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 왕국(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르하브암과 아비야 이야기 1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왕국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은 유다 왕국을 다스리고, 예로보암 1세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 이 두 왕국의 흥망성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1. 왕국의 분열 (기원전 931년)과 르하브암의 요새(기원전 931-926년경)

“르하브암은 스켐으로 갔다. 온 이스라엘이 스켐에 모여 그를 임금으로 세우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은 솔로몬 임금을 피하여 이집트로 달아나 있다가 거기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예로보암은 이집트에서 돌아왔다. … 온 이스라엘은 예로보암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그를 집회에 불러서 온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유다 지파 말고는 아무도 다윗 집안을 따르지 않았다. (1 열왕열왕 12,1.2.20)”

이스라엘 북쪽 지파들과 남쪽 유다 동맹(칼렙, 크나즈 등) 간의 뿌리 깊은 불화는 다윗과 솔로몬 통치 아래서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과중한 부역은 북쪽 지파, 특히 요셉 집안 사람들을 힘들게 했지요. 그러나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은 이들의 심상치않는 불만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왕권을 계승한 것을 만장일치로 인정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는 북쪽 지파들로부터 왕위를 재가받기 위해 스켐으로 가야했었습니다. 북쪽 지파들은 전에 요셉 집안의 부역 감독자였다가 최근 망명에서 돌아온 예로보암을 자신들의 대표로 내세웠습니다.

왕국의 분열 지도

솔로몬 통치 말엽에 외부적인 어려움들로 야기된 경제 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훨씬 더 힘들게 했습니다. 르하브암은 부담을 덜어 달라는 북쪽 지파들의 요구를 거만하게 거절하고는 어리석게도 평판이 좋지 않은 관료 아도람(1열왕 12,18; 1역대 10,18)을 보내어 그들을 위협했지요. 아도람은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거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 부과되던 끔찍한 강제 노역을 감독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돌로 쳐죽임으로 자신들의 불만을 표현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르하브암은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북쪽 모반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다가 예언자 스마야의 설득과 만류로 단념했습니다. 벤야민 지파 땅은 그 경내에 왕실 소유지와 레위인의 성읍이 있었고 주민인 기븐온족도 성전에서 특별한 소임을 맡는 등 예루살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다윗 왕국의 일부로 남았습니다.

다마스쿠스와 에돔은 최근 반란을 일으켰고, 에츠욘 게베르는 이미 빼앗겼거나 그럴 위험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다른 이웃 나라들도 약화된 이스라엘 및 유다 왕국과의 유대를 끊고 싶어 했지요. 교역과 상업에서도 이스라엘의 독점권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로보암 1세는 새 정부를 조직했습니다. 스켐이 북왕국의 첫 번째 수도로 정해졌고, 트랜스요르단의 중심지가 프누엘(1 열왕 12,35)에 세워졌습니다. 그는 오랜 종교적 전통을 지닌 베텔과 단을 종교 중심지로 세웠는데, 이들은 각각 왕국 남쪽 경계와 북쪽 경계선에 위치해 있으며(1 열왕 12,29-30), 이곳들은 물론 다른 지역 산당들에서도 레위인이 아닌 사람들이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외에 실로와 티르차가 북왕국의 성읍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1 열왕 14,4.17).

2. 남유다의 임금 르하브암의 요새 (기원전 931-926년 경)

“르하브암은 예루살렘에 살면서 유다에 요새 성읍들을 세웠다. 그가 세운 성읍들은 베들레헴, 에탐, 트코아, 벳 추르, 소코, 아둘람, 갓, 마레사, 지프, 아도라임, 라키스, 아제카, 초르아, 아얄론, 헤브론이다. 이곳들이 그가 유다와 벤야민에 세운 요새 성읍이다. 그는 요새들을 튼튼하게 만든 다음, 거기에 지휘관들을 배치하고 양식과 기름과 포도주를 저장해 두었다. 또 그 모든 성읍에 큰 방패와 창을 갖추어 놓고 그곳들을 매우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유다와 벤야민이 그의 지배 아래 남게 되었다. (2 역대 11, 5-12)”

