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바뇌 성모 발현 성지 (Banneux, 1933)

바뇌 성모 발현 성지는 벨기에에 위치한 성지로 보랭 발현 성지와 함께 유명한 성지입니다. 성모님께서 바뇌에서 발현하셨던 배경과 발현 과정 및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1. 벨기에 바뇌의 성모님 발현 성지 개요


벨기에의 바뇌는 보랭과 함께 벨기에에서 유명한 성모님 발현 성지입니다. 바뇌 가까이에 있는 벨기에 동부의 주요 교통 도시인 리에주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격으로 엄청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뇌의 신자들은 전쟁의 불안과 경제적인 빈곤으로 보랭의 신자들보다 더 심하게 사회주의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가톨릭 신앙을 부정하고 무시했습니다. 이에 성모님께서는 보랭에서 마지막 발현하신 1933년 1월 3일로부터 12일이 지난 1월 15일 다시 바뇌에서 발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벨기에 가톨릭을 원상태로 회복시키셨던 것입니다. 바뇌는 규모가 큰 성지인데요. 15개의 경당이 있고 20개의 성상이 있어서 묵상할 내용도 많습니다. 루르드처럼 기적의 샘도 있답니다. 


2. 바뇌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바뇌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리에주입니다. 리에주는 바뇌에서 북서쪽으로 27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요. 이 도시는 벨기에 동부의 주요 거점 도시로 독일과 맞닿은 국경까지의 거리가 43km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자동차로 30분만 달리면 독일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은 프랑스로 진격하기 위해 벨기에 영토를 통과하겠다고 요구했지만 벨기에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독일군들은 1914년 8월 중립을 선언한 벨기에를 무시하고 리에주를 침략했습니다. 자신들의 진격이 지체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벨기에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10년 이상이 지난 1932년에도 독일과 인접한 리에주 지역은 독일의 만행을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현실의 삶도 여전히 답답한 상태였었지요. 전쟁 후 영세중립을 다시 보장 받았지만 무력 앞에서는 이마저도 무의미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벨기에는 독일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 알베르 1세가 여전히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어요. 반면에 독일은 히틀러라는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 다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대안이 없었던 상황에서 리에주 주민들이 선택한 대안은 사회주의였습니다. 주민들은 상승 분위기를 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지켜보면서, 사회주의만이 자신들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다는 기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1929년에 발생한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도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리에주 지역의 주민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며 가톨릭 신앙을 저버렸습니다. 그들은 교회와 관련한 활동에도 무관심해졌습니다. 이처럼 가톨릭 신앙이 상당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성모님께서 리에주 근처의 작은 마을 바뇌에서 발현하신 것입니다.


3. 바뇌에서의 성모님의 발현 과정


성모님께서는 1933년 1월 15일부터 3월 2일까지 보랭의 발현과 비슷한 시간대인 저녁 7시를 전후하여 총 8번 발현하셨습니다. 보랭에서 1월 3일에 마지막으로 발현하시고, 12일 만에 벨기에의 산골 마을인 바뇌에서 다시 발현하신 것입니다.

(발현 기념 경당에 봉헌된 성화)


1) 첫 번째 발현: 1933년 1월 15일, 일요일

주일 저녁 7시 경에 베코 가족의 칠 남매 중  맏이였던 12세의 마리에트 베코(Mariette Beco)는 친구 집에 놀러 간 남동생을 기다리면서 창밖을 내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원에서 타원형의 빛을 보게 되었어요. 그 빛 속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는데요. 마리에트에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라고 손짓을 하였답니다. 이에 놀란 마리에트가 어머니에게 말했지만 어머니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어머닌 화를 내면서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여인은 흰색 옷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베일을 걸치고 허리에는 하늘색 띠를 두르고 있었는데요. 그 여인은 마치 루르드의 성모님으로 착각할 정도였다고 해요. 여인은 얼굴을 왼쪽으로 기울인 채 두 손을 합장하여 가슴 위에 얹었고, 오른팔에는 황금 십자가가 달린 묵주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른발 위에는 황금 장미가 얹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았던 마리에트는 언젠가 우연히 시골길에서 주웠던 묵주를 들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성모님의 첫 번째 발현은 끝났습니다.

다음 날 마리에트는 본당신부인 루이 자맹에게 여인의 발현에 대해 말해 주었는데요.  본당신부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래도 마리에트는 회심하여 수요일 아침마다 미사에 참여하고 교리반에도 다시 나갔습니다. 추운 겨울 밤인데도 밤마다 정원에 나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이로부터 15일에 독일에서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자 벨기에 국민들은 더욱 불안해 하였습니다.


