벳자타 못은 예수님께서 38년 간 앓고 있던 중풍 병자를 고쳐주신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예루살렘 구도시에 위치해 있는데요. 벳자타 못과 그 옆에 지어진 안나 성당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1. 벳자타 못의 특징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치유들이 설명되어 있지만, 오로지 요한 복음사가만이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채 소외당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요한복음사가는 이 이야기에서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이 갈릴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밝힌 후에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요한 5, 2-3)”
오늘날에는 사용하지 않는 몇몇 사본에 근거하고 있는 5세기 무렵의 불가타 라틴어 번역본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덧붙였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젖곤 했는데 물이 움직을 때엔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나았던 것이다.(요한 5, 4 불가타 본)”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특히 마음에 와닿는데, 그 이유는 제일 먼저 움직인 분이 그분이라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일 먼저 병자들이 누워있던 곳으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 가운데서 한 사람에게 주목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치유해 주겠다고 합니다. “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요한 5, 6-9)”
벳자타 못은 양문 가까이 있었으므로 양 못이라고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희생 제물로 봉헌될 양은 성벽 북동쪽에 있던 이 문을 통해서 반입되었습니다. 못에는 주랑(주랑은 기둥으로 지탱되는 지붕이 있는 통로이다) 다섯 채가 들어서 있었는데, 오각형 형태는 아니었고, 두꺼운 물막이로 분리된. 두 개의 저수조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주랑 네 채는 측면에 늘어서 있었고, 다섯 번째 주랑은 한 가운데 있는 6.5미터 넓이의 물막이 위에 서있습니다. 복음에서 전하고 있는 내용에 더하여,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와 예루살렘이 치릴로 성인은 3세기와 4세기에 이 장소에 대하여 기록했습니다. 못의 위치는 1천년 이후 천 년 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동정 마리아의 부모인 안나 성녀와 요아킴 성인의 집이 근처에 있다고 전하는 또 다른 전승이 없었더라면 완전히 잊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2. 성 안나 성당(The Church of St. Ann)
마리아의 출생지에 대한 가장 최초의 언급은 대략 2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위경인 ‘야고보 원 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전승에 따르면, 안나 성녀와 성전 사제였던 요아킴 성인은 예루살렘, 양 못 옆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중풍병자의 치유를 기념하여 5세기에 봉헌된 성당인 양 못의 성모 마리아 성당을 지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 전승을 확인해 줄 만한 고고학적 증거는 없습니다. 그 성당은 6세기 메드바 모자이크 지도에 나타납니다. 그곳은 세 개의 중앙 통로와 일부는 연못 유적지에, 일부는 단단한 대지 위에 지어진 아트리움을 갖춘 대성당이었습니다. 아트리움의 주량 아래와 중앙 통로들 아래에는 저수조들이 있었습니다. 그 지역의 다른 성당들과 마찬가지로 이 성당 역시 수차례 파괴와 복구를 반복적으로 겪었고, 1099년 십자군이 왔을 때는 유적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남아 있던 대성당 유적과 연못을 나누는 물막이 위에 기적을 기념하는 작은 경당을 건설했습니다. 이후 1130년에서 1150년 사이에는 동정녀 마리아의 출생지로 추앙받고 있는 근처의 동굴 꼭대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커다란 성당을 지었습니다. 이 성당이 바로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지 무슬림 지역 한 가운데에 있는 성 안나 성당입니다. 이곳은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며, 성 스테파노 성문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사자 문에 아주 가까이 서 있지요.
성 안나 성당은 성지 예루살렘에서 십자군 시대의 건물들 가운데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곳 가운데 하나로, 끝이 반원형 후진으로 이어진 중앙 통로 세 개와 마리아의 탄생을 기념하는 지하 소성당을 갖추고 있습니다. 건물의 특징은 단순함과 절제이며, 양식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조화로운 균형이 돋보입니다. 이곳은 또한 인상적인 음향 효과로도 잘 알려져 있지요. 십자군 와욱이 몰락한 이후에도 성당은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문 위에 쓰여 있는 아랍어 비문에서 알 수 있듯이 살라딘이 이슬람 학교로 개조한 것입니다. 1856년 크림 전쟁이 끝나고 터키인들이 건물을 프랑스에 기증한 이후로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의 소유입니다. 19세기에 알자스 출신 건축가 크리스토프 에두아르 마우스(Christophe Edourd Mauss)가 필수적인 복구 작업을 실행하던 중 우연히 저수조를 발견한 덕분에 연못까지 발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연못은 이전의 모든 흔적이 지워져 버렸던 벳자타 못이라는 것이 이내 밝혀졌습니다.
