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산띠아고는 제베데오의 아들이면서 요한의 형인 사도 야고보가 전교를 하고, 그의 유해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걷는 순례길 입니다. 성 야고보 사도를 스페인어로 산띠아고(Santiago)로 부릅니다. 산띠아고 가는 길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1. 산띠아고 가는 길
산띠아고(Santiago, 성 야고보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면서 사도 요한의 형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레아 출신인데요.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아버지와 함께 겐네사렛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였습니다. 그는 성 야고보로 불리는 가톨릭 교회의 성인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고 베드로와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성 야고보 사도는 스페인어로 산띠아고로 불리고, 영어로는 센인트 제임스(St. James)로, 프랑스어로는 생 자끄(Saint Jacques)로 불리고 있습니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유럽에서 출발해, 스페인의 북부지역을 가로질러 스페인 북서부에 있는 산띠아고 데 꼼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있는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이 길은 중세시대부터 동쪽에서 서쪽으로 걸어가던 가톨릭 순례자의 길로 지상의 길이자 동시에 천상의 길이기도 한답니다. 다시 말하면, 까미노는 그 길을 걷는 순례자의 삶에서 영적인 경험을 하도록 해주는 탁월한 곳이기도 합니다.

2. 산띠아고 가는 길의 유래와 역사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는 대서양과 지중해에 둘러싸여있는 지역인데요. 이는 마치 사람의 주먹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스페인에 가톨릭 교회가 전파되기 시작한 때는 1세기 중엽 로마 사람들의 침략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에 사도 바오로를 포함한 일곱 명의 사도들이 전교를 했다고 전합니다.
스페인에는 성 야고보 사도가 가톨릭을 전파했습니다. 성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복음서, 사도행전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뒤, 유대아 땅을 떠나 전교를 위해 머나먼 서쪽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이스파니아에서 포교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과가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헤로데 아그리빠스 1세 임금에 의해 교수형으로 죽임을 당하여 순교했습니다. 그의 스페인 전교여행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유대아의 헤로데 아그리빠스 1세에 의해 기원후 44년에 처형되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의 순교는 성 루카 복음사가가 로마에서 쓴 사도행전 12장 1-3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즈음 헤로데 임금이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을 해치려고 손을 뻗쳤다. 그는 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쳐 죽이게 하고서, 유다인들이 그 일로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들이게 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헤로데 임금에 의해 처형된 야고보 사도의 시신을 제자들이 수습해 돌로 만든 배에 실어 스페인 북서쪽을 향해 보냈다고 합니다. 몇 명의 제자들이 그의 유해가 담긴 돌로 만든 널을 해변까지 나르자, 천사가 양 옆을 붙잡고 있는 돌로 만들어진 배가 나타나 그 널을 실었습니다. 이 돌로 만든 배에에는 노와 돛 그리고 선원조차도 없었다고 하는데요. 그 배는 일주일 동안 지중해를 지나 대서양까지 나아갔습니다. 배는 온갖 풍랑을 맞으면서 로마 시대의 갈리시아 지방의 수도였던 오늘날의 빠드론 지역인 이리아 플라비아에 가 닿았습니다.
이 전승은 역사적 정황을 고려해 재해석을 해 볼 수 있는데요. 야고보 사도의 순교 이후 가톨릭 교회의 오래된 전통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참수당한 사도의 시신을 거두어 수의를 입히고 팔레스티나 해안으로 옮겼습니다. 하이파 항구에서 상선 아 바르까 데 빼드라(A Barca de Pedra)에 사도의 유해를 싣고 지중해와 이베리아 반도의 대서양 해안을 지나서 서쪽 끝, 사도 야고보가 복음을 전파했던 장소까지 왔습니다. 시신을 팔레스티나의 하이파에서 이리아 플라비아까지 돌로 만든 배로 옮겼다는 것은 갈리시아에서 로마 제국 안에서 다른 곳으로 광물을 운반했던 배로 유해를 옮겼다는 의미입니다. 바닷길을 항해하던 배는 아로우사 이라, 우야 강으로 들어서서 또레스 데 오에스떼, 뽄떼세수레스 같은 로마의 시설물을 지나, 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러한 경로로 야고보 사도의 유해를 실은 배는 로마인의 도시 이리아 플라비아에 도착했을 겁니다.