2) 두 번째 발현: 1933년 1월 18일, 수요일

저녁 7시경에 마리에트는 영하 12도의 강추위 날씨 속에서도 정원에서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딸이 너무 걱정되어 자맹 신부도 부르고, 이웃들과 함께 마리에트를 설득해 집으로 들어오게 하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잠시 후 하늘에서 여인이 내려와 마리에트 앞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섰습니다. 여인은 빛나는 구름 위에서 20분 동안이나 말없이 마리에트를 바라만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마리에트에게 당신을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여인은 뒷걸음질로 가다가 잠시 두 번을 멈추어 섰습니다. 이때마다 마리에트는 얼어붙은 땅에 무릎을 꿇었어요. 아버지와 두 동생이 일정 거리를 두고 마리에트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여인은 작은 샘이 솟고 있는 길 옆에 멈추어 섰고 마리에트는 세 번째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지요. “네 손을 물에 담그거라.” 마리에트는 아주 차가운 샘의 밑바닥까지 두 손을 밀어 넣었습니다. 이어서 여인은 “이 샘은 나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 샘물을 마시거라. 다시 보도록 하자.”라는 말씀을 남기고는 사라지셨습니다. 마리에트가 여인을 따라 가다가 무릎을 끓은 세 자리는 오늘날 별 모양이 그려진 석판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자맹 신부는 샘에 관한 소식을 듣고 다른 신부와 같이 마리에트의 집으로 갔습니다. 가는 길에서 자맹 신부는 만약 마리에트 아버지 쥘리앵이 회심을 한다면 여인의 발현을 믿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밤 10시경에 자맹 신부가 마리에트의 집에 도착하자 아버지 쥘리앵이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신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내일 고해설사를 보고 영성체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뇌의 두 번째 회심입니다.


3) 세 번째 발현: 1933년 1월 19일, 목요일


 이날 저녁 7시에 마리에트가 이웃 주민 11명이 모인 중에 정원에서 묵주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여인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마리에트가 물었어요. “아름다운 여인이시여, 당신은 누구신가요?” 그러자 여인은 “나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 마리아이다.”라고 당신의 신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마리에트를 다시 샘으로 데려가셨습니다. 마리에트가 “어제 ‘이 샘은 나를 위해 마련하신 것’이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라고 다시 물었어요. 성모님은 “이 샘은 병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나라를 위해 마련하신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다시 보도록 하자.”라고 말씀하시고는 사라지셨습니다. 이후로 바뇌 성모님은 ‘가난한 이들의 성모,’ ‘병자들의 성모’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바뇌 성모님을 향한 신심으로 ‘국제 기도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져 2백만 명이 넘는 회원이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4) 네 번째 발현: 1933년 1월 20일, 금요일


저녁 7시 45분경에 마리에트는 조금 피곤했지만 변함없이 정원에 나와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을 때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마리에트는 성모님께 물었어요. “무엇을 원하시나요?” 이에 성모님은 “나는 작은 경당을 원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마리에트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에트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정원에 몇 달 후 아주 작은 경당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3주 동안 성모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지요. 시간만 조용히 흐를 뿐이었습니다. 그사이 사람들은 무관심해졌고 발현 장소를 찾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에트 가족은 가혹한 비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마리에트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지요. 마리에트의 아버지 줄리앵도 사회주의자들에게 조롱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에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일 저녁마다 날씨가 추워도 정원에서 빠짐없이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마리에트는 성모님을 다시 만날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5) 다섯 번째 발현: 1933년 2월 11일, 토요일


이 날에 성모님께서는 신부와 수녀, 그리고 아버지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마리에트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 주셨습니다. “나는 고통을 덜어 주려고 왔다.” 그 날은 성모님께서 루르드에서 처음 발현하신 날이었죠. 즉, 루르드 성모님 발현 75 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바뇌와 루르드 성지는 발현 날짜뿐 아니라, 발현하신 성모님의 복장도 비슷하고, 두 곳 모두 기적의 샘이 있습니다. 또한 바뇌 성지에는 루르드의 시현자 베르나데트의 동상까지 있는 등 연관성이 많은 곳입니다.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루르드의 샘을 통한 치유의 기적을 바탕으로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정하였습니다. 성모님의 다섯 번째 발현이 있으셨던 다음 날 마리에트는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6) 여섯 번째 발현: 1933년 2월 15일, 수요일


마리에트는 본당신부 루이 자맹의 요청으로 성모님께 “본당신부가 발현의 증거를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성모님은 “나를 믿거라. 나도 너희를 믿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지요. 또한 마리에트에게는 “많이 기도하여라. 다시 보도록 하자.”라고 하셨습니다. 자맹 신부는 자신의 요청에 대해 성모님께서 답을 주신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발현에 자신도 참여한 것으로 받아들였지요. 그 후로 가난한 이들의 성모님과 마리에트를 열렬히 옹호해 주었습니다. 


