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다윗의 왕국 이야기

사울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의 자리에 오릅니다. 뒤를 이은 다윗은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이 두 임금들의 활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1. 사울의 등장과 사울 왕국 (기원전 1035-1017년경)

사울 왕국 시대의 지도

1) 나귀를 찾는 사울 (기원전 1035년경)

“하루는 사울의 아버지 키스의 암나귀들이 없어졌다. 그래서 키스는 아들 사울에게 말하였다. “종을 하나 데리고 나가 암나귀들을 찾아보아라.”(1 사무 9,3).”

이스라엘에 왕정이 시작될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인 사울은 필리스티아 탄압의 절정기에 일어났지요. 그는 벤야민의 기브아 출신이었는데, 이곳은 그의 근거지이자 이스라엘 왕국 최초의 수도가 되었고, 이후로 사울의 기브아로 불렸습니다. 사울은 에프라임 중앙 산악 지대에서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다니다가 사무엘을 만나 왕국을 세우게 되는데, 성경에 기록된 그의 이동 경로는 이야기 속에 유익한 지형학적 자료를 담고 있는 아주 좋은 예입니다.

2) 야베스 길앗의 구원 (기원전 1035년경) (1 사무 11장)

“이 소식을 듣는 순간 하느님의 영이 사울에게 들이닥치니, 그의 분노가 무섭게 타올랐다(1 사무 11,6).”

사울의 등극은 판관들이 백성의 위해 일어났던 것과 비슷합니다. 암몬 왕 나하스가 야베스 길앗을 탄압 하자 사울은 베젝에서 출정을 하여 암몬을 급습함으로 이스라엘 도시를 구원했지요. 이 싸움에서 승리한 후 사울은 자기 주위로 모였던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길갈로 가서 하느님 앞에서 사무엘의 기름부음을 받아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사울 왕국이 가나안 입성 후 이스라엘 최초의 중심지였던 이곳에서 수립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3) 미크마스 전투(1 사무 14,1-46)

“그날 주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을 도와주시어, 싸움은 벳 아웬 건너편까지 번져 갔다(1 사무 14,23).”

이스라엘 왕국 수립은 필리스티아의 통치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사울은 이천 명을 거느리고 미크마스와 에프라임 산악 지대 남부로 올라갔지요. 그의 아들 요나탄은 벤야민의 기브아에서 천 명을 모아 게바로 진격하여 점령하고 필리스티아 총독을 죽였습니다. 필리스티아는 즉시 많은 수의 군사를 보내어 반격했습니다. 사울은 길갈로 후퇴했다가 나중에 남은 군사들과 함께 깊은 협곡 와디 스웨니이트를 사이에 두고 미크마스 맞은편에 있던 게바에서 요나탄의 군대와 합류했습니다. 무난한 승리를 확신하여 방심했던 필리스티아는 이스라엘에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지요. 그들은 사울과의 전투에 집중하기보다는 이스라엘 여러 지역에 징벌군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좁은 와디 협곡을 지나 필리스티아 군대를 놀라게 한 요나탄의 용기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울의 군대는 필리스티아 군의 갑작스러운 혼란을 틈타 아얄론 골짜기 지역까지 필리스티아를 추격함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2. 엘라 골짜기의 전투-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기원전 1020년경)( 1사무 17장)

1) 엘라 골짜기의 전투-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사울도 이스라엘군을 집결시켜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맞서 전열을 가다듬었다(1 사무 17,2).”

다윗은 유다 지파의 최중심부에 위치한 중요한 성읍인 베들레헴 출신이었습니다. 뛰어난 용사이자 음악가였던 다윗은 신흥 왕국에서 초고속으로 신분 상승이 가능했습니다(1 사무 18, 17-30). 사울이 자신의 딸과 결혼시킨 것(1 사무 18,17-30)은 유다 지파와 그중 가장 영향력 있는 집안을 신생 왕정에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유다의 충성의 얻기 위한 사울의 노력은 엘라 골짜기에서 그의 군대와 필리스티아가 대립한 상황에서 나타납니다(1 사무 17장). ‘장수들의 일대일 결투’는 전형적인 그리스의 호메로스 전승일뿐 아니라 고대 근동에서도 흔한 것으로 아마 성경의 모든 군 전승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일 것입니다. 사실 이에 필적하는 전승이 있는데 베들레헴 사람 야아레 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이스라엘 편의 장수로 등장하는 이야기이지요(2 사무 19; 1 역대 20,5). 이 이야기에 자세하게 묘사된 지리는(그리스어 역본은 특히 더 상세함) 이 지역을 직접 경험하여 기록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두 군데는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남쪽에는 필리스티아군이, 북쪽 능선에는 이스라엘 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무참히 패배한 필리스티아는 구불구불한 계곡 길을 따라 서쪽으로 후퇴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아제카를 우회하기 위해 북쪽으로 방향을 튼 곳은 “사아라임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은 이곳에 매복해 있다가 필리스티아군을 쳐서 수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추격은 계곡 길을 따라 서쪽으로 아제카를 지나 필리스티아의 갓과 에크론 성문까지 이어졌는데, 이 구절은 필리스티아의 갓이 필리스티아 북부에 위치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본문 중 하나입니다 (1 사무 17, 52).

