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 왕국(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이야기 3: 모압과의 전쟁, 아시리아 침공 및 예후의 모반

분열 왕국 시대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은 때로는 적대 관계로, 또는 동맹을 맺어 이웃 나라들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모압과의 전쟁, 그리고 아시리아가 침공한 사건과 예후의 모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1. 모압과 동맹군이 유다 침략 시도와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압 침공 (기원전 852,848년)

1) 모압과 동맹군의 유다 침략 시도

“그 뒤에 모압 자손들과 암몬 자손들이 므운 사람들과 함께 여호사팟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전령들이 와서 여호사팟에게 보고하였다. “큰 무리가 바다 건너 에돔에서 임금님을 치러 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하차촌 타마르, 곧 엔 게디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들과 모압과 세이르 산 주민들에게 복병을 보내시니, 그들이 패배하였다. 그러자 암몬 자손들과 모압이 세이르 산 주민들에게 맞서 일어나, 그들을 완전히 전멸시켰다. 암몬 자손들과 모압은 세이르 산 주민들을 다 죽인 다음, 이번에는 동료들끼리 서로 쳐 죽였다. 유다 사람들이 광야의 망대에 이르러 무리를 바라보니, 주검들만 땅에 쓰러져 있고 살아남은 자는 하나도 없었다. (2 역대 20, 1-2; 22-24)”

모압 왕 메사는 실패로 끝난 유다 침공(2역대 20, 1-28)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다 왕 여호사팟은 아라비아와 필리스티아를 오가는 교역로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의 왕국은 강력하고도 견고하게 방비되어 있었지요(2역대 17, 10-13). 아람 왕 벤 하닷은 이 여호사팟이 이스라엘을 후원하는 것에 큰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스라엘의 강적인 메사는 자연스럽게 아람의 다마스쿠스와 동맹이 되었습니다. 메사의 침략군은 모압, 암몬, 그리고 미네안 사람들(Minaeans, 희랍어 역본)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중 미네안 사람들은 아마도 1역대 20, 1의 므운 사람이자 2역대 20, 10. 23 절의 세이르 산(서쪽) 사람들로 보이며, 이들은 필리스티아로 가는 무역로를 이용하는 대가로 여호사팟에게 조공을 바치던 아라비아인들 중 일부였던 것 같습니다(2 역대 17, 11). 아람에 선동된(2 역대 20, 2) 모압 동맹군은 사해를 건너 엔게디에 전초 기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여호사팟과 그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드코아 들로 나갔을 때 그들은 이미 자중지란에 빠져 있었어요. 이렇게 해서 침략군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2)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압 침공, 여호람이 당한 손실 (기원전 852,848년)

“그러고는 그가 “어느 길로 올라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고 묻자, 요람 임금이 “에돔의 광야 길로 올라갑시다.” 하고 대답하였다.(1 열왕 3,8)”

모압의 공격이 실패로 끝나면서 여호사팟은 에츠욘 게베르 기지를 포함한 남쪽 도로를 장악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왕 아하즈야와 협력하여 오피르와의 교역에 필요한 배를 진수시키려 했으나 난파당하고 말았지요(1 열왕 22, 48; 2 역대 35, 37). 아하즈야가 갑자기 죽고 난 후에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그의 형제 요람(여호람)은 여호사팟과 함께 모압 출정에 나섰습니다. 유다의 속국인 에돔 왕도 이 원정에 동참했습니다. 연합군은 아람이나 암몬의 반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남쪽으로 모압을 침공하기로 하여 사해 남단을 돌아가는 ‘에돔 길’로 행군했습니다. 광야 길에 이르러 폭염과 갈증으로 어려움을 겪던 연합군은 갑작스럽게 쏟아진 홍수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돌발 홍수는 아라바 협곡에서는 흔한 현상으로 고원 위로 쏟아진 비가 지표수가 되어 갑작스럽게 아래쪽으로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이후 유다 연합군은 모압 남부 지방을 크게 파괴했습니다. 메사의 비문에는 “크모스가 내게 ‘내려가서 하루로넨(Hauronem)에서 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내려가서 (싸웠는데…)”(모압 석비, 32-33행)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호르나임으로 가는 길’(이사 15, 5; 예레 48, 3.5.34)로 올라간 것을 말하는 듯합니다. 어쨌든 메사는 모압의 남쪽 수도인 키르 하레셋에서 포위해 공격해 오는 것을 견디어 낼 수밖에 없었지요. 그가 성벽 위에서 제물로 바친 젊은이는 사로잡은 에돔 왕의 아들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전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고 연합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사팟이 기원전 848년에 죽으면서 여호람이 유다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사마리아 왕실 출신의 아탈야였지요. 여호람은 왕국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자기 형제들을 모두 죽였습니다(2 역대 21, 2-4). 그 후 에돔이 유다의 지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여호람은 이를 진압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지요(2열왕 8, 20-22; 2역대 21, 8-10). 또한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 맞서는 산당들을 유다 산악지역(현재 멸망산이라 불리는 산)에 세우자 세펠라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사제의 성읍인 리브나도 반역을 선언했습니다(2역대 21, 10-11). 이렇게 남서쪽 측면이 무방비 상태가 되면서, 전부터 여호사팟이 부과한 과중한 조공에 보복할 기회를 노리던 필리스티아와 아라비아 사람들에게 유다 침략의 빌미가 주어졌습니다. 이들은 왕실의 보고를 약탈하고, 왕위 계승자인 여호아하즈(아하즈야)를 제외한 왕의 자손을 모두 죽였습니다(2역대 21, 16-17). 이후 여호람이 불치의 위장병으로 죽자(기원전 841년; 2역대 21, 18-20) 여호아하즈가 왕이 되었습니다.

