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 12 지파의 가나안 땅 정복 (2)

가나안 땅에 입성한 이스라엘의 12 지파는 상속받은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은 어떠했을까요? 이들의 가나안 땅 정복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 가나안 왕들의 명단과 단 지파의 이동 그리고 므나쎄 아들 마키르 이야기

1) 가나안 왕들의 명단

판관기와 여호수아에 나타난 정복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정복한 가나안 왕들의 명단으로 요약됩니다(여호 12, 7-24). 이 명단에는 실제 기사에는 언급되지 않은 도시들 이름들이 포함되어 있어 정복 전쟁 상황을 이해하는데 일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명단에는 북쪽 지역 왕들뿐만 아니라 에프라임 산악 지대와 샤론 평야에 있는 여러 도시들, 세펠라의 아둘람, 그리고 “길갈의 고임 왕”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 “길갈의 고임 왕,” 즉 칠십 인 역의 “갈릴레아의 고임 왕”은 아마도 갈릴레아 고임(이방의 갈릴레아) 왕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2) 단 지파의 이동 (기원전 12세기)

지파들 중에는 할당된 영토를 차지하는 데 실패했거나 그중의 일부밖에 정복하지 못한 지파도 있었습니다. 단 지파가 평지인 세펠라 북부에서 헤르몬 산기슭에 있는 가나안의 도시 라이스로 이주해 간 것(판관 1,34-35)이 가장 두드러진 예입니다. 라이스는 시돈 사람들(페니키아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곳 주민들은 페니키아 도시들의 내륙 농경지를 경작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페니키아인들은 바다와 관련된 일이나 방직업에 종사했기 때문이지요. 이들에게서 도시와 영토를 빼앗은 단 지파 사람들은 시돈 시장에 농산물을 공급하던 그들의 역할을 이어받게 된 것이 분명합니다. 단 지파 청년 중에는 간혹 선원 생활에 매력을 느꼈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까닭에 단 지파는 다른 가나안 도시국가들과 대결하는데 합류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이에 대해 판관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단은 또 어찌하여 배나 타고 있었느냐?(판관 5,17)”

3) 므나쎄의 아들 마키르 (기원전 12세기)

이 외의 지파나 가문의 지역 이동은 다른 지파의 상황에 그 이름이 등장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키르가 길앗 북부로 이주한 것은 므나쎄 족보에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므나쎄 지파는 요르단 강 서쪽을 영토로 받았으며, 드보라 활동 당시에 마키르는 에프라임 산 북부에 살고 있었지요(판관 5, 14). 그런데 후에 그는 길앗의 “아버지” 즉 길앗의 주민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에프라임 산 북부에 정착하여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도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던 가문이 트랜스요르단(현재의 요르단)에 거주하는 마키르와 길앗의 아들들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이상한 현상을 말해 줍니다.

2. 가나안 땅에 해양 민족들이 유입하다(기원전 1174년)

적어도 청동기 중기부터는 에게 해 지역 민족들이나 그리스 사람들, 그 외 인도-유럽계인들이 해양 무역을 통해 이집트나 레반트 지역과 교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18왕조 시대와 아마르나 시대 동안에는 케프티우(Keftiu, 갑돌)의 배들이 이지브로 상품을 들여왔고, 리키아인(Lukku)은 키프로스의 알라쉬아 왕국을 위협했습니다. 리키아인, 트로이인(다르다나인) 및 같은 계통의 서아시아인들이 히타이트(헷)를 위해 싸웠고, 사르데 지역에서 온 셰르다누(Sherdanu) 용병들은 이집트의 가나안 주둔군으로 람세스 2세의 지휘 아래 케데스 전투에서 싸웠습니다. 파라오 메르넵타는 아카와샤(아카이아?), 셰클레시(Shekelesh), 투르샤(Tursha, 티르세노이: 에트투리아인의 조상) 등 에게 해 여러 민족들의 지원을 받아 리비아인들의 침공을 물리쳤습니다.

람세스 3세 재위 8년인 기원전 1174년에는 “해양 민족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기근과 기아로 고통받고 내몰린 이들은 북서쪽에 있는 자신들의 땅에서 쏟아져 나왔지요. 이들은 육지와 바다로 이동하면서 하투샤, 코데, 아르자와, 알르자와, 갈그미스, 우가리트 같은 중요 중심지들을 파괴했습니다. 이들이 가나안 경계 지역 아무르(아모리) 땅에 진을 쳤지만, 람세스 3세는 이들의 이집트 침략 시도 작전을 방어할 수 있었지요. 그의 무덤인 묘실에는 이때의 승리를 기념하는 글과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필리스티아, 시켈, 셰클레시, 다나누, 와샤슈 등 다섯 민족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해리스 파피루스 제1호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이들이 이집트 군에 정착했다고 전합니다. 한편 필리스티아 해안 지역에서는 아스돗과 에크론 같은 몇 개의 주요 지역이 발굴되면서 가나안 도시들이 화재로 파괴되었고, 후에 에게 해 양식의 도기를 사용한 사람들이 이곳을 점령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이 해안 중심지들을 장악했던 듯 합니다. 이집트는 대략 람세스 6세 때(기원전 1141-1134년)까지는 이 해양 민족들이 거주했음에도 어떤 식으로든 계속해서 가나안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 같습니다.