2) 다윗의 방랑 (기원전 1018년경) (1사무 19, 18-27, 6)

“또한 곤경에 빠진 이들, 빚진 이들, 그 밖에 불만에 찬 사람들이 모두 다윗에게 모여들었다. 다윗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 수는 사백 명가량 되었다(1 사무 22,2).”

사울의 박해를 피해 다윗이 방랑하다

사울을 피해 방랑하는 다윗

얼마 되지 않아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껄끄러워졌고, 성격이 강한 두 사람은 자주 충돌했습니다. 다윗은 처음에는 유다 광야로 달아나 깊은 절벽의 계곡 사이에 있는 동굴과 여러 장소에 몸을 숨겼지요. 이곳에서 그는 여러 불만 세력을 모았고, 광야 외곽에 있는 유다 정착 주민들의 적대감에도 굴복하지 않고 살아 남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사울은 이 황량한 광야에까지도 그를 추격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피신과 추격 이야기 속에서 두 정적의 강한 애국심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울의 경우 다윗에 대한 깊은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필리스티아가 공격해 왔다는 소식을 듣자, 곧장 추격을 멈추고 서둘러 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더 멀리 달아날 기회를 얻게 되었지요(1 사무 23, 27-28). 다윗의 입장에서는 ‘주님의 기름부은받은이’에 대한 존중으로 사울을 해칠 수 있는 여러 차례의 기회를 이용하지 않았습니다(1 사무 24,10). 사울이 더욱 힘을 얻자 다윗은 의지할 곳을 찾다가, 결국 대적의 우두머리인 갓 왕 마옥의 아들 아키스에게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치클락의 다윗 (기원전 1017년)

“아키스는 그날로 치클락을 다윗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치클락이 오늘날까지 유다 임금들의 차지가 된 것이다. … 아키스가 “오늘은 누구를 털었소?” 하고 물으면, 다윗은 “유다의 네겝입니다,” 하거나 “여라므흐엘족의 네겝입니다.”하고 대답하곤 하였다 (1 사무 27, 2. 10).”

필리스타인들은 누구인가?

아키스는 다윗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에게 자기 영토의 변방 성읍들 중 하나인 치클락을 맡겼습니다. 그는 ‘임금’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필리스티아의 다섯 ‘제후들” 중 제1인자였던 것 같습니다. 아키스는 다윗과 그의 군대를 이용하여 네겝을 점령하고 있던 이스라엘 지파들로부터 필리스티아의 남동쪽 경계를 방어하고자 했지요. 다윗은 이들 지파들을 공격했다고 보고했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큰 적인 아말렉족과 평소 네겝의 정착지들을 괴롭히던 다른 유목민 집단들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네겝 지역의 이름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습니다(1 사무 27, 10;30, 14). 곧 서쪽은 “게레즈족의 남쪽,” 중앙은 “유다의 네겝,” 아마도 주로 헤브론 남쪽 산악 지대를 포함하였을 북동쪽은 “칼렙의 남쪽”(판관 1,15), 아랏 부근의 동쪽으로는 “카인족의 네겝 (판관 1,16)”이었으며, 남동쪽은 아마도 “여라흐므엘족의 네겝”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이한 점은 여기에 시메온이 빠져 있는 것인데, 1역대 4, 31-32을 적절히 분리해서 보면 시메온은 다윗이 임금이 되기 전까지는 네겝의 성읍들로 진출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4) 다윗의 용사들 (기원전 1018-1017년경) (1사무 23, 8-39; 1 역대 11, 10-12,22)

“다윗이 나가서 그들을 맞으며 말하였다. “여러분이 좋은 마음으로 나를 도우러 왔다면, 나도 여러분과 한마음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여러분이 나를 배신하고 내 원수들에게 나를 넘긴다면,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보고 벌하실 것입니다.”(1 역대 12,18).”

다윗 주변으로 용사들이 모였습니다. 일부는 광야 요새에서(1역대 12, 8), 일부는 치클락에 있을 때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다윗 군에서 핵심 역할을 하면서 절대적으로 충성했고, 언제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공을 세울 준비가 되어 있었지요. 대부분은 유다와 벤야민 출신이었으나, 에프라임 산악지대나 요르단 강 너머 같은 조금 더 멀리 있는 지파 출신도 있었습니다. 용사들 중 ‘삼십(명의) 우두머리’는 다윗 통치 기간 중 상비군 제도로 자리 잡았고, 이후에는 그 수가 늘어나서 암몬 사람 첼렉, 브에롯 사람 나하라이,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와 같은 외국인들까지도 포함하게 되었습니다(2 사무 23,37-39; 1 역대 11, 39. 41).

