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 산은 파스카 축제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셨고, 성령께서 강림해 교회 공동체가 탄생한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후 겟세마니 정원에서 기도를 하시다가 잡히시고 카야파 대사제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셨지요. 최후의 만찬 장소는 시온 산 정상에, 카야파 사제 집은 시온 산 중턱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두 기념 성당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글의 순서
1. 최후의 만찬 경당(Cenacle of the Last Supper)
1) 최후 만찬 경당에 대한 성경 근거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한 13,1). 너무도 익숙한 요한 복음사가의 이 장엄한 말씀은 우리를 다락방에서의 주님과의 친교 현장으로 이끕니다.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 가거라.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다락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마르 14, 12-15).”
위 말씀(마르14, 12-15) 다음에 일어난 일들, 즉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는 동안 벌어진 일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찬례의 제정, 사도들을 새 계약의 사제로 임명하신 것,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의 문제로 벌어진 말다툼, 유다의 배신에 대한 예언,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는 예언, 새 계약에 대한 가르침,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 작별의 말과 겟세마니에서의 기도 등. 다락방은 단순히 그날 저녁 그 안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공경의 대상이 될만 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무서워 방안에 숨어 있던 사도들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또한 새로 태로 태어난 교회 공동체가 다락방에 모였음을 다음과 같이 알려 줍니다. “성안에 들어간 그들은 자기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아, 필립보와 토마스, 바르톨로메오와 마태오, 알패오와 아들 야고보와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3-14).”
바로 그 방에서 성령감림절에 성령을 받은 받은 제자들은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최후의 만찬 경당의 전승과 역사
복음서에는 이 다락방이 정확히 어디였는지 확실한 단서가 나와 있지 않지만,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도 시대 당시에만 시온 산이라고 불린 예루살렘 남서쪽 모퉁이의 언덕 어디쯤으로 추정됩니다. 시온은 원래 다윗 왕이 정복했던 여부스족 성채의 이름이었지요. 그 후에는 계약의 궤가 보관된 성전 산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시편과 예언서에는 거룩한 도성과 그곳의 주민에 대해 언급되어 있습니다.바빌론 이유 이후에는 ‘시온’이라는 이름에 종말론적, 구세주적 의미, 즉 구원이 오게 될 장소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70년에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자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는 이러한 영적 의미를 받아들이면서 교회의 탄생과 연관이 있으므로 다락방이 위치했던 언덕에 시온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4세기 말에 살았던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 성인에게서 이 전승의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에피파니우스 성인은 팔레스티나의 수도자이자 키프로스의 주교였습니다. 성인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138년 동방으로 여행을 떠났을 당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지요. “황제는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완전히 무너졌고, 하느님의 성전이 파괴된 것을 보았다. 몇 채의 집과 작은 성당만 남아 있었는데, 그 성당은 예수님이 올리브 산에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이 돌아와 올라갔다는 다락방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바로 그곳, 즉 ‘시온’ 지역에 지어져 참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그리고 ‘시온’ 주위에는 집 몇 채와 유대교 회당 일곱 곳이 있었는데, ‘시온’에 그저 오두막처럼 홀로 서 있던 그 일곱 회당 가운데 한 곳은 막시모나스 주교와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까지 남아 있었다(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 성인, On Weights and Measures, 14).
이 기록은 사도 시대부터 자신이 살던 시대까지 시온의 주교좌를 역임한 29명의 주교 명단을 작성한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전한 기록, 일곱 회당 가운데 마지막 회당을 본 ‘보로도의 순례자,’ 성령 강림을 생각나게 하는 다락방 교회에 대해 언급한 예루살렘의 치릴로 성인,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심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에서 오린 전례에 대해 묘사한 순례자 에우제리아 등 4세기 다른 사람들의 증언과도 일치합니다.
다양한 역사, 전례, 고고학 자료를 통해 4세기 후반기에 그 작은 성당이 거룩한 시온이라 불리고 모든 교회의 어머니로 생각된 커다란 대성당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다락방뿐 아니라 이 대성당도 부근의 어느 집 터 위에 세워진 성모 영면 기념 성당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채찍 기둥과 스테파노 성인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12월 26일에는 다윗 왕과 예루살렘의 초대 주교인 야고보 성인의 기념식이 열렸다고 합니다. 이 대성당의 구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 성당은 7세기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전소된 후 재건되었다가 아랍인들에 의해 다시 파괴었어요.
