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 왕국(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이야기 4: 아람의 패권과 아마츠야, 여호아스, 예로보암 2세의 활동

분열 왕국 초기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은 외부적으로 아람과 아시리아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당시의 아람과 아시리아, 그리고 두 왕국의 임금들인 아마츠야와 여호아스, 그리고 예로보암 2세의 정복 활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의 활동도 알아볼까요?

글의 순서



1. 분열 왕국 시대: 아람의 패권, 엘리야의 유랑과 아시리아 아다드니라리 3세의 다마스쿠스 원정

1) 아람의 패권 (기원전 841-798년경)

“그때에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조금씩 찢어 내기 시작하셨다. 하자엘이 이스라엘의 온 영토를 공격하였다. 그는 요르단 강 동쪽, 갓 사람들과 르우벤 사람들과 므나쎄 사람들이 사는 길앗의 모든 땅, 곧 아르논 강 곁에 있는 아로에르에서 길앗과 바산에 이르는 지역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2 열왕 10, 32-33)”

수년 간 아시리아는 레반트 지역과는 상관없는 일들에 말려든 것으로 보입니다. 아람 왕 하자엘은 예후(기원전 841-814년)와 여호아하즈(기원전 814/813-798년) 두 왕이 연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트랜스요르단(현재 요르단)을 마음껏 정복했습니다. 아람이 길앗에서 저지른 만행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래도록 잊지 못할 만큼 잔인했으며(아모 1,3),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축소되었고 군사력은 위축되었습니다(2 열왕 13, 7).

아시리아 제국의 발흥과 번영

유다에서는 아하즈야 왕이 죽자 모후 아탈야가 손자들을 죽이고 권력을 거머쥐었습니다. 갓난아기였던 요아스만이 대사제 여호야다의 손에 구출되어 비밀리에 양육되었지요. 요아스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기원전 835년) 쿠데타가 일어나 아탈야가 암살당했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자(기원전 800년경) 요아스 왕은 그동안 여호야다의 영향으로 폐쇄해 오던 우상의 제단 곧 예루살렘 성전에 맞서는 지역 산당들을 다시 열도록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야다의 아들인 즈카르야는 이를 비난하다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습니다(2 역대 24, 17-22).

하자엘의 긴 통치가 끝나갈 무렵 곧 이스라엘의 여호아하스와 유다의 요아스가 죽기 전 즈음에 아람이 해안 평야를 급습하여(기원전 798년경) ‘가드’라는 성읍을 점령했습니다. 이곳은 필리스티아의 가드일 수도 있지만 갓 림몬(기타임) 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 후 하자엘의 군대는 유다를 위협 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타격부대로 수적으로 우세한 유다 군을 물리쳤지요. 요아스는 치명상을 입고 엄청한 금액을 배상해야 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왕궁의 음모로 죽고 맙니다(기원전 796년).

2) 엘리야의 유량 (기원전 9세기 중반)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 (1 열왕 19,13-14)”

엘리야의 활동 영역 지도

통일 왕정 시대부터 예언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의 삶에 기여해 왔습니다. 왕국 분열 후에는 정치 조언자나 비평가로 많이 언급되는데, 특히 유다에서 그러했지요. 오므리 왕조 통치 아래에서 온 백성이 바알을 숭배하던 암흑기에 두 명의 예언자가 이 가나안(페니키아) 종교에 맞설 하느님의 용사들로 세워졌는데, 바로 길앗 출신의 엘리야와 그 제자인 요르단 골짜기의 엘리사였습니다. 당시 오므리 왕가와 티로 왕 엣 바알 간의 유대로 페니키아의 문화와 정치가 이스라엘로 밀려 들어오면서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티로 왕의 딸로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가 된 이제벨로서는 이스라엘의 율법 이면의 정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합에게 “이스라엘 왕권을 행사하는(1 열왕 21,7)” 방법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제벨은 율법의 정의를 악용하여 이즈르엘 사람 나봇을 살해함으로 엘리야를 분노하게 했는데,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1 열왕 21,19)”는 엘리야의 책망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울려 퍼집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 및 사목은 국경을 초월하여 여러 민족에게까지 미쳤는데, 이는 두 예언자가 그들 역시 주님의 도구로 사용된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3) 아다드니라리 3세의 다마스쿠스 원정 (기원전 796년)

