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노크 성모 발현 성지 (Knock, 1879)

아일랜드의 노크 성모 발현 성지는 그 규모가 상당히 큰 성지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온갖 박해와 고통을 당했던 아일랜드 국민을 보호해 주셨답니다. 성모님께서 노크에서 발현하신 배경과 그 의미, 성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1. 노크 성모님 발현 성지 개요


아일랜드의 노크 성지는 규모와 시설 면에서도 세계 3대 발현 성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가톨릭 성지입니다. 아일랜드는 거의 800여 년 동안 역국의 식민지로 지배를 받으면서 온갖 박해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가톨릭 신앙으로 견디어 왔는데요. 두 차례에 걸쳐 감자 기근으로 생산이 저하되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나라 자체가 붕괴되어 미래에 대한 희망이 붕괴되어 갔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순간에 노크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어 하느님께서 계속 아일랜드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심으로 가톨릭 신앙으로 회복하도록 하셨습니다. 성모님을 아일랜드의 모후로 여기고 있을 정도로 아일랜드에서 성모님에 대한 신심은 그 어떤 가톨릭 국가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노크 발현 성당의 성모님 상)


2. 노크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영국의 헨리 2세는 1171년에 아일랜드의 남동부 렌스터 지방을 침략했습니다. 이후로 아일랜드는 1949년에 완전한 독립을 할 때까지 800년 가까이 영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아일랜드 국민들은 영국에 저항했습니다. 그 과정 중에 전 국민이 열렬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 이유를 알아볼까요.

첫째는 아일랜드 사람들은 오랜 기간 동안 가톨릭을 주 신앙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영국이 통치하면서 신교를 믿도록 강요하는 것에 큰 반감이 이었지요. 셋째는 당시 영국에 대항하는 국가인 스페인이 가톨릭 국가 였습니다. 넷째는 교황이 파견한 예수회의 선교 활동이 아일랜드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랍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국의 박해는 아주 교활한 방법으로 계속 되었지요. 하지만 아일랜드 국민들은 가톨릭 신앙을 버리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가톨릭은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참고 견디는 힘의 원천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1845년에서 1851년 사이에 아일랜드에서 감자 마름병이라는 전염병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유일하게 주식으로 사용되는 감자가 다 썩어 버리고, 게다가 기록적인 한파가 덮쳤습니다. 약 100~150만 명이 굶어 사망했습니다. 또한 새로운 곳을 찾아 고국을 떠나 타국으로 떠난 사람들도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 후 30년 동안 상황이 조금씩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1877년-1879년 사이에 다시 감자 기근이 발생했고 다른 전염병도 유행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에 더해 영국이 가톨릭을 계속 박해했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제 하느님이 아일랜드를 버리셨다면서 좌절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는 굶주림보다 더 무서운 고통이었지요. 이렇게 아일랜드 사람들이 역사상 가장 깊은 절망 속에 있을 때 노크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겁니다.


3. 노크에서의 성모님 발현

노크는 아일랜드 동쪽 메이요 카운티의 작은 마을입니다. 이곳에서 1879년 8월 21일 목요일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대부제인 카버나는 저녁 7시부터 비가 많이 내려 비에 흠뻑 젖은 채로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녁 8시 즈음에 사제관 도우미인 45세의 메리 매클로플린(Mary Mcloughlin)이 친구인 68세 마가렛 번 (Margaret Byrne) 부인을 만나려고 사제관을 나와 교구 성당 옆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당 남쪽 벽에서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형상과 제단을 보게 되었지요. 메리 매클로플린은 대부제 카버나가 더블린에서 주문한 성상을 빗속에 그대로 세워 둔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마가렛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사제관으로 돌아올 때는 마가렛의 딸 29세 메리 번(Mary Byrne)이 동행해 주었습니다.

메리 매클로플린이 교구 성당 앞을 지나가는데 아까보다도 더 환하게 빛이 나서 메리 번과 함께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았어요. 교구 성당의 남쪽 벽에 세 가지 형상이 땅에서 60cm 정도 공중에 떠 있었습니다. 비가 계속 쏟아지고 바람이 불어오는데도 형상들과 그 아래의 땅, 성당 남쪽 벽은 젖지 않은 상태였지요. 매리 번은 형상이 약간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성상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가운데에 있는 형상이 성모님이라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마가렛 번과 여동생인 21세의 마가렛 번(Margaret Byrne, Jr), 36세인 오빠 도미닉 번(Dominic Byrne), 그리고 사촌인 8살의 캐서린 번(Catherine Murray)에게 성모님이 계시니 빨리 가 보자고 말했습니다. 매리 번은 모든 가족과 이웃에게도 알리고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세 형상은 사람의 크기와 비슷했습니다. 가운데는 성모님, 그 오른편에는 성 요셉, 왼편에는 사도 성 요한이 있었습니다. 

