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무덤 대성당(Holy Sepulchre)

예수님 무덤 대성당은 이스라엘 성지 중에서 순례의 정점이 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예수님의 수난, 죽으심과 부활의 장소이기 때문이죠. 무덤 성당의 역사와 현재 성당의 모습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



1. 무덤 성당 모습

순례자들이 주님 무덤 대성당에 들어서면 벽에 둘러싸인 작은 공간인 산책 회랑 또는 아트리움이 나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봉헌된 등불이 한 줄로 걸려 장식되어 있고 커다란 촛대가 옆에 늘어서 성유의 돌로 알려진 기념물에 가닿습니다. 골고타 언덕 밑바닥보다 몇 센티미터 위에 있는 이 석판은 아리마태아 요셉과 니코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린 후 온 정성을 다해 손길을 쏟았음을 생각나게 합니다.

로탄다 아나스타시스 부활 전례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작은 기념물이 나오는데, 바닥에 끼워져 있고 닫집으로 덮여 있는 원형 대리석 석판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곳은 예수님을 따르던 거룩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하고 매장하는 것을 지켜본 장소였다고 합니다. 두 개의 거대한 기둥 사이로 난 공간을 통과해 지나가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주위로 건설하라고 명령했다던 로탄다 또는 아나스타시스, 즉 주님 무덤에 이르게 됩니다. 이곳은 대성전 1층 한가운데에 경당으로 둘러싸여 있지요.

2. 관련 성경 말씀

“이미 저녁때가 되어 있었다. 그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으므로, 요셉이라는 사람이 왔다(마르 15, 42-43). 그는 아리마태아 출신의 부유한 사람으로서(마태 27, 57), 의회 의원이며 착하고 의로운 이였다. 이 사람은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동의하지 않았다(루카 23, 50-51).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요한 19,38). 그는 빌라도에게 당당히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열심히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벌써 돌아가셨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며, 백인대장을 불러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느냐고 물었다. 빌라도는 백인대장에게 알아보고 나서 요셉에게 시신을 내주었다(마르 15, 43-45).”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30kg)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요한 17, 39-42).요셉은 바위를 깎아 만든 자기의 새 무덤이 있었다(마태 27, 60). 그날은 유다인들이 준비일이었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마태 27,60). 그리고 무덤 입구에 큰 돌을 굴려 막아 놓고 갔다. 거기 무덤 맞은 쪽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마태 27, 60-61) 앉아 있었다.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도 뒤따라가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 나서,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쉬었다(루카 23, 55-56).”

3. 무덤 성당 성경과 고고학 증거

주님 무덤 자체를 포함하여 전 지역이 그곳에 지어진 다양한 건물에 의해 상당히 바뀌었지만 성경과 고고학 증거를 보면 1세기에 모습이 어떠했을지 꽤 상상이 갑니다. 골고타는 버려진 채석장의 일부였습니다. 무덤은 채석장의 바위 앞면을 파낸 것이며 동쪽에 낮은 출구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큰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던 바로 그 출입구입니다. 입구가 너무 낮아서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들어가야 했을 것입니다. 조금만 들어가면 실제 묘실이었던 방으로 이어지는 연결 통로가 나옵니다. 바로 그곳 안 북쪽 바위를 파낸 석관 위에 예수님의 시신이 황급히 안치되었습니다. 곧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었기 때문입니다(루카 23,54).

4. 빈 무덤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와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줄까요?”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레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1-7). “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 모습에 대한 복음 속 설명에 익숙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다락방에 모여 있던 열두 사도들에게, 갈릴래아에서 베드로와 준비되어 있었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난 덕분에 빈 무덤의 발견으로 부활의 진실을 증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을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은 바로 부활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첫걸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요한 20,2)는 빈 무덤에 들어가 ‘그곳에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요한 20,6), 보고 믿었습니다(요한 20,8). 이는 그가 빈 무덤의 상태를 보고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은 사람이 한 일일 수 없으며, 라자로의 경우와는 달리 예수님이 단순히 지상의 삶으로 돌아오신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가톨릭 교리서, 640항).

첫 그리스도인들에게 빈 무덤은 일종의 근원적 표징이었습니다. 빈 무덤을 보게 된 그들의 경외심에 놀람과 기쁨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들이 느꼈을 그 모든 감정들 역시 후대의 신자들에게도 이어졌으므로, 2세기 전반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파괴해버렸을 때조차도 그 장소에 대한 기억들은 고스란히 보존되었습니다. 그러한 전승은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직접 지휘한 성전 재건 작업과 예수님의 무덤 발견 당시의 감동을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의 서술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면 바로 아래 있던 원래의 지표면이 드러나자 모든 예상과 달리 구세주의 부활을 알리는 장엄하고도 거룩한 유적이 바로 발견되었다. 그러자 정말로 가장 성스러운 이 동굴은 흡사 주님이 살아나신 것처럼 어둠 속에 누워 있다가 다시 빛을 보게 됨으로써, 그곳이 그 어떤 음성으로 전하는 것보다는 더욱 분명하게 주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현장이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확실하고도 생생히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Vita Constintini, 3,28).”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건축가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있던 지역을 격리시키고 주위의 바위를 파내어 묘실 자체가 바위 덩어리 안에 남겨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묘실은 지금은 소성전(Aedicule)이라고 불리는 대리석 경당 안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 경당 또한 꼭대기에 창이 있는 거대한 돔을 얹은 원형 무덤 중아에 서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구조는 같지만 원래 건물을 구성하고 있던 부분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1810년에 그리스 정교회가 건설한 이 경당은 2016년에서 2017년 사이에 가톨릭 교회와 아르메니아 교회의 협의 하에 보강 및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소성전의 평평한 지붕 위에는 네 기둥에 의해 지탱되는 러시아풍의 작은 돔 건물이 있습니다. 정면 벽은 촛대와 기름등잔으로 장식되어 있고, 측면 벽에 그리스어로 쓰인 많은 비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뒷벽의 제단은 콥트교회 소유인데, 12세기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무덤 양식들

