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이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과 자신의 궁을 건축하고, 여러 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안정되고 풍요로운 시대를 누렸습니다. 솔로몬의 통치와 무역, 건축 사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솔로몬 시대 지방 관장들의 관할 구역, 예루살렘 건축과 확장
“솔로몬은 또 온 이스라엘에 열두 지방관을 두어, 임금과 왕실에 양식을 대도록 하였다. 한 사람이 한 해에 한 달씩 양식을 대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후르의 아들이 에프라임 산악 지방을 맡고, 데케르의 아들이 마카츠와 사알빔과 벳 세메스와 엘론 벳 하난을, 헤셋의 아들이 아루뽓과 소코와 헤페르 땅 전체를 맡았다. 또 솔로몬의 딸 타팟을 아내로 삼은 아비나답의 아들이 도르의 고지대 전체를 맡고, 아힐룻의 아들 바아나가 타아낙과 므기또, 이즈르엘 아래 차르탄 곁에 있는 벳 스안 전체와, 벳 스안에서 아벨 므홀라에 이르는 지역, 곧 요크므암 건너편까지를, 그리고 게베르의 아들이 라못 길앗을 맡았다. 그의 지역은 길앗에 있는 므나쎄의 아들 ‘야이르의 부락들’과, 바산의 아르곱 지역에 있는, 성벽과 청동 빗장을 갖춘 큰 성읍 예순 개였다. 그리고 이또의 아들 아히나답이 마하나임을 맡고, 솔로몬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은 아히마아츠가 납탈리를, 후사이의 아들 바아나가 아세르와 브알롯을, 파루아의 아들 여호사팟이 이사카르를, 엘라의 아들 시므이가 벤야민을, 우리의 아들 게베르가 길앗 땅, 곧 아모리 임금 시혼과 바산 임금 옥의 땅을 맡았다. 그리고 유다 땅을 맡은 지방관은 따로 있었다. (1열왕 4, 7-19)”
지파 중심적인 이스라엘족과 도시 중심적인 가나안족이 나뉘는 것은 통일 왕국의 사회적, 지리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들은 징세 대상이었지요. 그들은 주로 해안 평야와 이즈르엘 골짜기 같은 낮은 지대에서 살았으며, 상부 갈릴래아 의 벳 세메스와 벳 아낫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습니다(판관 1,33).
솔로몬은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 지방 관장들에게 구역을 배정 했습니다. 기존에 받은 지파별 ‘상속 재산’은 그대로 인정되고 존중 되었지요. 한편 다윗 때 비로소 점령된 지역들이 이제 새로운 구역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열 두 관장과 그들의 담당 지역 목록(1열왕 4,7-19)은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행정 문서이지만, 그 본문이 온전하지는 않습니다. 일부 빠진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상당히 정확하게 지리적인 틀을 재구성할 수 있지요. 이 중 지도상의1,8,9,10,11,12번의여섯 개 구역은 지파 이름을 붙였는데, 철기시대 초 이스라엘이 정착했던 지역과 일치합니다. 여호 18,21-28의 벤야민 지파와 19, 10-39의 아세르, 납탈리, 이사카르 등 갈릴래아 지파들의 성읍 명단은 바로 이 솔로몬 시대의 행정 기록에서 도출한 것일 수 있지요.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이사카르 지역은 기원전 10세기에만 집중적으로 정착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마도 왕국에서 이사카르 지파에게 본래 그들이 살았던 이즈르엘 골짜기에서 고원 지역으로 올라가게 함으로써 낮은 지대의 가나안 족에게 부과하던 무거운 세금을 가볍게 해주는 한편 당시에 개발되지 않은 지역을 활용하고 육성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나머지 지도의 2,3,4,5,6,7번 여섯 구역은 각 구역의 성읍들만 확인되는데, 이들은 전에 가나안, 아모리 등 이스라엘 백성 외의 다른 이방 민족들이 살았던 지역들입니다. 솔로몬의 목록에서 2번과 12번 두 곳이 불완전한데, 이들의 원래 목록은 여호수아서에 각각 단 지파(여호 19,40-46)와 르우벤 지파(13, 15-23)의 상속 재산에 포함되어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레위인의 성읍이 이방 민족들이 살고 있는 국경 지역과 낮은 지대에 두드러지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지요. 각 지역들의 경제력을 균등하게 만들려는 시도는 전혀 없어 보입니다. 이스라엘 지파들이 살고 있는 지방의 우두머리들은 솔로몬의 왕궁에 매달 식량을 보내는 것 외에도 주로 부역을 담당했다(바로 이곳 산악 지역에 최고의 채석장들이 있었다). 낮은 지대의 지방 우두머리들은 세금을 부담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부역과 징세의 대상은 주로 가나안족과 이스라엘 정착 이전부터 이 땅에 살고 있던 민족들이었어요. 납탈리 지역의 우두머리는 가나안족과 이스라엘 사람 모두를 담당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유다는 이 12 행정구역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담당 우두머리가 있었어요. 유다 땅의 지역 구분은 솔로몬의 12 행정구역에 상응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지만 통일 왕정에서 유다가 상당한 특혜를 받은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솔로몬은 내륙 교역로에 있는 적대적인 정치 세력들로 인해 외국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감소하자 ‘카불 땅’을 히람에게 주어(1 열왕 9,10-13) 티로와의 국제 수지 적자를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솔로몬의 교역 독점을 시기하던 파라오 시삭(Shishak)은 에돔과 이스라엘의 망명자들을 받아들이면서 기회를 엿보아 레반트 지역 교역로에 대한 이스라엘의 독점을 끝내고자 했습니다.