12 세기 초의 칼릭스티누스 사본(Codex Calixtinus)은 하이파에서 이리아 플라비아까지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어떻게 갔는지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의 전승과 구전에 따르면 지중해 가장 동쪽에서 시작해 당시 세계의 끝까지 갔던 긴 여정 끝에 성 야고보 사도의 유해는 그가 선교를 했던 땅까지 오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사도의 두 제자인 테오도르와 아타나시오는 루빠 여왕과 현재 피스떼라 부근이었던 두기움에서 마주치게 될 로마군을 피하기 위해 고심을 해야만 했습니다. 수많은 고난을 겪은 후 두 제자는 스승을 묻을 곳을 구했습니다. 야고보의 무덤으로 정한 장소는 로마인의 작은 마을 근처를 지나는 교차로였습니다. 이곳은 수백 년 동안 리브레돈 숲의 덤불에 가려져 있었다고 하는데요. 전설에 따르면 루빠 여왕이 여러 기적들을 체험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에 그녀의 도움을 받아 제자들이 야고보의 유해를 옮겨 가까운 내륙에 매장했다고 합니다.
이후 야고보 사도의 무덤은 수 세기 동안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습니다. 스페인이 가톨릭이 주류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지요. 그런데 8세기 경에 뜻밖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프랑스로 넘어 갔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소수의 가톨릭 신자가 스페인의 북서쪽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서기 813년에 호기심 많은 가톨릭 수사인 ‘은둔자 빠이요’가 감미로운 음악 소리와 반짝이는 별을 따라 멀리 갈리사에 있는 구릉지까지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밝게 빛나는 한 무리의 별빛이 어느 곳을 비추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는 여기에서 유골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이 장소는 “별이 비춘 들판”이라는 뜻의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이것이 오늘날의 콤뽀스텔라(Compostela)가 된 것입니다. 또는 무덤을 의미하는 라틴어닌 꼼뽀스띠움(Compostium)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도 합니다. 이 소식은 점차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때 이리아 플라비아의 주교 떼오도르는 이 소식을 듣고 교황 칼릭스투스 2세에게 보고합니다. 교황은 이 유골이 성 야고보 사도의 유골로 인증하고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 사실을 아스투리아스의 왕인 알폰소 2세(791~842)에게 알립니다. 알폰소 2세는 이곳에 방문해 아름다운 성당 세 채를 건축해 봉헌했습니다. 그 뒤에 성 야고보 사도를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고 일종의 종교적 이벤트를 열었습니다. 이는 카롤링거 왕조의 가톨릭 부흥과 성 야고보를 사도를 연관시키려는 정치적, 종교적 합의에 의한 것인 것 같습니다.

(17세기의 꼼뽀스텔라 모습)
이렇게 해서 성 야고보는 스페인의 수호 성인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성 마르코가 베네치아에 부를 주고, 성 안드레아가 비잔틴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처럼 성 야고보는 당시 이슬람 세계와 접하고 있던 변경 지방인 길리시아의 수호성인이 된 것입니다. 당시 갈리시아는 레콩키스타(Reconquista, 718년부터 1492년까지, 약 7세기 반에 걸쳐서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로마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을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함; 레콩키스타는 스페인어로 ‘재정복’을 의미)의 열기가 고양되던 곳이어서, 성 야고보의 전설은 전쟁터에서 언제나 볼 수 있게 됩니다.
성 야고보는 정치적으로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에 중요한 명분이 되었는데요. 전설 속에서 성 야고보는 로그로뇨 근처 ‘끌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전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슬람 군대를 향해 칼을 휘두르며, 이슬람교도의 전진을 막았습니다. 야고보의 모습을 보고 사기가 오른 가톨릭 군대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 사도는 평화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가진 순례자의 성인 야고보(Santiago Peregrino)라기 보다는 산띠아고 마타모로스(Santiago Matamoros; 전사 야고보)라고 불립니다. 현재 싼띠아고 대 꼼뽀스뗄라 시청으로 쓰고 있는 라호이 궁전에 성 야고보의 기마상이 놓이게 된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9 세기부터 가톨릭에서는 이슬람 침략에 대항하는 방법의 하나이면서 북부 스페인 사람들이 이교도로 개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산띠아고까지 순례하는 것을 장려했습니다. 순례 장소를 홍보하는 것은 중세 마케팅의 결정체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후로 순례자들의 숫자는 수백 년 동안 계속 증가해 왔습니다. 특히 튀르키예가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예루살렘으로의 순례하는 것이 힘들고 위험해지자 수많은 프랑스 신자들은 산띠아고 순례를 했습니다.
