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엔떼 라 레이나에서 에스떼야까지는 22km로 약 6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뿌엔떼 라 레이나에서 출발해 마냐루, 시라우끼, 로르까, 빌랴뚜에르따, 그리고 에스떼야에 이르는 각 구간의 도시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산띠아고 길: 뿌엔떼 라 레이나에서 에스떼야까지
1. 엘 까미노(El Camino): 구간(Route) 줄거리
산띠아고로 향하는 까미노에서 가장 사진을 많이 찍게 되는 장소 중의 하나인 “여왕의 다리”를 넘는다면 전날 마켓에서 마실 음료를 사 두는 것이 좋습니다. 돌로 만들어진 긴 다리를 건넌 순례자는 고속도로를 건너가 좁은 비포장도로를 통해서 계곡의 끝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계곡을 통해 마냐루 입구의 십자가상까지 오르는 가파른 비탈길은 오래된 수도원과 성당 건물 사이에서 시작됩니다. 아르가 계곡을 통해서 오르는 마지막 구간은 상당히 험하므로 물을 충분히 준비해야 하지요. 중세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는 마네루에는 향기로운 로즈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유명한 바가 있으며 언덕 위에 외롭게 서 있는 산따 바르바라 성당이 있습니다. 마냐루에서 나오는 까미노는 에스빼란사의 수도원과 포르수사 수도원을 통해 이어집니다. 다음 마을인 시라우끼까지는 약 40분 정도가 소요됩니다. 시라우끼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포도밭을 지나다 보면 두 개의 기둥이 남아있는 공동묘지에 도착하게 되는데요. 여기에서부터는 멀리 “살모사의 둥지”라고 불리는 시라우끼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평탄한 언덕을 올라서면 오래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의 마을에 다다르게 되면 12세기와 13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양식으로 건축된 커다란 두 개의 성당을 만나게 됩니다. 시라우끼의 마을 출구에는 놀랄만한 풍경이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는데요. 보르도와 아스또르가를 연결하는 이 아름다운 로마시대의 길은 이제 그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지만, 그 길을 걷는 순례자의 마음에 아스라한 중세의 나바라를 느끼게 해 줍니다. 특히 이 길에는 로마시대의 도로 건축양식의 예술성을 새삼 느끼게 해 줍니다. 마차가 다니기 위해서 폭이 최소 5m가 넘었던 길을 빗물을 잘 빠져나가게 한 배수로를 가지고 있었으며 바닥에는 커다란 돌을 토대로 기초공사를 하여 아직까지 희미하게나마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답니다. 중세의 로마길을 지나온 순례자는 현대에 만들어진 다리와 쁨쁠로나와 로그로뇨를 이어주는 고속도로를 만나게 됩니다. 순례자는 몇 십미터 사이에서 중세와 현대의 도로를 동시에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원래 로마시대의 길은 현재 N-11 고속도로의 밑에 집들도 있다고 하는데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고속도로를 왼쪽에 두고 평행하면서 지나게 됩니다. 약 2km를 포도밭 사이로 직진하면 실개천 위로 지나는 조그마한 돌로 만든 다리를 건너게 되며 잠시 후 고속도로 아래로 나있는 샛길을 따라 잠시 아요스(Alloz)로 향하는 NA-1717 고속도로를 올라서야 합니다. 이 고속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왼쪽으로 살라도 강을 건너는 중세의 다리를 넘을 수 있습니다.
이어 너덜지대의 좁은 길을 따라 왼쪽으로 따라가면 로르까에 도착합니다. 과거 로르까의 주민들은 돈벌이를 위해 소금기가 많은 강물을 독이 있는 강물이라고 순례자들을 속여 포도주를 팔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재는 맛 좋은 포도주 인심이 좋은 친절한 마을이지요. 산띠아고 길과 함께 만들어진 이 마을은 마요르 길 주위로 아름다운 건물들이 있으며 중세의 순례자들이 걸었단 마을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나는 도로의 중간에는 작은 우물과 정원이 있는데요. 순례자들에게 평화로운 휴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로르까를 나오는 길은 마을 출구의 N-11 고속도로와 연결되기 이전 왼쪽으로 나 있는 좁은 길을 다라가야 합니다. 이후 왼쪽으로 몬떼후라를 바라보며 자동차 도로 아래의 밭길을 지나게 됩니다. 지나온 마을들에 비해 상당히 커다란 마을인 빌라뚜에르따로 들어가기 전에는 순례자의 지친 발을 쉬게 해줄 수 있는 매력적인 숲이 이어지는데요. 차가운 샘물과 빵 가게와 레스토랑, 약국이 있는 두 개의 광장을 가로지르면 마을에 도착합니다.