12세기에 성지에 도착한 십자군이 대성당을 짓고 ‘시온 산의 성 마리아 성당’이라 불렀습니다. 대성당이 남쪽 회중석에 다락방이 있었는데, 그곳은 여전히 2층으로 되어있고, 층마다 각각 경당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위층에는 성찬례 제정 기념 경당과 성령 강림 기념 경당이 있습니다. 아래층에는 발씻김 기념 경당과 부활하신 그리스도 출현 기념 경당이 있습니다. 아래층에는 또한 다윗 왕을 기리는 기념비(고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지 않은 장례비)가 있습니다. 1187년에는 예루살렘이 살라딘에 다시 넘어가고 난 뒤에도 대성당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으며 순례와 경배는 그대로 허용되었지요. 그러나 이런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244년에는 대성당이 완전히 파괴되어 닭방만 겨우 남았는데, 그 잔해물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이지요.
3) 오늘날의 최후 만찬 경당
오늘날 유적지에 서 있는 고딕식 방은 14세기 당시의 것인데, 1342년 유적지 소유권을 얻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도사들에 의해 지었졌습니다. 그에 앞서 7년 전 수도사들이 성지를 관리하게 되었고, 남쪽 측면에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1342년 교황의 대칙서에 의거해 성지보호관구가 설립되었고, 이집트 술탄으로부터 주님 무덤 대성당 감독권을 얻어낸 나폴리와 예루살렘의 왕이 성지보호관구에 다시 주님 무덤 대성당과 성령 강림 기념 경당의 감독권을 부여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2 백 년이 넘도록 별 어려움 없이 시온에서 살았지만 1551년 터키에 의해 쫓겨나게 됩니다. 그보다 앞서 1542년에 성령 강림 기념 성당은 이미 무슬림들에게 빼앗겨 모스크로 바뀌었지요. 무슬림은 그곳이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경경하는 다윗 왕의 매장지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바뀌지 않고 지속되다가 1948년이 되어서야 그곳을 소유하게 된 이스라엘이 오늘날까지 관리하고 있습니다. 최후 만찬 기념 성당은 이웃 건물을 경유하여 드나들게 되어 있는 데, 벽으로 둘러싸인 계단에 올랐다가 확트인 테라스를 가로질러 들어갈 수 있습니다. 최후 만찬 기념 성당 자체는 가로 15미터 세로 10미터 크기의 방인데 장식이나 가구가 거의 없습니다. 옛 기둥을 재사용하여 위에 올린 장식 기둥 몇 개와 중앙 기둥 두. 개가 둥근 천장을 받치고 있지요. 천장의 돋을 새김장식에서는 동물을 조각한 옛 부조를 볼 수 잇습니다. 그 가운데 선명히 보이는 것은 어린양의 부조입니다. 그 외에 증축한 흔적도 분명히 보이는데, 예를 들면 1920년 이슬람 신자들을 위해 세 개의 유리창 가운데 한 곳을 막아서 세운 구조물, 아래층으로 이어진 계단 위에 만든 터키 시대의 닫집 등입니다. 닫집은 새끼에게 먹이를 먹이고 있는 펠리칸의 성찬례 모티브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교의 양식인 것이 분면ㅇ해 보이는 가느다란 기둥이 떠받치고 있습니다. 왼쪽 벽은 비잔틴 시대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계단과 문을 통과해 순례자들은 성령 강림을 기념하고 있는 작은 방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출입구 맞은 편에는 또 다른 테라스로 나가는 입구가 있고, 테라스는 14세기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회랑을 굽어보는 옥상으로 이어집니다.
현재는 예수님의 최후 만찬 기념 성당에서의 미사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다만 유일한 예외가 있었는데, 2000년 3월 23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2014년 5월 26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이 방에서 성미사를 집전하는 특권이 주어졌었습니다. 2009년 5월 예루살렘을 찾은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그곳에서 성지의 미사 통상문으로 부활삼종기도를 바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아래층에 있는 기념비에서 기도하러 이곳을 찾곤 하는데, 이 기념비는 다윗왕의 무덤으로 공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시온산에는 여전히 그리스도교 건물이 있는데, 베네딕도 대수도원이 함께 있는 성모 영면 기념 성당과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녀원 등이 그렇습니다. 성모 영면 기념 성당은 1910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구입한 부지 위에 세워진 프란치스코 수도원에는 원래 다락방에 가장 가깝게 지은 가톨릭 성당인 예수님 최후 만찬 기념 성당도 들어 있습니다.
