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죽으심과 부활 이후 유대아는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혼란한에서 상황이 가속되었습니다. 기원후 70년에 결국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집니다. 이후 열혈당원을 중심으로 로마에 대항했지만 기원후 73년에 마싸다에서 자결로 끝을 맺지요. 후에 바르 코크바의 인도로 다시 항쟁을 했지만 이 또한 실패로 끝나고 유다인들은 뿔뿔히 흩어져 산발적으로 대항합니다. 이 시기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1. 예루살렘과 마케루스, 마싸다 함락 (기원후 70-73년)
1)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우리의 성소가 폐허가 되었다. 우리의 제단은 무너졌다. 우리의 성전이 파괴되었다. (제2 에스드라 10,21)”
로마군이 진군해 오자 마침내 열혈당원 간의 분쟁이 중단되었습니다. 지휘관인 기오라스의 아들 시몬과 기스칼라의 요한은 서로 방어 지역을 분담했지요. 시몬은 성벽 북동쪽 모서리에서 실로암 못에 이르는 부분을 수비했고, 요한은 동쪽 성벽을 맡았다. 후반에 가서는 시몬이 상부 도시를, 요한이 성전 자체를 방어했습니다. 이들 연합군은 2만 5천 명에 못 미쳤지만, 이들에 맞서는 로마군은 제 5, 10, 12, 15 등 네 개 군단과 수많은 지원군까지 총 8만 명 정도였습니다.
여인들의 문 밖 과수원에서 전초전을 치른 로마군은 본진은 서쪽에, 제2진(제10군단의 진)은 올리브 산에 세웠습니다. 그들은 5월 25일경 제3성벽을, 5월 30일 경에는 제2성벽을 돌파하였고, 본진도 도시 안쪽으로 이동했습니다. 6월 16일 경에 로마군은 헤로데 궁 북쪽에 있는 망대들과 안토니아 요새에 총공격을 했으나, 수비군은 로마의 공성 기구와 토성에 큰 타격을 입혀 맹공격을 막아냈습니다.
7월 초 티투스는 수비대의 보급을 차단하고자 도시 둘레에 포위벽을 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젤롯당(열혈당) 간의 내분으로 이미 많은 식량이 불타 없어졌던 차에, 결과는 곧 분명하게 드러났지요. 로마군은 7월 20일에서 22일짜기 맹공을 재개했습니다. 기오라스의 아들 시몬은 굳게 버텼으나 기스칼라의 요한이 지휘하는 안토니아 요새는 점령당하고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8월 6일 성전에서 끊임없이 드려지던 제사가 중단되었고, 8월 15-17일에는 주랑들이 불에 탔습니다. 안쪽 성벽에 경사로(토성)를 쌓아 놓았던 로마군은 성전으로 직접 들어가, 아브 월 9일(8월 28일경) 성전에 불을 질렀습니다.