고속도로 아래로 나있는 터널을 통과하여 산히네스 도로를 따라 걸으면 13세기에 만들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다리가 보입니다. 여섯 번째 날의 마지막 도착지인 에스떼야를 항하는 좁은 길을 만날 때까지 성당의 언덕길을 올라야 합니다. 왼쪽으로는 올리브나무 사이로 싼 미겔 성당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멀리 우르바사와 인디아 산맥이 보입니다. 언덕을 다 올라가면 에스떼야를 향하는 가벼운 내리막이 나옵니다. 이 길을 따라가면 2002년 산띠아고를 향하가 이 길 위에서 숨을 거둔 캐나다 사람인 케서린 킴톤을 추모하는 페레그리나의 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에스떼야를 통과하며 이후 리사라까지 순례자와 함께 걷게 되는 에가 강 위에 나무와 철로 만들어진 다리를 건너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좋은 빵과 훌륭한 포도주, 모든 종류의 행복함이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는 에스떼야는 프랑크족의 수공업자가 모여들어 상업이 번성했던 산띠아고 길의 오래된 도시 중 한 곳입니다. 15세기에 산띠아고를 향하는 순례자들로 넘쳐났던 아름다운 에스떼야는 산초 라미레즈 왕에 의해 여러 개의 바위산 옆에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에스떼야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축물은 3개의 고딕양식의 사원과 아라비아식으로 된 큰 현관이 아름다운 산 뻬드로 데 라 루아 성당인데요. 이외에도 나바라 왕궁과 대천사 미카엘 성당, 산또 도밍고 수도원과 성묘 성당의 아름다움이 순례자들을 즐겁게 해줍니다.
2. 마냐루(Maneru)
마냐루는 해발 456m에 위치해 있는 마을입니다. 고대 로마인들이 정착했던 마을로 대문마다 붙어있는 가문의 문장들이 이 마을의 자유로우면서도 고상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마냐루에서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별한 로즈와인을 맛볼 수 있습니다. 포도주 저장고를 방문하고 맛있는 전통 수프를 맛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마을을 벗어나면 넓은 포도밭과 양떼를 모는 목동이 등장하는 근사한 풍경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1) 까미노 이야기(Camino Story)
i) 시라우끼와 마냐루의 두 노파 이야기
마냐루의 시라우끼의 사이 교차로에는 두 마을의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요. 옛날 시라우끼와 마냐루에는 두 마을의 경계를 정하는 문제로 크고작은 다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두 노파가 두 마을의 경계선을 결정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표로 선출되었습니다. 둘 중에 상대편 마을 사람들이 채운 포도주 한 단지를 먼저 다 마시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마냐루 사람들은 시라우끼의 노파가 마실 포도주에 죽은 쥐를 넣었어요. 두 노파는 단지에 든 것을 모두 마셨는데요. 마냐루 노파가 단지를 깨끗이 비우는 동안 시라우끼의 노파 역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단지를 비웠습니다. 몇 번의 내기를 하다가 결국 시라우끼의 노파가 승리를 했답니다. 마냐루 주민들은 시라우끼이 노파가 쥐까지 먹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사람들이 뭔가 이상한 것을 못 느꼈느냐고 묻자 시라우끼의 노파는 목에 무슨 파리 같은 것이 걸린 것 같았지만 다 마셔버렸다고 했습니다.