2.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 (Gali Cantu)
1)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의 성경 근거와 특징
네 복음서는 모두 수석 사제들과 최고 의회가 예수님에게 행한 심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심문은 카야파의 집에서 이뤄졌습니다. 예외적으로 이 일을 지켜본 두 사람은 이곳까지 가까스로 따라왔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가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과 함께 대사제의 저택 안뜰에 들어갔다(요한 18,5-16).”
심문이 이루어지는 동안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과 베드로가 한 행위는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부당한 기소와 근거 없는 혐의, 거짓 증언과 모욕을 당하고도 예수님은 침묵을 지킵니다. 그러고 나서 진실을 선포할 때가 이르자 침착하게 말합니다. 한편 베드로는 카야파의 종들에게 위협을 느껴 예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발뺌을 하지요. “이 사람아, 나는 아닐세(루카 22,58).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마태 26,70).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마르 14,71).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루카 22,60-62).”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다락방(최후의 만찬 방)에서 멀지 않은 곳인 시온산 동쪽 산허리에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곳은 키드론 골짜기와 힌놈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주택가였습니다. 학자들은 카야파의 집으로 이 지역 안에 있는 두 군데 이상의 후보지를 꼽았지만 고고학 발굴을 통해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일 가능성이 조금 더 커졌지요. 이 성당은 19세기 이후로 프랑스의 성모승천 수도회(아숨 시옹)의 부지 위에 세워졌습니다. 1888년부터 1909년까지, 그리고 1992년부터 2002년까지 실시된 발굴 작업으로 방앗간, 저수조, 지하실을 갖춘 헤로데 시대의 저택 유적이 드러났습니다. 어디에 속죄 제물을 놓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비문이 새겨진 섬세하게 조각된 상인방, 성전에서 사용되었던 각종 저울과 됫박들도 추가로 발견되었어요. 나중에 이 집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공경의 대상이 되어 5세기에는 그 위에 성당이 세워졌는데, 모자이크 바닥 조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성당 중앙에는 깊은 저수조가 있는데, 원래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욕탕이었음이 틀림이 없지요.
2)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의 역사
이 성소를 언급하고 있는 것 같은 6세기의 한 문서가 발견되었어요. “골고타에서 200보만 가면 우리 주 그리스도와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으므로 모든 교회의 어머니라 불리는 시온 산의 성 마리아 성당이 있습니다. 그곳은 복음사가 마르코 성인의 집이었지요. 시온 산의 마리아 성당에서 50보만 걸어가면 현재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인 카야파의 집이 나옵니다 (테오도시우스, On the Topography of the Holy Land, 7(CCL.195,118)).
비잔틴 시대의 이 건물은 성지 예루살렘의 다른 많은 성당들과 똑같은 운명을 겪었습니다. 즉 7세기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그 후에 다시 지어졌고, 두 번째 건물 역시 11세기에 무너지고 말았지요. 이렇게 차례로 지어졌던 건물의 잔해들은 폐허 속에 묻힌 채로 남아 있다가 1887년이 되어서야 성모승천 수도회의 관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성당은 1931년에 봉헌되었고, 1997년에 개축되었는데, 지상 2층과 지하 1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자이크로 장식된 돔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덮인 2층 경당은 예수님의 재판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바닥 사이로 군데군데 바위가 드러나 있는 중간층 경당은 베드로의 부인, 회개의 눈물, 갈릴래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기념하여 봉헌된 것인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3) 오늘날의 베드로 기념 성당
성당 아래층 또는 지하 소성전에는 수백 년 동안 정확히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알 수 없는 몇 개와 비잔틴 시대부터 공경의 대상이 되어 온 ‘성스러운 웅덩이’로 알려진 저수조가 있습니다. 이 웅덩이는 원래 주택의 일부였고, 일찍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이목을 끌던 곳이었습니다. 웅덩이로 이르는 원래 출입구는 계단과 이중문을 통해서 내려가게 되어 있었는데, 그곳이 유다인들의 정결례 의식에 사용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웅덩이는 어느 지점에서 깊이가 깊어져 저수조로 바뀌고, 지붕에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신자들이 새겨 더해 놓은 표시들, 즉 구덩이 벽에 새겨 놓은 세 개의 십자가, 기도하는 인물의 윤곽선, 벽에 칠해 놓은 또 다른 일곱 개의 십자가를 보면 5세기에는 이곳을 예수님이 금요일 새벽이 밝아오길 기다리며 갇혀 있던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러한 전승을 계승하여 오늘날의 순례자들도 바로 이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고통을 묵상하며 시편의 다음 말씀을 읋조리게 됩니다.
