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스라엘 의 오므리는 사마리아로 수도를 옮기고 해안 무역로를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아들 아합은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주변 나라들을 정복해 강력한 왕조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람 군대와 맞서 전투를 하다 전사를 합니다. 이들의 이야기와 아시리아의 살만 에제르 3세와 메사 임금의 정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 1. 오므리의 발흥 (기원전 885/884년)과 아합과 아람 간의 전쟁 (기원전 855-853년)
- 2. 살만 에제르 3세의 초기 원정 (기원전 859-855년)과 모압 왕 메사의 원정 (기원전 853-852년)
1. 오므리의 발흥 (기원전 885/884년)과 아합과 아람 간의 전쟁 (기원전 855-853년)
1) 오므리의 발흥 (기원전 885/884년)
“유다 임금 아사 제이십칠년에 지므리가 임금이 되어, 티르차에서 이레 동안 다스렸다. 그 무렵에 이스라엘 군대는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속한 기브톤을 치려고 진을 치고 있었다. 진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 군대는 “지므리가 모반하여 임금을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이 그날로 진지에서 군대의 장수 오므리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내세웠다. 오므리는 온 이스라엘과 함께 기브톤에서 올라와 티르차를 포위하였다. 지므리는 성읍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왕궁 성채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불 속에서 타 죽었다. …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둘로 나뉘었다. 백성의 절반은 기낫의 아들 티브니를 임금으로 세워 그를 따랐고, 다른 절반은 오므리를 따랐다. 그러나 오므리를 따르는 백성이 기낫의 아들 티브니를 따르는 백성보다 우세하였다. 마침내 티브니는 죽고 오므리가 임금이 되었다. 유다 임금 아사 제삼십일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열두 해 동안 다스렸는데, 여섯 해는 티르차에서 다스렸다. (1열왕 16, 15-18; 21-23)”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티르차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이내 기브톤에서 필리스티아와의 전쟁을 재개해야 할 필요를 느꼈지요. 그러나 그는 통치 2년 만에 지므리에게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기브톤에 주둔해 있던 이스라엘 군은 지휘관 오므리를 왕으로 삼았고, 일주일 후에 지므리는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쟁자인 기낫의 아들 티브니가 나라를 내란으로 몰아넣었고, 오므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6년 만에 승리하여 오므리는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후 6년간(기원전 880-874/873년) 오므리는 아람 다마스쿠스와의 결전을 위해 왕국을 강화하는데 매진했습니다.
오므리는 산 위에 있던 세메르의 소유지였던 지역을 사들여 사마리아(Shomron.히: 쇼므론)라 하고 그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습니다(1 열왕 16, 24). 서편에 있는 곳을 선택한 것은 페니키아와 동맹을 재개하려는 그의 정책과 잘 맞아떨어졌지요. 이후 그의 아들 아합은 티로(페니키아의 주요 성읍) 왕 엣 바알의 딸 이제벨과 결혼하여 동맹을 맺었습니다. 유다와는 휴전을 하고, 오므리의 손녀 아탈야가 여호사팟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했습니다.
오므리는 트랜스요르단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쟁의 첫 단계로 메드바를 점령하고, 가드 자손이 살고 있는 아타롯 그리고 목초 지대와 맞닿아 있는 야하츠를 요새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남쪽의 디본을 제외한 고원 지대 대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했습니다. 이제 아람과 결전을 벌일 차례가 되었습니다.