아시리아의 강력한 새 왕 아다드니라리 3세(Adad-Ninari III)가 힘이 강해지면서 다시금 서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아시리아 총독의 이름별로 중요한 사건과 연대를 정리해 놓은 에포님 연대기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805년 ‘아르밧,’ 기원전 804년 ‘하자지(Hazazi),’ 기원전 803년 ‘바알리(Ba’ali),’ 원정, 기원전 802년 ‘해안에 도착.’ 다음으로 기원전 796년에는 서쪽 지역에서 다마스쿠스 정북 쪽에 위치한 ‘만수아테(mansuate) 지방’을 원정했습니다. 바로 이 정복 전쟁 중에 다마스쿠스 지역이 포위 공격을 당한 것이 분명하며, 이로 인해 다마스쿠스 왕 ‘마리(Mari, 2 열왕 13, 3의 벳 하닷 3세)는 막대한 조공을 아시리아 왕에게 바쳐야만 했습니다. 다른 비문은 ‘오므리의 땅’이라 불리는 ‘사메리나(사마리아, Samerina)’의 요아스는 물론 에돔과 필리스티아도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다마스쿠스는 이 전쟁에서 패하여 무력해지고, 최대의 적인 하맛과의 충돌에 다시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아다드나리 3세의 다마스쿠스 원정

아다드니라리 3세 통치 말년에 그의 뒤를 이은 살만 에제르 4세는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새롭게 등장한 후리안(Hurian) 왕국 우라르투(아라랏, Ararat)와의 전쟁에 힘을 쏟았지요. 다마스쿠스 원정을 마지막으로 이같이 서쪽 지역에 대한 아시리아의 침입이 중단되면서 이곳에 큰 세력의 공백이 생기면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힘 있는 통치자들은 이 지역 곳곳에 세력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2. 분열 왕국 시대: 아마츠야와 여호아스의 전쟁/여호아스와 예로보암 2세의 정복 활동

1) 아마츠야와 여호아스의 전쟁 (기원전 793-792년 경)

“그 무렵에 아마츠야가 예후의 손자이며 여호아하즈의 아들인,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에게 사신들을 보내어 이런 말을 전하였다. “자, 우리 한번 겨루어 보자!” 그러나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는 유다 임금 아마츠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대답하였다. “레바논의 엉겅퀴가 레바논의 향백나무에게 ‘그대의 딸을 내 아들에게 아내로 주오.’ 하고 전갈을 보냈다. 그러자 레바논의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엉겅퀴를 밟아 버렸다.

그대는 에돔을 쳐부수었다고 마음이 우쭐해져 오만하게 구는데, 집에나 머물러 있어라. 어찌하여 재앙을 일으켜 그대 자신과 유다를 함께 쓰러뜨리려 하는가?” 그러나 아마츠야가 듣지 않자,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는 올라가 유다에 속한 벳 세메스에서 유다 임금 아마츠야와 겨루었다. 유다군은 이스라엘군에게 패배하여 저마다 자기 천막으로 도망쳤다.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는 아하즈야의 손자이며 요아스의 아들인, 유다 임금 아마츠야를 벳 세메스에서 사로잡았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에프라임 성문’에서 ‘모퉁이 성문’까지, 예루살렘 성벽 사백 암마를 헐었다. 그는 주님의 집과 왕궁 창고에 있는 금과 은과 기물을 모조리 빼앗고, 인질까지 잡아 사마리아로 돌아갔다. (2열왕 14, 8-14)”

