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활동 이야기 2: 예수님의 공생활- 갈릴래아와 이방 지역 전교 활동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셨던 시대의 배경은 어떠했을까요?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이 다스리던 유대아, 갈릴래아 지역, 그리고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 데카폴리스를 두르 다니시며 하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1. 예수님 시대의 성지와 코엘레-시리아/카나와 나자렛 방문/ 갈릴래아 지역

1) 예수님 시대의 성지와 코엘레-시리아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마르 3,8)”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셨던 시대의 배경은 어떠했을까요?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이 다스리던 유대아, 갈릴래아 지역, 그리고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 데카폴리스를 두르 다니시며 하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적을 바탕으로 한 예수님 당시의 카파르나움 모습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주로 갈릴래아 바다 주변 지역에서 전하신 가르침이 갈릴래아, 유대아, 예루살렘, 이두매아, 요르단 건너편 땅, 티로, 시돈의 군중들을 끌어모았다고 전합니다(마태 4, 25: 데카폴리스 추가; 마르 3,7-8; 루카 6,17). 이들 지역과 성읍은 당시 유다인들의 성지에서의 정착 상황을 보여줍니다. 유대아 땅에서는 예루살렘만이 유일하게 ‘도시’로 지목되고 있지요. 이두매아는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 시대 이후로 개별적인 행정구역이었지만, 그 주민들은 점차로 유다인들에게 흡수되어 갔습니다. ‘요르단 건너편’ 땅들이나 베로이아는 토비아스 왕조 때부터 유다인의 땅이었습니다. 하우란의 도시들에도 유다인 공동체가 있었지만 이방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지요. 마지막으로 티로와 시돈 땅은 페니키아인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유다인들도 상당수 살고 있었습니다. 성지는 로마에 예속된 채 여러 지역과 통치자들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지의 유다인들은 영적으로 하나였으며, 어느 한 공동체에서 신앙적 분위기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전체 공동체를 휩쓸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나중이기는 하나 여기에 누락되어 있는 사마리아와 해안 도시들에서 그리스도교가 엄청나게 번영하게 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지요.

2) 카나와 나자렛 두 번째 방문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 6,4)”

나자렛과 카나 두 번째 방문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카나를 두 번째 방문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예수님의 친척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요한 4,46: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습니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어떤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카나는 아소키스 평야의 변방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왕실 소유지가 있었고, 이 ‘왕실 관리’는 아마도 이곳을 관리하는 왕실 관리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기간에 인근 지역을 방문하셔서 나인 고을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루카 7,11-37). 나인은 ‘성’이라고 언급되기는 하지만 나자렛에서 남동쪽으로 약 8km 떨어져 있는 마을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모레 산 기슭산기슭 북쪽에 위치한 나인은 성벽 하나에 성문도 하나였지만, 후대에 한 지역의 중심지가 됩니다. 이 고대 마을의 공동묘지 유적은 지금도 중앙 간선로와 연결된 길가 바위 지역에서 볼 수 있지요. 모레 산기슭 남쪽 부근에는 엘리사 예언자가 한 죽은 소년을 다시 살리는 기적을 일으켰던 도시인 수넴이 있었습니다(2 열왕 4,8-37). 이러한 수넴에 가까이에 살던 나인 성 사람들이었기에 같은 기적에 “우리 가운데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루카 7,16)”고 외치며 반응했을지도 모릅니다.

3) 갈릴래아 바다 주변 지역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마르 4,41)”

