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단순히 우리 앞에 우연히 전개되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에서 해석되어 온 사료와 문헌들을 바탕으로 한 추론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추정함에 있어서 지나간 과거 사건의 정확한 시간과 연대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이전의 연대와 역사는 고고학적인 분류로 물질문화의 발달 순서와 과정에 따라 구분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고고학적 분류법과 함께 이스라엘 왕국 시대 이후로는 성경과 성경의 외적인 자료들, 특히 이집트의 역사와 메소포타미아 역사 문헌들을 교차 비교하고, 상대적인 연대기 분석을 통하여 연대를 거의 정확하게 도출해 낼 수 있게 되었답니다.
글의 순서
- 1. 들어가는 말
- 2. 이스라엘 역사를 고증해 주는 자료들
- 2. 이스라엘 고대 역사 연대 분류
(기원전 25-23세기 경의 고대 전쟁 이야기_이베렛의 그림)
1. 들어가는 말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는데요. 20 세기 중반에 히브리 성서학 분야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사해 사본이 발견되고, 그리짐 산에서 사마리아 성전 유적이 발굴되고, 그리고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발견된 고대 사본과 유물 등 새로운 사료들이 판독, 해석되고 출판되었기 때문이지요. 이 발견물들은 새롭고 다양한 연구 방법론을 통해 히브리 문학과 이스라엘 종교 역사를 고찰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또한 히브리 성서에 관한 새로운 전망을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토대로 기원전 1 천 여 연간의 시대의 (1000 BCE-기원전 1 세기까지) 고대 이스라엘과 초기 유다이즘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이스라엘 역사를 고증해 주는 자료들
이스라엘 역사를 뒷받침 해줄 수 있는 현존하는 사료들은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서나 비문으로 남긴 문서화 된 자료들과 유물, 유적 등과 같은 고고학 발견물을 통해 재구성을 해 볼 수 있지요. 이들의 예를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1) 문서화 된 자료들
먼저 문서화 된 자료들로는 원본이나 원서 (비명, 비문 등)가 있습니다. 그리고 2 차 사료로 히브리 성서와 그 외의 여러 히브리어 성서 버전들, 외경과 위경들, 그리고 사해 사본과 요세푸스 플레비우스의 저서들과 라삐 문헌들과 같은 유다인 역사 문헌들과 그리고 신약성서입니다. 그리고 성서나 성서를 보조하는 문헌들 (para-biblical literatures)이 수세기에 걸쳐 계속 발견되고 연구되면서, 이들을 분석 비평 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북서쪽 지역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 일부)
이 외에 비문이나 돌, 진흙, 도기 파편이나 파피루스, 그리고 가죽에 새겨진 회당의 고대 언어들과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에서 발견된 고문서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비문, 낙서나 법, 경제, 또는 행정 문서들, 그리고 바빌론이나 엘레판틴 섬에서 발견된 유다인 고문서들과 사해 사본들로써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대 근동-소아시아, 우가릿,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이집트-에서 발견된 문헌들은 고대 세계의 역사를 다양하게 그려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까지의 역사도 알려주고 있지요.
2) 고고학 발견물들
비록 문서화 된 것은 아니지만 고고학 발견물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역사를 고증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고대 문자가 새겨진 도자기나 동전들은 절대 연대를 정확하게 측정하도록 도와줍니다. 고고학 발견물들과 더불어 지리와 실물 화폐 연구는 어느 특정 지역이나 장소에 인류가 거주한 역사뿐만 아니라 그들의 다양한 삶의 정황들 (그 지역이 화재로 멸망했는지 아니면 지진으로 멸망했는지)을 판독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건축 양식의 변화와 농작물 경작 추이, 또는 축산과 무역, 그리고 공업이나 그들의 다른 생활 양식을 판독하는데 수월하게 해 줍니다. 더 나아가 고대 근동의 초상화와 옥새들, 동전들과 다른 통화 수단들도 훌륭한 증거물입니다.