(교구 성당 남쪽 벽에 발현하신 성모님과 성 요셉, 사도 성요한, 제단의 어린양과 십자가와 천사)

성 요한의 왼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평범한 제간이 있었어요. 그 위에는 십자가와 어린양 한 마리가 있고, 발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여섯 명의 천사가 날개를 펄럭이면서 십자가가 있는 제대 위를 돌고 있었습니다. 생후 8주 정도로 보이는 어린양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이 가장 밝았다고 하는데요. 이는 하느님의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모님은 흰색 겉옷에 흰색 망토를 입으시고 머리에는 황금 왕관을 쓰고 계셨답니다. 한편 두 팔은 가슴 높이까지 들고 시선은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이셨지요. 성 요셉은 백발노인의 모습이었고 긴 겉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성인은 성모님을 향해 합장한 채 고개를 숙여 공경하는 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주교 복장을 한 성 사도 요한은 왼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오른손은 강복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소리도 들리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소식이 동네에 퍼지자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14명이 동시에 성모님의 발현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성모님께서 발현하시는 동안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지켜보았습니다. 특히 열 한 살인 패트릭 힐(Patrick Hill)은 아주 가까이에서 성모님의 모습을 지켜보았는데요. 성모님이 쓰신 왕관 한가운데 한 송이 장미가 박혀 있고, 성모님이 앞으로 내딛고 있는 오른쪽 발목, 성모님의 눈동자까지 자세히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15번째 목격자인 65세 패트릭 월시(Patrick Walsh)는 성당에서 800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자신의 집 뜰에서 성당 벽에 생긴 둥근 황금빛을 보았습니다. 

노크에서 일어난 성모님 발현은 다른 곳에서 있었던 발현과는 다른 점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성모님이 어떠한 메시지도 주시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침묵의 성모님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에 우리는 발현의 정확한 의미를 추정해 봐야 하지요. 또한 성모님이 혼자 발현하신 것이 아니라 성 요셉, 성 사도 요한 등 성인들과 함께 나타나신 겁니다. 발현하실 때 어린양, 복음서가 등장하고 6명의 천사가 날개를 펴고 날아다녔다는 점도 특이합니다. 

성모님의 발현은 약 2시간 정도 진행되었는데요. 마가렛 부인의 딸인 21세의 마가렛 번이 성당의 문을 닫으면서 건물의 반대편이 환히 밝다고 느꼈던 오후 7시 30분부터 빛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진 9시 30분까지였습니다. 다른 자료는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되었다고도 설명합니다. 노크 성지 훔페이지에는 성모님 발현의 정확한 시간은 나오지 않고 저녁에 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는 설명만 나옵니다. 메리 매클로플린은 대부제 카버나에게 달려가 자신이 보았던 형상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이날 이후로 1880년 1월 2일과 5일, 6일에도 성모님 발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을 받지는 못한 상태라고 합니다.


4. 성모님 발현 장소

아일랜드의 노크(Knock)라는 지명은 아일랜드 말로 ‘언덕’을 의미하는 ‘크노크(Cnoc)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예로부터 이곳은 ‘마리아의 언덕’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실제로 노크 마을은 주변 지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노크도 아일랜드 전 지역을 강타한 제2차 감자 기근으로 큰 피해를 입고 타격을 받았습니다. 감자밭은 초토화되고 허름한 농가만 남아 가장 가난한 마을이 되고 말았지요. 마을 사람들은 거의 다 죽어 갔거나 다른 지역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1879년에 노크에는 단 열여덟 가구만 남았다고 합니다. 이 작은 마을은 고립과 궁핍함으로 더 이상 유지가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성모님께서 21년 전 프랑스의 가장 가난한 산골 마음인 루르드에서 발현하신 것 같이, 그보다 더 비참하고 가난해 절망적인 상태에 놓인 노크에서 발현하신 것입니다. 고단한 삶에 지친 아일랜드 사람들이 믿음과 기도로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도로 하느님이 계신 하늘에 다다라, 하느님은 성모님의 발현이라는 선물로 아일랜드에 응답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정확히 교구 성당인 세례자 성 요한 성당의 외부 남쪽의 벽에서 발현하셨습니다. 교구 성당 안에서 볼 때 재단이 있는 방향의 벽에 해당합니다. 성모님 발현 이후 아주 많은 순례자들이 교구 성당 남쪽 벽 앞에 모여 축복을 기원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지팡이를 의지해야만 걸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기도 중에 치유 받고 벽에 걸어 놓아 남쪽 벽이 지팡이들로 가득찼습니다. 사람들이 나날이 더 모여들고 남쪽 벽에서 기도를 해 그 의미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남쪽 벽과 연결하여 성모님 발현을 기념하는 경당을 새로 건축했습니다. 