역대기서에 의하면 르하브암은 유다 왕국 전반의 성읍 간 연결 도로를 요새로 만들고자 했습니다(2 역대 11,5-12). 역대기의 사건 순서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유다의 방비 강화 작업은 분명 시삭의 침입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2역대 11,5-12의 성읍 명단은 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다르게 생각해보면 언급된 지역들에서 방어 강화 작업이 사실상 동일한 속도로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제카와 벳 추르 등 그 위치가 확인된 일부 성읍들에서 진행된 고고학 조사에서는 기원전 10세기 말의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방어 시설이 발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라키스의 유적 중 지층 IV(Stratum IV)에서는 게제르, 므기또, 하초르에서와 같이 거대한 벽돌 성벽과 삼중문이 발굴되었습니다. 르하브암의 성읍 명단에서는 일종의 지리적 법칙, 논리를 발견할 수 있는데 곧 베들레헴, 에탐, 트코아, 지프 등 동부 스텝 지대와 맞닿아 있는 분수령 길을 보호하고, 서쪽 진입로인 라키스, 마레사, 모레셋 갓, 아제카, 초라, 아얄론을 감시하며, 소코와 아도라임 등 국내 성읍들과 네겝의 일부 핵심 중심지들은 이미 요새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시대 구분표

3. 파라오 시삭의 출정(기원전 926년)과 아비야의 정복 (기원전 911년)

1) 파라오 시삭의 출정(기원전 926년)

“르하브암 임금 제오년에 이집트 임금 시삭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주님의 집에 있는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가져갔다. 모조리 가져가 버렸다. 또한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모두 가져갔다. (1 열왕열왕 14, 25-26)”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레반트 지방에서 장악한 상업과 교역의 주도권을 꺾고 싶었습니다. 기원전 946년 이집트에서는 리비아 사람인 시삭 1세가 제22왕조를 세우고 타니스(초안)와 부바스티스(Bubastis)에서 기원전 913년까지 다스렸습니다. 그는 솔로몬의 두 대적 에돔의 하닷과 요셉 집안의 예로보암을 자극하는가 하면, 솔로몬이 죽은 지 5년이 지났을 때에는 르하브암과 예로보암의 왕국을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성경에는 단지 유다가 침공을 당했고 르하브암이 예루살렘 멸망을 막기 위해서 엄청난 값을 치른 것에 대해서만 언급되어 있지요(1 열왕 14,25-26; 2 역대 12,2-12). 이집트 군은 리비아인, 카르가(Kharga)와 다클라(Dakhla)의 오아시스에서 온 수키임(Sukiim) 사람들, 그리고 누비아 출신 에티오피아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시삭이 룩소르에 있는 아몬 신전 남서쪽 모퉁이에 세운 ‘부바스티스 현관’에 과시용으로 새겨 놓은 비문만이 그가 유다 네겝(남방 땅)뿐 아니라 예로보암의 영토까지 원정했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비문에는 그가 점령한 지역의 명단이 위, 아래 두 단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윗단은 이스라엘 성읍이고, 아랫단은 유다, 그중에서도 주로 네겝 지역의 지명들입니다. 이 도시들 명단은 왕년의 파라오들의 비문을 묘사한 것이 아닌 원본임이 분명합니다. 이전의 이집트 문서들에서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지명들이 이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과 심지어 므기또와 벳 산같이 잘 알려진 장소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철자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요. 또 므기또에서 발견된 시삭의 조각상 파편은 그가 실제로 잠시나마 이 성읍을 점령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트랜스요르단의 수콧과 푸느엘로 진격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예로보암을 이스라엘의 동쪽 본거지까지 추격했음을 알려줍니다. 아랫단에 기록된 지명은 남쪽 원정에 대한 것으로 그 지명들의 위치가 거의 확인되지 않아 훨씬 더 불확실합니다. 후기 아람어 하그라(Hagra)에 해당하는 셈어(‘hqr’)을 통해 여덟 개 장소는 중심 요새로 밝혀졌지요. 파티스(Patish) 외에 두 요새의 지명만 알아볼 수 있는데, 둘 다 ‘아랏’입니다. 두 곳의 아랏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사실 네겝 지역 등에서는 이미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아랏 라빠는 텔 아랏에 있었던 성경 속 성읍일 가능성이 높으며, ‘여라흐므엘 집안의 아랏’은 텔 말하타(Tell Malhata) 일 수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brm’이라는 ‘요새’는 아브람(Abram)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투트모스 3세의 비문과 유사한 용례로서 아벨림(Abelim)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 지역의 요새는 ‘네겝’이라는 이름을 담고 있으며, 이 중 둘은 에센(2 사무 23,8) 및 수하 사람(1 역대 4,11)과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게베르(Geber)의 샘’은 에츠욘 게베르를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에도 아마도 에돔의 수중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삭이 원정에 나선 주된 목적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핵심 요새들을 파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북쪽으로는 요르단 강과 이즈르엘의 지배권에 마침표를 찍었지요. 예로보암과 르하브암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시삭이 침략을 정복으로 바꿀 만큼 강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무슨 이유로 이전에 자신의 신하였던 예로보암에게 무력을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통일 이스라엘 왕정 아래서 진력이 난 필리스티아가 그를 부추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삭은 기원전 925년 재위 25년에 부바스티스 현관 건축에 사용할 돌을 조달하기 위해 채석장을 열라고 명령했는데, 그는 이 현관 위에 자신의 성공적인 필리스티아 출정 포고문을 새겨 넣었습니다.

