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기원전 4년 경에 탄생하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헤로데 가문이 통치하던 시기에 활동을 하신 거지요. 예수님의 탄생부터 이집트 피신하신 것과 세례 받으신 후 초기 공생활 시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예수님 탄생과 이집트로의 피신/ 이집트에서의 귀환과 성전의 소년 예수님
1) 예수님 탄생과 이집트로의 피신 (기원전 4년?)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루카 2,1-7)”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마태 2, 13-15)”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네 복음서 즉, 마태오, 마르코, 루카, 그리고 요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의 세 복음서를 ‘공관’ 복음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들 유사성으로 인해 함께 연구되기 때문이지요. 제 4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상세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다릅니다. 그리스도교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은 (기원전 4년에 사망한) 헤로데의 통치 말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따라서 탄생 시기는 아마도 기원전 5년 12월 일 것입니다. 루카복음 2,22-24에 의하면 아기 예수님은 정결 예식에 따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셨습니다. 헤로데의 위협을 받은 요셉과 마리아는 어둠을 틈타 이집트로 피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헤로데의 영토를 최대한 빨리 벗어나려면 이집트로 가는 주요 경로에 있는 아스칼론(아스클론) 길로 가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막의 더 안전한 길이 있었지만 여자와 신생아에게는 너무 힘들고 위험한 길이었을 것이지요. 성 가족은 무사히 나일 강 지역에 도착하여 당시 이집트에 살고 있던 많은 유다인들 가운데 은신하며 생계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2) 이집트에서의 귀환과 성전의 소년 예수님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마태 2, 19-23)”
“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루카 2, 41-52)”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 요셉 성인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으나 예루살렘 근처로는 가지 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는 헤로데의 아들 아르켈라오스가 유대아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의 폭정은 아버지 헤로데보다 훨씬 심했지요. 요셉 성인은 갈릴래아 서부의 수도인 세포리스(Sepphoris, 치포리)에서 남동쪽으로 약 11km 떨어져 있는 작은 유다인 마을 나자렛에 정착했습니다. 요셉 성인이 나자렛을 선택한 지정학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보통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사실 이 외딴 마을은 상대적으로 온순한 헤로데 안티파스의 통치 영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에르켈라오스의 흉악한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전통적인 해안길을 따라 귀환하게 되면 아르켈라오스의 땅으로 가지 말라는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마태오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요셉 성인은 이 지역을 피하여 이집트 시내에 있는 리노코루라(Rhinocourura)에서 페트라로 향하는 잘 알려진 남쪽 경로로 따라갔을지도 모릅니다. 요르단 건너편 북쪽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이들은 곧 베레아를 지나 남동쪽에서 갈릴래아의 나자렛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2. 예수님 세례와 광야/ 세례자 요한의 죽음/ 나자렛에서 카파르나움까지
1)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에 머무심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루카 3, 1-3)”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신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통치 15년 즉 기원후 27-28년에 세례자 요한도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루카 3,1-3). 복음서의 기사를 당시의 다른 사료들(특히 요세푸스 플레비우스의 저서나 꿈란 문서 등)과 병행해서 보면 요한의 활돌이 당시 유대아 전역에서 불고 있던 깊은 영적 각성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지요. 요한은 요르단 골짜기에서 집중적으로 활동했는데, 아마도 예리코 부근 요르단 강 여울가에 있는 벳 아라바나 좀 더 상류에 있는 스키토폴리스 (벳 산) 남쪽의 에논이었을 것입니다. 에논은 4세기 당시 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오늘날의 키르벳 엣 디르 (Khirbet ed-Dir)입니다. 세례를 받으려고 몰려든 무리들 중에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신 예수님이 계셨지요. 이것이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나가셔서 사십 일을 계셨다고 하는데, 이곳은 예리코 북쪽의 유대 광야일 가능성이 큽니다. 고대부터 이곳은 속세를 떠나 살기 원했던 사람들의 피난처였습니다.
당시에는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 은둔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실 때, 악한 영에 이끌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꼭대기’-아마도 수직 낙하 거리가 약 40m인 성전산 남쪽 모퉁이로 보임-에 세워지셨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은 유혹을 이기신 후 갈릴래아로 돌아오셨습니다. 요한은 계속 회개를 전파하고 세례를 베풀다가 끝내 헤로데 안티파스의 명으로 체포되었습니다 (마태 14,1-12; 마르 6,14-29; 루카 3,19-20).