(성모님 발현 기념 경당)

교구 성당 제대 부분의 바로 건너편에 발현 기념 성당 기념 제단이 있는데요. 하나의 벽을 두고 두 제단이 자리하게 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전세계에서 처음일 것입니다. 한편 교구 성당의 남쪽 벽과 만나는 발현 기념 성당 부분의 바깥벽을 유리로 처리하여 경당 제단을 외부에서도 볼 수 있답니다. 또한 경당 제단에는 발현 당시 성모님, 성 요셉, 성 사도 요한, 그리고 제단 위 양과 천사 등 주위에 있었던 모든 것들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이를 보면 그때의 감동을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발현 기념 경당은 교구 성당의 삼각형 지붕을 그대로 연장하여 건축하여 정면에서 보면 삼각형 건물로 보입니다. 경당 전면도 유리로 만들어져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기도 합니다.


5.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시현자들

노크에서의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이들은 대부분 같은 동네 주민들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모님의 선택을 받으면 영안이 열리고, 그 영안을 통해서만 성모님의 발현을 볼 수가 있었는데요. 따라서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사람은 대개 1명 정도가 대부분이죠. 예를 들면, 과달루페 1명, 레자이스크 1명, 파리 뤼 뒤 박 1명, 로마 프라테 성당 1명, 루르드 1명, 필리포프 1명 등 그 수가 매우 적습니다. 하지만 노크는 특이하게도 집단으로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것입니다. 노크의 시현자들은 남성 4명, 여성 6명, 10대 소년 3명, 어린아이 2명입니다. 가장 어린 시현자는 5세인 전 커리(John Curry)부터 최고령자인 74세의 브리짓 트렌치(Bridget Trench)까지 그 연령대도 다양했습니다. 대성당의 커다란 벽화에는 19명의 시현자가 그려져 있는데요. 자료에 따르면 14-19명의 시현자로 나옵니다. 하지만 대성당 안의 기둥에는 15명의 시현자 이름과 나이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15명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지요.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시현자들)

시현자들 중에는 번(Byrne) 가족이 제일 많습니다. 어머니 마가렛, 딸 메리와 마가렛 주니어, 아들 도미닉과 패트릭, 친척 캐서린 등이 성모님 발현 장소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성모님 발현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번 가족이 담합을 했거나 집단 환각 증상을 보인다고 의심했답니다. 그리고 성모님이 시현자 중 누군가를 지정해 메시지를 남기시지도 않았기에 주목할 만한 시현자가 없다는 점이 다른 다른 발현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두 달 후에 시현자들은 발현을 조사하는 위원회에 자신이 본 내용을 자세히 증언하고 서면으로도 제출했다고 합니다. 시현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는 성모님이 발현하셨을 때의 상황을 보다 더 정확히 날 수 있는데요. 그 증언 문서는 오늘날 노크 성지 안에 있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6. 노크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공인 과정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성모님 발현에 대한 최초 언론 보도가 되자 노크를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급증했습니다. 또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지요. 방문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노크에서는 잠을 잘 수 있는 침대나 의자를 찾을 수가 없다. 사실 작고 초라한 마을이지만 의자에서 잠을 자는 수수료가 무려 1실링 6펜스나 되었다.” 첫 번째 기적은 여섯 살 이후로 청각장애를 앓고 있던 여인이 경당을 방문하는 동안 청력을 다시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10여 년 동안 앞이 보이지 않아 고통을 당했던 마이클 앤스버러와 존 매캐너도 시력을 완전히 회복했지요. 메이 프렌더개스트는 오랫동안 걷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남쪽 벽 앞에 있는 의자에 그를 앉히자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즉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노크 성지는 치유의 기적이 많이 일어난 성지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루르드 성지처럼 공식 기관에 의해  검정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카버나 대부제가 1880년 말 노크에서 일어난 기적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고 하는데요. 그의 기록에 의하면 치유 기적은 약 300여 건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 일기는 훗날에 출판도 되었습니다. 

