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순서
1. 사마리아 오스트라카/ 유다 지파의 행정구역
1) 사마리아 오스트라카 (기원전 784-783년)
“제 구 년, 야지스에서 아히노암에게, 오래된 포도주 한 단지, 제 십오 년, 헬렉에서 아사, 아히멜렉, 헬레스에게 하제롯 산. (사마리아 오스트라카, 9번과 23번)”
글자가 새겨진 60여 개의 도기 파편(오스트라카) 무더기가 고대 사마리아의 발굴 작업 중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므나쎄 산악지대에서 여러 관리들에게 보내는 포도주나 기름의 선적에 대해 기록해 놓은 행정문서였습니다. 이 도기 파편들은 모두 버려져 후대에 세워진 한 건물의 바닥을 채우는 데 사용된 상태로 발견되었지요. 각각에 기록된 내용들은 버려지기 전에 이미 파피루스 원본에 기록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기록 내용은 전반적으로 구조가 같은데, 왕의 재위 연도로 시작해서 물건의 수취인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세부 사항에 의해 내용은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한쪽은 ‘묵힌 포도주’나 ‘정제된 기름’(특별히 화장품으로 제조된 것) 한 단지(병) 등 보낸 상품을 밝히고 있는 부류이고, 다른 쪽은 상품 내용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이쪽 상품은 모두 포도주나 기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물건을 보낸 사람이 언급되어 있는 그룹입니다. 둘 다 상품을 보낸 성읍 이름은 밝히고 있는데, 상품 내역을 생략하고 있는 쪽은 성읍이 위치해 있는 가문(종족) 구역을 덧붙였지요. 또한 이 두 그룹은 각각의 연대 표기 방식으로도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양쪽에 사용된 서체가 상당히 비슷해서 고문서학(서체학)에 근거해서는 연대를 구별해 낼 수가 없지만 기록에 사용된 도기 파편의 상대적 연대는 기원전 8세기의 제2분기입니다.
연대표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는 기원전 798년에 왕위에 올랐고, 그의 아들 예로보암 2세는 아마츠야와 전쟁을 벌이기 직전인 기원전 793년에 공동 통치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로보암 제10년인 기원전 783년은 동시에 여호아스 15년이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증거를 충족시키는 합리적인 추론을 하면 ‘제구, 십 년’이 적힌 것들은 예로보암 2세, 그리고 ‘제15년’이라 적힌 것들은 여호아스와 연결시킬 수 있지요.
사마리아 오스트라카는 사회, 지리적으로 대단히 흥미로운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성경 자료에도 나타나지 않는 방대한 지명 자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종종 사마리아 산악지대에 있는 아랍인 마을 이름과 일치하기도 합니다. 사실 여기에 기록된 장소들은 모두 므나쎄 지파의 상속지 안에 있지요. 성경에 므나쎄 지파의 성읍 명단이 없었기에, 사마리아 오스트라카를 통해 얻은 정보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제15년’이라 적힌 것들에 언급된 지파(종족)의 구역은 모두 성경의 므나쎄/마키르 족보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특정 종족과 관련되어 위치 파악이 가능한 성읍들을 통해 각 종족의 전체적인 위치를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므나쎄의 주요 여섯 아들 중 다섯의 이름은 오스트라카에서 지역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나타나지 않는 헤페르는 그 아들 츨롭핫의 두 딸들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딸들이 상속재산 받을 권리를 얻게 된 선례였습니다(민수 26, 28-34; 27, 1-4[5-11]; 36,10-12[비교, 1-8절]; 여호 17, 1-6, 1역대 7, 14-19). 지파의 족보에 관한 정보는 므나쎄 지파의 성읍과 지방들의 정착 양상에 나타난 것처럼 사회학적 현실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 유다 지파의 행정구역
“아사의 아들 여호사팟이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여호사팟은 이스라엘에 맞서 자신을 튼튼하게 하였다. 그는 유다의 모든 요새 성읍에 군대를 배치하고, 유다 땅과, 자기 아버지 아사가 점령한 에프라임의 성읍들에 수비대를 두었다. (2역대 17, 1-2)”
유다 지파의 정착 양상은 여호수아 15,2 0-63에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성경에서 가장 상세한 지리 정보를 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서의 기자가 써넣은 원문의 날짜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여호사팟이 행정 조직을 재정비(2역대 17, 1-13)하고 왕자들을 각 지방 관장에 임명했다(2역대 21, 2-3)는 기록에 대해 유다 지파의 성읍 명단이 그의 재위 기간인 기원전 9세기 중반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기원전 8세기나 7세기의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성읍 명단은 유다, 칼렙, 시메온의 족보에 나타난 다른 정착지들(1역대 2-4장)과 더불어 벳 세메스, 아도라임 등의 핵심 성읍들이 빠져 있는 등 온전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한 구역 전체가 빠져 있지만, 희랍어 역본을 통해 일부를 보충할 수 있습니다(여호 15, 29).