4. 아비야의 정복(기원전 911년경)

“예로보암 임금 제십팔년에 아비야가 유다의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세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미카야인데 기브아 출신 우리엘의 딸이었다. 아비야와 예로보암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아비야는 전투에 능한 정예 용사 사십만을 이끌고 싸우러 나갔고, 그에게 맞서 예로보암은 정예 용사 팔십만을 거느리고 전열을 갖추었다. 그때에 아비야가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있는 츠마라임 산 위에 서서 말하였다. “예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은 내 말을 들어라. … 그러나 예로보암은 이미 복병을 유다군 뒤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렇게 이스라엘군은 유다군 뒤에 복병을 숨겨 두고 그들과 정면에서 맞섰다. 유다군이 돌아보니, 전투가 앞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부르짖었다. 사제들이 쇠 나팔을 불자, 유다군은 함성을 올렸다. 유다군이 함성을 올릴 때, 하느님께서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예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치시니, 이스라엘 자손들이 유다 앞에서 도망쳤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군을 유다군의 손에 넘겨주시어, 아비야와 그의 군대가 적들을 크게 무찔렀다. 이스라엘에서 쓰러져 죽은 정예 군사는 오십만이나 되었다. (2 역대역대 13,1-4; 13-17)”

유다와 이스라엘 적대 상태는 유다 왕 르하브암, 아비야, 아사 그리고 이스라엘의 예로보암, 바아사 왕조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시삭이 원정을 다녀간 후 두 왕국은 상당히 지쳐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요. 그럼에도 공개적인 첫 교전이 아비야의 짧은 통치 기간(기원전 913-911년/910년)에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츠마라임에서의 격렬한 접전 후 이스라엘은 베텔, 여사나, 에프론(오프라)을 남겨둔 채 후퇴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비야는 두 나라 간 경계를 베텔 북쪽까지 확장시킴으로 벤야민 지파의 성읍 명단(여호 18,21-24)에 나타난 ‘공식적인’ 북쪽 경계를 아우르게 된 듯합니다.

