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 왕국(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이야기 6: 아하즈 시대, 아시리아의 북이스라엘 정복과 유배

글의 순서



1. 르친과 페카의 원정/ 아하즈 시대에 이루어진 필리스티아의 정복 활동/ 티글랏 필에세르 3세의 원정

1) 르친과 페카의 원정(기원전 735년)

“아람이 에프라임과 르말야의 아들과 함께 너를 해칠 계획을 꾸미고 말하였다. ′우리가 유다로 쳐 올라가 유다를 질겁하게 하고 우리 것으로 빼앗아 그곳에다 타브알의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자.′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아람의 우두머리는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의 우두머리는 르친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순다섯 해만 있으면 에프라임은 무너져 한 민족으로 남아 있지 못하리라. 에프라임의 우두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우두머리는 르말야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이사야 7, 5-9)”

이스라엘 왕국은 예로보암 2세의 아들 즈카르야가 통치 6개월 만에 암살당하면서(기원전 752년)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살룸은 1개월밖에 다스리지 못했습니다(2 열왕 15, 8-14). 새로운 왕위를 차지한 므나헴은 사마리아에서 10년 간 다스렸고, 그의 아들 프카흐야가 뒤를 이어 2년을 더 통치했습니다(기원전 752-742/741; 2열왕 15, 17-26). 그 사이에 르말야의 아들 페카가 길앗에서 권력을 차지하고 20년을 통치했습니다(호세 5, 3-5). 그는 프카흐야와 화해를 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를 암살하고 8년간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기원전 740-732년; 2열왕 15, 25-31).

유다 왕 요탐은 이러한 북이스라엘의 분열된 정치 상황을 틈타 군사력을 합하여 암몬 왕을 공격해 트랜스요르단에 자신의 기지를 마련했지요. 그러나 아시리아의 티글랏 필에세르 3세가 다시 영토확장의 야망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대다수의 선대 왕들과는 다르게 지역 왕들을 항복시키고 조공을 받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복한 영토들을 합병하여 아시리아 총독들을 파견해 다스리는 지방으로 격하시켰습니다. 또한 정복한 지역의 상류 지배층을 추방하고 아시리아 제국의 다른 지역 유배자들을 그곳에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아시리아의 영구 통치에 반대하는 세력을 억압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티글랏 필에세르 3세는 원정 중에 보급 기지에서 멀리 떨어져 수행해야 하는 긴 일정을 피했습니다. 새롭게 임명된 총독들은 아시리아 군이 다음 지역을 정복할 때 군수와 물자를 보급하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르친과 페카의 유다 왕국 원정

기원전 743년 티글랏 필에세르는 원정 중 예기치 않게 유다의 아자르야가 이끄는 서쪽 지역 국가의 연맹군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연맹군의 항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스라엘 왕 므나헴은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습니다(2열왕 15, 19-20). 이 무거운 짐을 이스라엘 귀족들이 지게 됨에 따른 불만이 야기되면서 불안해졌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3년 후에 페카가 사마리아에서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티글랏 필에세르 3세가 다른 지역, 특히 아라랏(우라르투)으로 관심을 가지며 분주한 동안, 페카는 다마스쿠스 왕 르친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들은 아시리아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자 했지요. 유다 왕 요탐은 그의 아버지 우찌야와 마찬가지로 반 아시리아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예루살렘의 지도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탐은 16년을 다스린 후 아들인 아하즈를 지지하는 반 아시리아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세력들에 의해 사실상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기원전 735년). 아하즈는 티글랏 필에세르 3세에 맞서는 페카와 르친에 합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요탐은 왕위에 오른 지 20년째 되던 해까지 살았습니다(기원전 732/731년; 2 열왕 15, 30).

