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이후의 유대아는 아그리파스 1,2세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폭정으로 유다인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져 갔지요. 결국 열형당 중심으로 로마에 대항에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1. 아그리파스 1,2세의 통치
1) 아그리파스 1세의 왕국 (기원후 37-44년)
아그리파스 1세는 헤로데 대왕의 손자이자 아리스토불로스의 아들이었는데, 아리스토불로스는 하스모니아 왕가의 마지막 후손인 마리암메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모험으로 가득한 젊은 시절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내면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뒤를 이은 카이사르 가이우스(Gaius Caesar [Caligula])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기원후 37년 칼리굴라는 기원후 41년에 로마에서 암살당하게 되는데, 당시 로마에 있었던 아그리파스 1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즉위에 공헌했답니다. 그 보답으로 아르켈라오스가 다스리던 땅을 하사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그리파스 1세는 할아버지의 왕국 거의 전부를 통합하여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입지를 굳힌 후 유다인의 율법들을 준수함으로써 백성들의 환심을 샀는데, 그의 통치기는 재앙이 덮치기 전 제2성전 시대 최후의 전성기로 여겨집니다. 아그리파스 1세는 정통 유다교 지지정책의 일환으로 자신의 영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으며 카이사리아 극장에서 연설 후 닷새 만에 죽고 맙니다(사도 12, 20-23).
2) 아그리파스 2세의 왕국 (기원후 44-66년)
“헤로데가 죽은 후… 클라우디우스는 그의 왕국을 아그리파스의 아들이며 헤로데의 조카인 아그리파스에게 주었다(전쟁사 2:223)”
아그리파스 1세가 미성년의 아들 (후의 아그리파스 2세) 하나만 남기고 죽자(기원후 44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유대아를 아그리파스 2세에게 레바논의 칼키스 땅을 하사했습니다. 기원후 53년에는 이 지역을 다마스쿠스 근처에 있는 아빌라 및 영주 필리포스의 땅 (가울라니티스, 바타네아, 트라코니티스, 아우라니티스, 카이사리아 필리피)과 바꾸어 주었습니다. 또 네로 통치 아래서 티베리아와 타리키아이뿐 아니라 베로이아의 아빌라와 그 주변 마을들까지 받았지요. 유다인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아버지인 아그리파스 1세 만큼 왕국을 확장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기원후 95년경 죽을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기원후 44년 이후 유대아를 다스린 로마 총독들 중에는 티베리우스 알렉산드로스(Tiberius Alexander, 이집트 출신 유다 쥐족 가문의 후손으로, 유다교를 버리고 로마의 이교 신앙을 받아들인 필로의 조카)와 클라우디우스가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준 펠릭스(Felix)가 있었습니다. 펠릭스의 뒤를 이어 알비누스(Albinus, 기원후 62-64년)와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 기원후 64-66년)가 부패하고 잔혹한 정치를 펴면서 유다인들의 반란을 촉발하게 되었습니다.
대다수의 바리사이들은 칼리굴라가 자신의 신상을 성전에 세워 더럽히려 했던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메시아에 대한 소망에 고취되어, 헤로데 시대 이후 끈질지게 로마와 싸워오고 있던 젤롯(열혈당)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거의 대부분의 백성들이 로마에 맞서 일어나게 되었지요. 카이사리아에서 유다인과 헬라인이 충돌하자, 유다인들은 카이사리아를 떠나 나르바타로 가야했습니다. 이 소식은 예루살렘에도 전해져 항쟁심을 촉발시켰습니다. 증오의 대상이었던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자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지요. 아그리파스 2세는 백성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허사였습니다.