5) 길보아 전투를 위한 병력 배치 (기원전 1016년경) (1사무 29장)

“필리스티아인들은 모든 진영을 아펙에 집결시키고, 이스라엘은 이즈르엘에 있는 샘가에 진을 쳤다(1 사무 29,1).”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의 전쟁은 길보아 산에서 사울이 전사함으로 끝이 났습니다. 사울은 이즈르엘의 교차로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습니다. 필리스티아는 골짜기를 점령하여 갈릴레아 지역 지파들을 에프라임 산악지대와 단절시키려고 했습니다.

이 전투의 준비 과정과 전쟁 자체를 제대로 이해를 하려면 성경의 기록이 정확한 연대순이 아니라 사울과 다윗의 움직임에 따라 사건에서 사건으로 건너뛰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를 해야 합니다. 1 사무엘기서 28장에는 사울이 전투 전날 밤 엔 도르의 점쟁이 여인을 찾아가 만나는 이야기가, 29장에는 필리스티아 방백들과 아키스가 출정을 시작하면서 다윗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의 적절한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필리스티아인들은 북방 원정을 강행하면서 관행대로 샤론 평야의 아펙에 집결했습니다(1 사무 29,1). 이들은 이곳에서부터 모레 언덕 기슭에 있는 수넴으로 진격했고, 사울은 경무장한 이스라엘 용사들에게 조금 더 유리할 것 같은 산악지대를 선택하여 군대를 필리스티아군의 맞은편 길보아 산에 배치시켰습니다. 그는 이즈르엘 기슭에 있는 한 샘 곁에 진을 쳤는데, 바로 여기서 한밤중에 엔 도르의 점쟁이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다음날 그는 길보아에서 세 아들과 함께 영웅적인 죽음을 맞았습니다. 필리스티아는 완승했고, 이즈르엘의 주요 도시들은 그들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필리스티아는 경고의 표시로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의 시체를 벳 산 성벽에 매달고 그들의 무기는 아스타롯 신전에 두었습니다. 이 신전은 아마도 당시 이곳에 있던 두 개의 신전 중 하나일 것이며, 고고학 발굴을 통해 그 유적이 밝혀졌습니다. 사울이 살아있을 때 자신들의 성읍을 암몬으로부터 구해 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길앗 야베스 주민들은 어둠을 틈 타 위험을 무릅쓰고 벳 산 성벽에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내려 야베스로 가져와 정중히 장사를 지내고 7일간 단식하며 슬퍼했습니다.

6) 사울의 죽음과 장사 지냄 (1사무 31, 1-13)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에 싸움을 걸어왔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도망치다가, 길보아 산에서 살해되어 쓰러졌다. … 야베스 길앗 주민들은 필리스티아인들이 사울에게 한 일을 전해 들었다. 그러자 그곳의 용사들이 모두 나섰다. 그들은 밤새도록 걸어가서, 사울의 주검과 그 아들들의 주검을 벳 산 성벽에서 내려다가, 야베스로 돌아와 거기에서 불태웠다. 그다음 그들은 그 뼈를 추려 야베스에 있는 에셀 나무 밑에 묻고, 이레 동안 단식하였다.”

7) 다윗 왕국과 에스바알 왕국 (기원전 1018-1010년경)

“사울의 아들 이스 보셋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것은 마흔 살 때였다. 그는 두 해 동안 다스렸다. 한편, 유다 집안은 다윗을 따랐다(2 사무 2,10).”

사울의 군대 장수이며 네르의 아들인 아브네르는 길보아 전투에서 도망하여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수도를 요르단 강 너머 마하나임으로 옮기고, 살아남은 사울의 아들들 중 에스바알을 왕위에 앉혔습니다(2 사무 2,8; 1 역대 8, 33). 성경은 에스바알을 폄하하여 ‘치욕스러운 사람’을 의미하는 이스 보셋으로도 부릅니다. 다윗은 갓 임금의 신하로서 필리스티아의 집결지인 아펙으로 왔지만, 필리스티아 제후들이 그를 의심하는 바람에 동족과의 싸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1 사무 29장).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은 유다의 원로들을 설득하여 헤브론에서 칼렙, 크나즈, 카인, 여라흐므엘, 시메온과 관련된 지파들과 더불어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의 임금으로 세우도록 했습니다. 헤브론은 지리상 연합한 지파들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점과 유다라기보다는 칼렙 땅이라는 이유로 다윗 왕국의 수도가 되었지요. 다윗이 유다에서 통치하는 동안 에스바알은 사울 왕국의 나머지 다섯 지파 지역을 다스렸습니다(2 사무 2, 9-10). 필리스티아는 이러한 분열을 환영했고, 갓 왕 아키스는 다윗을 여전히 자기 명령에 따르는 충성스러운 신하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필리스티아인들의 추측대로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브온에서 벌어진 충돌은 적대 중인 두 왕국의 힘을 약화시킨 수많은 전투 중 하나에 불과했지요. 마치 이스라엘과 유다는 자신들의 구역을 벗어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이전의 지역 지파 연맹 상태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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