이에 페카와 르친은 아하즈를 폐위시키고 타브알(Tab’al)아들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즉시 유다 선전포고를 했습니다(이사 7, 4-6). 타브알은 아마도 그 시대에 트랜스요르단에 정착한 유다 귀족 집안 출신으로 나중에 토비야 가문의 조상이 된 사람인 듯합니다. 르친은 먼저 엘랏을 되찾으려는 에돔을 지원했고(2 열왕 16, 6), 에돔은 남쪽에서 유다를 공격했습니다(2 역대 28, 17). 그 사이에 필리스티아는 네겝 서부와 유다의 세펠라(낮은 언덕) 북부를 공격하여 산악지대로 가는 주요 진입로의 수많은 성읍들을 점령했습니다(2역대 28,18). 페카는 끝내 자신의 뜻을 예루살렘에 이룰 수가 없었고, 약탈할 때 사로잡은 포로들마저 돌려보내야 했지요(2열왕 16, 5; 2역대 28, 17; 이사 7, 1-6). 아하즈는 신속하게 티글랏 필에세르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2) 아하즈 시대에 이루어진 필리스티아의 정복 활동 (기원전 735년)

“필리스티아인들도 평원 지대와 유다 남부의 성읍들을 공격하여 벳 세메스, 아얄론, 그데롯, 소코와 거기에 딸린 마을들, 팀나와 거기에 딸린 마을들, 김조와 거기에 딸린 마을들을 점령하고 그곳에 자리 잡았다. (2 역대 28, 18)”

아하즈 시대의 필리스티아 정복 활동

3) 티글랏 필에세르 3세의 원정 (기원전 734-732년)

“이스라엘 임금 페카 시대에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가 와서, 이욘, 아벨 벳 마아카, 야노아, 케데스, 하초르, 길앗, 갈릴래아와 납탈리 온 지역을 점령하고,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갔다. (2 열왕 15, 29)”

티글랏 필에세르 3세는 민첩하게 행동했습니다. 그가 레반트 남부로 출정한 시기는 그의 연대기와 에포님 연대기(The Eponym Chronicle)를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 734년 그는 필리스티아로 진격해 나갔습니다. 세펠라 북부는 얼마 전에 필리스티아의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티글랏 필에세르의 부조에 묘사된 게제르의 포위는 이 원정 기간에 일어난 것임이 분명합니다. 다음으로 가자 왕 하눈이 아시리아의 진격 소식에 겁을 먹고 이집트로 달아난 후 가자가 정복되었습니다. 아시리아 군은 계속해서 시나이 북부로 진격하여 므운(마온) 사람들도 굴복시켰고, 이집트 시내에는 수비대를 남겨 두었습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지역의 왕들은 이집트로부터 고립되어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티글랏 필에세르 3세의 원정 지도

그는 다음 해인 기원전 733년에는 북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주요 원정 경로는 열왕기 하권 15, 29을 통해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지요. 티글랏 필에세르 3세는 레바논 베카 계곡에서 공격을 시작해 우선 이욘과 아벨 벳 마아카를 점령했습니다. 그 후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상부 갈릴레아 지역을 가로질러 티로 위쪽 산자락에 위치한 야노암으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티로를 병참 기지로 확보했습니다. 그는 당시 상부 갈릴레아를 건너 진격하여 케데스를 점령했습니다. 주변의 두 성읍인 이론과 메롬도 아시리아가 이번 원정에서 사로잡은 포로 명단에 나타나므로, 이들 역시 이 시기에 정복당한 것이 확실합니다.

티글랏 필에세르는 이제 상부 갈릴레아에 대한 걱정 없이 하초르를 포위 공격하는데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길앗은 물론 “갈릴레아와 납탈리 온 땅”으로 병력이 배치되었습니다. 이사야는 한 정복자에 의해 제일 먼저 짓밟힐 이들 땅을 “ 바다로 가는 길과 요르단 건너편과 이민족들의 지역 (이사 8, 23)”으로 묘사합니다. 성경에서 ‘바다로 가는 길’은 바다로 이어진 길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아시리아 군의 원정 경로였던 납탈리 지역 내의 아벨 벨 마아카에서 야노아(야노암)에 이르는 길과 완벽하게 들어맞고 있습니다. 물론 ‘요르단 건너편’은 길앗 땅이고, ‘이방인의 갈릴레아’라는 원문을 직역하면 ‘이민족(goiim)의 지역’으로 보통 갈릴레아 지역의 이즈르엘 계곡(판관 4, 2의 하로셋 고임)을 가리킵니다.