(제1차 유다인 항쟁 당시의 동전들, [기원후 66-73])
3) 유다인의 필사 문화 유산인 성경을 통해 본 이스라엘 역사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성경 전통을 그저 단순하게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이 전통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필기 문화가 고대 문헌들에 명백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성경에도 특정한 문학 양식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지요. 성경 전통이 특별한 필사 관습과 지식, 그리고 다른 나머지 문학 장르와 결합하여 또 다른 새로운 길을 제시했고, 공통된 필사 전통을 바탕으로 고대 근동 세계에서 독립된 장르를 만들어 냈습니다. 성경의 장르와 내용은 필사 문화의 일반적인 양식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왜냐하면 필사자 (서기관)들은 성서 학자들이 되었고, 성경 전통은 필사 문화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전통이 없었다면 이스라엘과 유다는 아마도 다른 주변 나라들의 운명과 같았을 것입니다. 두 왕국이 멸망하고, 후에 주변 강대국들의 속주로 전락했을 때, 이 기록에 부합하는 고고학 발견물이 증명해 주기 전에 이미 그들은 이전 필사 문화와 함께 멸망했거나 잊혀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은 성경 전통의 기억 속에 살아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 오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필사 문화가 성경 전통으로 변화된 것은, 문장의 한 단락이나 구절이 종교나 역사 문학과 결합하여, 히브리 성서 속의 유다인 전통으로 굳게 바탕이 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성경 속 사건을 토대로 한 이스라엘 역사
성경 속의 사건을 토대로 한 이스라엘 역사는 바빌론 포로기 이전의 “고대 이스라엘 왕국” 시대와 연속으로 이어지는 포로기 이후의 “유다이즘”으로 두 개의 시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역사의 시작은 세계 창조 (창세 1)와 함께 아브라함을 부르심 (창세 12), 야곱 자손들의 출생과 야곱이 이스라엘로 불림 (창세 29-32와 35),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 (탈출 1), 열 두 지파들의 가나안 땅 정착 (여호수아, 판관기),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국 (사무엘과 열왕기서), 성경 역사 기록이 시작되었던 바빌론 포로기 (창세기-열왕기서, 역대기서, 느헤미야-에즈라) 느헤미야-에즈라)와 페르시아 시대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헬레니즘 시대를 배경으로 기록된 마카베오와 같은 제 2 경전이 있지요.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한 제2차 예루살렘 성전 멸망을 이스라엘 역사가 끝나는 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위의 고대 사료와 문서에 기록된 역사와 전통, 그리고 성경의 사건을 토대로 초기부터 로마에 의해 제 2차 성전이 멸망하는 기원 후 70년까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연대기 순으로 기술하고자 합니다.
2. 이스라엘 고대 역사 연대 분류
역사가들과 고고학자들은 고대 세계를 연대 (era)로 나눕니다. 각 시대의 이름은 야금학(야금학(물질문화의 발달 순서)을 바탕으로 구분되지요. 그러나 ‘청동기 시대’라고 해서 반드시 청동기 즉 구리만을 사용했다는 의미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대 근동에서 ‘철’은 ‘철기 시대’ 이전에도 사용되었지만, 야금학의 이름들이 시대를 ,구분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고고학에 의한 시대 분류법을 전적으로 신뢰를 하기는 어렵지만,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고 있지요. 왜냐하면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는 연대기 구분과 깊은 상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시대의 문화 발달, 풍습과 삶에 대한 윤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 연대가 시작되거나 종료되는 시기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어 의견의 불일치가 있어 왔고, 대략 50-200년 정도의 연도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고고학에 따른 연대 분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고학 연대 측정에 의하면 최초의 인류가 출현한 시기는 약 1백 4십만년 전 나일강 상류의 수단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후의 변화에 따라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요르단 계곡을 따라 발견된 몇 개의 유적들은 가장 오래된 인류 문화의 자취들이 있었음을 증명해 주지요. 그 이후에 기원전 약 1만년 전부터 중석기 문화 (Epi-Paleolithic)와 특히 특히 나투피아 인들의 문화 (The Natufian Culture)라고 불리는 독특한 문화가 예리코 부근과 갈멜산 지역의 몇몇 동굴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일부의 학자들은 이 시기의 초기에 대홍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1) 신석기 시대 (The Neolithic Period: 기원전 8500-4300)
