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전(제1, 2차 성전 시대)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구원의 역사를 이끌었던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와 중요한 역할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예수님 시대의 상황과 유다이즘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1.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와 그 역할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 할 날이 되자, 아기를 성전에 바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습니다(호세 마리아 성인, Holy Rosary, 4th Joyful Mystery).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이 땅에서 사신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가장 귀한 기억들을 품고 있는 곳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이 설교하고, 기적을 행한 곳이며 수난 전 뜨거운 사랑으로 성체성사를 제정하는 강열한시간을 보낸 현장이기도 하지요.  최후의 만찬이 이루어진 바로 그 다락방에서 오순절에 마리아를 중심으로 모인 가운데 성령을 받은 교회가 탄생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를 이끄는 예루살렘의 중요한 역할은 이미 오래 전 기원전 1010 년에서 970년 사이 다윗 왕 시대에 시작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가나안 땅을 점령해가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함락시키지 못한 여부스 족의 본거지었어요. 오르막 계단처럼 늘어선 산맥의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여전히 오펠 또는 다윗 성이라 알려진 가장 높은 지역의 남쪽 지구에는 여부스족의 성채가, 북쪽 지구에는 유대 전승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던 모리야 산이 있었습니다(창세 22,2; 2역대 3,1 참조). 평균 해발 760미터에 위치한 고지는 동쪽으로는 올리브 산과의 사이에 흐르는 키드론과 남서쪽으로 흐르는 힌놈 또는 게헨나라는 깊은 두 강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 두 계곡은 산마루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세 번째 계곡인 티로포에론 계곡에서 만납니다. 

예루살렘은 손에 넣은 다윗은 성채에 기거하며 몇 채의 건물을 올리기 시작했고(2사무 5,6-12), 그와 동시에 예루살렘을 왕국의 수도로 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 가운데에 있다는 표징이었던 계약의 궤를 가져와(2사무 6,1-23), 그것을 위한 성전을 지어(2사무 7,1-7; 1역대 22,1-19; 28,1-21; 29,1-9),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로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그의 아들 솔로몬은 재위 4년째 되던 해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고, 재위 11년 즉 기원전 960년경에 완공하여 봉헌했습니다(1열왕 6,37-38). 그 지역에서의 발굴이 어려운 탓에 이러한 사실에 대한 모든 고고학적 증거를 찾기란 불가능하지만 성전 건물과 그 위용이 어떠했는지는 성서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1열왕 5,15-6,36; 7,13-8,13; 2역대 2,1-5,13). 

성전은 기도, 그리고 주로 제사를 통해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하느님이 자기 백성을 보호한다는 상징이었는데, 하느님은 그곳에서 언제나 도움이 필요하여 찾아온 사람들의 청원을 듣고 도와줄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이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주님께서 밤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나의 것으로 선택하여 제사의 집으로 삼았다. … 이제 내가 눈을 뜨고, 이곳에서 드리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겠다. 내가 이제 이 집을 선택하여 이별하고 이곳에 내 이름을 영원히 있게 하겠다. 내 눈과 내 마음이 언제나 이곳에 있을 것이다. 네가 네 아버지 다윗이 걸은 것처럼 내 앞에서 걸으며, 내가 명령한 모든 것을 실천하고 내 규정과 법규를 따르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네 자손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고 게약한 대로 너의 왕좌를 세워 주겠다. 그러나 너희 마음이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서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가서 그들을 섬기고 경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너희를 뽑아 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려,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러면 한때 존귀하던 이 집을 보고, 지나는 사람마다 몹시 놀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찌하여 주님이 이 땅과 이 집을 이렇게 만들었을까?’”(2 역대 7,12-21; 1 열왕 9,1-9)

그 후로 이어진 수백 년의 역사는 이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여줍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왕국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대왕국으로 갈라졌습니다.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은 이스라엘왕국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게 정복당했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은 유대왕국은 기원전 597년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에게 함락되었지요. 기원전 587년 결국 네부카드네자르의 군대는 성전을 비롯하여 도시를 모두 파괴했고, 예루살렘 주민들은 대부분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 하느님은 유대인들의 형식에 치우친 예배, 우상숭배를 꾸짖으며 깊은 내적 변화를 촉구했습니다. 또한 나중에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계약을 충실히 지킬 경우에는 하느님이 함께 하셨음을 상기시키며, 마지막이고 영원히 지속될 계약이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잃지 말 것을 간곡히 타일렀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당신께 복종하여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질 주님의 종의 믿음을 통해 구원이 오게 되리라고 사람들에게 더 큰 확신을 불어 넣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하느님의 보호를 체험했습니다. 기원전 539년 바빌론 왕국을 무너뜨린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이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한 것입니다. 제1성전 터 위에 크기는 훨씬 작은 두 번째 성전이 지어져 기원전 515년에 봉헌되었습니다. 향후 2백 년이 넘도록 정치적 독립은 이루지 못했어도 이스라엘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상대적 평화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침입하고, 그 뒤를 계승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 기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과 제 2차 성전 내부 모습