이제 다마스쿠스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이듬해인 기원전 732년 승승장구하던 티글랏 필에세르 3세의 군대에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칼라에서 발견된 아시리아부조에는 당시 정복당한 성읍들 주 ㅇ바산의 주요 도시 아스타롯의 주민들이 사로잡혀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무참히 패배를 한 후 이스라엘 페카는 엘라의 아들 호세아에게 암살당했습니다(기원전 732년). 티글랏 필에세르 3세는 자신이 호세아를 이스라엘 왕으로 세웠고 그에게서 막대한 조공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이때는 유다 왕 요탐의 통치 20년째 해이자 마지막 해이기도 했습니다 (2열왕 15, 30). 이때부터 아하즈의 16년 단독 통치 기간으로 인정됩니다(2 열왕 16, 2; 2 역대 28, 1).

2. 티글랏 필에세르 3세 시대의 아시리아 행정구역/ 살만 에세르 5세와 사르곤 2세의 레반트 남부 지역 원정/ 아시리아 통치 아래에서 일어난 이스라엘 민족의 유배 / 사르곤 2세 시대의 아시리아

1) 티글랏 필에세르 3세 시대의 아시리아 행정구역 (기원전 732 년)

“ 옛날에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앞으로는 바다로 가는 길과 요르단 건너편과 이민족들의 지역이 영화롭게 되리이다( 이사야 9,1). “

아시리아는 새롭게 정복된 땅들을 당시의 정책에 따라 충성스러운 총독들이 다스리는 행정구역으로 편성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가자, 아스클론, 아스돗, 에크론 등 필리스티아의 주요 4개 도시나 티로와 같은 일부 중요 국가들에서는 그 지역의 왕조의 유지가 허용되었지요. 유다 왕 아하즈와 이스라엘 왕 호세아는 아시리아의 조공국(속국) 왕으로 백성들이 아시리아에 지속적으로 충성하도록 이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는 지나치게 문제를 많이 일으켜 왕조가 폐지되었고, 영토는 4개의 속주로 분할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영토도 비슷한 운명에 직면했습니다. 상부 갈릴레아 지역 대부분은 아마도 티로에 현입된 듯하다. 므기또 지역의 새로운 행정 중심지에는 아시리아 총독이 세워졌습니다. 속주인 므기또 지방은 주로 이즈르엘과 벳 산 골짜기였는데, 아마 상부 가라릴레아 지역도 포함되었을 듯합니다. 트랜스요르단은 갈라지(Gal’azi, 길앗) 지방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사론 평야는 여전히 사마리아에 속했는데, 특히 아펙은 그곳의 중심 도시였지요. 도르(Dor)는 이미 티로에 종속되었던 듯하나 그 관할 구역은 임시적으로 므기또 총독이 맡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기록들에 의하면 이 땅은 오직 기원전 7세기에만 총독의 관저로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2) 살만 에세르 5세와 사르곤 2세의 레반트 남부 지역 원정(기원전 724-712년)

“ 호세아 임금은 아시리아 임금 살만에세르가 자기를 치러 올라오자, 그의 신하가 되어 조공을 바쳤다(2열왕 17, 3).”

기원전 727년 티글랏 필에세르 3세가 죽고 뒤를 이은 살만 에세르 5세는 서쪽 원정의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 왕 호세아는 아시리아가 위협해오자 처음에는 조공을 바쳤습니다(2열왕 17, 3). 그러나 이내 돌아서서 ‘이집트 왕 소(So)’에게 도움을 청하고 살만 에세르에 대한 조공을 중단했습니다. 여기서 ‘소’는 아마 이집트 왕의 이름이 아니라 당시의 수도였던 사이스(Sais)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에 아시리아 왕은 호세아를 잡아 가두었고, 호세아 7년(기원전 725/724년) 자신을 배신한 사마리아 왕국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호세아9년 (기원전년) 결국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포위 공격에 굴복했고, 그 주민은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살만 에세르 5세가 죽고 사르곤 2세가 계승을 했지요. 이에 사르곤의 사관들은 사마리아 정복의 공을 (이 원정에 동참했던) 자신들의 왕 사르곤에게 돌렸습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발흥

3) 아시리아 통치 아래에서 일어난 이스라엘 민족의 유배 (기원전 734-712년)