8월 30일 로마군은 하부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상부 도시를 수비하는 이들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로마군은 한 달을 더 공들인 후 상부 도시와 헤로데 궁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그제서야 저항이 그쳤습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을 사로잡고 도시의 건물들을 무너뜨리라고 명령했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제10군단이 진을 쳤던 부근의 망대 세 개가 전부였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그 지역은 제10군단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2) 마케루스 공성 (기원후 72년)
“유다인들은 함께 있는 이방인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하면서 하부 도시에 남아 있게 하였다. (전쟁사 7: 191)”
마케루스 요새는 상부의 요새와 하부의 도시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열혈당원들이 상부 요새에 자리를 잡으면서 나머지 사람들(주로 이방인들)은 하부 도시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로마군은 특별히 이 마케루스 요새를 강력하게 포위하여 열혈당원 지도자 중 한 명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로마군은 협상을 통해 열혈당원들을 마케루스에서 무사히 내보내 주기로 합의했으나 불행히도 이것은 하부 도시의 수비군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지요. 이들 대부분은 달아나려 했지만 이어진 접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로마군의 공성퇴)
3) 마싸다의 함락 (기원후 73년)
“우리는 하느님 외에 로마나 다른 누구도 섬기지 않기로 결심했다.(전쟁사 7:323)”
마싸다는 깊은 골짜기 사이에 가파르게 솟아 있는 암벽 정상에 건설된 요새였습니다. 로마군은 포위 병력을 하부 진영과 상부 진영으로 나누었는데, 상부 진영에는 사령부도 있었습니다. 로마군은 어떤 방법으로 공성탑을 절벽 꼭대기에 있는 요새의 성벽에 닿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그들은 먼저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구역을 제외한 암벽 주변 전체에 포위벽(토성)을 쌓았습니다. 수비군은 투석기가 설치된 이 포위벽에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새 내부에 식량과 물이 풍족히 비축되어 있어 보급을 차단해도 그들을 신속하게 정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로마 장군 실바노는 마싸다 서쪽의 한 곳을 택했는데, 이곳은 두 개의 골짜기 사이에 솟아 있는 낮은 산등성이었습니다. 그는 소위 ‘흰 바위’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요세푸스에 따르면) 300 규빗 (그러나 실제로는 97m에 불과한) 위에 있는 마싸다 성벽까지 경사로(토성)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200 규빗을 쌓은 로마군은 나무와 철로 50 규빗 높이의 단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60 규빗에 이르는 공성탑을 두어 전체 높이가 마싸다 성벽보다 6m 정도가 더 높아지게 되었지요. 기원후 73년 5월 1일에는 공성추로 성벽이 뚫렸습니다. 수비군은 서둘러 나무 방책을 세웠고, 로마군은 그것을 태워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바람이 로마군 쪽으로 불었으나, 오후 들어 바람의 방향이 바뀌더니 방책에 불이 붙어 타버렸습니다.
승리가 확실해지자 로마군은 다음 날로 결전을 미뤘습니다. 그러나 제1차 유대 전쟁에서 로마에 노골적으로 저항했던 최후의 세력인 960 명의 마싸다 주민들-남녀, 아이들까지-은 그날 밤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2. 제1차 항쟁 이후 팔레스타인의 그리스도교인들과 유다인들/ 얌니야(야브네)의 현자들
1) 제1차 반란 이후 팔레스타인의 그리스도교인들과 유다인들 (기원후 73-131년)
“그대는 잘려 나간 그 가지들을 얕보며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로마 11, 18)”
기원후 66년에서 70년까지는 갈릴래아와 유대아 지역 모두에서 전쟁이 치열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과 그 외 일부 지역에서는 전투가 꽤 격렬했는데, 그럼에도 유다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땅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유대아 땅이 로마 제국에 정복되었습니다. 바르 코크바의 항쟁은 2세기 초반에도 여전히 유다인들이 유대아 지역에 정착해 있었음을 증거해 주며, 수세기 후에도 일부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얌니아(야브네, Jabne)에서 새로이 구성된 산헤드린은 전국으로 그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유대아 전쟁의 참사를 겪으면서 유다인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벽이 생기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포위 전날 거룩한 도시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의 펠라로 피신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펠라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해안 평야에 사도들이 세운 공동체들은, 카파르나움, 갈릴래아의 크파르 스카니아(샤크닌, Sachnin), 갈릴래아 혹은 시리아의 코카바, 그 외 일부 지역에 있던 유다계 그리스도인 무리와 마찬가지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초기 자료들에 언급되어 있는 수천 명의 회심자들에 대한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대다수 유다인들의 전통(유다교) 고수와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들로 그리스도인들은 성지의 이방인들과 외국으로 점차 전교의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유다교에서 정식으로 분리해 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2) 얌니야(야브네)의 현자들
“야브네와 그곳의 현자들을 내게 주시오. (깃딘 소책자, Gotten Tractate, 56b)”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는 충격적인 사건 이후 유다 민족의 영적인 삶은 라반 요하난 벤 자카이(Johanna ben Zakkai)라는 영향력 있는 인물을 통해 회복되었습니다. 그가 항쟁하는 것에 반대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반란자들에게 자만하지 말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은 주의를 준 적은 있었답니다. “이방인들의 제단 허무는 일을 서두르지 말라. 그러다가 너희들의 손으로 그것을 다시 세우게 될 수도 있다. 너희가 벽돌 제단을 허물었으나 돌로 그것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을 수도 있다.” (라삐 나탄의 아봇(Avot, B 31역본) 지역 전승에 따르면 요하난은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를 찾아가 야브네에서 “계명들을 수행하고 토라를 가르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성전 파괴로 공허해진 유다인의 영적인 삶을 재건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곧 산헤드린을 다시 소집하고 야브네에서 초하루 규례들을 확립해 나갔습니다.