1) 예루살렘 건축과 확장 (기원전 10세기 중반)
“제 사 년 지우 달에 주님의 집 기초가 놓였다. 그리고 제십일년 불 달, 곧 여덟째 달에 그 집은 모든 부분이 설계한 대로 완공되었다. 솔로몬이 그 집을 짓는 데에는 일곱 해가 걸렸다. 솔로몬이 열세 해에 걸쳐 자기 궁전을 짓고, 궁전 전체를 마무리하였다. (1 열왕 6,37-7,1)”
솔로몬은 예루살렘을 강력한 국가의 수도에 걸맞게 요새화하고, 단장하면서 그 규모를 확장했습니다. 7년에 걸쳐 건축한 성전이 13년 만에 완성된 왕궁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이 두 건축물은 왕국을 이끌어가는 두 제도 즉, 아론 계통의 레위인 종교 조직과 왕가를 대표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해 둘은 상호 의존적이었고, 각각 이스라엘 전 지역의 많은 땅과 자원들을 차지했습니다.
다윗이 사들인 타작마당과 그 부근의 언덕이 성채 안으로 들어오면서 도성의 실제 면적은 북쪽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거대한 옹벽도 기술적으로 진보한 부문 중 하나인데, 기혼 샘 위쪽 발굴 작업에서 그 일부가 드러났지요.
남동쪽 산에는 솔로몬이 정략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어(1열왕 11,1) 방문한 외교 사절들이 머물고 있었는데, 이들은 그 공관 내에 각자의 국가 신을 모신 신당을 두고 있었습니다(1열왕 11, 4-8; 2열왕 23, 13). 솔로몬과 정략 결혼을 한 수많은 이방인 아내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당에서 제물을 바칠 수 있었고, 솔로몬 또한 말년에 그들의 제사에 참여했습니다.
2. 솔로몬 건축 사업과 독점 무역(기원전 10세기 중반)
1) 솔로몬의 건축 사업
“솔로몬 임금이 주님의 집과 자기 궁전과 밀로 궁을 짓고, 예루살렘 성벽과 하초르와 므기또와 게제르를 세우려고 부역을 시킨 이야기는 이러하다.이집트 임금 파라오가 올라와 게제르를 점령할 때, 그 성읍에 불을 지르고 그곳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을 살해한 일이 있었다. 그는 솔로몬의 아내가 된 자기 딸에게 그 성읍을 지참금으로 주었는데, 솔로몬이 이 게제르를 재건하였던 것이다. 솔로몬은 또 ‘아래 벳 호론’을 세우고, 유다 지방 광야에 바알랏과 타마르를 세웠다. 솔로몬은 자기의 모든 양곡 저장 성읍, 그리고 병거대 주둔 성읍들과 기병대 주둔 성읍들을 세웠다. 그 밖에도 솔로몬은 예루살렘과 레바논을 비롯하여 자기가 다스리는 온 영토 안에 세우고 싶어 하던 것을 다 세웠다. (1 열왕열왕 9,15-19)”
솔로몬 왕은 다윗 왕조의 최초 주요 건축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페니키아 건축가들에게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게 한 것으로 전해지며(1 역대 14,1; 15,1), 긴 통치 기간 동안 그 역시 국가를 위한 사업들을 일으켰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그러나 통일 왕정은 솔로몬이 국제 무역로를 장악함으로 꾸준한 수입이 보장된 후에야 그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더불어 체계적인 관료 조직이 군대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솔로몬은 자신의 뜻대로 인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전과 왕궁을 건축한 이후에도 왕국 전역의 교통과 무역의 핵심 지역에 견고한 요새 성읍을 세웠습니다. 이들 중 성경에 특별히 하초르, 므기또, 게제르(1 열왕 9,15)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들 지역의 고고학 발국 작업에서 거의 똑같은 문들이 발견되었는데, 에제키엘 40,10에 묘사된 미래의 예루살렘 성전의 문들과 비슷했습니다. 