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히즈키야가 모반을 준비하다/ 산헤립의 페니키아 재정복
- 2. 므나쎄 통치 시기의 유다와 주변 나라들 (기원전 701-642년)
- 3. 아시리아의 이집트 정복/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 킴메르인과 스키타이인의 침입/ 요시아 왕국
1. 히즈키야가 모반을 준비하다/ 산헤립의 페니키아 재정복
1) 히즈키야가 모반을 준비하다 (기원전 705-701년)
“밭곡식과 술과 기름을 저장해 둘 곳간들을 짓고, 모든 가축들과 양떼를 위하여 우리들을 세워야 했다. 또 그 많은 양과 소를 건사하는 성읍들을 세웠다. 그토록 많은 재물을 하느님께 받았던 것이다. 기혼 샘 윗쪽 물줄기를 막고 땅을 뚫어 그 물을 감쪽같이 다윗 성 서쪽으로 해서 성 안으로 끌어들인 것도 바로 히즈키야였다. 히즈키야는 무슨 일을 하여도 뜻대로 되었다.(2역대 32, 28-30)”
히즈키야와 그 외 레반트 남부 지역의 임금들은 사르곤 2세의 죽음을 아시리아의 멍에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로 보았습니다. 이집트 제25왕조의 에티오피아인 왕 샤바코는 이들 모반자들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이사 30, 1-5; 31, 3). 사르곤의 뒤를 이은 산헤립은 이후 몇 년 동안 동쪽 특히 바빌론과 전쟁으로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칼데아인의 우두머리 므로닥 발아단이 아시리아에 바빌론의 왕권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아시리아 군은 그를 엘람으로 추방했습니다.
히즈키야는 이전 사르곤 2세가 통치할 때 그에게 복종을 해 대상로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2역대 32, 27-29). 이제 그는 이 재원을 사용하여 성읍을 새롭게 요새 화하고 최신 무기들을 도입함으로 유다를 무장된 진영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2 역대 32, 5). 가자 왕 실리 바알이 아시리아에 대한 반역 모의에 협조하지 않자, 히즈키야는 군대를 파견해 네겝 서부에 있는 필리스티아의 주요한 성읍인 가자와 그 경계에 이르기까지, 파수 탑에서 요새 성읍까지 쳐부수었습니다(2 열왕 18, 8). 그리고 시메온 사람들을 이 지역에 정착시키는 (1 역대 4, 39-41) 한편, 그들로 하여금 아말렉족으로부터 세이르 산 서쪽을 빼앗도록 했습니다(1 역대 4, 42-43). 아스클론 왕은 요빠를 점령하고 내륙의 농경지를 획득했습니다. 에크론 사람들은 반 아시리아 모반을 지지했지만 그들의 왕 파디(Padi)는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결국 그는 축출당하여 히즈키야에게 넘겨졌고, 예루살렘에 투옥되었습니다. 가드와 게제르는 유다의 요새가 되었던 것이 분명하며, 아제카는 또 다른 요새 성읍이었습니다. 라키스와 리브나는 세펠라 남서부의 주요 중심지였습니다.
왕국 전체 지역 요새들에는 식량이 비축되었습니다(2 역대 32,27-30).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왕실 양조장의 손잡이가 4개 달린 포도주 항아리들로, 유다 북부와 서부에 있는 것의 모든 중요 군사 요새 도시 유적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항아리들에는 날개가 4개 달린 스카라브(고대 이집트에서 생산, 재생의 상징으로 매우 신성하게 여겨졌던 인장, 부적, 장신구 등에 많이 사용되던 풍뎅이 모양의 문장)나 두 개의 날개가 달린 태양 원반 등 공인된 상징의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 위에는 ‘왕(의 소유)’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으며 아래에는 포도주를 생산한 성읍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헤브론, 집, 소코 등이 있었습니다. 왕실 포도원은 산악지대에 있었기 때문에(2 역대 26, 10) 이들은 유다 산악지대 남쪽 행정 구역에 각각 하나씩 위치한 것입니다. 포도주 생산 담당하는 관리들은 항아리의 손잡이 하나 이상에 자신의 개인 인장을 찍곤 했습니다. 항아리를 빚는 데 사용되던 진흙은 모두 세펠라 일부 지역에서 조달되어 아마도 이곳 포도주 생산 중심지로 보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산지에서 포도주 항아리를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요새화 된 도시에 식수 공급을 확보하는 토목 공사들도 시행되었는데(2 역대 32, 3-4), 특히 실로암 지하 수로를 만들어 기혼 샘으로부터 성안으로 물을 끌어들인 점은 눈여겨 볼 만합니다(2열왕 20, 20; 2역대 32, 20).