이렇게 참패를 당한 직후 이스라엘에서는 예로보암 1세가 죽고 그 아들 나답이 뒤를 이었는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스티아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나답은 이스라엘 군대를 거느리고 기브톤을 포위 공격하던 중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에게 암살당했습니다(1 열왕 15,27; 기원전 909년). 그 사이에 유다 왕 아비야도 최후를 맞았고, 그의 아들 아사가 뒤를 이었습니다(기원전 911/910년). 이스라엘의 왕이 된 바아사는 혹 유다에 대해서는 대립을 고수했는지 모르지만 필리스티아와는 전쟁을 추진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한데, 이는 아마도 그가 내정에 전념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아사는 십 년간(기원전 909-899년경) 평화를 누리면서 유다의 국력을 키울 수 있었지요(2 역대 14,1-8).

이 평화는 에티오피아 사람 제라의 침공으로 깨져 버렸습니다. 제라는 북부 헤자즈(Hejaz) 출신으로 기원전 904-890년에 아라비아를 통치했던 지도자인 듯하며(창세 10,7; 2 대하 21,16; 하바 3,7), 그가 이 전투에 필리스티아를 끌어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네겝에 새로이 재건된 유다의 요새 일부를 파괴하면서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제라가 유다의 평지(세 펠라) 지역으로 침투해 들어오려 하자 아사는 ‘마레사 북쪽’ 골짜기에서 그의 군대를 물리쳤어요. 유다 군은 네겝 서부를 지나 역으로 적을 추격하여 ‘그라르 사면’을 파괴하고 그곳 성읍의 정착민들은 물론 목동들의 천막까지 약탈했습니다(2 역대 14,13-15). 이 승리 후 아사는 고취된 민족정신에 편승하여 종교 제도를 개혁하고 왕정을 지지할 중앙 성소 제도를 강화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가 백성을 소집한 것은 그의 통치 15년(2 역대 15,10)인 기원전 896년으로 유다 왕국이 통일 왕국에서 분리된 지 35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이렇게 참패를 당한 직후 이스라엘에서는 예로보암 1세가 죽고 그 아들 나답이 뒤를 이었는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스티아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나답은 이스라엘 군대를 거느리고 기브톤을 포위 공격하던 중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에게 암살당했습니다(1 열왕 15,27; 기원전 909년). 그 사이에 유다 왕 아비야도 최후를 맞았고, 그의 아들 아사가 뒤를 이었습니다(기원전 911/910년). 이스라엘의 왕이 된 바아사는 혹 유다에 대해서는 대립을 고수했는지 모르지만 필리스티아와는 전쟁을 추진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한데, 이는 아마도 그가 내정에 전념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아사는 십 년간(기원전 909-899년경) 평화를 누리면서 유다의 국력을 키울 수 있었지요(2 역대 14,1-8).

이 평화는 에티오피아 사람 제라의 침공으로 깨져 버렸습니다. 제라는 북부 헤자즈(Hejaz) 출신으로 기원전 904-890년에 아라비아를 통치했던 지도자인 듯하며(창세 10,7; 2 대하 21,16; 하바 3,7), 그가 이 전투에 필리스티아를 끌어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네겝에 새로이 재건된 유다의 요새 일부를 파괴하면서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제라가 유다의 평지(세 펠라) 지역으로 침투해 들어오려 하자 아사는 ‘마레사 북쪽’ 골짜기에서 그의 군대를 물리쳤어요. 유다 군은 네겝 서부를 지나 역으로 적을 추격하여 ‘그라르 사면’을 파괴하고 그곳 성읍의 정착민들은 물론 목동들의 천막까지 약탈했습니다(2 역대 14,13-15). 이 승리 후 아사는 고취된 민족정신에 편승하여 종교 제도를 개혁하고 왕정을 지지할 중앙 성소 제도를 강화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가 백성을 소집한 것은 그의 통치 15년(2 역대 15,10)인 기원전 896년으로 유다 왕국이 통일 왕국에서 분리된 지 35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