플라비아누스 왕조 말엽 람반 가믈리엘(Gamallel)이 요하난의 뒤를 이어 유다교파의 새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끄는 야브네의 민족 지도층은 로마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지요. 야브네의 산헤드린은 로마 제국의 승인 외에도 이스라엘 내부는 물론 광범위한 디아스포라 유다인 사회의 인정도 받게 되었습니다. 야브네의 산헤드린의 권위가 확립되자, 민족의 공동체 및 영적인 삶은 토라 학자들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이들은 성직자로 세워져 다른 동료들과 구별되었고, 이제 ‘라삐(rabbi)’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3. 바르 코크바 항쟁
1) 바르 코크바 항쟁의 시작 (기원후 131-132년)
“하찌 라키바는 코시바의 아들을 볼 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가 그 기름부음 받은 왕이다.” (팔레스타인 탈무드, 타아닛[Taanit] 84, 68d)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무너진 예루살렘에 로마 식민지를 세우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루살렘에 그 흔한 이방 신전이 들어설 수도 있다는 사실에 성전 재건의 소망이 송두리째 사라지면서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다시 한 번 로마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지요. 유다인들은 제1차 항쟁을 통해 철저히 준비하고 단결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번에는 가장 적절한 순간, 곧 황제가 유대아에서 멀리 있을 때를 택했고, 다시는 요새에 갇히는 일도 없도록 지방 지역들을 요새화 두었습니다. 또한 유대아 평원과 갈릴래아 일부 지역에 수많은 지하 은신처들을 마련했는데 대부분 기존의 동굴을 활용해서 바위를 깎아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량의 무기들을 준비해 놓고 가능한 모든 주민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통합된 지휘 체계를 세워 항쟁 시작부터 끝까지 이를 유지했습니다.
바르 코크바(Bar Kokhba) 항쟁 때에는 제1차 반란 당시의 요세푸스 같은 기록자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여러 탈무드와 그외 자료들, 그리고 유대아 사막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문헌들을 비롯한 고고학적 유물들을 통해 조금씩 정보를 수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헌들에 따르면 바르 코크바(바르 코시바[Bar Kosiba]가 바로 반란 당시의 유대아 동전에 새겨져 있는 ‘이스라엘 왕 시므온’이었습니다. 이 시므온은 ‘메시아’로 여겨졌는데, 다윗의 혈통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항쟁은 기원후 131년 가을 모디인(Modiin)에서 가까운 카파르하룹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합니다. 철저한 준비가 결실을 맺어 유대아 백성은 로마의 제10군단이 주둔해 있던 예루살렘 주변으로 집결했고, 유대아 전 지역과 해안 평야까지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사마리아인 중에도 바르 코크바 반란군에 가담한 이들이 있었으며, 이방인들 중 주로 압제당하던 지역에 살던 반란군을 찾아와 동참했던 듯합니다. 산헤드린과 주로 라삐 아키바의 지지를 받았던 이 새로운 지도자는 자신이 이끄는 정부를 그 땅의 유일한 합법 정부를 합법 정부로 여겼습니다. 바르 코크바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등의 반대자들은 반란 당국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갑작스러운 폭동과 반란군의 철저한 방비에 로마 총독 티니우스 루푸스(Tinius Rufus)는 예루살렘에서 철군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제10 군단과 비(非 )유다인 주민들은 카이사리아로 떠났고, 유다인들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고대 수도를 탈환했습니다. 행정 질서가 잡히고, 달력이 새로이 계산되어 도입되었습니다. 반란 첫 해(기원후 131-132)가 ‘이스라엘 구속 제1년’으로 선포되면서 그 다음 해부터는 ‘구속 제~년’ 또는 ‘이스라엘 해방 ~년’이 되었습니다. 유대아 사막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이때 시행된 새로운 토지 등록의 효율성과 로마 통치 때의 토지 임대 계약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각 지방의 지휘관들이 임명되었고, 새 정부의 은화와 동전이 발행되었는데, 로마 제국과 지방 도시의 주화 위에 다시 찍은 것이었습니다.