전쟁 준비에 한창이던 히즈키야는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그가 회복되어 15년을 더 살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었습니다(2 열왕 20, 1-11; 이사 38장; 기원전 701-686년). 또한 이때 바빌론 왕 므로닥 발아단이 히즈키야의 병문안으로 보낸 사절이 왔는데, 당시 므로닥 발아단은 엘람에 정치 망명자로 있으면서도 여전히 산헤립에 맞설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2 열왕 20, 12-19; 이사 39장).
3) 산헤립의 페니키아 재정복 (기원전 701년)
기원전 701년 제 3차 군사 원정에 나선 산헤립이 팔레스타인 땅에 도착했습니다. 첫 번째 목표는 페니키아 해안 정복이었지요. 반란을 선동한 시돈의 룰리(Luli, 엘룰라이오스[Elulaios])는 이아드나나(Iadnana, 키프로스)로 달아나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엣바알이 시돈의 새 지도자로 올라섰습니다. 페니키아의 도시들이 함락되자 히즈키야의 이전 동맹국들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아코로 가서 산헤립에게 조공을 바치고 다시금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 후 산헤립은 필리스티아와 유다로 진군했습니다. 그는 아스클론의 시드키야(Sidqia)가 반란으로 장악했던 요빠와 그 주변 성읍들을 함락시킴으로 해상을 통해 페니키아로부터 군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시리아의 사관들은 두 개의 사건, 즉 시드키야를 몰아낸 것과 시드키야 히즈키야를 도우러 온 이집트-에티오피아 군대를 물리친 사건을 연관시켜 기록하는데, 이것은 논리적이긴 하지만 연대순은 아닙니다. 성경의 사건 연대에 의하면 엘드케에서 벌어진 이집트-에티오피아 군과의 전투는 라키스 함락 후 리브나를 포위 공격하고 있을 때 벌어졌기 때문입니다(2 열왕 19, 8-9; 이사 37, 8-9).
다음으로 소렉 골짜기의 팀나가 정복되면서 에크론은 히즈키야로부터 직접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어 이 역시 정복되었고 반역자들은 말뚝에 찔려 죽었습니다. 산헤립의 승리를 전하는 ‘(아슈르) 신에게 바치는 서신’을 통해 산헤립 연대 기사에 빠져 있는 그다음 행보를 보완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서신은 산헤립의 군대가 높이 솟은 유대의 요새의 아제카를 점령했다고 언급한 후 히즈키야가 장악했던 어느 필리스티아 성읍에 대해 기록하는데, 이는 ‘갓’ 일 가능성이 크다. 아제카가 점령되자 갓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서쪽에서 유다 땅으로 가는 주요 진입로 두 군데가 막혔습니다. 다음 정복자는 이번 원정의 정복지 중 가장 큰 라키스였고, 이어서 리브나가 정복되었습니다. 평지 성읍들에 대한 미카의 애가는 그 지역 다른 성읍들의 운명에 대해 암시해 줍니다(미카 1, 8-16). 또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위협하며 북쪽에서 진격해 오는 적군에 대해 묘사하였습니다(이사 10, 28-32). 산헤립은 46개의 유다 성곽 도시와 그 주변 마을들을 점령했다고 주장하는데 라키스, 브에르 세바, 아랏, 드비르, 벳 세메스 등의 발굴 작업을 통해 당시의 극심한 파괴의 흔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유다는 이때 받은 타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반면 예루살렘은 화를 면했습니다. 아시리아 군은 샤바코의 동생이자 아마 공동 통치자였던 것으로 보이는 타하르카(Taharka)의 이집트 군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그 후 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주님의 천사”가 아시리아 군을 쳤고, 산헤립은 막대한 조공을 바치겠다는 히즈키야의 약속을 믿고 철수했습니다.