7) 일곱 번째 발현: 1933년 2월 20일, 일요일

이 날은 몹시 추운날이었답니다. 하지만 마리에트는 눈 위에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드렸습니다. 마리에트가 정원에서 샘으로 가는 동안 세 번 무릎을 꿇으며 기도를 바치자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에트에게 말씀하셨지요. “사랑스러운 나의 딸아, 기도하거라. 많이 기도하거라.”

(기적의 샘)

8) 여덟 번째 발현: 1933년 3월 2일, 마지막 발현


이날 저녁 7시경에,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지만 마리에트는 그 비를 맞으면서 땅 위에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모님께서 나타나셨고 이내 비는 그쳤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오랫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시다가 슬픈 표정으로 말씀하셨어요. “나는 구세주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기도를 많이 하거라. 잘 있거라.” 성모님께서는 이전처럼 ‘다시 보도록 하자.’라는 말씀 대신에 ‘잘 있거라.’라고 하시면서 이번이 마지막 발현임을 암시하신 것이죠. 그리고 성모님은 마리에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하신 다음에 성호를 긋고 사라지셨습니다. 이 마지막 발현은 5분여 동안 일어났으며 비가 내려 날이 무척 추운데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둘러서서 마리에트와 함께 했습니다. 다음 날 마리에트는 자맹 신부를 만나 지난밤에 일어난 일들을 전하며 이제 더는 성모님께서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4. 바뇌에서의 성모님 발현 장소

독일이 다시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킨다면 벨기에는 곧 전쟁터가 될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리에주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늘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항이 벨기에까지 영향을 미쳐 경제적 상황도 훨씬 더 어려워졌어요. 이런 불안과 고통 속에서 주민들은 사회주의를 선택한 것입니다. 가톨릭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냉담을 했습니다. 이에 성모님께서는 당신께서 비슷한 처지에 있던 보랭에서 발현하셨음에도 이를 부정하던 리에주 인근의 가난한 마을에서 나타나신 것이죠. 어느 냉담 가족의 어린 딸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겁니다.

(성모님 발현 기념 성당과 마리에트의 집)

아르텐고원에 자리한 바뇌는 경작할 토지가 부족해 마을 사람들은 매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마을 중앙에는 19세기에 성 레오나르도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민이 300여 명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라서 본당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사제도 주임신부가 아니라 지도신부 자격으로 사도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리에트의 집은 성당에서 1km 정도 떨어진 외딴 곳이었고 농사 짓기도 적합하지 않은 장소였습니다. 마리에트의 집 건너편에서 전나무 숲이 시작되어 벨기에 동부와 독일 아이펠고원까지 이어졌습니다. 이곳의 토양이 질퍽하고 축축하여 더욱 척박한 곳이었지요. 

이런 마리에트의 집 앞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는데요. 성모님께서는 이 정원 덤불 위에서 발현하신 것이지요.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그 자리에는 그분이 네 번째 발현에서 요청하신 대로 곧장 작은 경당이 세워졌는데요. 1933년 4월 18일 경당 건립 승인이 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5월 16일에 초석이 놓이고,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에 경당과 종탑이 봉헌되었습니다. 그 후 1960년, 1993년, 1995년에 일부분이 증축되었고 경당 주변도 정리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발현 기념 경당은 교황청의 인정을 받은 16 군데의 성모님 발현 성지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작습니다. 경당 전면에 있는 세 개의 아치를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면 간신히 서 있을 공간밖에 없어서 정말 소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가난한 이들의 성모님이란 이름에 걸맞은 경당이라고 할 수 있지요. 경당 내부에는 마리에트에게 발현하신 성모님의 모습이 세 폭의 성화로 그려져 있는데요. 이 성화는 마리에트의 증언에 따라 다섯 번 정도 수정한 끝에 완성된 그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장은 기적의 샘을 통해 치유를 체험한 사람들의 감사패로 꾸며져 있습니다.


