니다. 이곳은 성모님께서 발현하실 당시에는 수녀원이었지요. 질베르트가 이곳에서 공부를 했었습니다. 피정의 집 입구에는 시현자 5명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피정의 집에는 한국에서 파견 나온 수녀님도 상주하고 있답니다. 필요하면 방문하여 안내를 받으면서 성모님 발현에 관한 이야기도 자세히 들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피정의 집은 숙소로도 이용할 수 있고 사전에 예약하면 숙박과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9. 보랭 성모 발현 성지 찾아가는 길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의 남역(Zuid)이나 중앙역(Centraal)에서 고속 열차를 이용해 나무르(Namur)까지 먼저 갑니다. 그 다음에 일반 열차로 갈아타고 보랭으로 이동하는데요. 약 2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보랭역에서는 성지까지는 9번, 25번 버스를 이용할 수 있고요. 거리가 1km 정도라서 걸어서 갈 수도 있습니다. 보랭을 순례한다면 바뇌도 방문해 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보랭역에서 나무르역까지 간 다음에 그곳에서 환승하여 리에주(Liege)역까지 이동합니다. 다시 64번 버스를 갈아타고 바뇌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구글에서는 Sanctures Notre Dame de Beauraing을 검색하여 찾아 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