2) 아합과 아람 간의 전쟁 (기원전 855-853년)
“아람 임금 벤 하닷이 전군을 소집하였다. 그는 임금 서른두 명과 말과 병거대를 이끌고 사마리아로 올라가, 그곳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벤 하닷은 성읍 안으로 이스라엘 임금 아합에게 사절들을 보내어 말하였다. “벤 하닷이 말한다. 그대의 은과 금은 나의 것이다. 그대의 아름다운 아내들과 아들들도 나의 것이다.” …그리하여 아합이 지방 장관들의 젊은 부하들을 사열하니, 이백삼십이 명이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전군을 사열하니 모두 칠천 명이었다. 그들은 정오에 싸우러 나갔는데, 그때에 벤 하닷은 자기를 돕는 임금 서른두 명과 함께 여전히 초막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방 장관들의 젊은 부하들이 먼저 나갔다. 벤 하닷이 정찰대를 내보냈는데, 그들이 “사마리아에서 군사들이 나왔습니다.” 하고 보고하였다. 벤 하닷은 “그들이 화친을 하러 나왔다 하더라도 사로잡고, 싸움을 하러 나왔다 하더라도 사로잡아라.” 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 곧 지방 장관들의 젊은 부하들과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은 이미 성읍에서 나와, 저마다 닥치는 대로 적을 쳐 죽였다. 마침내 아람군이 도망치게 되자, 이스라엘군이 그들을 뒤쫓았다. 아람 임금 벤 하닷은 말을 타고 기병들과 함께 빠져나갔다. 그러자 이스라엘 임금도 나가서, 말과 병거를 쳐부수고 아람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 예언자가 다시 이스라엘 임금에게 나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임금님께서는 용기를 내시고 무엇을 하셔야 할지 헤아려 보십시오. 해가 바뀌면 아람 임금이 다시 임금님을 치려고 올라올 것입니다.” (1 열왕열왕 21, 1-3; 15-22)”
아합은 아버지가 시작한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갔습니다. 아람 다마스쿠스와의 이권 다툼은 피할 수는 없었지요. 아람이 먼저 이스라엘에 침입해 사마리아를 포위하는 것으로 선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봉건적인 사회 구조, 즉 속국 왕들의 동맹을 통해서는 통합된 지휘권을 행사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이들 속국 왕들은 자신들의 막사에서 느긋하게 쉬다가 급습을 당하여 도망가고, 병사들은 죽음을 당했습니다(1 열왕 20, 1-21). 결국 다마스쿠스 왕은 왕국을 재정비하고, 왕들을 총독으로 대체했지요. 그러나 주도권은 아합에게 넘어갔습니다. 아합은 긴네렛 바다 동편 고지에 위치한 아펙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여 정치와 교역에 대한 아람의 양보를 받아냈습니다(1 열왕 20, 23-34). 이후 두 나라는 3년의 휴전 기간을 가졌는데, 그동안 레반트 지역의 모든 국가들은 카르카르(Qarqar)에서 앗시리아 왕 살만 에제르 3세(Shalmaneser III)의 침공에 맞서 단결했습니다. 그 후 다마스쿠스가 또다시 이스라엘에 도전해오자, 아합은 여호사팟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 요청에 응답한 여호사팟은 왕위를 보호하기 위해 아들인 여호람을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습니다(2 열왕 1, 17; 3, 1; 8, 2-34). 길앗 라못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아합은 목숨을 잃었고, 다마스쿠스는 트랜스요르단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1 열왕 22, 1-40; 2 역대 18, 2-34).
2. 살만 에제르 3세의 초기 원정 (기원전 859-855년)과 모압 왕 메사의 원정 (기원전 853-852년)
1) 살만 에제르 3세의 초기 원정 (기원전 859-855년)
“나는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비트아디니의 이후니에게 속한 파카르루부니(와 다른) 도시들에 접근했다. 나는 그의 땅에 패배를 안겼다…. (살만 에제르 3세 연대기)”
기원전 9세기 앗시리아가 세력을 회복하면서 레반트 지역의 국가들은 극도로 동요했습니다. 기원전 1100년 경 티글랏 필에세르 1세 때는 ‘윗 바다’ 곧 지중해까지 세력을 미쳤던 아시리아는 그의 후계자들 통치 아래서 다시 약화되고 말았지요. 아슈르나시르팔 2세(Asshurnasirpal II, 기원전 883-824)는 새로운 팽창 정책을 시도했습니다. 그의 군대는 시리아를 비롯해 아르왓, 비블로스, 티로, 시돈 등 페니키아 해안 도시들까지 진출하여 막대한 조공을 강탈해 갔습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아들 살만 에제르 3세(기원전 859-824 재위)는 아버지의 공격적인 정책을 이어받아 재위 원년에 군대를 이끌고 아마누스 산맥에 이르렀지요.