3) 유다와 필리스티아 땅에서의 산헤립 (기원전 701년)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시리아 임금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곳으로 활을 쏘지도 못하리라. 방패를 앞세워 접근하지도 못하고 공격 축대를 쌓지도 못하리라. 자기가 왔던 그 길로 되돌아가고 이 도성에는 들어오지 못하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이 도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니 이는 나 자신 때문이며 나의 종 다윗 때문이다.” 그런 다음 주님의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이 모두 죽어 주검뿐이었다. (이사 37, 33-37)”
2. 므나쎄 통치 시기의 유다와 주변 나라들 (기원전 701-642년)
산헤립은 모반을 주도했다는 벌로 유다의 영토를 크게 축소시키고 문제의 성읍과 지역들을 가자, 아스돗, 에크론의 충성스러운 임금들에게 주었습니다. 히즈키야 임금은 산헤립의 침공을 막아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탔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2역대 32, 22-23).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아시리아에 막대한 배상금을 바치고 있었어요. 그 사이에 병을 얻은 히즈키야는 아들인 므나쎄가 열두 살이 되자 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습니다(2열왕 21, 1; 2역대 33, 1; 기원전 697년). 이집트에서는 에티오피아인 타하르카가 기원전 690년에 왕위에 올라 아시아 지역에 적극 개입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은 이집트를 전적으로 지지했지요. 산헤립을 암살하고(기원전 681년) 아시리아의 임금이 된 에사르하똔은 곧바로 티로와 시돈의 모반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기원전 679년).
같은 해에 그는 ‘이집트 시내 경계’에 위치한 성읍 아르사를 점령함으로써 남부 해안에 대한 통치권을 확고히 했습니다. 2년 후, 에사르하똔은 시돈을 정복하여 시돈의 주도권 싸움을 종식시켰습니다. 티로 임금 바알(발루, Balu)과는 조약이 체결되어 필리스티아 국경에 이르는 해안가의 아시리아 성읍들이 티로에게 주어졌는데, 도르와 아코도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해인 기원전 677년에는 강 저편 하티(Hatti) 땅 12개 나라의 통치자들이 레바논에서 나무를 베어 니네베에 건설 중이던 에사르하똔의 새 왕궁까지 운반하는 일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유다를 단독으로 통치하고 있던 므나쎄 임금은 막중한 경제적 부담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변 나라들, 특히 아시리아 편에 가담한 티로를 의지했는데, 이로 인해 히즈키야가 없애버린 바알과 아세라, 일월성신 숭배 등 가나안의 모든 이교 숭배 풍습이 다시 유입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의 아합과 비교되지요(2열왕 21, 3). 시돈, 모압, 암몬 등으로부터 수많은 이방 종교가 유입되었다는 것은 그 나라들과 종교는 물론이고 외교적, 경제적 유대 관계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들의 산당(과 공관)은 “예루살렘 동쪽 ‘멸망의 산’ 남쪽”(2열왕 23,1)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형태들은 아시리아가 요구한 것이 아니었지요. 아시리아의 신 아슈르는 예루살렘에서 숭배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아시리아는 속국에 자국의 신들을 섬기도록 강요하는 정책을 펴지도 않았습니다.
에사르하똔은 기원전 676년 이후 수년 동안 아라비아인들에게 대해 군사적,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아시리아에 적대적인 아라비아 지도자를 몰아내고 충성하는 사람을 세웠습니다. 이집트를 노리고 있던 아시리아 임금은 아랍의 지원이 필요했고, 아라비아인들은 그 대가로 대상로를 장악했습니다. 유다를 포함한 레반트 지역 국가들은 에세르하똔의 이집트 침략이 최초로 성공을 거둔(기원전 671년)뒤로부터 그 다음 임금인 아슈르바니팔(Asshurbanipal)이 노아몬(No-amon)을 정복하기까지(기원전 664/604년)까지 꼼짝없이 전쟁에 동원되었습니다. 므나쎄도 주변 나라들과 함께 이집트에 병력을 보냈습니다(기원전 667년).
아시리아 제국을 뒤흔든 거대한 내전이 끝난 후 유다의 운명은 급변했습니다. 아슈르바니팔의 형제인 샤마시슘우킨(Shamash-shum-ukin)은 바빌론 왕좌에 오르게 되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형제가 다스리는 제국의 왕좌마저 노렸습니다(기원전 652년). 티로와 아라비아는 바빌론을 지지했는데, 아라비아 군대가 유프라테스 골짜기로 진입하려다가 아시리아에 발각되어 전멸하기도 했습니다(기원전 650명). 바빌론은 패전했고 젊은 임금 샤마시슘우킨은 기원전 648년에 죽었습니다. 바빌로니아를 재정비하는 동안 아슈르바니팔은 서쪽 지도자들을 바빌론으로 불러들여 추궁했지요. 므나쎄도 그들 중의 하나였는데, 그는 아시리아 임금에게 가까스로 자신의 충성을 확신시킨 후 예루살렘과 유다의 요새 성들을 재건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아마 자금도 지원받았을 수 있음) 송환되었습니다(2역대 33, 11-17). 이후 아슈르바니팔은 모반에 가담했던 아라비아 여러 족들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단행했습니다(기원전 644/643년). 또한 본국으로 귀환하는 길에 티로가 샤마시슘우킨을 지지했던 것에 벌을 내리려고 우수와 아코를 공격했습니다.