3. 시라우끼(Cirauqui)
시라우끼의 기원은 마을에 남아 있는 로마 시대의 길을 보면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을은 언덕 위에 세워저 방어적인 기능이 있었고 주거지는 동심원 고리 모양으로 형성되었는데요. 시라우끼는 까미노의 전통, 문화, 예술적인 면에서 흥미로운 곳이고 로마, 이슬람, 그리스도교 문화가 혼합된 곳이기도 합니다. 시라우끼에서는 중세의 구불구불한 길을 걸으며 성벽, 문, 집을 감상하고 로마 가도를 산책하면서 과거의 시간에 푹 빠져볼 수도 있습니다. 시라우끼라는 이름은 바스크어로 ‘살모사의 둥지’라는 뜻입니다. 로마 시대와 중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 마을의 전략적인 위치 때문에 지나가기가 어려운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시라우끼 남쪽에는 아니스 폐허(Despoblado de Aniz)가 있습니다. 1537년부터 폐허로 남아 있다고 하는데요. 성벽 일부와 산따 마리아 성당의 일부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1) 까미노 포인트(Camino Point)
i) 산 로만 성당(Iglesia de San Roman)
1200년경에 건축된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으로, 17세기 후반에 재건축되었습니다. 이때 성당의 제단 부분이 바로크양식으로 바뀌었다고합니다. 12세기 후반의 로마네스크식 아치는 뿌엔떼 라 레이나의 산띠아고 성당과 비슷한 구조로 로마네스트 양식의 남아 있는 부분은 정문뿐인데요. 건축 양식으로 에스뻬이의 산 뻬드로 성당과 매우 비슷합니다.
ii) 산따 까딸리나 성당(Iglesia de Santa Catalina)
산따 까딸리나 성당은 13세기에 만들어진 고딕 양식 건물로 내부가 세 구획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제단 부분은 다각형이고 16세기에 건물 측면에 소성당들이 추가로 증축되었습니다. 성가대석은 낮은 아치 위에 있고, 감실은 제단 쪽 벽에 붙어있습니다.
4. 로르까(Lorca)
해발 483m 지점에 있는 로르까를 방문했던 순례자들은 로르까 주민들의 친절함에 대해 종종 이야기를 하는데요. 예리 계곡의 초입에 위치한 이 마을은 경관이 아름답고 기념물이 많습니다. 로르까의 주요 거리는 까미노의 일부이며 이 길의 주변으로 건물들이 들어서 있으며 전통 포도주 저장고에서 지방의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까미노를 따라 로르까로 가다 보면 나바라 왕국의 첫 번째 영토였던 예리 계곡이 나옵니다. 이곳의 이름은 ‘전투’라는 뜻의 아랍어 알 아우르께(Al Aurque)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는데요. 이것은 이 계곡에서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의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1) 까미노 포인트
i) 산 살바도르 교구 성당(Iglesia Parrotual de San Salvador)
산 살바도르 교구 성당은 롬바르디아 양식의 로마네스크 성당으로 내부는 13세기 고딕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신랑은 크기가 다른 구획으로 이루어져 있고 제단 부분은 반원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창문 위는 아치, 제단 위는 원형 궁릉으로 덮여 있으며 18세기에 증축된 성구실은 외벽에 붙어 있습니다. 정문과 탑은 20세기에 지어진 현대 건축물입니다. 18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만든 순례자 야고보 성인의 제단화가 있습니다.
5. 빌랴뚜에르따(Villatuerta)
빌랴뚜에르따는 중세의 로마인들이 거주했던 해발 439m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성직자들의 거주지이기도 한데요. 이곳이 거주지였던 이유는 이란수 강이 주는 풍요로운 자원과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현재도 빌랴뚜에르따의 주민들은 이란수 강의 양 옆에 나뉘어 살고있는데요. 로마인들이 이 구불거리는 마을이란 뜻으로 빌라또르따(Villatorta)라고 불러서 마을의 어원이 생겼다고 합니다. 빌랴뚜에르따의 밭은 매우 비옥해서 레스토랑에 가면 이 지역에서 생산된 재료로 만든 음식과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케익과 후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또한 투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빌랴뚜에르따 에스떼야 출신 투우사인 빠블로 에르모스 데 멘도사의 황소 목장을 둘러 볼 수도 있습니다. 과거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를 향하는 까미노는 빌랴뚜에르따에서 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는 사라뿌스 수도원으로, 그리고 다시 이라체 수도원으로 에스떼야를 지나지 않고 곧장 이어져 있습니다. 1090년에 산초 라미레스가 넘쳐나는 야고보 길의 도보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에스떼야를 세우면서부터 까미노 길이 바뀌었는데요. 그러나 아직까지도 빌랴뚜에르따는 예전의 까미노 길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1) 까미노 스토리(Camino Story)
i) 성 베레문도의 고향
이라체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었던 성 베레문도의 고향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빌랴뚜에르따와 인접한 아레야노(Arellano) 사람들은 성 베레문도의 고향이 자기 마을이라는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데요. 이런 이유로 성인의 유해는 5년마다 번갈아 가며 두 마을에서 보관합니다. 그렇지만 매월 3월 8일에는 모두 성 베레문도의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ii) 성모 승천 성당(Iglesia de La Asuncion)
성모 승천 성당은 13세기 초반에 지어진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인데요. 1200년에 지어진 아름다운 종탑이 있으며 성당의 내부에는 고딕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고 신비로운 벽화가 남아 있습니다. 14세기 후반에 구조가 바뀌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치를 받치고 있는 기둥의 주두는 체스판 무의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성당 측면의 로마네스크식 정문은 이웃한 산 로만 성당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성당 앞에는 인자한 모습을 하고 있는 성 베레문도의 상이 서 있습니다.