그 외의 지역으로는 아래 벳 호론, 바알랏, 들에 있는 타마르가 있으며(1열왕 9,17-18), 이곳에는 병거대 주둔 성읍들과 기병대 주둔 성읍들이 있었습니다(1열왕 9,19). 노동은 가나안 모든 민족과 다윗이 정복한 기타 민족들에게 부과되었으며(판관 1,28.30.33.35; 1열왕 5, 13-14; 9,20-21), 이들은 교대로 레바논에 가서 나무를 벌목해 이스라엘로 보내는 일을 했습니다. 부역은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 모집했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산악지대에서 채석한 돌들을 건축 현장으로 보내는 일 외에 실제 건축 현장에서 일하기도 했지요(1열왕 5,15-17; 11,28). 각 부서에는 감독과 관리자로 이루어진 자체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2) 솔로몬의 독점 무역
“솔로몬이 병거와 군마를 모으니 병거가 천사백 대, 군마는 만 이천 마리에 이르렀다. 그는 그것들을 병거대 주둔 성과 임금이 있는 예루살렘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솔로몬 임금 덕분에 예루살렘에서는 은이 돌처럼 흔해졌고, 향백나무는 평원 지대의 돌무화과나무만큼이나 많아졌다. 솔로몬은 이집트와 크웨에서 말들을 들여왔는데, 왕실 무역상들을 통하여 크웨에서 일정한 가격으로 사들였다. 병거는 한 대에 은 육백 세켈, 말은 한 마리에 은 백오십 세켈을 주고 이집트에서 들여왔다가, 왕실 무역상들을 통하여 히타이트의 모든 임금과 아람 임금들에게 되팔았다. (1 열왕열왕 10, 26-29)”
이집트나 메소포타미나에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교량 지역을 지배할 강대국이 없었던 바로 그 시대에, 새롭게 통일된 이스라엘 왕국이 유프라테스 강과 이집트 삼각주 사이의 주요 교역로에서 정치, 군사적으로 패권을 잡았습니다(1 열왕 4,21.24; 2 역대 9,26). 에돔, 모압, 시돈(페니키아), 히타이트(시리아 북부의 아람족) 등의 이스라엘 인근의 작은 나라들은 모두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에 복속되었으며, 이들과 솔로몬 정부의 관계는 솔로몬의 결혼 동맹(1 열왕 11,1)으로 상징됩니다. 새 왕국의 인구 기반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규모로 확대되었지요. 평지의 비옥한 곡창 지대가 과수원과 포도원이 많이 있었던 산악지대와 연결되면서 , 이스라엘은 페니키아 해양 민족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지나는 수많은 무역상들의 필요까지 충족해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들에게 군사적으로 보호를 해 주고, 물과 사료, 양식을 제공해 주어 그 대가로 귀금속이나 상품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수입의 일부는 특히 주요 교역로에 위치한 중요한 성읍들을 요새 화하는데 투자되었습니다.
솔로몬은 페니키아 벳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해상 원정까지 나서 소말리아와 남아라비아의 이국적 상품들을 들여와 필리스티아와 페니키아 항구에서 거래하도록 했습니다. 레반트 지역의 교역 중추에는 이즈르엘 및 베카 계곡을 경유하거나 벳 산 근처 요르단 나루에서 골란 및 다마스쿠스를 지나 이집트에서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경로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솔로몬의 중심 요새들이 통제했습니다. 트랜스요르단(오늘날 요르단 땅) 고원의 중요한 무역 대로는 바산, 길앗, 모압 평지에 주둔해 있던 솔로몬의 군대가 감독했다. 에츠욘 게베르에서 가자로 가는 무역상들은 솔로몬이 광야와 네겝에 세운 요새들이 장악한 경로를 통과해야만 했지요. 이 모든 상황은 티로의 히람이 그토록 예루살렘 왕들과 동맹 조약을 맺으려고 했던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줍니다.