갈릴래아의 공생활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여정 전까지 몇 번을 제외하고 예수님의 사목은 갈릴래아 바다 주변에 집중되었습니다(마태 15,29; 마르 1,16; 7,31). 복음서에서 갈릴래아 바다는 겐네사렛 호수(루카 5,1), 티베리아스 호수(요한 6,1; 21,1), 아니면 그냥 ‘바다’로도 불렸으며,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지역 주민들이 이 호수를 ‘겐네사렛 호수’라 불렀다고 기록합니다(전쟁사 3:463). 사실 ‘갈릴래아 바다’라는 이름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호숫가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사목을 이사야 9,1의 성취라고 믿으면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성경 구절에서 이 지명의 구성 요소들을 가져왔는데, ‘바다’와 ‘갈릴래아’가 함께 사용된 곳은 단 한 구절뿐이지요(요한 6,1). 이 ‘갈릴래아 바다’라는 표현이 마태오, 마르코, 요한복음 이외의 유대 및 이교 문학에 다시 나타난 것은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서입니다. ‘티베리아스 바다’라는 호칭은 라삐 문헌에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분명 기원후 18-19년에 티베리아스가 세워진 이후일 것입니다. 최초의 사도들은 어부들이었습니다. 때로 예수님이 배에 서서 가르치시면 군중들은 해변에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행복 선언은 카파르나움 근처에서 선포되었으며(마태 8,1.5), 그 장소는 카파르나움 바로 뒤편 언덕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주 가끔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마태 11, 21-24; 루카 10, 13-15)

갈릴래아 바다에는 자주 폭풍이 붑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폭풍이 부는 호수를 건너며 주무셨는데, 그분이 깨어나셔서 꾸짖으시자 바다가 갑자기 잔잔해졌습니다(마태 8, 23-27; 마르 4,35-41; 루카 8, 22-25). 성경에 기록된 유일한 예수님의 호수 동편(건너편) 기사에는 배가 고대 정박지인 게르게사라는 곳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돼지 떼가 몰살된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마르코 5, 1와 루카 8, 26.37는 이곳을 ‘게라사인들의 지방’이라고 기록한 반면 마태오 8, 28는 ‘가다라 지방’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수에서 남쪽으로 대략 48km 거리에 있던 유명한 도시 게라사에 해안 지역이 포함되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가다라는 도시가 호수에 좀 더 가깝고 잠시 호수 남단에 항만을 소유했던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 사건이 일어났던 곳으로 보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지요. 그러나 이 사건을 기록한 다른 헬라어 사본들에는 ‘게르게사인(Gergasenes)의 지방’으로 나타납니다. 게르게사는 고대 유대 문헌에 요르단 강 동쪽의 작은 마을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이 이름을 가진 마을이 실제로 있었음을 증명해 줍니다. 이러한 혼란은 후대의 헬라어 필사 방식의 산물로 보이는데, 유명하지 않은 도시 이름(게르게사)을 좀 더 유명한 도시 이름(게라사나 가다라)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6세기에는 이 지역에 거대한 수도원이 세워졌습니다. 게르게사(쿠르시)는 호수 동편 히포스 땅의 가파른 경사지에 위치해 있었지요. 이방인이었던 게르게사 주민들은 유다인들과 달리 돼지를 치는 일을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방인 신전에서는 가끔 돼지를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1 마카 1, 47).

이외에 갈릴래아 바다와 그 주변 지역과 관련하여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으로는 벳 사이다라는 성읍 근처 ‘황량한 곳’에서 베푸신 오병이어(루카 9,10-17)의 기적, 물 위를 걸으심,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걸은 것(마태 14, 22-33; 마르 6, 45-51; 요한 6, 15-21) 등이 있습니다. 그 외에 예수님은 ‘마가단(마태 15, 39; 마르 8,10에서는 달마누타)’을 방문하셨는데, 마태오복음의 ‘마가단’이나 마르코 복음의 ‘달마누타’ 모두 막달라로 봐야 합니다. 막달라는 해안가에서 티베리아스 다음으로 중요한 곳으로 생선가공업으로 유명했습니다. 이곳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까지 올라온 여자들 중 한 명인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향이었지요. 이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악귀를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주신 여인으로, 자기 소유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루카 8, 2-3).

2. 예수님, 티로와 시돈/카이사리아 필리피/ 데카폴리스를 방문하시다

1) 예수님: 티로, 시돈, 카이사리아 필리피 방문하시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마르 7, 24)”