5. 성모님 발현 목격한 시현자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마리에트 베코는 가난한 마을 바뇌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의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1921년 3월 25일에 태어났는데요. 그날은 주님탄생 예고 대축일이면서 성금요일이었습니다. 

(발현 당시의 시현자 마리에트 모습)

베코 가족은 아버지 쥘리앨이 실직해 작은 방이 3개 딸린 집에서 9명의 식구가 함께 살아야만 했습니다. 마리에트의 부모는 냉담자였고, 집에 십자가도 없었으며 신앙에도 무관심했습니다. 또한 자녀들에게도 관심이 별로 없어 마리에트가 학교를 가지 않아도 꾸짖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리에트는 나이가 어렸지만 맏이라서 역할을 다 하려고 동생들을 잘 돌보았지요. 이렇게 주님께 버림받은 아이같던 마리에트에게 성모님께서 찾아오신 것이지요.

마리에트는 성모님의 발현을 처음 목격하고 나서 회심해 성당에 가 미사에 참여하고 교리반에 나갔습니다. 날씨가 무척 추운 날에도 빠짐없이 매일 정원에 나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마리에트의 일상은 기도 그 자체였으며 마음속에 주님과 성모님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에트도 다른 시현자들처럼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에 시달려야 했지요.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온갖 질문을 해댔습니다. 그리고 마리에트에게 욕을 하고 조롱하는 이들도 많았어요. 또한 마리에트가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것이 아니라 루르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저 상상한 것이라고 하고, 또는 베르나데트를 모방하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과도한 관심과 괴롭힘은 마리에트가 평생 짊어져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마리에트는 21세가 되던 해인 1942년에 결혼해 두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이후로는 성모님 발현에 대하여 침묵한 채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1972년 바뇌에서 가까운 곳인 “퇴”라는 마을로 이사하고 난 뒤 그곳에서 계속 살다가 2011년 12월 2일 90세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6. 바뇌 성모님 발현 성지 공인 과정

성모님께서 보랭에 이어 바뇌에서도 발현하시자 성모님에 대한 공경심이 불길처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에 방문하였습니다. 보랭처럼 냉담자들의 회심이 수없이 일어났고, 기적의 샘물을 마시거나 그 샘물로 씻은 사람들이 치유되는 기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기적 중에 오텔레트 부인(1933)과 요셉 바센(1946)의 치유 기적은 유명하답니다. 기록에 의하면 1933년부터 1938년까지 25건의 기적이 의학적 검사를 통과했다고 합니다. 1958년에는 순례자들이 손을 직접 담글 수 있도록 큰 수반이 설치되었는데요. 오늘날에도 많은 순례자들이 그 수반에 손을 담그고 샘물을 마시려고 줄을 서고 있습니다.

기적의 샘이 있는 성모님 발현 성지는 모두 네 곳입니다. 프랑스의 살레트와 루르드, 폴란드의 기에트슈바우트, 그리고 벨기에의 바뇌이지요. 네 성지는 모두 기적의 샘을 통하여 엄청난 치유가 일어났는데요. 이는 결국 수많은 순례자들을 성지로 이끄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리에주 교구는 조사 위원회를 구성해 1935년 3월부터 1937년까지 2년 동안 73명의 발현에 대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의학과 역사학, 신학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조사한 결과를 정리해, 1941년 교황청에 보고했습니다. 1942년 3월에 리에주 교구의 케르크호프스 주교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허락했습니다. 1949년 8월에는 주교가 사목 서신을 통해 성모님의 발현을 재차 공인했지요. 그리고 이 발현 사실을 온 세계에 선포하고 그 은총을 전파하여 바뇌 성지 순례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5년 5월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순방했는데요. 그런 중에 18일에는 보랭 성지를 방문하고, 21일에는 바뇌 성지를 방문했습니다. 교황은 발현 기념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경당에서 기적의 샘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또한 기적의 샘에도 손을 담갔습니다. 그리고 교황은 시현자 마리에트를 만나고, 병자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이때 1만 여명의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7. 바뇌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의미