 투암 교구의 존 맥 헤일 대주교는 1879년 10월 8일에 조사 위원회를 구성해 3명의 신부를 파견하고 시현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사 위원회들은 시현자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증언을 듣고는 그 증언들이 모두 신뢰할 만하다고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57년이 지난 후인 1936년 토머스 패트릭 길마틴 대주교는 다시 조사 위원회를 구성해 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위원회는 그때까지 생존하고 있던 시현자 2명의 증언을 다시 확인해 보고 긍정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후 교황이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명해 교황청의 승인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1) 1974년 6월 6일에 교황 바오로 6세는 아일랜드의 모후 노크의 성모 대성당 초석을 직접 축북해 주었습니다. 

2) 1979년 9월 3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역대 교황들 중 처음으로 아일랜드를 순방하고, 성모님 발현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노크 성지를 방문했습니다. 성지 성당을 대성당으로 승격하고, 성모님께 교황의 공인과 공경을 표시하는 황금 장미와 기념 초를 봉헌했습니다. 이 기념식에 45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참여했습니다.

3) 2018년 8월 26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아일랜드 사목 순방을 하는 동안에 이 성지를 방문해 세상의 모든 가정을 위해 기도를 하고, 황금 묵주를 봉헌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봉헌한 황금 장미와 기념 초와 교황 프란치스코가 바친 황금 묵주는 현재 교구 성당과 발현 기념 성당 사이의 벽면 하단의 유리관에 보관되어 있는데요. 노크를 방문하면 누구나 직접 볼 수 있답니다. 그리고 1993년 6월 5일 마더 데레사 수녀가 성지를 방문했을 당시엔 5만 명 이상의 순례자들이 모였었습니다.


7. 노크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의미

1877년에 제2차 감자 기근으로 인해 다시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근과 기아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자 아일랜드 국민들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런 끔찍한 기근이 발생한 것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동안 수많은 곤경과 난관을 경험하면서도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면서 하느님께 의지하며 견디어 온 아일랜드 국민들은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고 포기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래와 희망이 사라진 아일랜드에 성모님께서 기적처럼 발현하신 것입니다. 발현하신 성모님은 어떤 메시지를 주시지는 않았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에게는 성모님께서 나타나신 것만으로도 그 자체가 메시지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요. 하느님이 아일랜드를 외면하신 것이 아님을 확인한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다시 그분 백성으로 돌아왔고, 그들의 신앙은 더욱 고취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갖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자 3년 간 이어진 지독한 기근도 사라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모님에 대한 아일랜드의 신심이 다른 어느 가톨릭 국가보다도 깊은 이유라고 할 수 있지요. 노크 성지는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성지인 것이죠. 따라서 다른 성모님 발현 성지의 규모 못지 않게 대규모 성지로 조성했습니다. 또한 성모님을 아일랜드의 모후로 부르며, 독립을 강렬히 꿈꾸면서 성모님께 열렬하게 기도했습니다. 

성모님께서 노크에서 발현하신 모습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는데요. 바로 신앙의 원형이신 성모님과 교회의 열렬한 수호자이신 성 요셉, 하느님 말씀의 선포자이신 성 사도 요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 위의 어린양의 모습은 성체 성사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크에서의 성모님 발현은 미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8. 노크 성모 발현 장소 소개

노크 성모님 발현 성지는 성모님의 발현 성지 중에서 가장 넓은 곳이라고 합니다. 세계 3대 발현 성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노크 성지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아일랜드에서는 최고의 성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노크 성지에는 5개의 성당과 경당을 포함해 사목 센터, 박물관, 서점, 카페, 숙박 시설 등과 넓은 묘지 등 여러 시설이 있습니다. 다섯 군데의 성당과 경당은 아일랜드의 모후 노크의 성모 대성당, 교구 성당과 발현 기념 성당, 성체 경당, 지하에 세워진 화해(reconciliation) 경당입니다. 발현 기념 경당 제단에 세워진 성모상은 1960년 로렌초 페리 교수가 이탈리아산 희색 카라라 대리석으로 조각한 것입니다. 매해 10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성지를 방문하자 1976년 몬시뇰 제임스 호런은 1만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당을 건축해 축성했습니다. 대성당은 정면에 인상적인 첨탑이 솟아 있는데요. 정육각형으로 생긴 특이한 평면으로 되어 있기에 대형 모자이크 벽화가 있는 면을 제외한 다른 면에는 신자들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있습니다. 벽화는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150만 개의 개별 모자이크로 구성된 것인데, 유럽에서 가장 큰 모자이크 벽화랍니다. 