“ 아시리아 임금은 바빌론과 쿠타와 아와와 하맛과 스파르와임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성읍들에 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성읍들에서 살았다. (2열왕 17, 24)”

아시리아 제국 아래에서의 이스라엘 민족의 유배

3) 사르곤 2세 시대의 아시리아 행정구역 (기원전 733-716년)

“나는 이들 도시들을 재편성했다. 나는 서쪽 땅에서 사로 잡아온 민족들을 이곳에 정착시켰다. 나는 내 신하를 그들을 다스릴 총독으로 임명하고 그들을 아시리아인으로 여기며 내 멍에를 지게 했다. (사르곤 2세의 연대기)”

사르곤 2세는 하맛 왕이 주동하고 사마리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이 지지하여 일어난 레반트 지방에서의 반란을 진압한(기원전 720년) 후 이집트 군과 맞서기 위해 남쪽으로 행군했습니다. 도중에 그는 필리스티아의 두 성읍 기브톤과 에크론을 점령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정복되는 모습은 사르곤 2세의 왕궁 부조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침내 라피아에서 결전이 벌어졌는데, 이집트의 군대장관 르우(Re’u)는 전장에서 달아나버렸고, (이집트의 음모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이는) 가자 왕 하눈은 사로잡혔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기원후 716년) 사르곤 2세는 아라비아 북부 출정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아라비아인들을 물리치고 조공을 바치도록 한 후에 이집트의 경계인 이집트 시내(강)로 갔습니다. 이집트 왕 쉴칸니(Shilkanni, 오소르콘 4세)는 사르곤이 아라비아와 필리스티아의 교역로를 장악했음을 그제서야 인정하고 후한 보상금을 보냈습니다. ‘이집트의 봉쇄된 항구’는 교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개항되었습니다.

아라비아인 유배자들이 사마리아에 정착하는 동안 히즈키야가 아하즈의 뒤를 이어 유다 왕좌에 올랐지요(기원전 715년). 같은해 에티오피아 왕 피예 (pye)가 이집트 삼각주 지역을 원정했습니다. 사마리아에는 이제 더 이상 백성을 다스릴 왕조가 없었기 때문에 유다 왕 히즈키야는 그곳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초대하여 예루살렘에서 재개한 과월절 행사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2역대 30, 5-6. 10-11). 그런 다음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유다와 사마리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다른 예배 중심지들에 대한 반대 운동을 했습니다.

필리스티아에서는 이집트가 아시리아에게 당한 일들로 인해 불안감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713년 아시리아를 배신한 아스돗 왕 아주리(Azuri) 대신 그의 동생 아히밋티(Ahimitti)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다음해에는 이아마니(Iamani, 히브리어로는 야완, 희랍어로는 이욘에 해당하는 이름)라는 사기꾼이 아스돗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유다, 에돔 모압 등이 여기에 연루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사르곤이 군대장관이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자 서둘러 조공을 바쳤던 것 같습니다. 한편 유다 왕 히즈키야는 이미 이사야로부터 이 반란에 합류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었어요(이사 20장). 머지않아 가드와 아스돗이 아시리아에 정복되었습니다. 이아마니는 이집트로 달아나 수에네까지 갔지만 에티오피아 왕(피예의 형 제인 샤바코[Shabako])은 그의 정치적 망명을 거절했습니다. 샤바코는 이미 이집트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그런 일로 앗리아인들을 모욕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스돗 내부의 지역 왕조들은 계속해서 도시국가들을 다스렸지만 이제 아스돗 자체는 아시리아의 속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시리아의 한 관리가 다음 소식을 칼라에 알려왔습니다. 타브알 땅의 아야누르(Ayanur)라는 사람이 게제르 당 사람들이 모압의 성읍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는 것이죠. 타브알의 수도는 티레(Tyre)라고 불렸는데, 이곳은 나중에 토비야 가문의 사유지로 나타납니다.

기원전 710년 바빌론의 왕좌를 탐내던 갈대아 사람 므로닥 발아단을 물리친 사르곤은 5년 후 북방 킴메르야인들을 정복하려고 출정하던 중 죽음을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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