그러던 것이 상황이 바뀌어 마케도니아에서 생겨나 시리아에서 정착한 셀레우코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헬레니즘화 정책은 기원전 175년 예루살렘 성전 모독 사건으로 절정으로 이르러 반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카베오 가문이 주도한 반란이 성공한 덕분에 기원전 167년에는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고 나아가 그들의 후손인 하스모니아 가문이 유대의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63년 팔레스티나가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에게 함락되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로마는 헤로데를 왕으로 임명하고 통수권을 맡겼지요. 기원전 37년 매우 잔인하게 권력을 굳힌 헤로데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새로운 건물로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야심찬 계획은 기원전 20년부터 실행에 옮긴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과 확장이었습니다. 

2. 예수님과 예루살렘 성전

1)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바침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어렸을 때부터 예루살렘 순례길에 올랐으므로 성전에 이미 대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 22).”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 10km를 가려면 걸어서 가든 나귀를 타고 가든 몇 시간은 걸렸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누구도 그 참뜻을 의심하지 않는 율법을 하루 빨리 이행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성전에서 바침은 아기 예수님께서 주님께 속한 맏아들이심을 보여줍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529항).”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모든 장자는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선포 했습니다(탈출 13, 1-2, 11-16).” 부모들은 오늘날 20 일치 품삯에 해당하는 은을 주고 산 봉헌물을 속죄제물로 바쳐야했습니다. 율법은 또한 출산 후 산모의 정결례를 규정했습니다(레위 12,2-8). 동정 잉태한 마리아는 사실상 정결례를 지키지 않아도 되었지만 순순히 율법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은 점점 내려가는 언덕들로 이어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워질수록 지평선 너머로 우뚝 서 있는 성전 산이 보였을 것입니다. 헤로데 시대에는 성전 안뜰이 두 배로 확장되었고, 그 주위를 에워싸는 거대한 성벽(두께가 4.5미터나 되는 곳도 있었다)이 건설되었습니다. 흙으로 메우거나 지하 아치로 받쳐 경사진 땅을 평평하게 만들었어요. 이런 식으로 사각형 기단을 건축했는데, 길이는 각기 서쪽 485미터, 북쪽 314미터, 동쪽 469미터, 남쪽 280미터 였습니다. 중앙에는 50미터 높이에 흰 돌과 금박으로 덮인 성전이 또 다른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베들렘헴에서 오는 길은 성벽 서쪽을 타고 자파 성문으로 이어집니다. 그곳에서부터는 수많은 작은 거리들이 성전을 향해 거의 직선으로 뻗어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성전 산의 남쪽 면에서 성전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성벽 기저에는 요셉 성인과 마리아가 율법에 규정된 대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결례 제물, 즉 산비둘기 한 상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살 수 있는 작은 가게들이나 노점이 많았습니다. 넓은 계단 가운데 한 곳을 올라 쌍문(Double Gate)으로 알려진 입구를 통해 들어간 그들은 거대한 지하 통로들을 지나 안뜰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지하 통로들을 지나면 제일 먼저 이 거대한 구역 전체에서 가장 큰 열린 공간인 이방인의 뜰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곳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지요. 한쪽은 헤로데의 명령으로 확장된 곳이고, 다른 쪽은 경계가 삼엄한 원래의 안뜰이었습니다. 그곳은 이방인이든, 이스라엘 사람이든, 순례자든, 예루살렘 주민이든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군중의 음성으로 늘 웅성거렸습니다. 이러한 왁자지껄함에 아직 공사 중인 여러 구역에서 여전히 일하던 공사장 일꾼들의 소음까지 더해졌지요.

요셉 성인과 마리아는 그곳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안뜰을 갈라놓고 있는 담을 훌다 문으로 통과하여 이방인들은 출입할 수 없는 구역(어겼을 때는 사형이었다) 주위에 둘러친 난간을 뒤로 하고 마침내 성전 벽에 도착했습니다. 성전은 동쪽 면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었어요. 아마도 늙은 시메온이 그들에게 다가왔다고 하는 곳은 이곳, 여인들의 뜰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날 구원자를 보게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루카 2,27), 군중 가운데서 구원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아기인 메시아를 알아본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입니다(루카 2,28-31).”