지하에 있는 화해 경당은 1988년 건축 공모로 설계되고 건축된 성당입니다. ‘화해’의 의미는 인간이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여 회개를 하고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행위를 가르킵니다. 이는 성지 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죠. 화해 경당으로 들어가면 모든 벽이 문으로 되어 있는데요. 이 문들이 모두 고해실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세계 어느 성지에도 이렇게 많은 고해실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해요. 고해실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의 화해를 위하여 대기하고 있습니다. 다섯 군데의 성당과 경당을 순례하고나서 많은 조각물과 함께 잘 꾸며져 이쓴 뜰에서 산책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대성당에서 나와 길을 따라 가다보면 단층으로 된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박물관으로 많은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어 노크의 성모님 발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성지 입구 쪽에는 십자가의 길이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곳의 바로 옆에는 사목 센터가 있습니다. 이곳에 들러 관련 자료를 받아 살펴보면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크에서 하루 이상 머물고 싶다면 성지에서 운영하는 68개 객실을 보유한 노크 하우스 호텔에서 숙박을 해도 좋습니다. 성지 외부에는 대규모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는데요. 이곳에 성모님 발현 시현자들의 묘지도 있습니다. 


9. 노크 성지 찾아 가는 방법

노크 성지를 방문하려면 먼저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으로 가야 합니다. 프랑스 파리나 영국 런던 공항에서 항공편을 이용하는 것이 제일 편리합니다. 더블린 공항에 도착하면 공항 버스를 이용해 골웨이(Galway)로 갑니다. 공항에서 골웨이까지는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됩니다. 공항버스는 매시간 15분에 출발하는 시티링크(City Link)와 매시간 45분에 출발하는 고 버스(Go Bus)가 있는데요. 자신의 시간에 맞는 버스를 이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골웨이에 도착하면 여기에서 64번 버스를 이용해 노크로 갈 수 있습니다. 약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됩니다. 64번 버스는 하루에 4회 정도 노크를 경유하여 슬라이고(Sligo)로 가는데요. 혹시 이 버스를 이용하지 못할 경우엔 52번 버스를 타고 노크의 주변 도시인 클레어모리스(Claremoris)까지 간 후 시내버스나 택시를 타고 노크로 갈 수 있습니다. 

구글맵에서는 Basilica of Our Lady of Knock를 검색해 찾아 갈 수 있습니다.


10. 노크의 주변 성지 소개: 더블린

아일랜드는 가톨릭 신앙이 아주 독실한 국가입니다.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이고, 85% 이상의 신자들이 주일 미사 참석하고 있답니다. 그러다보니 더블린에는 당연히 가톨릭 성지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성지는 성 패트릭 성당입니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인데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성당을 세운 것입니다. 1192년에 석조로 건축된 성당은 초기 영국의 고딕양식 건축물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 성당은 화려한 바닥 타일과 멋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아름답습니다.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도 이곳에 묻혀있습니다. 1742년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가 초연되기도 했습니다. 

더블린은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가 창립된 곳이기도 합니다. 프랭크 더프는 1921년 9월 7일 프란치스코 거리에 있는 마이러 하우스에서 첫 모임을 갖고 레지오를 창설했습니다. 먼저 병원 방문을 시작으로 1922년 탈성매매 여성을 위한 산타 마리아 기숙사를 건립하고, 1927년 남성 노숙인을 등을 위한 샛별 기숙사와 1930년 미혼모와 여성 노숙인 등을 위한 천상의 모후 기숙사를 세웠습니다. 10여 년간의 레지오의 이러한 활동이 널리 알려지자 1931년 교황 비오 11세는 프랭크를 직접 만나 지원을 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또한 1932년 더블린 성체대회와 1962년에 열렸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서 레지오 마리애는 전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각 나라마다 레지오 마리애가 설립되어 오늘날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봉사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세계 본부인 꼰칠리움은 모닝스타 애비뉴에 위치해 있는데요. 그곳을 방문하면 프랭크의 집, 샛별 기숙사, 천상의 모후 기숙사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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