제21왕조 최초의 파라오인 타니스의 스멘데스(Smendes B.C. 1070-1044년) 시절 웬아몬(Wen-amon)이라는 관리가 노아몬에 있는 아몬 신의 신성한 배를 수리하는데 필요한 목재를 사러 레바논으로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이 여행기를 통해 시켈이라는 또 다른 “해양 민족”이 도르에 정착해 살고 있었음이 밝혀졌지요. 이들은 도시국가를 체제를 갖추었고, 선단을 운영했으며 티로, 비블로스, 알라쉬아와의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웬아몬은 상업상 고객으로는 환영받았지만 한 군주의 사절로는 인정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는 가나안에서 이집트 패권은 명백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음을 보여줍니다.

12 지파가 상속 받은 지역들

3. 이스라엘이 정복한 지역과 남은 가나안 땅 (기원전 12-11세기)

1) 이스라엘이 정복한 땅

기원전 12 세기 경 이스라엘의 가장 큰 적인 가나안 사람들은 각자의 지역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계속해서 북부 계곡 지역과 평야에, 필리스티아인들은 다른 “해양 민족들”과 함께 해안 평야 남부에, 이스라엘 지파들은 산악 지역에 거주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낮은 지대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을 몰아낼 수 없었음을 알려 주는데, 이는 그들이 “철 병거(여호 17, 18)”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판관기 1장은 이방 민족들이 계속 거주하던 지역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와 비슷한 언급이 여호수아 곳곳에서도 나타납니다(여호 15,16; 17,11-13). 칠십 인 역 판관기 1,18-19은 유다 지파가 필리스티아를 정복하지 않았음을 말하며, 판관기 1,27-35에는 지파별로 정복하지 못한 지역들이 기록되어 있지요. 남아 있는 주요 가나안 사람들의 거주 지역은 이즈르엘 계곡과 페니키아 해안가였습니다. 아세르 지파는 페니키아인들(시돈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살았는데, 해양 활동에만 집중하던 페니키아인들을 대신해 농사를 지어 주었던 것이 확실합니다(판관 1,31-32). 스켐 정복과 관련된 전승은 존재하지 않는데, 아마도 가나안 족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생하며 살아가던 게제르(여호16,10)와 상황이 같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요. 단 지파에 저항했던 여부스-예루살렘, 게제르, 그리고 아모리 성읍들은 이스라엘 중앙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고대 전승들은 에프라임 지파가 단 지파 사람들을 몰아낸 이 지역의 토착 세력과 일찍부터 접촉했음을 말해줍니다(판관 1,35; 1 역대 7,20-24). 또한 벤야민 지파 중에도 이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1 사무 4,2-4; 1 역대 8,12-13).

최근 산악 지역의 고고학 발굴 조사를 통해 분수계(分水界)의 동쪽 목초지(초원 지대) 외곽을 따라 정착하기 시작한 목축민들이 있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들은 점점 팽창하여 혼합 농업 지역에 정착지를 세웠다가 마침내 서부 산악지대로 이동하였는데, 이곳에서는 계단식 밭을 일구고 과수원과 포도원을 만들 수 있었지요. 이렇게 해서 목축을 하던 집단이 다양한 자급 전략을 갖춘 정착 사회로 완전히 탈바꿈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부갈릴레아에 정착한 민족 집단들도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정보들은 하나같이 기원전 12세기에서 11세기 경에 새로운 인구 혁명이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청동기 말에는 인구가 주로 평야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산악 지대에는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아 이곳은 아피루(‘apiru) 무법자들과 샤수(Shasu) 목축인들의 은신처가 되었던 것이지요. 이 중 샤수의 목축인들은 점점 그 수가 늘어나 정착 생활 방식을 따르게 되었는데, 어쩌면 가나안 족의 농업 생산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평지의 가나안족과 산악 지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로 양분된 상황은 판관기와 사무엘서 이야기 전반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가나안의 정복되지 않고 남은 땅