유대아에서의 반란이 성공하자 바르 코크바는 갈릴래아 지역까지 반란을 확대하고자 했습니다. 치포리(세포리스)의 파괴 흔척이나 갈릴래아 지역에서 발견된 은신 동굴 중 일부가 훼손된 모습은 이곳에서도 반란군의 활동과 방비가 있었음을 증거해 주며, 일대의 올리브 나무가 뿌리째 뽑혔던 흔적 역시 이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정작 갈릴래아 지역의 유다인 대부분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로마군은 이 반란이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총독 율리우스 세베루스(Julius Severus)가 브리튼(Britain)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불려왔습니다. 또 유대아에 이미 주둔해 있던 제6군단과 제10군단 외에 시리아, 아라비아, 다뉴브(Danube) 강가의 무시아(Mysia), 이집트에서도 병력을 들여왔으며 파노미아(Pannonia), 레티아(Rhetia) 등 그 외 지역에서도 소규모 기병과 보병을 들여왔습니다. 바르 코크바와 그의 추종자들은 사방에서 압박을 받았습니다.
율리우스 세베루스는 천천히 진격하여 한 곳씩, 한 마을씩 정복하면서 반란자들을 계속 압박하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작전을 진행하게 된 것을 얼마 전 제22군단이 서둘러 내륙으로 진격했다가 전멸당하고 말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제22군단은 로마군 명단에서 사라졌습니다.
2) 바르 코크바 반란 제3년과 4년 (기원후 133-134년)
“비열한 하드리아누스가 엠마오에 하나, 카파르 라키타야에 하나, 그리고 베텔에 하나, 세 곳에 수비군을 주둔시켰다. (애가 라빠 81)”
초반에 반란군이 승리하자, 군 정세는 급속도로 바뀌었다. 로마군은 유대아에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고 팔레스타인 정복을 시작했습니다.
전투 자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양측 다 정면 대결을 피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며, 결전을 벌이기를 주저했습니다. 대신 로마군은 수십여 개의 작은 마을들을 포위 공격하면서 반란군이 장악한 지역을 지속적으로 줄여 나갔고, 각각을 정복한 후에는 그곳의 반란 세력을 전멸시켜 버렸습니다. 당시 자료들에 의하면 이러한 잔학 행위는 세베루스가 도착하기 전까지 유대아 총독인 루푸스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합니다.
바르 코크바 항쟁 제3년, 율리우스 세베루스가 로마의 모든 원정군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항쟁 제3년의 주화들이 세펠라와 유대아 산악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로마가 유대아를 제외한 팔레스타인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중요한 전투가 엠마오에서 있었고 아마도 이 전투에서 호르밧 에퀘드(Horbat Eqed)가 로마군에 점령된 듯합니다. 승리를 기념하여 이 성읍은 ‘승리의 도시’를 뜻하는 니코폴리스(Nicopolis)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 후 로마군은 반란 세력을 봉쇄하기 위해 엠마오, 카파르라키타야, 베텔, 혹은 베들레헴에 장벽을 세웠습니다. 반란 제3년에 로마군은 마지막 요새인 베텔을 제외한 나머지 유대아 지역들을 점령했습니다.