므나쎄는 자신의 뒤를 이을 임금들에게 왕국을 재정비할 수 있는 이 특별한 반전의 기회를 남겨놓고 기원전 642년에 죽었습니다.
3. 아시리아의 이집트 정복/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 킴메르인과 스키타이인의 침입/ 요시아 왕국
1) 아시리아의 이집트 정복 (기원전 669-663년)
“사마리아 땅의 도시 아펙에서 이집트 시내 지역의 도시 라피아까지는 강이 없다!(에사르 하똔 연대기)”
에사르 하똔의 첫 번째 이집트 공격(기원전 674년)이 실패한 것은 아라비아의 원조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공격(기원전 671년) 때는 아라비아인들이 에사르 하똔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 아시리아 군은 무사히 사막을 지날 수 있었습니다. 나일 삼각주 지역은 에티오피아의 멍에에서 풀려났고, 지역마다 친 아시리아 계열의 통치자들이 세워졌습니다. 그중에는 특히 사이스의 느코(Neco 1) 1세가 있었습니다. 제 25왕조의 에티오피아인들이 레 반트 지역에 간섭하자, 에사르 하똔은 이제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기원전 669년 에사르 하똔은 이집트로 다시 한번 원정을 오던 중에 죽고 말았습니다. (에사르 하똔의 2차 원정할 때(기원전 671년) 자신의 성읍을 버리고 달아났던) 이집트 왕 타하르카는 다시 멤피스로 돌아왔으나 아슈르바니팔이 그의 군대를 물리치고 다시금 노아몬으로 쫓아냈습니다(기원전 667/666년). 기원전 664/663년 마침내 아슈르바니팔은 노아몬을 정복하고 사이스의 느코 1세의 아들 프삼메티코스 1세 (Psammeticus)를 나일 삼각주의 통치자로 임명했습니다.
기원전 655년 프삼메티코스는 이집트를 제26왕조 치하에 통일하고 자신의 딸을 노아몬의 대사제로 임명했습니다. 또 그는 또 리디아(Lydia) 왕 기게스(Gyges)가 보낸 용병들의 도움을 받아 아시리아에서 독립했습니다. 그러나 기게스는 이 일로 인해 킴메르 인들이 리디아를 침략했을 때 아시리아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어 목숨을 잃고 맙니다(기원전 654년).
2)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 (기원전 7세기 말)
“… 아시리아의 교만은 꺾이고 이집트의 왕홀은 사라지리라. (즈카10, 11)”
아슈르바니팔 시대에 아시리아의 힘은 절정에 달했지만, 제국의 몰락을 가져올 내부적 갈등과 외부적 위험의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프삼메티코스 1세가 통일된 이집트의 독립을 쟁취했고, 킴메르인들은 리디아로 방향을 틀기 전까지 계속해서 아시리아 북쪽을 위협했습니다. 메디아는 맹렬하게 공격하다가 임금인 프라오르테스(Phraortes)가 전사를 하자 수그러들었지요(기원전 653년). 또한 바빌론 왕 샤마시슘우킨과 충돌(기원전 652년-648년) 할 때 페니키아와 아라비아 등 일부 지역의 민족들이 아시리아에게 보여준 행동을 통해 그들의 충성도가 얼마나 약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아슈르바니팔은 기원전 630년까지 아시리아와 바빌론을 다스리다가 아들 아슈르에틸일라니(Asshur-etil-ilani)에게 제국을 계승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627년 죽을 때까지 (칸달루(Kandalu)라는 이름으로) 바빌론 왕좌를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 바빌론에서 시작된 왕권 다툼이 마침내 니네베 왕좌까지 흔들면서 갈대아 사람인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가 바빌론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623년경 나보폴라사르는 메디아와 연합하여 아시리아에 맞서 독립 바빌로니아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기원전 616년 프삼메티코스 1세가 아시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냈으나 메디아와 칼데아인들에게 참패를 했습니다. 기원전 614년에는 메디아의 키악사레스(Cyaxares)가 아슈르를 함락했고, 나보폴라사르는 기원전 612년에 정복에 합류하여 니네베로 진격했습니다. 아시리아인들은 하란으로 후퇴했으나 기원전 610년에는 다시 갈크미시까지 퇴각해야만 했지요.