iii) 산 미겔 소성당(Ermita de San Miguel)
산 미겔 수도원에 있는 소성당 유적에 관한 자료는 1062년에 산초 데 빼날렌 왕이 산 살바도르 데 레이레에게 이곳을 봉헌했다는 기록이 유일합니다. 에스떼야로 향하는 길의 내리막이 시작되기 직전에 자리하고 이 성당은 여러 번 개축되어 정확한 건축 시기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6. 에스떼야 (Estella)
해발 426m에 위치한 에스떼야에는 기념물이 많아 북쪽의 똘레도라고도 불립니다. 이곳은 1090년 산초 라미레스 왕이 애가 강가에 만든 계획도시라고 하는데요. 에스떼야에는 바스크인, 유대인, 프랑스인 등 여러 인종이 모여 살았습니다. 왕이 주도한 개발로 인해 도시는 항상 부유했습니다. 당시 번성한 상업과 수공업 때문에 에스떼야는 까미노 데 산띠아고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칼릭스티누스 사본에서는 에스떼야를 가르켜 ‘좋은 빵과 훌륭한 포도주, 고기와 물고기가 넘쳐나고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는 모든 종류의 행복이 있는 도시’라고 기록했습니다.
에스떼야는 거리 구석구석을 돌아볼만합니다. 중세식 발코니가 있는 그럼처럼 아름다운 라 루아 거리, 산 니꼴라스 거리를 산책해보고, 푸에로스 광장, 산띠아고 광장, 산마르띤 광장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도시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애가 강변의 아노스 공원에 머물러 보는 것도 좋습니다. 역사적으로 에스떼야의 물과 음식은 훌륭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데요. 레스토랑에서는 메네스트라(Menestra), 뽀차스(Pochas)라고 부르는 데친 야채 요리, 구운 새끼돼지 요리인 까르네스(Carness), 하몽으로 채운 송어요리인 뻬스까도스(Pescados) 등을 맛볼 수 있습니다. 후식으로는 초콜릿 크림을 곁들여 겹겹이 구운 알빠르가따스(Alpargatas), 개암나무 열매를 곁들인 초콜릿인 로까스 델 뿌이(Rocas del Puy)등이 있습니다. 8월 첫째 주에는 라 바하디까 델 뿌이(la Bajadica del Puy), 라 빠뉴엘라다(La Panuelada)와 같은 전통 행사와 여자만 참가할 수 있는 소몰이 축제 등이 열립니다. 7월 중순에는 중세 주간을 지내는데 화려하게 장식한 거리엔 중세식 시장이 열립니다. 중세식 저녁을 먹는 이 축제는 산띠아고 길에 이어 내려온 특이한 행사입니다.