아마츠야와 여호아스의 정복 전쟁 지도

기원전 796년 여호아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마츠야는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와의 동맹을 모색했습니다(2 열왕 14, 9; 2 역대 25, 18). 그 후 그는 이스라엘 용병을 거느리고 에돔 정복에 나섰나가 한 예언자의 경고를 듣고 전투 바로 전에 용병들을 해산시켰습니다. 아마츠야는 자신의 군대만으로 에돔 사람들을 이기고 그 땅에 대한 유다의 지배권을 재확립했지요(2열왕 14, 7; 2역대 25, 5-12). 헛걸음치게 되어 화가 난 이스라엘 용병들은 전에 유다가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아간 성읍들을 약탈했습니다. 이에 아마츠야는 여호아스에게 싸움을 걸어 응수했습니다. 여호아스는 벳 세메스에서 아마츠야와 맞서기 전에 우선 예로보암 2세를 공동 통치자로 세웠습니다(기원전 793년). 이 전쟁에서 여호아스는 아마츠야를 무찌르고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때 예루살렘의 방어 시설의 일부가 무너졌고, 백성들은 잡혀간 아마츠야를 대신하여 그 아들인 16세의 아자르야(우찌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기원전 792년, 2열왕 14,12; 2역대 26,1). 아마츠야는 여호아스가 죽은 후(기원전 782년)에야 풀려나 15년을 더 살았지만, 왕실 음모에 희생되어 기원전 767년 라키스에서 죽었습니다(2열왕 14, 19-20; 2역대 25, 27).

2) 여호아스와 예로보암 2세의 정복 활동 (기원전 790-782년경)

“유다 임금 요아스의 아들 아마츠야 제십오년에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의 아들 예로보암이 임금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마흔 한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그가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영토를 되찾았다. 이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갓 헤페르 출신으로 당신의 종인,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 그대로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이스라엘을 도와주는 이 없이, 그들이 매우 쓰라리게 고생하는 것을 주님께서 보셨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리겠다고 하지는 않으셨으므로, 여호아스의 아들 예로보암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셨다. 예로보암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한 모든 일, 그의 무용과 그가 한 전쟁, 그리고 그가 유다에 속하였던 다마스쿠스와 하맛을 이스라엘로 복귀시킨 일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 임금들의 실록에 쓰여 있지 않은가? (2 열왕열왕 14, 23-28)”

여호아스와 예로보암 2세의 정복 활동

성경은 여호아스가 아람 다마스쿠스를 세 번 물리쳤다(2 열왕 13, 18-19)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 한 번은 골란의 아펙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것(2 열왕 13,17)을, 그리고 나머지 두 번은 아들 예로보암 2세와 함께 카르나임과 로 드비르에서 승리한 것을 의미하는 듯합니다(아모 6, 13). 아다드니라리에 이어 하맛과의 충돌로 약해져 있던 다마스쿠스는 여호아스와 예로보암 2세가 트랜스요르단에 대한 지배권을 거의 완전히 회복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지요. 예로보암은 이스라엘 영토를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에 이르기까지” 회복했습니다(2 열왕 14, 25). 하맛은 다마스쿠스와 함께 이스라엘에 굴복하였으나(2 열왕 14, 28), 메드바 평야는 여전히 모압의 수중에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가드와 르우벤 사람들이 바산과 동부 목초 지대 너머 유프라테스 강 쪽에도 거주하게 되었습니다(1 역대 5, 9-11).

여호아스가 죽은 뒤(기원전 782년) 아마츠야가 풀려난 것으로 보아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왕가 사이에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진 듯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통일 왕국 시대의 북부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습니다. 바산의 대초원(아모 4, 1)으로부터 카르멜의 농장(아모 1, 2)에 이르는 광대하고 비옥한 농경지에서는 곡물, 포도주, 기름 등이 풍족하게 수확되었습니다(호세 2, 8). 또한 이즈르엘 계곡과 샤론 평야뿐만 아니라 트랜스요르단의 대상로까지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로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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