씨앗의 발견으로 지중해 연안의 지역에 농경생활이 시작되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한 시대입니다. 신석기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기원전 6천 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한 토기의 발명과 사용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토기 발명 이전 시대 ((8500-6000, Pre-Pottery Neolithic Age)와 토기 발명 이후 시대(Pottery Neolithic Age)로 나누기도 합니다. 공동체 생활의 흔적을 보여주는 공공 건축물을 남긴 이스라엘의 예리코는 신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역입니다. 발굴된 무덤 양식은 인간이 내세에 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답니다. 그리고 부싯돌과 짐승의 뼈를 이용한 도구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2) 금석 병용기 시대 (The Chalcolithic Period: 기원전 4300-3300)
‘구리 (chalcos: copper)’와 ‘돌 (lithos: stone)’의 합성어인 chalcolithic (금석 병용) 시대는 구리를 제련하고 도구로 쓰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돌, 차돌로 된 부싯돌도 함께 사용하던 시기로 특징지어집니다. 도시 유적과 쐐기 문자를 통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문명이 출현했음을 알 수 있지만, 동지중해 연안 지역(Levant)에서는 아직 작은 촌락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이 시기를 특징짓는 문화는 요르단 계곡의 동남쪽에 위치한 ‘가술 사람들의 문화’ (the Ghassulian Culture) 유적입니다.
i) 초기 청동기 시대 (The Early Bronze Age: 기원전 3300-2300)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수메르 제국을 비롯한 우르, 아카드, 에렉, 그리고 에블라 등의 큰 도시 왕국들은 수레바퀴를 이용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동지중해 연안 즉 가나안 땅에 도시 문화가 출현한 것입니다. 이 지역의 여러 성읍 공동체들은 이집트, 에게,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무역 교류를 하면서 국제 교역로(International Trade Route)로 이용됩니다. 가나안의 여러 성읍은 거대 문화권 사이에서 이들의 영향을 받게 되지요. 시리아의 알렙포 남서쪽에 위치한 유명한 교역 도시였던 에블라에서 발견된 “에블라 문서들 (The Ebla Archives:기원전 2300년경)”은 이 시대의 가나안에 위치한 도시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요 도시들은 남부 지역의 아라드, 라키쉬, 중부 지역의 므기또, 벧샨, 게제르, 예루살렘, 예리코, 그리고 북부 지역에 위치한 하초르, 단 등이었습니다. 이 문서를 통해 아브라함에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기 이전의 시대 그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특히 이집트는 피라밋 왕조라 불리는 고왕국 시대(The Old Kingdom)로써 상형 문자를 사용하였고, 피라미드가 건설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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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청동기와 중기 청동기 시대의 변천기 (The Early Bronze Age/Middle Bronze Age Transition: 기원전 2300-2000)
기원전 2300년 경에 가나안 땅의 도시 문명은 멸망하고, 이곳 민족의 생활환경은 다시 촌락과 유목의 삶으로 바뀝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정치와 지리를 기반으로 한 ‘아카드의 사르곤(Sargon of Akkad)’과 같은 민족의 출현과 함께 거대한 ‘제국 (Empire)’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대홍수(A Great Flood)’ 사건을 기록한 ‘수메르 왕 명부 (The Sumrian King List)’와 같은 메소포타미안 기록 문서들과 신화가 처음으로 기록됩니다.