2. 아시리아의 후속 출정 (기원전 849-845년)과 예후의 반란 (기원전 841년) , 살만 에제르 3세의 출정 (기원전 841년)

1) 아시리아의 후속 출정(기원전 849-845년)

“재위 10년, 나는 여덟 번째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다…. (살만 에제르 3세의 연대기)”

살만 에제르 3세는 기원전 849, 848년에 계속해서 시리아 출정을 나갔지만, 목표한 바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원정을 갈 때마다 아람 다마스쿠스 왕 하닷 에제르(벤 하닷 2세)가 이끄는 시리아(She’arian) 왕들의 동맹군과 부딪혔기 때문이지요.

예후가 이스라엘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 아람 다마스쿠스에서는 하자엘이 벤 하닷 2세를 배반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습니다.

결국 동맹군의 강력한 지도자였던 하닷 에제르가 죽고,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지만 이 젊은 군주는 이내 아자엘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2) 예후의 모반 (기원전 841년)

“예후가 이즈르엘에 이르렀을 때, 이제벨은 소식을 듣고 눈화장을 하고 머리를 꾸민 다음, 창문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후가 문에 들어서자 이제벨이 말하였다. “자기 주군을 죽인 지므리 같은 자야, 평안하냐?” 그러자 예후가 창문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거기 누가 내 편이냐? 누구 없느냐?” 그러자 내시 두세 명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예후가 “그 여자를 아래로 내던져라.” 하고 일렀다. 내시들이 그 여자를 아래로 내던지자 그 피가 담벼락과 말에 튀었다. 예후가 그 여자를 짓밟고, 안에 들어가서 먹고 마신 다음, “저 저주받은 여자를 찾아다가 묻어 주어라. 그래도 임금의 딸이 아니냐?”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여자를 묻어 주러 나가 보니, 두개골과 발과 손바닥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이 돌아와 예후에게 보고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당신의 종 티스베 사람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그대로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즈르엘 들판에서 개들이 이제벨의 살을 뜯어 먹고뜯어먹고, 이제벨의 주검이 이즈르엘 들판의 거름이 되어 아무도 그것을 이제벨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2 열왕열왕 9,30-37)”

예후의 모반 경로 지도

아람과 이스라엘의 적대 관계는 요람의 통치 기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유다의 새로운 왕 아하즈야의 협조를 얻은 요람은 길앗 라못에서 또다시 아람과 맞붙었습니다(2 열왕 8, 28; 2 역대 22, 5). 여기서 요람은 부상을 입고 이즈르엘에 있는 겨울 궁전으로 돌아갔으나 이내 병이 들었고, 이 소식을 들은 아하즈야가 그를 문병하러 내려왔어요. 그 사이에 예후가 예언자에게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요람과 그 어머니 이제벨을 암살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아하즈야도 치명상을 입고 달아났으나 므기또에서 죽고 말았지요. 왕위에 오른 예후는 먼저 왕국 전반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바알 종교의 뿌리를 대대적으로 근절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우방 페니키아를 잃었고 심각한 내부 분열을 겪었습니다.

3) 살만 에제르 3세의 출정 (기원전 841년)

“나는 티로와 시돈의 주민들 그리고 오므리의 아들 예후로부터 조공을 받았다.(살만 에제르 3세의 연대기)”

아시리아 임금 살만 에제르 3세의 모습

(아시리아 임금 살만 에제르 3세)

기원전 841년 다시 시리아로 온 살만 에제르는 이번에는 스니르 산에서 하자엘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뒤이어 다마스쿠스를 포위했으나 이 성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수많은 도시를 파괴하면서 하우란(Hauran) 산맥으로 나아갔고, 서쪽으로도 진군하여 벳 아르벨(호세 10,14)과 아마도 하초르(지층 stratum, VII)까지 멸망시킨 것 같습니다. 해안에 이는 ‘바알리라시(Baali-rasi, 바알로스[Baal-rosh]) 산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조각상을 세웠는데, 이곳은 아마도 엘리야 이야기와 기타 문헌들에서 바알 숭배의 중심지로 나타나는 카르멜 산인 것 같습니다. 이집트 문헌에서 카르멜 산은 ‘로슈게데스(Rosh-kedesh)라 불리며, ‘바알로스’라는 이름은 아마도 ‘바알 곳’ 이라는 의미인 듯합니다. 당시 카르멜은 티로와 이스라엘의 경계 지점으로, 살만 에제르가 이 두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앗시리아인들은 이스라엘 왕국을 ‘오므리의 땅’으로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예후도 그들의 문헌에는 ‘오므리의 아들’로 언급되어 있으며, 살만 에제르의 블랙 오벨리스크에서도 이와 같이 불립니다. 살만 에제르는 카르멜에서 페니키아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나르 엘 칼브(Nahr el-Kalb, ‘[개(dog) 강이라는 뜻],’ 헬라 시대에는 리쿠스[Lycus]라 불림) 입구에 있는 절벽에 전승 비문을 새겼습니다. 이곳에는 이미 이전에 앗시리아와 이집트가 남긴 전승 기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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