2) 세례자 요한의 체포와 죽음
“그러나 헤로데 영주는 자기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온갖 악행 때문에 요한에게 여러 번 책망을 받고, 그 모든 악행에다 한 가지를 더 보태었다.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루카 3, 19-20)”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플레비우스는 신약에 기록된 요한의 감금과 죽음에 대하여 조금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고대사 18:116-118). 헤로데 안티파스는 로마 여행길에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둘 다 배우자가 있는 상태였는데도 헤로디아에게 청혼했습니다. 요한이 헤로데 안티파스와 그의 새 아내를 질책한 것은 바로 이 파렴치한 행동 때문이었지요. 안티파스는 많은 무리가 그를 따르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입을 막으려고 그를 잡아들였습니다. 요세푸스는 헤로데가 사해 동쪽 하스모니아 왕조의 옛 요새이며 나바테아 경계 지역에 있는 마케루스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가는 아마도 몇 줄 앞(고대사 18:112)에서 언급했던 성의 이름과 이곳은 혼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부 갈릴레아의 영주인 헤로데 안티파스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가 이런 그를 하필 나바테아 왕국의 국경 쪽으로 보냈을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요세푸스는 안티파스와 세례자 요한, 나바테아 왕가의 삼각 관계를 반복하여 언급하면서 요한의 죽음을 설명합니다.
아레타스 왕은 딸의 명예를 위해 안티파스의 군대를 물리쳐 복수했습니다. “헤로데 군대의 패배는 요한을 살해한 죄에 대한 하느님의 정당한 형벌로 여겨졌습니다. (고대사 18:119)”
그러나 마르코 복음에서는 요한이 갈릴래아 바닷가의 티베리아스에 있는 안티파스의 궁에서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생일을 맞아 “대신들과 천인 대장들과 갈릴래아의 귀빈들로 더불어 잔치” (고대사 6:21)를 했는데, 헤로디아가 이 잔치 중 요한의 처형을 교사했습니다.
3) 나자렛에서 카나와 카파르나움까지
루카복음 3,23에 따르면 예수님은 약 삼십 세에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루카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사목 초반에 유년 시절을 보낸 나자렛 마을의 회당을 방문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루카 4,16-30). 마르코는 이 에피소드를 예수님이 갈릴래아 바다 주변 지역에서 가르치시던 상황 속에 끼워 넣었고(루카 6,1-6), 마태오복음 13,53-58도 이와 이슷하며 여기서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라고 불리십니다. 예수님은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61,1-2과 58,6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회중 앞에 낭독하심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기대하게 만드셨지요. 청중들이 이 새로운 가르침을 거부하자 예수님은 겐네사렛 호숫가에 있는 가파르나움으로 이동하셨습니다. 가파르나움(나훔의 마을)은 작고 부유한 마을로,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어획량은 루카복음 5,6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안티파스와 필리포스 2세의 통치 지역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카파르나움에는 세관이 있었습니다. 사도 마태오는 이곳에서 세관으로 일했던 중 제자로 부름을 받았을 것이지요(마태 9,9; 마르 2,14; 루카 5, 27). 이 지역 수비대를 지휘하던 백인대장은 이방인임에도 지역 회당을 세웠고(루카 7,5), 예수님은 이곳에서 종종 강론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첫 제자들, 곧 인근의 요르단 강 동편 벳 사이다 사람으로 어부인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요한 1,44),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곳도 바로 카파르나움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여기서 열두 제자를 세우셨습니다(마태 10,1-4; 마르 3,13-19). 예수님이 복음서에 기록된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신 곳도 카파르나움으로, 이후로 이곳은 “(그의)의 본래의 동네”로 불립니다(마태 9,1).
카파르나움에는 다양한 주민들이 살았으며 외딴곳에 있는 나자렛 마을보다 지역 및 국제 교역로에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가르침에 좀 수용적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유년 시절을 보내신 지역에 발길을 완전히 끊으신 것은 아니었지요. 요한복음 2,11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인근의 카나에서 성모님과 제자들 앞에서 기적을 일으키셨음을 이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예수님의 공생활 사목 초기에 있었던 일이지만, 요한은 예수님이 나중에 한 번 더 이곳에 방문하셨다고 전합니다(요한 4,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