갈릴래아 사람 유다(Judas the Galilean)의 아들인 므나헴은 무기 저장고가 있는 마싸다를 확보한 후 수하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성전 최고 관리 중 한 명인 아나니아의 아들 엘르아자르가 바리사이인들과 친밀한 몇몇 ‘교사, 선생’들의 지지를 등에 엎고 황제를 위한 제사를 중지하라고 명령했지요. 이것은 공공연한 항쟁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요새들이 하나씩 점령되었고, 8월에는 유다인들이 도시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므나헴이 큰 적인 유다 귀족들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반란은 계속되었습니다. 키프로스와 마케루스 요새가 점령되었고, 반란은 유대아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이 가까이에 있는 그리스 도시들을 공격하자, 이곳 주민들은 자기들과 함께 거주하는 유다인들에게 보복을 가했습니다. 스키토폴리스 주민들이 가장 잔인했는데, 이들은 유다인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젤롯당원의 공격을 물리치고도 나중에 그들을 배반하여 무참이 살육했습니다. 이러한 도시들 중 게라사 주민들만이 유다인 주민들의 생명을 지켜주었다고 합니다.
2. 게스티우스와 베스파시아누스 출정
1) 케스티우스 갈루스의 출정 (기원후 66년)
이 지역의 혼란에 대해 전해 들은 시리아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는 군대 일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자기 휘하의 군단들과 콤마게네(Commagene)의 안티오코스 4세, 홈스(Homs)의 소하이무스(Sohaemus), 아그리파스 2세의 군대, 그리스 도시 등에서 모두 6,000명의 병력을 모아 제12군단을 조직했습니다. 이 중 아그리파스 2세는 정찰을 맡았습니다. 로마 군단은 프톨레마이스에 도착했고, 한 개 대대를 카불로 보냈습니다. 카불 주민들은 잠시 마을을 떠났다가 나중에 돌아와서 약탈하고 있던 시리아 지원군을 물리쳤습니다.
갈루스 자신은 카이사리아로 진격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야포로 육로와 해상을 통해 병력을 보내어 그곳을 점령하고 불을 질렀습니다. 또한 나르바타로 기병대를 보내 기습 공격을 가하고 약탈을 했으며, 치포리에도 군대를 보내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치포리(세포리스) 맞은편 아스몬 산으로 피했던 주민들은 결국 로마군의 측면 포위 공격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갈릴래아로 보냈던 군대가 돌아오자 로마군은 이어서 안티파트리스로 진격하여 아펙 투르리스 근방에 집결해 있던 유다인들을 해산시켰습니다. 칼루스는 계속해서 리따(Lod)로 나아갔는데, 초막절을 맞아 주민 대부분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뒤였지요. 남아있던 50여 명의 사람들은 학살당했고, 리따는 전소되었습니다.
로마군은 리따에서 벳호론을 지나 가바온으로 진군했습니다. 유다인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지만 갈루스는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기원후 66년 티슈레이 월 30일 예루살렘 성벽을 뚫고 성전 문까지 나아갔지요. 그러나 유다인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더 진격하지 못하고 스코푸스(Scopus) 산으로 퇴각했습니다. 로마군은 스코푸스 산에 이어 가바온에서도 계속해서 공격을 당했고 벳호론 비탈길로 퇴각하면서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제12 군단은 심지어 그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독수리 상징(군기)를 잃어버리는 치욕까지 당했습니다. 유다인들은 갈루스를 안티파트리스 성문까지 추격하여 로마의 공성 기구와 많은 장비들을 빼앗았습니다. 갈루스의 원정이 실패로 끝나면서 유다인의 반란은 전면전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2) 베스파시아누스의 갈리래아 원정 (기원전 67년)
“이렇게 해서 이제 갈리래아는 완전히 진압되었다. 그동안 로마군은 임박한 예루살렘 출정에 대비한 강한 훈련을 받은 셈이 되었다(전쟁사 4:120)”