오늘날 피레네 산맥의 세장피드포르에서부터 스페인 북부지역을 관통해 지나는 길을 프랑스 길(Camino Frances)이라고 부르는데요. 이길은 가장 일반적인 순례길로 알려져있습니다. 1189년 마침내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는 교황 알렉산더 3세에 의해에 의해 로마, 예루살렘과 같은 가톨릭의 성지로 선언되었습니다. 또한 교황은 교령을 발표하여 성스러운 해 (산띠아고 성인의 축일인 7월 25일이 일요일이 되는 해)에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도착하는 순례자는 그 동안 지은 죄를 완전히 면죄받는데요. 다른 해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죄은 죄의 절반을 속죄 받는다는 대사를 선언했습니다. 이런 계기로 순례자들의 수는 12, 13세기에 가장 많았다고 전해지는데요. 이 시기에만 약 50만 정도의 순례자들이 이 길을 걸었고, 이때 순례길을 따라 많은 도시와 마을이 생겨났습니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 가톨릭의 수복이 완료된 후 순례자들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지요. 20세기 중반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순례를 했습니다. 그 후 1982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를 방문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산띠아고 순례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관심이 늘어나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또한 1987년에 EU가 까미노를 유럽의 문화유적으로 지정하였는데요. 1993년 유네스코가 까미노를 세계 문화유산에 추가하면서 폭발적으로 순례자들이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1997년 파울로 코엘교가 발표한 “연금술사”가 세계적인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소설의 배경이 된 이 순례자의 길이 젊은이들의 문화의 한 코드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순례자들이 많이 걸었고, 우리나라의 순례자들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2010년 11월 16일에는 교황 베네딕도 16세가 산띠아고 데 꼼뽀스텔라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3. 오늘날의 산띠아고 길
중세 시대의 순례자들은 갈리시아의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로 가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부터 걷거나 말을 타고 출발했습니다. 이러면서 자연스럽게 전 유럽에는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수많은 까미노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현재도 약 100여개의 까미노 루트들이 남아 있으며 새로운 루트도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데요. 프랑스의 4대 루트와 스위스의 상트갈렌에서 출발하는 스위스 루트 그리고 포르투갈과 영국에서 출발하는 루트가 대표적입니다.
대부분의 순례자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지나는 루트인 까미노 스란세스를 따릅니다. 까미노 프란세스는 피레네 산맥 발치의 세장피드포르에서 출발합니다. 실제로 도보 순례자들이 걷게 되는 거리는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까지 808km이며 피스떼라까지는 929km 정도가 됩니다. 장거리 도보순례인 까닭에 개인차에 따라 짧게는 30일, 길게는 45일 정도가 걸립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부족한 순례자들은 이 길을 몇 년 동안 나누어 걷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띠아고 데 꼼뽀스텔라에 있는 순례 사무국에서는 산띠아고 데 꼼뽀스까지 마지막 100km 이상을 걸은 순례자에게 꼼뽀스텔라(Compostela: 순례완료증서)를 주고 있습니다.
교황 알렉산더 3세의 교령 이후 순례하는 이들의 숫자는 산띠아고 성인의 축일인 7월 25일이 일요일이 되는 성스러운 해에 절정을 이룬다고 합니다. 지난 성스러운 해였던 2004년에만 18만명의 순례자들이 산띠아고 데 꼼뽀스텔라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10세기의 순례자들은 대성당의 은상자에 담겨있는 성 야고보의 유골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강도와 늑대들의 위험을 감수하고 이 험난한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성 야고보의 전설이 있기 이전 고대 켈트 족도 은하수를 따라 비아 락테스(Via Lactes)라고 불리는 이 길을 서쪽으로 태양이 지는 피스테라의 태양신전을 향해 걸었습니다. 당시 피스떼라는 세상의 끝으로 알려져 있었고, 사람들이 육로로 여행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었답니다.
오늘날의 순례자들은 산띠아고와 피스떼라까지 여러 가지 다른 이유 때문에 걷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스러운 도시까지의 순례라는 종교적인 이유로 걷고, 어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휴식을 원해서, 또는 더 단순한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어 순례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