벨기에는 오늘날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가톨릭 국가입니다. 하지만 성모님 발현 당시에는 사회주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이 널리 퍼져 있었어요. 특히 독일과 인접한 리에주 지역에는 이런 경향이 훨씬 심했다고 합니다. 1932년 말 나무르 지역의 보랭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서 수많은 벨기에 신자들이 회심을 하고 가톨릭으로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리에주 지역에서는 발현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조롱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모님께서 보랭 발현이 끝난 후 12일 만에 다시 바뇌에서 발현하시니 분위기는 반전 되었습니다. 특히 바뇌에서는 기적의 샘을 통한 치유가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 마지막으로 발현하시고 5개월 후에 있었던 발현 기념 성당 봉헌식에 거의 6만 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했다고 하는데요. 이를 통해 보면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벨기에의 가톨릭이 이전 상태로 회복이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벨기에는 또다시 독일에 점령 당했지만 바뇌 성모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의지해 이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바뇌 성모님은 8번의 발현 중 5번이나 기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는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신 것이죠.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도 아주 유효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덜어 주려고 오셨다는 말씀도 여전히 해당되는 말씀이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면서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현재 벨기에는 성모님이 두 번이나 발현하신 은총의 나라답게 국민의 80%가 가톨릭 신자입니다. 


8. 바뇌 발현 성지 소개

바뇌 성지는 숲 속에 위치하고 있고, 그 규모가 매우 큰 성지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순례하기에 참 좋은 곳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성모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동정 마리아’로 발현하셨기 때문에 그런지 대지에 비해 모든 시설물들은 적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성지라면 당연히 세워져야 할 대성당이 여기에는 아직도 없습니다. 성당도 한 곳 밖에 없고, 발현 성지 중에서 발현 기념 성당도 가장 작습니다. 대신 다양한 시설들과 성상들이 많은데요. 경당한 15곳 가까이 됩니다. 그리고 성모상을 비롯한 다른 성상들도 20개가 넘습니다. 성지를 소개하는 안내판에는 안내 번호가 51번까지 달리고, 설명이 되어 있는 성지는 바뇌가 유일할 것입니다. 

성지에서 중요한 장소는 첫 번째로 마리에트의 집과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정원에 세워진 발현 기념 성당입니다. 두 번째는 기적의 샘이 있는 곳인데요. 지금 이곳에는 가난한 이들의 성모상이 세워져 있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여기에 옵니다.. 성모님께서 알려주신 기적의 샘에 손을 담그고 그 물을 마십니다. 세 번째는 야외 미사가 열리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경당과 메시지 경당, 야외 제대, 가난한 이들의 성모상을 둘러싸고 있는 장소입니다. 이 곳에서는 날씨가 좋으면 병자들을 위한 미사가 거행되는데요. 성지에서 운영되는 요양 병원이 바로 옆에 붙어 있어 노인 환자들과 그 밖의 병자들이 미사에 참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984년에 건축된 가난한 이들의 성모 성당은 성지 남쪽 끝에 위치하는데요. 이 성당의 외관은 마치 구약성경의 성막처럼 커다란 천막이 연상됩니다.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지만 아직까지 대성당으로 승격되지 않았습니다. 바뇌 성지의 특징은 360여 개의 병상을 갖춘 요양 병원이 바로 옆에 있다는 점이지요. 이는 성모님이 다섯 번째 발현에서 “나는 고통을 덜어 주려고 왔다.”라고 말씀하신 것에 따라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세운 시설입니다. 1938년에 초석이 놓였고 1940년에 완공되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1946년 6월에서야 병원으로 사용되기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성지 숲속에는 성 미카엘과 성 잔 다르크 경당,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경당, 주님 탄생 예고 경당 등 많ㅇ느 경당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지요. 그러니 충분한 시간을 갖고 차분히 기도와 묵상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경당들 사이에는 루르드의 베르나데트의 성상, 마더 데레사의 성상,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을 쓴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의 성상, 오상의 파드레 비오의 성상 등도 있습니다. 이 성상들을 보면서 또 다른 묵상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숲속 깊은 곳에는 십자가의 길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또한 치유의 샘 근처에는 ‘성모칠고의 길’도 있습니다.


9. 바뇌 발현 성지 찾아가는 길

벨기에 수도 브뤼셀의 남역(Zuid)이나 중앙역(Central), 북역(Noord)에서 고속 열차를 타고 리에주 기유맹(Guillemins)역까지 갑니다. 대략 1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그런 다음에 역 앞 버스 정류장에서 노란색 64번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 바뇌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대략 45분 정도가 소요됩니다. 파리에서 출발하게 되면 파리에서 리에주로 가는 고속 열차를 이용합니다. 바뇌와 함께 보랭 성지도 방문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리에주역에서 1 시간마다 출발하는 고속 열차로 나무르역까지 간 다음에 환승하여 보랭역으로 이동하면 됩니다. 총 2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보랭역 앞에서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보랭 성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약 15분 정도가 걸립니다. 

구글에서는 Office Tourism de Sprimont Banneux를 검색해 찾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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