(유다 지도층에 의해 갈릴래아 지역의 지휘권을 얻게 된) 요세푸스는 지역 내 여러 반대파들을 억압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물론 그가 다가오는 로마의 공격에 어느 정도 대비를 해 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병력을 일으켜 로마식으로 훈련시키고자 했으며, 갈릴래아 주변의 주요 정착지 일부를 요새화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치포리(세포리스)가 로마군에 등을 돌리지 않겠다고 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상황의 심각성을 보고받은 네로 황제는 최고의 장수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와 3개 군단을 유대아로 보냈습니다. 프톨레마이스에 사령부를 세운 베스파시아누스는 쉽게 요세푸스의 방어선을 뚫고 치포리(세포리스)에 이르렀습니다. 갈릴래아 군은 싸워보지도 않고 대부분 흩어졌고 요세푸스 자신은 꾀를 써서 목숨을 보존한 후 로마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배스파시아누스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군대를 이끌고 갈릴래아 정복을 마무리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그는 요르단 골짜기를 지나 남쪽에서 침투했습니다. 티베리아는 항복했고, 나머지 반란군들은 타리키아이(막달라)의 육지와 바다에서 패주했습니다. 이어 가믈라로 방향을 돌려 힘겨운 포위 끝에 요새를 함락함으로써 저항군의 바빌로니아 도주로를 차단해 버렸습니다. 야피아나 타보르 산 같은 일부 작은 요새들도 점령되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지중해의 카이사리아로 돌아가기 전에 아들인 티투스를 보내 키스칼라의 요한을 처리하게 했으나, 약삭빠른 젤롯당들은 로마군을 따돌리고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갈릴래아 전체와 골란 지역이 로마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3) 베스파시아누스의 유대아 원정
“성전이 왜 파괴되었는가? 맹목적인 증오 때문이다(탈무드 요마[Yoma] 9b)”
갈릴래아에서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베스파시아누스는 케레알리스(Cerealis)를 사마리아로 보내 그리짐 산 근처에 모여 있던 사마리아인들을 해산시켰습니다. 그는 갈릴래아 정복이 끝나자 육지와 바다를 통해 병력을 급파하여 야포를 점령하고, 로마의 수송선을 방해하던 유다인들의 배들을 기습 공격하여 파괴했습니다. 로마군은 또한 얌니아와 아조도를 점령함으로써 자유롭게 해안길을 따라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유다인들은 (귀족과 이두매아의 지원을 받고 있던 열혈당이 본거지인 마싸다에서 나와 다른 날도 아닌 과월절 전날 밤 엔게디 마을을 기습한 사건은 유다인들 사이의 내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지요. 기원후 67-68년 경에는 기타 사병 조직이 생겨났는데, 그 중 기오라스의 아들 시몬(시몬 바르기오라[Simon Bar-Giora])의 군대가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그는 이전에 케스티우스 갈루스에 맞서 전쟁에 참여해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아크라베타(Acrabeta) 지방의 게라사에서 태어난 시몬은 유대아 사막에서 활동했습니다. 나중에는 마싸다로 갔는데, 잠시 의심받기는 했지만 이내 그곳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사막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본거지를 예루살렘 근방의 파라로 옮기더니 그곳에서 이두매아까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헤로디움을 점령한 다음 트코아 근처에서 이두매인들과 싸웠으나 결국 알루루스에서 타협했습니다. 그 후 헤브론을 정복한 시몬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곳의 지도자들 및 자신의 주요 적인 키스칼라의 요한과 끊임없이 맞서면서 젤롯(열혈당)의 최고 지휘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4) 기원후 68년의 출정
“베스파시아누스는 사방에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자 이제 예리코와 아디다에 진을 구축했다(전쟁사 4:486)”
(로마군의 독수리 문장)
기원후 68년 봄, 전쟁을 재개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다군을 조직적으로 분할하여 한 지역씩 차례로 정복해 나갔습니다. 먼저 유대아의 베로이아 정복에 착수한 그는 가도라의 항복을 받아낸 후 로마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카이사리아로 돌아갔습니다. 가도라 주민 중 젤롯인들이 요르단 지역으로 퇴각하자 남아 있던 로마 군단의 사령관 플라시누스(Placidus)가 군대를 이끌고 추격했습니다. 로마군은 먼저 벳엔나브리스를 점령한 후 요르단 강변에서 도망자들을 살육했습니다. 이후 로마군은 아빌라, 율리아스, 벳시못을 점령했지요. 이렇게 하여 베로이아에서는 마케루스와 그 인근 지역만이 유다인의 수중에 남게 되었습니다.