티로와 시돈, 그리고 카이사리아 필리피 방문

예수님이 전통적인 성지의 경계를 벗어나신 것은 티로와 시돈을 여행하실 때 뿐이었습니다. 마태오복음 15, 21과 마르코복음 7, 24은 예수님이 티로와 시돈 지역을 여행하셨다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도시로 들어가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티로와 시돈에는 각각 광범위한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지요. 시돈 지방은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도시 다마스쿠스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으며, 티로 지방은 훌레(Huleh)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산악지대에 위치한 카다사까지 아울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정 중 ‘그리스’ 또는 ‘페니키아’ 여인 (당시 로마 동부에 널리 퍼져 있던 헬라 문화를 받아들인 페니키아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지요. 마르코복음 7, 31에 의하면, 예수님은 트랜스요르단의 하루란(Hauran, 나중의 데카폴리스)를 통과하여 내륙을 우회하며, 디움, 아빌라, 가다라, 그리고 히포스 땅을 지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헤로데와 그의 아들 필리포스가 헬라 문화를 반영해 재건한 파니아스(Panias), 즉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역을 지나온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이 지역은 도시 근처의 높은 절벽들이 장관을 이루었는데, 그곳에는 판(Pan) 신을 섬기는 동굴과 암석을 깎아 만든 수많은 님프 상들이 있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헤로데 대왕이 자신을 후원해 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세운 세 개의 신전 중 하나였으며(고대사 15:364), 나머지 두 곳은 지중해 연안의 카이사리아와 사마리아의 세바스테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여정은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루카복음에는 빠져 있습니다. 아마도 마태오 4, 15와 마르코는 이사야 9,1 에 언급된 세 지방, 즉 해변 길(티로에서 파니아스에 이르는 주요 대로, 요르단 저쪽(하우란/데카폴리스) 이방의 갈릴래아를 연관지으려 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2) 데카폴리스 (Decapolis)

마태오, 마르코복음 (마태 4, 25; 마르5, 20; 7, 31)은 데카폴리스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역사적 자료입니다. 요세푸스는 “시리아의 데카폴리스”를 언급하면서, 유다 반란자들에 맞선 이 도시들이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불평했단고 전합니다(자서전 341). 또한 그는 스키토폴리스를 데카폴리스에서 가장 큰 도시로 기록하고 있는데(전쟁사 3:446), 이름의 지정학적 속성이나 기원, 또는 어떤(하위) 도시들이 여기에 포함되는지 등의 추가 정보는 제시하지 않고 있지요.

데카폴리스

플리니우스(기원후 79년)는 1세기의 데카폴리스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시리아 쪽으로 유대아에 가까이 있는 데카폴리스(열 개의 도시) 지방은 성읍의 개수가 이름이 되었으나 기록에 따라 여기에 포함되는 성읍 목록이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보통은 크리소로에(Chrysorrhoe) 강의 범람으로 비옥한 목초지가 있었던 다마스쿠스, 필라델피아, 라파나(이 셋은 아라비아쪽에 위치), 스키토폴리스(전에는 리베르 신이 이곳에 묻은 유모의 이름을 따서 니사(Nysa)라 불림), 야르묵 강이 관통하는 가다라, 히포스, 디온, 물이 풍부한 펠라, 게라사, 카나타 등이 포함됩니다. (박물지, naturals Historia 5:16)”

또한 그는 데카폴리스에 포함되는 ‘열 개의 도시’ 명단이 확실한 것은 아님을 인정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그가 다른 이들에게서 들은 것을 기록했음을 암시합니다. 2세기의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기원후 150년)는 데카폴리스 지역에 18개 도시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는 플리니우스가 언급한 도시 중 라파나를 제외하고 헬리오폴리스, 아빌라, 사아나(Saana), 히나(Hina), 아빌라 리사니아스, 카피톨리아스, 에드레이, 가도라, 사물리스(Samulis) 등 아홉 개의 도시를 추가하였습니다(스트라보, 지리학, 5: 14-22). 그러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했던 1세기의 지리학자 스트라보(기원전 63-기원후 24년)가 로마 제국의 다른 연맹들은 기록하면서 데카폴리스 도시들의 연맹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은 주목할만 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데카폴리스를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정치적 연맹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요. 비문이나 동전 또는 사료들에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아 그리스 시대나 로마 시대 초기에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유다인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켜 혼란했던 시기(기원후 66-70년)에 이 동맹이 결성되었다고 보는 쪽이 더 그럴 듯 합니다. 이 도시들은 유다인들이 밀집된 주변 지역과 자신들을 뚜렷하게 구별하고자 했지요. 그러므로 복음서에 데카폴리스 지방이 등장하는 것은 저작 당시의 지명이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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