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빵을 나누셨던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엠마오의 후보지는 네 군데로 추정하고 있는데요. 오늘날의 라트룬이라 불리는 니코 폴리스, 엘 큐베베, 아부 고쉬, 그리고 모짜 입니다. 엠마오로 추정되는 장소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 엠마오는 어디일까?
- 1. 엠마오: 니코 폴리스(Niko Police)
- 2. 엠마오: 엘 큐베이베(Al-Qubeybeh)
- 3. 엠마오: 아부 고쉬/ 키르얏 바알/ 키르얏 여아림(Abu Gosh/ Kiryat Ba’al/ Kiryat Ye’arim)
- 4. 엠마오: 모짜/콜로니아(Mozah/Kh. Mizza)
엠마오는 어디일까?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예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 13-16).”
루카 복음사가가 자세히 설명한 내용을 보면 클레오파스와 다른 제자가 걸어가고 있던 마을의 위치를 찾는 것은 간단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지 예루살렘의 많은 장소들과 달리 시간이 흐르고 역사적 사건에 휘말리면서 상황이 너무 많이 바뀌었으므로, 복음 속 엠마오로 거론될 수 있는 곳은 여러 군데가 됩니다. 그 가운데 학자들의 연구를 근거로 해도 그렇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순례지라는 점에서도 가능성이 더 확실해 보이는 장소가 몇 곳이 있습니다.
1. 엠마오: 니코 폴리스(Niko Police)
첫 번째 후보지는 구약에 엠마오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예루살렘의 서쪽의 한 도시였습니다. 기원전 165년에 니카노르와 고르기아스가 지휘하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대가 이 지역에 진을 쳤다가 유다 마카베오가 이끄는 유대 저항군에게 패배했습니다(1마카 3,38-4,25). 같은 시기에 그곳에 요새가 세워졌는데(1마카 9,50), 그 가운데 일부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자파 항구와 예루살렘을 잇는 길 위에 있으며, 평원이 끝나고 팔레스티나의 중앙 산맥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다는 전략적 위치 때문에 로마인들은 기원전 1세기 중반 무렵 그곳을 주요 행정 중심지로 삼았지요. 그러나 기원전 4년 무렵 로마 보병대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그곳은 불태워져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다가 66-67년 무렵에 재건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역사가 플레비우스 요세푸스와 플리니우스가 그 지역의 주요 도시 목록에 그것을 올렸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유대인 반란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그곳을 정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승리의 도시’라는 의미로 니코폴리스라는 이름을 새로 얻게 되었고, 223년 로마제국의 도시로 등재되면서 이 명칭을 그대로 쓰게 되었습니다.
니코폴리스가 복음에 나오는 엠마오가 맞다고 확인해 주는 가장 오래된 증인은 3세기에 등장합니다.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는 295년 무렵 작성된 복음 속 장소들을 설명한 ‘지명집 Onomasticom’에서 “루카 복음서에 언급되어 있는 클레오파스의 출생지 엠마오는 오늘날 니코폴리스라고 불리는 팔레스티나의 중요한 도시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예로니무스 성인은 에우세비우스의 글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이 주장을 확증했을뿐 만 아니라 자신이 386년 “빵을 나누어 줄 때 주님을 알아보았던 클레오파스의 집을 성당으로 봉헌한 곳으로 예전에는 엠마오라 불리던 니코폴리스”에 순례를 다녀왔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예로니무스 성인, Letters, 108 (Epitaphium Sancte Paule), 8).
비잔틴 시대인 4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니콜폴리스는 주교 관구였으므로 상당한 그리스도인 주민이 살았을 것입니다. 638년 아랍인들이 팔레스티나에 쳐들어와 도시가 점령당하자 암와스(Amwas)라는 아랍식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2년 후에는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떠났다고 하지만 이슬람 통치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그 지역의 주요 도시로 남아 있었습니다. 1099년 6월 이곳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도중 함락한 마지막 요새였고, 12세기에 그리스도교 왕국이 지배한 동안에는 비잔틴 시대의 대성전 폐허 위에 그리스도교인들의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엠마오가 예루살렘에서 60 스타디온(11킬로미터) 떨어졌다고 한 루카의 복음사가의 서술과는 약간 차이가 있음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 제자 앞에 모습을 드러낸 장소가 니코폴리스라고 보는 전통이 이 무렵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니코폴리스는 160 스타디온, 즉 29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셈이지요. 학자들이 그 차이를 설명해 보려고 여러 가지 가설을 제시했음에도 니코폴리스를 복음 속 엠마오로 보는 견해는 점차 설득력을 잃었으므로 그곳의 성당은 십자군이 떠난 후 에 버려졌고, 그리스도인들도 도시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9세기 말이 되어 카르멜 수도회 수녀인 베들레헴의 마리암 성녀의 주도로 성당 유적이 포함된 땅을 구입하였고, 그곳으로의 순례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1880년과 1924년에 고고학 발굴이 실시되었고, 현재도 진행 중인 발굴 조사로 비잔틴 시대의 대성당 두 곳과 대성당의 폐허에서 가져온 돌로 지은 중세의 십자군 성당이 발견되었습니다.