통치 6년(기원전 853년)의 원정 때에 그는 니네베에서 행군하여 프토르(Pethor) 근처의 유프라테스 강나루에서 불어난 강을 건넜고, 알레포를 경유하여 하맛 왕에게 속한 영토로 나아가면서 납치와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이에 당시 레반트 지역의 국가들은 국지전을 중단하고(1 열왕 22,1), 이 침략자를 막으려고 힘을 합쳤습니다. 그들은 오론테스 강가 카르카르(Qarqar)에서 살만 에제르 3세와 맞붙어 아시리아군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살만 에제르 3세는 자신이 승리했다고 주장하지만, 이후 4년 동안은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지요.
이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아시리아 어느 지방에서 발견된 석비가 유일한데, 그 내용은 오류 투성이입니다. 레반트 지역 동맹국 명단은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보이지만, 각 나라에서 동원했다는 전차와 보병의 수치는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있지요. 그러나 비블로스에서 500명, 이집트에서 1,000명, 그리고 이르카나타(Irqanata)에서 전차 10대, 또한 시얀누(Siannu)에서 전차 30대 등을 지원했다는 것은 적절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닷에제르, 이르훌레니(Irhuleni), 아합 등이 수천의 전차와 병력을 파견했다는 것은 누가 봐도 과장입니다. 이 비문 내용을 근거로 아합이 강력한 전차 부대를 거느렸을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르카나타와 시얀누의 전차 부대수와 비교해 보면 실제로는 약 20대 정도를 소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 군대는 혹 아합의 군대에 포함되었다면 모를까 참전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시리아 군은 기원전 9세기 내내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시리아와 여러 지역들로 대담하게 뻗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군수품 조달의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그럼에도 아시리아 군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마침 그들의 눈에 띈 도시와 그 주변 지역들을 성공적으로 약탈했기 때문이었지요. 그중 군수품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 도시는 얼마든지 해를 입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아시리아 군이 철수하자 다시 국지전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마스쿠스와 이스라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요. 이후 몇 달이 채 못 되어 아합은 길앗 라못 전쟁터에서 죽게 됩니다.
2) 모압 왕 메사의 원정 (기원전 853-852년)
“나는 메사, 크모스의 아들로 모압 왕이며 디본 사람이다. … 내가 크모스를 위해 이 높은 곳에 쌓았다 …. 그가 나를 모든 왕들로부터 구하여 내 모든 원수들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모압 석비, 1-4행)”
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죽자 모압 왕 메사는 아르논 북쪽의 모압 평원 전체의 지배권을 되찾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먼저 메드바에 있는 이스라엘 본거지를 공격하고 다음에 벳 바알 므온과 키르야타임에 새로운 요새를 구축했습니다. 이제 아타롯에 있는 가드 사람들의 요새는 길앗이나 요르단 계곡으로부터 고립되었지요. 메사는 아타롯을 정복하고 주민 모두를 죽였으며, 이곳에 있던 ‘다윗의 번제단’을 약탈하여 모압의 제사 중심지인 크리욧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타롯에는 사론과 마하랏 지역의 모압 백성을 정착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메사는 느보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그는 밤중에 그곳으로 접근한 뒤 동틀 무렵 공격을 개시하여 정오경에는 그곳을 점령했습니다. 느보 주민들은 죽임을 당했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위한 제사용 그릇들은 크모스의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왕으로 추정되는 아하즈야가 야하즈의 변방 요새에서 반격을 시도했으나 또다시 메사에게 패하고 말았지요.
모압 왕 메사는 아로에르, 아르논을 가로지르는 대로, 벳 바못(Beth-bamoth) 그리고 베제르 등의 핵심 지역에서 건축 사업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는 또 메드바와 벳 디블라타임, 벳 바알 므온 등을 재차 강화했으며, 디본의 성채를 대규모로 증축하고 급수 시설을 갖추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