후에 이스라엘에 통합된 가나안족의 거주지 외에, 성경에는 “남아 있는 땅(여호 13,1-6; 판관 3,1-3에서는 ‘주님께서 남겨 두신 민족들’)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남쪽의 필리스티아 지역을 비롯해 북쪽으로는 페니키아-시돈 해안에서 비블로스까지와 레바논 땅에서 아모리(아무르)족의 경계 아페카까지, 그리고 헤르몬 산 아래 바알가드에서 하맛 어귀에 이르는 레바논 골짜기가 포함되었습니다. 이 중에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지역들도 있었습니다(민수 34,1-12와 비교해 보라).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이들 지역에 정착하지 못했으나, 이스라엘 왕국이 팽창 정책을 펴던 시기에 일부가 이스라엘의 통치 아래로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아모리족의 경계”란 레바논 땅에 있는 아모리(아무르)왕국의 경계선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이집트 신왕국 문헌들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정착 지역들은 주로 산악지대에 한정되어 있었지요. 필리스티아와 이미 이 땅에 뿌리를 내린 토착 세력의 적대감과 반항에 이스라엘은 대규모로 정착 활동을 시도했습니다. 이 활동에는 미개발 산림 지역을 점진적으로 개간하여 마을 세우고 과수원이나 포도원 등 장기적인 농경 사업을 수립하는 일 등이 포함되었지요. 산악지대에서 이런 활동이 있었던 흔적들은 트랜스요르단(현재 요르단), 유다 산악 지역, 에프라임 산악 지대, 갈릴레아 등지에서의 고고학 발굴 조사를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가나안 정착 양식에서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던 지역들에 처음으로 거주자들이 생겨났고, 그 수가 배로 불어나 새로운 중심 성읍들이 세워졌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속적인 정착은 가나안 땅의 지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은 것이지요. 그리고 이 운동은 후에 이스라엘 왕정이 세워지는데 갖추어야 할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내부적으로 통합되어 단일 왕국인 이스라엘 왕정 시대를 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속된 정착 양식의 결과로 이스라엘 왕국이 성립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4.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상속 재산과 경계

여호수아 13-19장은 각 지파의 상속 재산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그 경계와 각 지파별 성읍 목록 일부가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학자들 대부분은 이들 성읍 명단이 왕정 시대의 중앙 집권화된 행정 체제 아래서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지역과 구역으로 정리된 유다의 세부 행정 문서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지요. 경계에 대한 기록은 그중 일부에 불과하며, 그나마 몇몇 지파들의 경계만 세부적으로 기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기록들에는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경계점들이 지리적 순서에 따라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 경계가 어떠했는지는 본문에 사용된 서술 동사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지요. 특히 벤야민과 유다, 에프라임 지파 등 경계를 공유했던 이 지파들에 대한 설명 병행 구절들을 비교해 봄으로써, 원본이 여호수아서에 표현된 요약본보다 훨씬 더 상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근처를 지나는 경계와 같이 중요한 지역들은 세세한 부분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경계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구역들은 사실상(판관기 1장에 기록된 것처럼) 초기 정착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침투하지 못했던 지역들과 전반적으로 일치합니다.

이사카르, 단, 시메온 지파와 트랜스요르단(현재 요르단)의 지파들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지형 이름과 더불어 성읍 이름과 성읍 목록만 기록하였습니다. 유다 왕국의 경계와 유다 지파의 상속 재산은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남쪽 지역은 유다 왕국의 정치적 경계이면서 가나안 땅의 남부 경계와도 일치하지만, 북부 지역은 벤야민 지파의 경계와 맞닿아 있지요. 벳 세메스 너머 북서쪽으로 유다가 경계선을 확장하면 사실 필리스티아와 이스라엘 왕국의 경계가 됩니다. 또 아세르의 지파의 땅도 왕정 시대 이스라엘의 국경과 연관됩니다(1 사무 24,5-7과 비교해 보라).

벤야민, 므나쎄, 에프라임, 즈불론, 아세르, 그리고 납탈리 지파만이 경계한 지역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 지파들 모두는 가나안족의 거주지 정복에 실패한 지파들이기도 합니다(판관 1,21-36). 이들은 또한 흥미롭게도 열왕기서 상권 4장에 묘사된 솔로몬의 행정구역과 연관되는데, 여호수아 13-19장에 언급된 각 지파의 경계가 솔로몬 시대에도 그대로 행정구역의 경계로 정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행정구역은 성읍 목록으로 나와있는데, 이것은 판관기 1장에 기록된 정복하지 못한 성읍 이름들과 일치하며 여호수아서의 경계에 대한 목록에는 나와 있지 않은 부분입니다. 북쪽 지파들에게 가장 중요한 제사 중심지는 실로였을 것입니다. 판관 시대에는 북쪽 지파와 남쪽 지파 사이의 유대 관계는 다소 느슨했던 것 같습니다. 유다, 시메온 및 그 근처 칼렙, 크나즈, 카인, 여라흐므엘족 등은 드보라와 기드온 전투 같은 공동의 전쟁에도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유다 외의 남쪽 지역의 지파들은 헤브론을 그들의 예배 중심지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에스바알(이스 보셋) 사이에 갈등이 있기 전까지는 북쪽이든 남쪽이든 지파 간의 어떠한 공식적인 “연맹”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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