2. 엠마오: 엘 큐베이베(Al-Qubeybeh)
복음 속 엠마오로 볼 만한 또 다른 곳은 엘 쿠베이베(Al-Qubeybeh)라는 작은 마을인데, 이곳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정확히 60스타디온 떨어진 카스텔룸 엠마오라고 불리던 옛 로마 군대의 요새 위에 있었습니다. 1355년에 그곳에 도착했던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그곳이 클레오파스의 고향임을 뒷받침하는 지역 전승을 발견했습니다. 18세기 말 실시된 발굴로 옛 건물을 편입하여 지은 십자군 시대의 대성당 유적이 빛을 보았고, 더불어 중세 시대의 마을의 흔적도 드러났지요. 1902년에는 예전 성당의 남은 부분을 편입시켜 옛 로마식 성당이 새로 지어졌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2008년 부활절에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복음 속에 등장하는 엠마오는 아직 어느 곳으로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여러 가지 시설이 있는데, 그 자체로 다 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엠마오가 모든 곳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 나아가 모든 사람들의 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신앙과 희망의 불꽃을 다시 밝혀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빵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 길벗이 되신 겁니다(교황 베네딕도 16세, Regina coeli, 6 April 2008).”
3. 엠마오: 아부 고쉬/ 키르얏 바알/ 키르얏 여아림(Abu Gosh/ Kiryat Ba’al/ Kiryat Ye’arim)
1) 성경 속의 아부 고쉬인 키르얏 여아림
엠마오 추정지로 알려진 네 장소 중 아부 고쉬는 구약의 키르얏 여아림, 또는 키르얏 바알로 알려져 있습니다(여호 15,9, 10; 60; 18, 28; 2사무 6, 2).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5km 지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엠마오로도 생각된 것 같습니다. 성경 시대의 키르얏 여아림은 기브온 지역에 있던 네 고을 중 하나로 기브온과 동맹하여 이스라엘을 속여서 멸망당하지 않았던 성읍이기도 합니다(여호 9, 17). 이곳은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의 경계선에 있었던 유다 지파의 성읍으로 나오기도 하지요(여호 15, 9). 궤약 궤의 재앙을 두려워하는 벳 세메스 사람들이 키르얏 여아림으로 그 궤를 보냈습니다. 키르얏 여아림 사람들은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궤약 궤를 보내 20년 동안 그 궤를 보관했습니다(1사무 7, 1; 2사무 6, 3). 바빌론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에는 키르얏 여아림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느헤 7, 29). 예레미야 시대에 하느님의 예언을 전해 준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가 키르얏 여아림 출신이었지요(예레 26, 20).
2) 아부 고쉬의 역사
아부 고쉬에서 후기 청동기 시대(late Bronze Age)와 철기 시대(Iron Age)의 토기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마을의 언덕에는 1899년에 건축된 십자군 시대의 성당 터 위에 세워진 올리베따노 수도원이 있습니다. 이곳의 북동쪽에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1923년에 베네딕트 신부가 헤로데 시대의 무덤 두 개를 발굴했습니다. 베네딕도 올리베따노 수도원의 동쪽과 남쪽에는 로마 시대의 저수조(16.25×20.7m)가 발견되었는데요. 이 저수조 위에 십자군 시대의 성당이 지어졌습니다. 이 성당은 1142년부터 1187년까지 사용되었지요. 19세기 말경에 부분적으로 개축되었는데, 십자군 시대의 벽화 등 성당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돌로 된 손도끼, 비잔틴 시대와 아랍 시대의 토기, 십자군 시대와 마믈룩 시대의 토기, 초기 아랍 시대의 여행자 숙소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4. 엠마오: 모짜/콜로니아(Mozah/Kh. Mizza)
엠마오로 추정되는 또 다른 지역은 모짜(Mozah)입니다. 모짜는 벤야민 자손이 가족대로 상속 받은 지역으로 성경에 한 번 등장하는 벤야민 지파의 고을 중 하나였습니다(여호 18, 26). 모짜는 크피라, 레켐, 이르프엘 근처에 있었던 벤야민 지파의 열네 성읍 중 하나였지요.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7km에 있는 키르벳 미짜(Kh. Mizza)로 보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지파의 땅이나 이름을 보존하고 있고, 고고학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모짜는 히브리어로 ‘수원’이라는 뜻으로 수원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 주변 지역에서 신석기 시대와 관련된 유적도 발견되었는데요. 발굴된 지층은 총 12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일곱 번째 지층은 심각한 파괴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토기는 주로 기원전 10세기의 것으로, 중앙 산악 지역을 정복한 시삭에 의해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는 후기 철기 시대 말경에서의 곡식 저장소, 히브리어 비문이 발견되어 당시 중앙 산악 지역에서의 생활과 경제 모습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