3) 티로의 무역 (기원전 10-7세기)
티로의 무역 (기원전 10-7세기)
“바다 어귀에 자리 잡은 성읍, 수많은 섬으로 다니며 여러 민족과 장사하는 상인 티로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티로야, ′나는 더없이 아름다워.′ 하고 너는 말하였다. 너의 경계선들은 바다 한가운데에 있고 조선공들은 너를 더없이 아름답게 지었다. 너의 바깥 판들은 모두 스니르의 방백나무로 짜고 레바논의 향백나무를 가져다가 네 위에 올린 돛대를 만들었다. 바산의 참나무로 노를 만들고 키팀 섬에서 젓나무를 가져다가 상아를 박으며 갑판을 깔았다. 너의 돛은 이집트에서 가져온 수놓은 아마포로 그것이 너의 깃발이 되기도 하였고 차일은 엘리사아 섬에서 온 자주와 자홍 색 천으로 만들어졌다. … 너에게는너에게는 온갖 재물이 많아 타르시스가 너와 무역을 하였다. 그들은 은과 쇠와 주석과 납을 주고 네 상품들을 가져갔다. 야완, 투발, 메섹도 너와 장사를 하여, 노예와 구리 연장을 주고 네 물품들을 가져갔고, 벳 토가르마에서는 말과 군마와 노새를 주고 네 상품들을 가져갔다. 드단 사람들도 너와 장사를 하였고, 또한 많은 섬이 너의 중개상으로 일하면서, 그 대가로 너에게 상아와 흑단을 지불하였다. 너에게는 온갖 제품이 많아서 아람도 너와 무역을 하여, 석류석, 자홍 천, 수놓은 천, 아마포, 산호, 홍옥을 주고 네 상품들을 가져갔으며, 유다와 이스라엘 땅도 너와 장사를 하여, 민닛 밀, 기장, 꿀, 기름, 유향을 주고 네 물품들을 가져갔다. 너에게는 제품도 많고 온갖 재물이 많아, 다마스쿠스도 헬본 포도주와 차하르의 양털을 가져와 너와 무역을 하고, 단과 야완 머우잘도 너와 상품을 교환하였는데, 그들이 네 물품 값으로 가져온 것은 망치로 두드린 쇠, 계피, 향초였다. 드단은 말을 탈 때 안장에 까는 천을 가져와 너와 장사를 하고, 아라비아와 케다르의 제후들도 너의 중개상으로서, 새끼 양과 숫양과 숫염소를 가져와 너와 무역을 하였으며, 스바와 라마 상인들도 너와 장사를 하여, 온갖 최고급 향료와 보석과 금을 주고 너의 상품을 가져갔다. 하란과 칸네와 에덴, 그리고 스바의 상인들과 아시리아와 킬맛도 너와 장사를 하였는데, 그들은 화려한 의복, 수놓은 자주색 옷, 여러 색으로 짠 융단, 단단히 꼰 밧줄을 너의 시장으로 가져와서 너와 장사를 하였다. (에제 27,3-24)”
일찍이 해상 무역에 참여한 해양 민족들이 있었지만 솔로몬 시대에는 페니키아인들이 단연 독보적이었으며, 티로는 지중해 동부 해안의 도시국가 중 최강자로 떠올랐습니다. 심지어 솔로몬도 에츠욘 게베르에서 배들을 띄울 때 티로의 전문가들을 의지해야 했지요. 페니키아 상선은 ‘타르시스의 배들’이라 불렸는데, 아마도 길리기아 평원에 있는 타르소의 처음 지명이 ‘타르시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후 페니키아의 해상 탐험 범위가 확대되면서 ‘타르시스’라는 지명도 서쪽으로 이동하여 기원전 9세기경에는 사르데냐의 타로스(Tharros), 결국에는 스페인의 타르테소스(Tartessos)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비록 기원전 6세기의 것이지만 에제키엘 27장의 티로에 관한 예언은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여러 나라의 목록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더 오래된 문헌에 근거했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은 배를 건조할 때 무엇보다도 최고의 목재를 구해야만 했지요(에제 27,5-6). 계속해서 에제키엘은 고대의 주요 경제 중심지들에서 생산된 가장 유명한 물품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유일한 유명 소산물은 농산물이었는데, 대부분은 지역 시장에서 거래되었고, 특히 해양 산업에 종사하던 페니키아 주민들의 양식으로 공급되었습니다. 레반트 남부 지방에서 생산되는 것들은 거의 수출할 수 없는 것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통일 이스라엘 왕국과 같은 강력한 세력이 주요 시장을 서로 연결하는 모든 대상로들을 장악하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남부 아라비아, 아나톨리아, 그리스 등 발전된 국가들 간의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거둘 수 있게 되었지요. 솔로몬과 티로 왕 히람의 협력 관계는 양국의 풍부한 재정적 수익을 보장해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