1) 까미노 스토리(Camino Story)
에스떼야는 바스크어로 별이라는 뜻으로 도시의 문장에도 별이 하나 그려져 있습니다. 이 별은 사도 야고보가 잠들어 있는 꼼포스뗄라로 우리를 인도해줍니다. 지금은 도시의 크기가 줄었지만 에스떼야는 나바라와 스페인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과거 나바라의 왕은 왕위를 받을 때 에스떼야의 성당에서 선서를 했는데요. 에스떼야의 로마네스크 양식 궁전에서 살았습니다. 14세기에 유대인들을 학살한 잔인한 사건의 배경이 되기도 했으며 까를리스따 전쟁 동안 비운의 왕자 돈 까를로스가 왕이 되길 바라는 추종자들의 본거지였습니다. 현대에는 에스떼야 법령(Estatuto de Estella; 빠이스 바스꼬 Pais Vasco의 첫 번째 자치 법령)이 이곳에서 입안되었고. 에스떼야 협정이 이곳에서 합쳐졌습니다. 프랑스 도시와 닮은꼴인 도시 에스떼애는 나바라에 있는 작은 프랑스라고도 불립니다. 이 도시는 특히 산띠아고까지 가는 프랑스 길의 또다른 시작점인 르 퓌(Le Puy)와 닮은 점이 매우 많지요. 두 도시에 모두 뿌이의 성모님에게 봉헌된 성당이 언덕 위에 있고 성당에 모셔진 성모상의 피부도 모두 검으며, 두 도시의 수호성인도 모두 성 안드레아 입니다. 비숫하게 생긴 강의 구부러진 곳에 도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두 도시를 평면도를 거울에 비친 것처럼 반대로 뒤집어서 겹쳐놓으면 도시의 배치가 똑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11, 12세기에 프랑스의 인구가 늘어나자 베즐레이 사람들이 이곳 에스떼야에 정착했는데요. 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여 르 퓌와 비슷하게 에스떼야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i) 잊혀진 묘지의 전설
산 뻬드로 데 라 루이의 화랑에는 전설적인 묘지가 있습니다. 가장 작으면서 묘지의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묘지는 떼오발디꼬라는 아기의 무덤입니다. 그는 나바라의 왕 떼오발도 2세의 조카로 생후 아홉 달이 되었을 때 유모의 팔에서 미끄러져 라 아딸리야 성의 성벽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떼오발도 2세에게는 후손이 없었고 오로지 조카 떼오발디꼬만이 있었는데요. 결국 이 아기는 죽음은 참파냐 왕조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유모도 아이의 뒤를 따라 죽었다고 하는데요. 떨어지는 아이를 구하려다가 죽은 것이라고도 하고 다가올 벌을 받기가 두려워 절망한 나머지 자살했다고도 합니다. 다른 묘지 하나는 그리스 파트라스 주교의 무덤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성 안드레아의 견갑골을 가지고 산띠아고로 향한 순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못한 상태에서 에스떼야에서 병이 들어 죽었는데요. 순례자의 넝마 옷을 입은 채로 산 뻬드로 성당의 묘지에 무명씨로 기록된 채 매장되었습니다. 그러자 이틀 밤 동안 그의 무덤 위에서 이상한 빛이 너울거렸고 이 빛은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다시 파내서 성인의 유해와 주교의 지팡이, 그리고 은으로 만든 성수병을 발견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유물은 오늘날까지 지 성당에 보관되었고, 그는 주교답게 다시 매장되었습니다.
ii) 롤랑과 페라구뜨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인 나바라 왕궁은 에스떼야의 산 뻬드로 성당 앞에 있는데요. 여기에서 롤랑과 페라구뜨 사이의 전투를 표현한 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전투는 에스떼야에서 뿐만이 아니라 나헤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답니다.
iii) 위치를 바꾼 아기예수
에스떼야를 빠져나가는 길에 있는 로까마도르 성당 입구의 문 위 벽감에는 조금 색다른 모습의 성모상이 있습니다. 이 성모상은 다른 성모상과 달리 아기 예수가 성모의 왼팔이 아니라 오른팔에 안겨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한 순례자가 산띠아고 축일에 살인을 했다고 고발되었다고 합니다. 순례자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는데요. 그런데도 결국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답니다. 처형대 위에서 순례자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말하면서, 그 증거로 로까마도르 성모의 팔에 안긴 예수의 위치가 바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성당으로 달려가서 이를 확인하고는 이 기적을 찬미했다고 합니다.