“당신께서 저를 깊은 구렁 속에,
어둡고 깊숙한 곳에 집어넣으셨습니다.
당신의 분노로 저를 내리누르시고
당신의 그 모든 파도로 저를 짓누르십니다.
당신께서 벗들을 제게서 멀어지게 하시고
저를 그들의 혐옷 거리로 만드셨으니
저는 갇힌 몸, 나갈 수도 없습니다.
주님, 저는 온종일 당신을 부르며,
당신께 제 두 손을 펴 듭니다.” (시편 88편 6-10)
성당 밖에서는 산허리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이루어진 특별한 길을 포함하여 고고학 발굴로 발견된 유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길은 도시의 부유한 위쪽 동네와 키드론 천을 따라 물을 구할 수 있었던 지점, 즉 기혼 샘과 실로암 연못 주위에 늘어선 가난한 동네를 이어 주었습니다. 이 길은 예수님 당시에는 돌로 만든 계단은 아닐지라도 이미 그 시대부터 존재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곳을 걸어서 여러 번 오르락내리락하셨을 것입니다. 특히 성목요일 밤에는 처음에는 사도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겟세마니로, 그 후에는 올리브 산에서 자신을 체포하여 수석 사제의 집으로 끌고 가는 무리들에 의해 여러 차례 오갔을 것입니다.
성당 안뜰에서 순례자들은 비잔틴 시대의 예루살렘을 표현한 대규모 모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모형에는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지어진 일곱 성당인 주님 무덤 대성당, 성모 영면 기념 성당과 주님 만찬 기념을 품고 있는 시온 산의 성 마리아 성당, 오늘날 성 안니 성당과 어느 정도 같은 지점에 있는 벳자타 연못의 마리아 성당, 헤로데의 궁전 터에 세워지고 현재의 성채가 서 있는 곳에 있는 세례자 요한 성당, 연못 위에 지어진 실로암 성당, 네아, 즉 새로운 교회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그 또한 사라져 없어진 성모 마리아 성당,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의 자세한 모형도도 있습니다.
3. 성모님 영면 성당 (Abbey of the Dormition, Church of the Dormition)
1) 성모님 영면 성당 기원과 역사
‘시온산’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 시대에 생긴 명칭입니다. 초기 교회가 생겨난 곳은 바로 다락방이었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4세기 후반에 ‘거룩한 시온’이라 불리던 대성당이 지어져 모든 교회의 어머니로 여겼습니다. 대성당에는 다락방과 마찬가지로 ‘성모님의 임종’ 장소가 들어 있는데, 전승에 따르면 성모님이 임종을 맞이한 곳은 그 지역 안의 어느 집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몇 백 년이 흐르는 동안 대성당은 몇 차례 파괴와 복구가 거듭 되었다가 겨우 다락방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장소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결고 잊혀진 적은 없습니다. 1920년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시온 산 부지를 갖게 된 덕분에, 베네딕도 대수도원과 그 옆에 성모 마리아의 영면을 기념하는 대성당이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2) 성모님 영면 성당의 특징
대성당은 비잔틴 양식이 가미된 독일 낭만주의 형식으로 지어진 2층 건물입니다. 위층에는 대성전이 있는데, 둥근 형태의 꼭대기에는 모자이크로 장식한 거대한 돔이 얹혀 있습니다. 대성전 주위로 여섯 개의 측면 경당이, 동쪽으로는 역시 거대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아치형 천장을 갖춘 후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아래층 지하 소성전 한가운데에는 기둥으로 지탱되는 작은 돔이 얹힌 지점에 마치 잠든 것 같은 모습의 복되신 성모 마리아 상이 보입니다. 그 성역은 여러 국가나 단체가 기증한 몇 개의 경당에 둘러싸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