ii) 중기 청동기 시대 (기원전 2000-1550)
이 시기의 동지중해 연안(Levant)에 거대 도시 국가를 특색으로 한 도시 문화가 다시 출현하고, 이스라엘은 대략 성경의 족장 시대에 해당합니다. 남쪽으로 이집트는 중왕조 시대(Middle Kingdom Period)가 펼쳐지고, 이때에 잠시 셈족이었던 힉소스 (Hyksos:이방 통치자들) 민족이 점령, 통치합니다. 이때 말과 전차와 병거들이 소개되었지요. 그러나 힉소스 인들은 아하 모세스 1세 (Ahmoses I, 1570-1546 BCE: 18 왕조 창설자)에 의해 이집트의 삼각주에서 가자의 동북쪽 사루헨(Sharuhen)이란 그들의 본거지로 추방됩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서부 샘계의 아모리 민족에 의해 바빌론 제국이 설립되고, 시리아 북쪽에서 아모리 민족이 남방으로 대거 이주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히브리 민족이 출현하고,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에서 서쪽으로 이주해 하란 땅에 머뭅니다. 그리고 다시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옵니다(창세 12 장). 유목민이었던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원주민과 갈등을 빗으며 중앙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목초지를 찾아 이동을 하지만, 그의 후손 이사악, 야곱도 가나안 땅에서 살았습니다. 창세기에 12-46을 통해 그때 당시의 가나안 땅의 도시 문화를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초안 (Tanis)를 중심으로 힉소스가 통치하던 시대에 야곱과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집트로 이주합니다. 사카라(Sakkara)에서 발견된 저주 문서 (Execration Texts)는 기원전 18세기의 문서로써 예루살렘, 아쉬켈론, 그리고 르홉과 같은 도시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성경 밖의 문서로 도시들과 통치자들의 이름도 언급하고 있지요. 이는 도시 국가 조직이 기원전 18세기 경에 이미 구체화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이 시기 (노아 시대)에 대홍수가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대홍수 이후에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들과 내 계약을 세운다. …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창세 9, 8-13).” 유다 라삐 문헌 미쉬나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7 개의 계명을 주셨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제 1계명, 우상을 섬기지 말라. 제2계명, 살인하지 말라. 제3계명, 근친상간이나 간음을 하지 말라. 제4계명, 생명이 있는 상태의 가축의 고기를 먹지 말라. 제5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제6계명,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저주하지 말라). 제7계명, 공정한 재판을 위해 법질서를 바르게 하라. (미쉬나 토라, 왕들의 법 8:10 (Mishnah Torah, Law of Kings 8:10).”
a) 창세기 12-23장 이야기
아브라람이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다가, 그후 가뭄과 기근으로 이집트로 잠시 이동합니다. 이스마엘이 출생하고, 사라가 이사악을 낳습니다. 사라가 죽고 아브라함이 막펠라 동굴을 사서 매장지로 삼습니다. 유다와 사마리아 산악 지대에서 목축업을 했던 유적이 발견되지만, 가나안의 해안 평야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23장까지의 사건들이 이 시기에 일어납니다.
b) 이사악과 야곱의 활동 시기 (기원전 17세기)
이사악은 가나안의 남방 지역에 거주할 때 레베카와 혼인합니다. 그에게 쌍둥이가 태어나는 데, 첫 번째 아기는 몸이 붉은 까닭에 에사우 (“붉다”)라고 불리고, 그의 동생은 야곱 (“뒤꿈치를 잡은 자”)이라 불렸습니다. 이 두 형제가 자란 후에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 형 에사우의 보복이 두려워 하란에 거주하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합니다. 하란에서 20 여년간 머물다가 그의 네 명의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가축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야뽁강에서 하느님의 천사와 씨름을 하고 이긴 다음 “이스라엘 (하느님과 겨루어 이기다)”이란 이름을 얻습니다. 에사우와 야곱은 만나서 서로 화해를 하고 만남의 회포를 풉니다. 야곱이 스켐에 머물 때, 그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자 분노한 야곱의 아들들이 하모르의 아들들을 몰살하자 두려움으로 식솔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합니다. 베텔을 통해 중앙 산악길을 지나오고, 베들레헴 가까이에서 만삭이었던 라헬은 둘째 벤야민을 낳고 숨을 거두고 맙니다. 마침내 헤브론에 머물던 그의 아버지 이사악을 만나고, 이사악은 숨을 거둡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두 아들은 서로 다른 곳으로 가서 정착합니다. 에사우는 세이르 산악 지방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에돔(에사우라는 의미)이라 불렀습니다. 야곱은 그의 아버지의 땅인 가나안에 거주합니다. 창세기 25장-37장 1절까지의 배경이 이 시기에 일어납니다.