iv) 뿌이의 성모상
뿌이 성당에는 이웃 마을 아바르수사의 목동들이 찔레나무, 가시나무, 엉겅퀴 사이에서 1085년에 발견한 성모상이 있습니다. 이는 기록에도 남아 있으며 에스떼야 지방의 축제에서 부르는 민요에서도 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1640년경 한 도둑이 뿌이 성당에 침입하여 성모의 보석, 옷, 값나가는 물건 등을 훔쳤습니다. 도둑은 밤새도록 지칠 때까지 도망을 갔는데요. 동이 터 정신을 차려보니 성당 문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도둑은 밤새도록 성당 주변을 뱅뱅 돈 것이지요. 도둑은 즉시 체포되어 손이 잘리는 벌을 받았습니다. 잘린 손은 성당 입구의 나무 기둥에 매달았습니다. 훗날 나무기둥은 돌기둥으로 대체되었고 잘라진 손 대신 라틴어 문구가 새겨졌습니다. 이 성당 뒤편에는 첫 번째 까를리스따 전쟁이 끝나갈 무렵 평화안에 찬성하지 않은 까를리스따의 장군 다섯 명이 마로또에 의해 총살당한 곳으로 남겨진 명판이 있습니다.
1) 까미노 포인트(Camino Point)
i) 나바라 왕궁(Palacio de los Reyes de Navarra)
나바라에서 종교와 상관없는 건축물 중 유일하게 로마네스크 양식인 나바라 왕궁은 12세기 후반에 건설되었습니다. 17세기에 작은 탑 두 개가 더 증축되었습니다. 네 기둥의 주두는 롤랑과 페라구뜨의 전투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에스떼야에 반해서 그림을 모두 기부한 화가 구스따보 마에추의 이름을 기념하여 구스따보 데 마에추 미술관(Museo Gustavo de Maeztu)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ii)대천사 미카엘 성당 (Iglesia de San Miguel Arcangel)
대천사 미카엘 성당은 현명왕 산초의 보호 아래 1187년에 건축되었습니다.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북쪽 문이 참 아름다운데요. 이 문은 스페인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건축물 중 가장 화려하고 우아하며 사실적인 조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당 건물은 중앙의 신랑과 두 측랑, 반원 아치 천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랑의 천장은 고딕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iii) 산 뻬드로 데 라 루아 성당 (Iglesia de San Pedro de la Rua)
13세기 산 뻬드로 엘 마요르 성당(Iglesia de San Pedro el Mayor)으로 불리는 이 성당은 나바로의 왕들이 선서를 했던 곳인데요. 오늘날에는 산 뻬드로 델 라루아 성당으로 불립니다. 12세기의 아름다운 회랑, 순례자들의 묘지가 있습니다. 현재의 건물과 회랑은 12세기 중반 이후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공사는 다음 세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증축과 보수로 로마네스크 양식에 고딕양식,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이 가미되었습니다. 화랑엔 북쪽과 서쪽 복도만 남아 있는데요. 남쪽 동쪽 복도는 16세기에 바위 위에 건축된 성이 무너지면서 붕괴되었습니다.
iv) 성묘 성당(Iglesia del Santo Sepulcro)
성묘 성당은 아름다운 파사드가 있는 13세기의 고딕 양식 성당입니다. 까미노를 따라 에스떼야로 들어오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축물로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입니다. 성묘 성당의 로마네스크 양식 후진은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측면의 소성당이 기초만 남아 있는 반면 중앙의 소성당들은 온전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고딕 양식 문은 중세 조각의 아름다움을 남겼으며 당시 영국과 프랑스 궁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v) 산따 마리아 후스 델 까스띠요 성당(Iglesia de Santa Maria Jus del Castillo)
산따 마리아 후스 델 까스띠요 성당은 지금은 사라진 왕실의 성 근처, 언덕 위에 있는 성당입니다. 후스 델 까스띠요는 ‘성 아래’라는 뜻인데요. 예전 유다교 회당이었던 자리에 지은 성당으로, 가르시아 라미레스 왕이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이 그리스도교 성전을 보호해 주도록 1145년 빰쁠로나의 주고 돈 로뻬 데 다르따호나에게 선물했습니다. 성당의 신랑은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후진은 반원형 궁륭이 얹어져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