3. 벳자타 못(Bethesda Pool)
19세기 이후, 즉 1878년부터 유적을 관리해 온 아프리카 선교사들인 화이트 파더스와 에콜 비블리크의 도미니코 수도사들이 유적지에서 고고학 조사를 실행해 왔습니다. 이러한 조사 덕분에 양 못의 역사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고, 유대인의 씻김 의식 장소, 로마 시대의 이교도 신전, 비잔틴 시대의 성 마리아 대성당, 십자군이 지은 작은 경당 등 그 지역의 다른 건물들 유적에 대해서도 밝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연못은 각기 다른 두 시대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첫번 째 연못은 기원전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하즈야 또는 히즈키야 왕이 다스리던 때에 북쪽에서 흘러내리던 물을 저장하기 위해 물막이 둑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수로를 통해 이 물을 성전으로 공급했습니다. 첫 번째 연못 남쪽에 위치한 두 번째 연못은 기원전 3세기 말 무렵 파내어 만들어졌지요. 다른 연구의 주장에 따르면 로마 제국 당시에는 전체 구역이 개조되어 너비와 길이가 각각 60미터, 120미터에 달했다고 하네요. 오늘날 현장에서는 예전의 웅장했던 크기를 느끼기 어렵지만 수심은 15미터에서 20미터나 될 정도로 깊었다는 것은 쉽사리 알 수 있습니다. 저수조로서의 벳자타 못의 유용성은 헤로데 대왕 시대에 비슷한 규모의 연못인 이스라엘 연못을 성전 훨씬 가까운 곳에 구상하면서부터 점차 쇠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양 못은 아마도 씻김 의식에 여전히 사용해 왔을 것입니다. 물가로 내려 가는데 사용되었을 계단들은 아직도 확연히 볼 수 있습니다. 44년 무렵 헤로데 아그리파는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확장하도록 명령했는데, 이로 인해 북쪽 연못은 성벽으로 완전히 막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연못의 동쪽 면 옆에서 고고학자들은 저수조, 욕조, 동굴 등을 갖춘 치료 시설처럼 보이는 유적을 발굴했습니다. 유적의 일부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치료 시설은 기원전 150년에서 서기 70년 사이에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또한 요한 복음사가가 묘사했듯이 그토록 많은 병자들이 그곳에 모여든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2세기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갈아엎고 새로 지었을 때, 아마도 로마의 의학의 신인 아스크레피오스에게 바쳐진 이교도 신전이 그곳에 세워졌을 것입니다. 모자이크 바닥, 프레스코화, 비문, 봉헌물, 동전 등등이 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들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5세기에는 양 못에 성 마리아 대성당이 세워지면서 모든 것이 덮였습니다. 일곱 개의 아치로 지탱되는 아트리움이 물막이 너비보다 넓게 옛 연못 위에 지어졌고 치유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후진이 달린 세 개의 종앙 통로가 지어졌습니다. 기둥 네 개의 기초는 아직 온전하고, 아치 일곱 재 가운데 고스란히 보존된 한 개와 더불어 세 개의 아치와 일부 모자이크는 여전히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11세기 말에 십자군이 도착해보니 대성당은 이미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 개의 연못을 갈라놓고 있는 물막이 위에 기존의 비잔틴 건물 일부를 통합하여 경당을 지었습니다. 그 유적은 모든 건물 가운데서 가장 쉽게 눈에 띄며, 두 개의 지하층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군중 틈에 있는 한 천사의 그림과 더불어 그 시대에 맞게 장식된 지하 소성당이 있었고, 그 바로 아래에는 저수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12세기에 세워진 작은 성당은 중풍병자의 치유를 기념하는 반면 성 안나 성당은 동정녀 마리아의 탄생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매년 8월 8일 그곳에서 성모 축제가 장엄하게 거행됩니다.
4. 도움의 손길
“벳자타 못은 질병, 절망, 빈곤, 버려짐, 고독 등 인간이 겪는 온갖 종류의 질환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이렇게 비참한 이들이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연민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죄의 결과를 대신 짊어지고, 가장 곤궁에 처한 사람들과 같아지기를 원하셨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48항 참조)”
예수님은 스스로 원하여 예루살렘에 가셨고, 사도들을 대동한 채 양 못의 주랑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의 사명을 더 잘 이해하기를 바라셨고, 중풍병자를 고쳐주는 치유의 기적이 안식일에 일어났으므로 자신이 하느님의 힘에 의해 행동하고 있으며, 그 힘이 안식일법보다 위에 있다는 것과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요한 5, 9-18)”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의 사명을 더 잘 이해하길 바랐고, 38년 동안이나 앓아 온 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그 중풍병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싶어 했습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이 살아온 지난 삶과 역사와 어려움을 아신 채 모든 영혼을 찾아 나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모든 이에게 연민을 느끼며, 모든 것을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보여 준 바로 그 자비는 우리들 각자의 삶에서도 드러납니다. 특히 육체적 질병보다도 더 흔한 정신적 질병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약하기 때문에 인생을 살다 보면 자주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잡아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언제나 함께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일어서길 원합니다! 중풍병자에게 하신 아름다운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일어나라!’ 하느님은 우리가 두 발로 딛고 일어서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등산하는 사람들이 산에 오를 때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가 있는데, 그 기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등산에서 중요한 것은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채로 있는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붙잡아 주어 일으키도록 내맡길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손길은 흔히 친구의 손을 통해, 부모님의 손을 통해, 인생길을 함께 하는 이들의 손을 통해 주어집니다. 바로 그들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일어나십시오! 하느님은 우리가 발로 딛고 일어서길, 언제나 굳건히 서기를 원하십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16년 4월 26일, 소년 소녀들을 위한 희년 강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