여호수아서의 성읍 명단은 혈연보다는 철저하게 지리적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큰 유다’ 지역의 종족, 가문의 지리적 분포(1 역대 2-4장)와 비교해 보면 친족 간 정착 양상이 여호수아 15,20-63에 나타난 지리적 경계와 일부분만 일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 지역의 4가지 주요 생태 구역인 네겝(남쪽 지역), 평지(세펠라), 산악지대, 목초 지대(광야)는 이 명단을 구성하는 근간이 됩니다. 이곳의 성읍은 지리적으로 묶어서 분류할 수 있는데, 네겝과 목초 지대는 각각 하나의 지리군으로 분류됩니다. 평지는 세 개의 지리군을 가지며, 이는 세 개의 행정구역에 해당됩니다. 산악지대는 희랍어 역본에 보존된 지역을 포함해 여섯 개의 지리군을 가집니다. 이렇게 총 11개 지리군에 아직 유다의 지배 아래 있던 벤야민 최남단 지역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레위인의 성읍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평지와 산악 지대 남부 지역에서는 와디를 사이에 있는 분수계를 따라 구역 간 경계가 그어졌지요. 또 제2구역에서는 성읍 명단이 그 지방의 시계 방향, 제4구역에서는 그 반대 방향의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2. 우찌야의 업적/ 예로보암 2세와 우찌야 시대의 이스라엘과 유다
1) 우찌야의 업적 (기원전 782-750년)
“유다의 모든 백성이 나이 열여섯 살인 우찌야를 데려다가, 그의 아버지 아마츠야의 뒤를 이어 임금으로 세웠다. 아마츠야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든 뒤에, 우찌야는 엘랏을 재건하여 유다에 복귀시켰다. 우찌야는 열여섯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쉰두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여콜야인데 예루살렘 출신이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 아마츠야가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다. 우찌야는,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 준 즈카르야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느님을 찾았다. 그리고 그가 주님을 찾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그가 성공하도록 해 주셨다. …그러자 그의 명성이 널리 퍼져 나갔다. 그가 이처럼 강하게 되기까지는 놀라운 도우심이 있었다. (2역대 26, 1–4.15)”
우찌야가 스물여섯 살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가 죽었습니다. 아마츠야는 예루살렘으로 송환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이스라엘 왕 예로보암 2세의 배려였던 것 같습니다. 두 왕국은 영토 확장을 위한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우찌야는 필리스티아 원정에 나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가드, 야브네, 아스돗의 성벽을 허물고, 아스돗 땅에 자신의 성읍들을 세웠습니다(2 역대 26, 6). 그 후에는 필리스티아와 아라비아인, 므운인들을 제압하고 남쪽에서 승리를 했습니다(2역대 26, 7). 희랍어 역본 2역대 26,7에는 므운 사람들이 그에게 조공을 바쳤고, 그의 명성이 이집트 국경까지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우찌야가 아라비아에서 필리스티아와 이집트에 이르는 무역로를 장악한 것을 의미합니다. 주로 시나이에서 활동하던 므운 사람들은 그동안 대상단과 숙박업을 통해 얻어 오던 이익을 이제 우찌야와 나누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767년 아마츠야가 죽은 후 마침내 우찌야는 엘랏에 요새를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2 열왕 14, 22; 2 대하 26, 2).