3) 킴메르인과 스키타이인의 침입 (기원전 676-652년경)
“북쪽에서 재앙이 터져 이 땅의 모든 주민 위에 덮칠 것이다. 이제 내가 북쪽 왕국들의 모든 족속을 불러들일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들이 와서 저마다 제 왕좌를 예루살렘 성문 입구에 차리고, 그 주변 모든 성벽과 유다의 모든 성읍에 맞설 것이다.(예레 1, 14b-15)”
성경에 나타난 “민족의 계보”에 의하면 킴메르인들은 고메르의 후손으로 보입니다(창세 10, 2-3; 1 역대 1, 6). 킴메르인들의 뒤를 이어 스키타이인들이 당대 역사에 등장하는데, 이들이 예레미야의 예언에(예레 4, 5-31; 5, 15-17; 6, 22-26) 멸망을 불러오는 이들로 언급된 아스크나즈입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1권 104. 2-105. 4) 이집트 왕 프삼메티코스 1세가 ‘시리아 팔레스타인’에서 이 스키타인들을 만났으며, 엄청난 보상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한 후에야 침공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이들은 철수하면서 아스클론에 있던 신전을 약탈해 가기도 했습니다.
4) 요시아 왕국(기원전 628-609년)
“다윗의 집안에 한 아들이 태어나리니, 그 이름은 요시야이다. 그가 네 위에서 분향하는 산당의 사제들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치고,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태울 것이다.’(1열왕 13, 2b)”
므나쎄의 아들 아몬은 통치 2년(기원전 642-640년)만에 왕궁의 음모로 살해당했습니다. 지구 계급 귀족인 “나라 백성”은 왕을 시해하고 여덟 상의 요시아를 왕좌에 앉힌 것입니다(2 열왕 21, 23-22, 1; 2 역대 33, 24-34, 1). 요시아는 열네 살에 이미 아버지가 되었는데(기원전 634년), 여호야킴은 하부 갈릴레아 루마 출신 프다야의 딸 즈비다에게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2열왕 23, 36; 2역대 36, 5). 2년 후에는 리브나 출신 예레미야의 딸 하무탈에게서 여호아하즈를 낳았지요. 그의 통치 8년째(기원전 632년) 안 이때부터 요시아는 “아직 어린 몸으로 조상 다윗의 하느님”찾기 시작했는데(2 역대 34, 3), 이는 세펠라의 사제 도시 리브나 출신 장인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기원전 630년 요시아는 아슈르바니팔이 아시리아의 왕위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에 고무되어 예루살렘과 대립 관계에 있던 모든 이방 성소들에 대한 개혁을 착수했던 듯한데, 그 범위는 유다는 물론 “므나쎄와 에프라임과 시메온, (산지의) 납탈리까지 (사면이 황폐한) 성읍들”(2 역대 34, 6)에까지 미쳤습니다. 여기서 ‘시메온’은 (지파가 아니라) 이즈르엘 평야 즈불론 땅에 있는 도시를 가리키며, 여호수아에서는 ‘시므론’(여호 11, 1; 19, 15), 저주 문서와 투트모스 3세의 목록, 그리고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심온(Shim’on)으로 나타납니다. 또 요세푸스와 탈무드 문헌에 의하면 제2성전 시대에는 ‘시모니아(Simonia)’ 불렸습니다. 시메온은 므기또가 아시리아의 근거지가 된 후 이즈르엘 계곡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성읍이었지요. 기원전 609년경 요시아가 므기또에서 파라오 느코 2세와 전쟁을 벌이려 하자 아시리아인들은 므기또마저 포기했습니다.
요시아는 히즈키야의 선례를 따라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아시리아 총독들은 그를 막지 않았던 듯합니다. 아슈르바니팔이 죽던 해 (기원전 627년) 예레미야는 23년의 예언자로 사명을 시작했고(예레 1, 2; 25, 1-3), 그 무렵 나보폴라사르는 바빌론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았으며(기원전 623년), 유다 왕국은 독립국가로서 언약을 새롭게 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기원전 622년 요시야는 성대한 언약 의식과 국가적인 개혁을 시작하면서(2 열왕 22, 3-23, 28; 2 역대 34, 8-35, 19), 예루살렘을 중점적으로 섬겼던 사제와 레위인들만 그 직무를 담당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2 열왕 23, 9).
아스돗얌(Ashdod-yam) 북쪽 해안에서 우연히 발견된 작은 요새에서 유다에서 유다의 히브리어 문자와 언어가 잘 보존되어 있는 비문 일부가 발굴됨으로 요시야의 세력이 해안까지 확장되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그가 ‘온 이스라엘’을 얼마나 확고히 통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도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는 일은 훌륭하게 수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