iii) 후기 청동기 시대 (기원전 1550-1200)
힉소스를 축출하고 신왕조 (New Kingdom)를 창설한 이집트는 가나안 땅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18 왕조의 주역인 아하 모세스를 필두로, 투트 모세스 3세 (Thutmoses III, 1504-1450 BCE: 므기또 전투의 주인공), 그리고 아멘 호텝 2세 (Amenhotep II, 1450-1419 BCE) 등은 강력한 북한 정벌을 시도했으며, 특히 북방의 제국들 (미타니, 아시리아, 그리고 힛타이트)과 패권 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기원전 13세기에 세티 1세 (Seti I, 1129-1279 BCE: ‘벧샨 석비’로 유명)는 가나안 정벌을 시작합니다. 라암세스 2세 (Ramses II, 1279-1212 BCE)는 힛타이트 제국과의 충동 이후 평화 조약을 맺고, 가나안 지역을 관리하에 둡니다. 그를 계승한 메르넵타 (Merneptah)도 가나안을 정복해 황폐화시킵니다. 그의 전승 기념비인 ‘이스라엘 석비 (Israel Stele)’라고 부르는 이 석비에 성경 외에 최초로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등장합니다. 기원전 14세기에 기록된 ‘아마르나 문서’에는 이집트가 다스렸던 가나안의 도시 성읍 이름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문서를 통해 가자, 야포, 벳산, 므기또, 게제르, 예루살렘, 라키스, 가드, 그리고 아쉬켈론 등의 도시 국가들은 이집트의 봉신으로써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가나안 땅은 이집트의 압제 아래서 암흑기를 보냈음이 틀림없지요. 이 시기에 필리스티아인들이 가나안 땅의 지중해 해안 평야 지역에 자리를 잡습니다. ‘해양 민족 (Sea Peoples)’인 필리스티아 인들의 출현과 함께 후기 청동기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가나안 땅의 내륙에 위치해 있던 도시 성읍들은 하피루 (Hapir: 유랑자)나 샤슈(Shasu)와 같은 히브리 민족의 전신이었던 유목민들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히브리 민족은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과 정복 전쟁을 펼치며 여러 지역들을 서서히 점령해 나갑니다. 이 시대에 파라오 메르넵타가 13 세기 후기에 정복했다는 ‘이스라엘’이란 용어가 문서에 처음으로 등장하지요. 히브리 민족은 왕이 없이 여러 지파에서 나온 판관들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a) 야곱의 이집트 이주 (기원전 16 세기)
이집트에서의 폭동 이후 힉소스 족은 가나안 땅 남부 지역을 침입합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팔려가 미디안 상인들 손에 결국은 이집트로 끌려갑니다. 포티파르의 집에서 재산 관리인으로 일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끌려가 복역을 하다가 파라오의 꿈을 해몽하게 되지요. 그 일로 요셉은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파라오 다음의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 가뭄과 큰 기근이 들어 야곱의 아들들과 식솔은 이집트에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을 첫눈에 알아본 요셉은 아버지 요셉과 그의 형제들과 식솔을 이집트로 내려오게 하여 그들을 보호해 줍니다. 야곱은 이집트에서 죽어 그의 유언대로 헤브론의 막펠라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묻힙니다(창세 37-49장). 요셉도 그의 수를 다하고 죽어, 그의 유해는 결국 이스라엘 자손들이 탈출할 때 그들의 손에 들려와 가나안 땅 스켐에 묻힙니다(창세 50장;여호 24:32).