기원후 68년 말 베스파시아누스는 두 번째 원정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카이사리아에서 안티파트리스로 진격하면서 타므나와 리따 지역을 진압했고, 엠마오로 진군하여서는 제5 군단을 배치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엠마오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베토가브리스와 카파르토바스를 점령한 후 이곳에 병력을 남겨 두고 이두매아 동부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은 북쪽으로 향하여 엠마오를 지나 아디다에 부대 하나를 남겨 두었습니다. 로마군은 사마리아를 지나 그리짐 산과 에발 산 사이에 있는 마바르타라는 마을로 진격했는데, 후에 이곳은 네아폴리스라는 도시가 됩니다. 그 후 베스파시아누스는 코리아이를 지나 요르단 골짜기로 들어가서 예리코를 점령하고 사해로 진격했습니다. 사해의 에세느 분파의 중심지인 메사드 하시딤(키르벳 쿰란, Khirbet Qumran)은 이때 최종적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입니다. 베로이아 지역을 완전히 평정한 트라야누스(트라야누스 황제의 아버지)는 예리코에서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끄는 로마 주력 부대와 합류했고, 그의 제10 군단을 이곳에 배치하였습니다.
그후 베스파시아누스는 루키우스 안나이우스(Lucius Annaeus)휘하의 기병대를 파견하여 게라사(벳데르, Bethther 동쪽, Khirbet Jarish)를 파괴했습니다. 이렇게하여 나토파(Natopha) 지역과 이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 정복되었습니다.
5) 기원후 69-70년의 원정
“그는 아들인 티투스와 정예 부대를 보내어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했다. (전쟁사 4: 658)”
(로마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의 헌정 비문)
기원후 68년 골(Gaul,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네로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네로 황제는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자살했습니다. 누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아에서 벌이던 작전들을 신중하게 보류했습니다. 1년 사이 갈바(Galba), 오토(Otto), 비텔리우스(Vitellius) 등 세 명의 황제가 교체되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전쟁을 보류하기 전에 이미 모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 상태였습니다. 기원전 69년 봄 그는 아크라베타와 고프나 지역을 점령했고, 그의 장소인 케레알리스(Cerealis)는 카페트라(Caphar-ther), 카파라비스, 헤브론을 정복했습니다. 기원후 69년 7월 알렉산드리아와 카이사리아에 있는 군대들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고, 파노니아(Pannonia, 유럽 중부에 위치한 로마의 속주)의 군대가 그의 편에 붙으면서 그의 대적인 비텔리우스를 물리쳤습니다. 기원후 70년 봄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에서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장남 티투스를 유대아로 보내 원정을 계속하도록 하였습니다. 티투스는 카이사리아에서 두 개의 군단을 집결시킨 후 북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문에 이르기 전에 예리코에서 온 제 10군단, 엠마오에서 온 제 5군단과 합류했습니다. 열혈당원들은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사해 근처 유대아 사막에 위치한 세 개의 고립된 요새들, 곧 헤로디움, 마케루스, 마싸다로 퇴각했습니다. 이 중 마싸다와 마케루스는 마카베오 가문이, 헤로디움은 헤로데가 건설한 곳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이 세 곳을 모두 요새로 만들고 필요한 것들을 갖추어 놓고 겨울 궁전으로, 또 포위당했을 때는 도피처로도 사용하였습니다. 로마 군단장 루킬리우스 바수스(Lucilius Bassus)가 헤로디움과 마케루스를 점령했지요. 그의 뒤를 이는 실바누스(Silva)는 까다로운 요새 마싸다를 정복했습니다. 마싸다의 최후 반란군은 기원후 73년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