유다의 이러한 외부 수익은 국가의 내적인 번영을 다지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방비 상태가 개선되었고(2 역대 26,9), 왕실 가축을 치는 목초지 곧 ‘유대 광야’에 망대와 물 웅덩이가 만들어졌습니다. 또 평지와 해안 평야에 있는 왕의 토지, 특히 필리스티아 북부 정복으로 얻는 땅들이 경작되었고, 농부들은 ‘산악 지대와 카르멜’ 즉 유다 산악지대 북부와 남부에 있는 왕실 포도원을 돌보았습니다(2역대 26,10). 더불어 군대 시설도 확정, 정비되었습니다(2역대 26,11-15).
기원전 750년 우찌야의 아들 요탐이 유다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는데, 이는 우찌야 왕이 예루살렘 사제직을 침해하려다가 불치병에 걸렸기 때문이었지요(2 열왕 15,5-7; 2역대 26,16-23). 요탐은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에서 아버지의 건축 사업을 계속 이어 나갔습니다(2 역대 27,3-4). 그의 업적 중 암몬을 정복하여 3년 동안 조공을 받은 것(2 대하 27,5)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이로써 유다는 이전까지만 해도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영역이었던 트랜스요르단에 처음으로 중요한 지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우찌야는 기원전 740년까지 살았는데, 기원전 743년에 티글랏 필에세르 3세는 이 우찌야가 아시리아의 레반트 진격을 저지하려는 서쪽 국가 동맹을 이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2) 예로보암 2세와 우찌야 시대의 이스라엘과 유다 (기원전 8세기 중반)
“유다 임금 요아스의 아들 아마츠야 제십오년에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의 아들 예로보암이 임금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마흔한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그가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영토를 되찾았다. 이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갓 헤페르 출신으로 당신의 종인,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 그대로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이스라엘을 도와주는 이 없이, 그들이 매우 쓰라리게 고생하는 것을 주님께서 보셨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리겠다고 하지는 않으셨으므로, 여호아스의 아들 예로보암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셨다.구원하셨다.(2 열왕 14, 23-27)”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은 기원전 8세기의 제2분기 동안 진정한번영과 권력을 동반한 마지막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들은 힘을 모아 다시 한 번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남쪽 지방을 가로지르는 세계 교역의 중추를 장악했습니다. 갈릴레아 갓 헤페르 출신의 예언자로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는 이러한 예로보암 2세의 성과를 칭송했습니다(2 열왕 14, 25).
기원전 9세기의 예언자 학교는 기원전 8세기에도 계속해서 번성했습니다. 이곳의 예언자들은 국내외 상황 모두에서 일어나는 윤리적,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트코아 출신 예언자 아모스는 이스라엘 왕실의 제사 중심지인 베텔에서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아모 7,10-17). 또한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주요 적들에게도 심판을 예언했는데, 다마스쿠스는 길앗을 압박한 것(아모 1,3-5), 필리스티아(가자, 아스돗, 아스클론, 에크론)은 에돔이 유다 사람들을 잡아가도록 도운 것(아모 1,6-8), 티로는 그 계획에 함께한 것(아모 1,9-10), 에돔은 유다인들을 동정심도 없이 잔인하게 대한 것(아모 1,11-12), 암몬은 길앗에서 길앗 여자들에게 한 심한 악행을 한 것(아모 1,13-14), 모압은 에돔 임금의 뼈를 불살라 횟가루로 만들어 모독한 것(아모 2,1-3)이 그 이유였지요. 그 후 아모스는 야훼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유다(아모 2,4-5)와 사회 정의를 심각하게 위반하는 이스라엘(아모 2,6-16)에 대하여 분노와 심판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9세기의 사마리아나 다마스쿠스 등의 성곽 도시들이 티글랏 필에세르 3세 같은 거침없는 정복자를 막아 내지 못할 것을 예언했습니다(아모 3,11). 티글랏 필에세르 3세는 인근의 아시리아 우두머리로부터 충분한 군수 지원이 되지 않으면 결코 중요한 출정을 단행하지 않았음에도 쉬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진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한편 출신이 잘 알려지지 않은 호세아 예언자는 자신의 신탁을 통해 사마리아의 종교적 부패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그 지역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