b) 이집트의 가나안 원정과 정복 (기원전 15-14세기)
이집트는 파라오 투스 모세스 3세의 지휘 아래 가나안 땅을 침공합니다. 이집트 카르낙 신전 비문은 야포, 아펙, 므기또, 그리고 하초르를 점령했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이 시기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여러 나라들 간의 정복 전쟁과 세력 다툼으로 혼란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 그리고 향백나무 등을 해양 교역을 하던 페니키아는 동지중해 주변 나라들을 식민으로 만들어 조공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알파벳을 사용했고, 그리스어로 “푀니케스 (phoinikes)”, 또는 소라에서 자주색 물감을 추출해서 “붉은 사람들 (red-people)”이라 불렸습니다. 그들은 카르멜 해안 지역의 도르 (Dor) 항구에 뛰어난 해양 문화유산을 남겼습니다(기원전 15세기). 이집트의 나일강 중부 지역에 위치한 아크나톤의 성지 텔 아마르나(Tell el-Amarna)에서 발견된 ‘엘 아마르나 서신’이라고 불리는 쐐기 문자로 새겨진 진흙 서판들은 이집트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의 성읍 임금들이 보내 서신들입니다. 이 서신들을 통해 이집트가 정복한 여러 성읍들이 바쳐야 할 조공이 늘어남에 따르는 위험성을 알리는 사회, 정치적 상황과 관계를 말해 주고 있지요. 이 서신들에 의하면 아코, 시므온, 악삽, 므기또, 스켐, 아펙, 게제르, 가드, 예루살렘, 그리고 라키스 등 가나안의 성읍 임금들은 파라오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세티 1세 (Seti 1, 기원전 1318-1304)는 므기또, 벳 산, 아코, 하초르, 그리고 케데스 등 가나안의 성읍들과 티로와 시돈에 자리하고 있었던 히타이트 족을 몰아냅니다(기원전 1310경) (기원전 14세기).
c)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 (기원전 1300-1022)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 (Ramses II, 기원전 1304-1227)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의 상태로 전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나일강 근처에 아부 심벨 (Temple of Abu Simbel) 신전을 건축하는데 동원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 … 그리하여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탈출 1,8.13).” 힛타이트 족은 북쪽 레바논의 언덕 지대인 케데스 전투에서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의 군대를 무찌릅니다.
d) 모세의 등장과 이집트 탈출 (기원전 1240년)
요셉을 알지 못하는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해도 더욱 번성하고 퍼져 나가자 이를 두려워한 파라오는 산파를 통해 히브리 어린 사내아이들을 죽이도록 명령을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레위 집안의 남자가 레위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지요. 이 부부는 아들이 태어나자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두었다가 더 이상 아이를 숨길 수가 없어 왕골 상자에 넣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습니다. 마침 목욕을 하러 나온 파라오의 딸에게 발견되어 아이는 목숨을 구하고 공주의 손에 자라났습니다. 모세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란 이름으로 불린 이 아이는 친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는 자신이 히브리인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집트인을 죽인 모세는 자신의 일이 탄로 날까 두려워 사막으로 피신을 하였지요. 사막에서 40여 년간의 시간을 보내고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세는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갔습니다. 주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다음에서야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도록 허락했지요.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40 여년 간 사막과 광야를 방황하면서 새로 약속받은 땅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집트 탈출 사건은 기원전 약 1240년 경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탈출 1-40; 민수기; 신명기 참조).
e) 가나안 땅 입성과 정복
모세는 사십 년째 되던 해 열한째 달에 요르단 건너편 아라바에 있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님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그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리고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느보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는 못하고 죽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모압 땅 벳 프오르 맞은 쪽 골짜기에 묻히게 하셨지요(기원전 약 1210년 경). (신명기 34장) 여호수아와 칼렙은 이집트 탈출 2세대와 함께 요르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 길갈에 진을 칩니다. 길갈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키고, 할례를 베풀고, 그리고 그 땅의 첫 소산물인 누룩 없는 빵과 볶은 곡식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멈추었습니다(여호 3-5장). 이스라엘 백성이 맨 처음 점령한 성읍은 예리코 였지요. 그들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엿새 동안 성읍을 돌다가 일곱째 날에 숫양 뿔 나팔을 불어 예리코 성을 무너뜨리고 성을 점령합니다(여호 6장). 그 후 베텔과 아이 성을 점령하고, 이어서 가나안의 남과 북에 위치한 여러 성읍들을 정복하고, 요르단 건너 동편에서도 정복 전쟁을 펼치고 영역을 확장해 갑니다(여호 7-12장).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 12 지파는 아직 정복하지 못한 지역을 포함해서 땅을 분할하고 지파 별로 정복해 나가도록 권장합니다(여호 24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