전투는 매우 치열했습니다.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의하면 바르 코크바 항쟁기에 로마군이 요새 50개를 점령하고, 985개의 마을들을 파괴했으며, 백만 명 이상을 살육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군 역시 막대한 손실을 입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하드리아누스가 원로원에서 연설을 하면서 상투적으로 사용하던 “황제와 군대는 건재하다”라는 말을 삼가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바르 코크바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사기는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반란 ‘제3년’의 문서들은 물론 심지어 ‘제4년’의 문서들, 그 중에 가장 나중의 것인 제4년 마르헤스반 월의 것에 따르면 백성들의 삶과 경제 활동은 평소와 같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바르 코크바가 그의 지휘관들에게 보낸 서신들에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그의 참모들이 종교적인 규례들을 지키도록 배려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또 식량 몰수, 엔게디 항만에서의 보급품 수송, 반대 세력 진압 등에 관한 명령과 더불어 초막절에 쓸 룰라브(Lulab)와 에트로그(Ethrog) 수집에 관련된 지시도 나타나 있습니다.
*룰라브와 에트로그는 각각 초막절 의식에 사용하는 대추야자 나무 가지 다발과 이때 함께 사용되던 시트론 열매를 말합니다.
3) 베텔 공성 (기원후 135년)
“이전에 육십 명이 베텔 성벽 아래로 내려간 적이 있었으나 한 사람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토세프타 예바못[Tosefta Yebamoth])”
항쟁 제4년인 기원후 135년 봄, 바르 코크바와 그의 군대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베텔 요새로 쫓겨났고, 세베루스와 그의 군단들은 신속히 포위 공격을 단행했습니다. 그 사이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에 대한 로마의 통치권이 회복되자 유대아를 떠났습니다. 베텔 요새는 깊은 협곡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고, 남쪽으로는 해자로 보호받고 있었습니다. 위치상으로는 상당히 안전했지만, 물을 확보하기 어려운 곳이었지요. 로마군은 포위벽을 둘러 쌓은 후, 마지막에 공성댐을 이용하여 해자를 건넜습니다. 기원후 135년 늦여름 로마군은 결국 성벽을 뚫고 들어가 바르 코크바를 포함하여 남아 있던 수비군을 학살했습니다.
4) 유대아 사막 동굴 속의 바르 코크바 투사들 (기원후 135년)
“그들은 동굴에 앉아 있었고, 동굴 위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다. (바빌론 탈무드, 안식일 60a)”
결국 로마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엔게디의 바르 코크바 지지자들에게 전해지자 그들은 사해로 내려가는 협곡 절벽에 위치한 동굴들로 달아났는데, 이들은 각기 다른 운명을 맞게 됩니다. 엔게디 동쪽 ‘연못 동굴’은 사전에 물이 저장되어 있어 이곳으로 피신한 이들은 살아남았던 듯합니다. 나할 헤베르 (Nahal Hever) 협곡 맞은편의 두 동굴(서신 동굴과 공포 동굴)도 피신처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동굴들을 직접 공격할 수 없었던 로마군은 그 위에 진을 치고 그들이 기아와 갈증에 지쳐 쓰러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엔게디의 반란군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바얀(Bayan)의 아들 요하난의 가족과 바바타(Babatha), 어쩌면 바얀도 포함하여 ‘서신 동굴’ 안으로 피신한 이들의 최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반면 ‘공포 동굴’에 피신한 남자 40명과 여자 한 명은 항복을 거절했으며,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것이 확실해지자 자신들의 모든 소유물을 불태우고 그 안에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외에 유대아 사막과 에프라임 사막에 있는 다른 동굴에서도 반란군의 은신처 유적들이 발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