마침내, 아기인 메시아를 알아본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계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입니다(루카 2,28-31).” 

“복음의 이 장면은 성부의 뜻을 충실히 이루려 이 세상에 오신 봉헌된 성자 동정녀의 아들의 신비를 드러냅니다.시메온은 아기 예수를 알아보고… 예언의 말로 하느님께 최고의 봉헌이자 최후의 승리를 선포합니다. 이 부분이 바로 구약과 신약 두 계약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자신이 곧 하느님의 새로운 성전인 예수님은 옛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을 찾아서 오신 것이고, 그럼으로써 율법을 이행하고 구원의 마지막 시기를 예고하고 계신 것입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2011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성무일도 저녁기도 강론).” 시메온은 젊은 요셉 부부를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 34-35).” 구원자의 도착을 둘러 싼 빛과 환희의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 말들은 하느님이 그들에게 이제껏 알려주신 것을 완결 짓는 말입니다. 이 말들은 예수가 완전하고도 유일한 희생 제물인 십자가의 제물로 봉헌되려고 태어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편 마리아에 관해 말하자면, “구원의 역사에서 마리아의 역할은 말씀이 육화되는 신비로만 끝나지 않고 아들의 죽음과 부활에 사랑과 슬픔으로 동참하는 것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아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감으로써 동정녀 어머니는 세상의 죄를 짊어질 어린 양으로서 하느님께 봉헌한 것입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2006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미사 강론).” 

시메온의 말과 이어진 여 예언자 한나와의 만남으로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 요셉 성인과 마리아는 여인들의 뜰과 유대인의 뜰 사이에 있는 니카노르 문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반원형 층계를 열다섯 계단 올라가 사제 앞에 섰고, 사제는 그들의 제물을 받고 의식에 쓰이는 성수로 마리아를 축복했습니다. 이러한 예식은 성자가 속죄되었고, 성모가 정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2)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고(마태 23,2; 마르 13,2; 루카 19,44; 21,6) 예언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70년에 실현되어, 로마 군단의 공격으로 성전이 완전히 불타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50년 뒤 두 번째 반란을 진압하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모조리 쫓아낸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옛 도시의 폐허 위에 완전히 새로운 도시, 일명 알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를 지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성전 폐허는 유피테르 신상과 함께 자신의 입상과 함께 기념비들을 건립하게 했지요.

(복원되기 이전의 더블 게이트 남쪽 문)

4세기 들어 예루살렘이 다시 그리스도인들의 도시가 되자 성지에는 많은 성당과 대성당이 건설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통곡의 벽으로 알려진 서쪽 벽 발치에서 일 년에 한 번은 기도할 수 있게 유대인들의 접근이 허용되었음에도 성전 산은 복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백 년 후 세력을 점차 키워 가던 이슬람은 마호메트가 죽은 지 6년째 되던 638년 예루살렘을 점령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초기 무슬림 통치자들은 성전 안뜰에 관심을 집중했고, 얼마 안 되어 모스크 두 채가 들어섰습니다. 안뜰 중앙, 옛 지성소 자리였던 곳에는 691년에 완공된 바위 돔의 돔이 들어섰고 지금까지도 원형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남쪽 뜰, 헤로데 성전의 대문이 있던 곳에는 715년에 완공된 엘 악사 사원이 들어섰는데 이 건물은 훗날 여러 번 대대적인 재건축을 거칩니다. 이후로 12, 13세기에 단명했던 십자군 왕국을 제외하고는 이 지역은 줄곧 무슬림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을 하람 알 샤리프(고귀한 성소)라 부르며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이슬람의 세 번째 성지로 떠 받들게 됩니다.

3) 새로운 예배

사도행전에는 열두 사도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러 성전에 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전했는지에 대해 많은 증언들이 담겨 있지요. 동시에 그들은 빵을 나누기 위해, 즉 성찬례를 거행하기 위해 (사도 2, 42와 2,46), 자신들의 집에 모이곤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성전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에서 새로운 예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성전은 바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당신의 성체와 성혈의 성사로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입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Jesus of Nazareth, Holy Week, from the Entrance into Jerusalem to the Resurrection, San Frrancisco, Ignatius Press, 2011, pp.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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