경당 내부는 하나의 방과 안쪽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낮고 좁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방은 길이가 3.5미터, 폭이 4미터이며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에 없애버렸던 원래의 아치형 천장을 재현했습니다. 그곳은 무덤을 막아 놓은 커다란 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거룩한 여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 주었던 천사를 기념하여 천사의 경당이라고 불립니다. 천사가 앉아 있던 돌의 일부는 경당 중아에 보존되어 있는데 원래는 돌 전체가 온전히 보전되어 있었으나 1009년 알 하킴의 명령에 따라 파괴되고 일부만 남은 것입니다. 또한 알 하킴이 신하들은 정확히 예수님의 무덤에 해당하는 안쪽 방마저 없애버리려고 했으므로, 그 손상은 거의 회복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아리마태아 요셉과 니코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했던 석관은 오른쪽에 벽과 평행하게 있는데 대리석 석판으로 덮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사도신경)” 하시었습니다. 순례자들은 으레 경건한 마음으로 이 작은 공간으로 들어섭니다. 무덤 경당에서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장엄 미사가 진행됩니다.

2016년 10월 23일에 소성전을 복원하던 중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555년 이후 처음으로 대리석 석판을 들어내자 원래의 바위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성스러운 그 바위의 예전 덮개로 사용되어 왔던 또 다른 묘비의 일부가 발견되었습니다. 묘비를 제자리에 고정시킨 모르타르를 분석한 결과, 전문가들은 그것이 4세기에 그곳에 놓인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 

십자군 시대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대성당 유적 위에 지어진 복합 건물에는 로탄다 바깥쪽으로 다른 경당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주요 경당은 골고타 경당(십자가의 길 제14처)입니다. 북쪽으로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지보호관구 소유인 마리아 막달레나 제단과 성체 경당이 있는데, 이 경당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난 부활한 예수님의 출현을 기념하여 봉헌되었고, 예수님이 채찍질을 당했던 기둥 조각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성당 중앙에는 예전의 성직자 성단이 있던 자리이며 로탄다 방향으로만 열려 있는 카톨리콘(Katholikon)으로 알려진 구조물입니다. 이것은 그리스 정교회에 속하는 커다란 공간입니다. 이 공간 뒤에는(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조롱 경당, 그리스도의 옷을 나누어가짐 성당,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백인대장 롱기누스 경당이 있습니다. 아래층에는 아르메니아교회 소유인 성 헬레나 경당과 2세기 순례자가 써놓은 낙서가 있는 바르탄 경당, 거룩한 십자가 발견 경당이 있습니다. 

5. 무덤 성당에 관한 전승

성당 안의 각 공간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자세히 묘사하자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하 경당은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전승에 따르면 그곳은 사망하기 직전인 327년 무렵 예루살렘에 다녀온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후인 헬레나 성녀가 발견했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그 이야기를 박진감 넘치는 시적 언어로 들려줍니다. “헬레나 성녀는 성지에 도착하여 성소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는데, 성령에 휩싸여 예수님이 못 박히셨던 십자가를 찾아볼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골고타 언덕으로 발걸음을 옮긴 후 그곳에서 탄식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전쟁터였건만 승리의 전리품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구원의 깃발을 찾아보았지만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구나. 주님의 십자가는 흙속에 묻혀 있는데, 나는 옥좌에 앉아 있단 말인가? 나는 황금에 둘러싸여 있는데 주님의 전리품은 돌무더기 틈에 묻혀 있단 말인가?… 오, 악마여, 너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 그 칼을 묻어버리기 위해 네가 이 모든 것을 꾸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사악은 외적이며 막아버린 우물을 뚫었고, 물이 숨겨진 채로 남아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러니 새명이 드러나도록 모든 폐허들이여 사라질지어다. 진짜 골리앗을 베었던 그 칼이 번쩍일지어다. … 악마여, 다시 한번 패배하지 않기 위해 십자가를 숨김으로써 무엇을 이루었느냐? 너는 승리자를 낳으신 마리아에게 졌다.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너를 무찌르고 죽음으로써 너를 굴복시킨 그분을 동정으로 잉태하시고 낳으신 분 말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이신 그분께서는 우리 주님을 잉태하셨다. 나는 그분의 십자가를 찾아낼 것이다. 성모께서는 예수님이 태어나셨음을 보여주셨다. 나는 그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보여주겠다(암브로시오 성인, De obitu Theodsii, 43-44).”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건축한 부활 대성당

이야기는 계속되어 그대의 저수조 바닥에서 십자가 세 개가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말해 줍니다. 그 저수조는 현재의 십자가 발견 기념 성당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빌라토가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명령한 공지문인 티툴루스(titulus)의 흔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한 조각은 로마에 있는 성 십자가 대성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은 못 들도 발견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의 쇠 왕관으로 만들어져 현재는 이탈리아의 몬차에 있습니다. 또 하나는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에 있고, 다른 하나는 로마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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