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에서 철기 시대는 1, 2기로 나뉩니다. 제1철기 시대에 이스라엘은 판관 시대와 사울이 통치했습니다. 제 2철기 시대에는 다윗 임금과 솔로몬의 통치 이후 남북으로 분열됩니다. 후에 북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에게 패망하고, 남유다 왕국은 바빌론 제국에 멸망하고 솔로몬 성전은 무너지는데요. 이 시기의 역사를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 1. 제 1철기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가나안 땅 정착과 판관 시대: 기원전 1200-1000)
- 2. 제 2철기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이스라엘 왕국 시대: 기원전 1000-930)
- 3. 제 2철기 시대의 분열 왕국 이스라엘 역사
1. 제 1철기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가나안 땅 정착과 판관 시대: 기원전 1200-1000)
철기 문명이 급속히 다른 지역 민족들에게 전파되자 이 문명의 주역이었던 힛타이트 민족은 그 힘과 영향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러 민족들이 패권 다툼을 벌이고, 이집트도 신왕국 말기에 힘이 점차 약해지면서 제3 중간기에 들어 갑니다. 동지중해의 강대국들이 쇠락하자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은 독립 구도가 형성되며, 각 민족 별로 세력을 새로 규합하는 부족 국가들로 탄생,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면서 발전합니다.
북쪽 레바논에 위치한 페니키아는 이 시기에 일찌감치 국제 해양 무역의 선두주자가 되어 지중해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들과 무역을 하고 심지어 경제 식민지로 삼기도 했습니다.
해양 민족들인 필리스티아는 해변에 정착하고, 요르단 서편에 자리잡은 새로운 주인 이스라엘, 요르단 동편에 자리한 에돔, 모압, 암몬, 그리고 다마스커스를 중심으로 시리아 북쪽에 아람이 자리를 잡습니다. 이 시대에 이스라엘은 왕정을 이루지 못하고 아직도 판관들이 통치를 했지요. 그러다가 말엽인 기원전 약 1050년경에 사울이 왕으로 등극하고, 40년간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땅과 백성 호칭 변천 과정)
1) 가나안 정착기: 판관 시대 (기원전 12 세기: 제1철기 시대)
이 시기는 이집트의 파라오 권력이 쇠퇴하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힛타이트 인들이 종말을 맞는 때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정복전을 벌여 각 지파 별로 영역을 넓혀갑니다.
2) 이스라엘 판관 시대 (기원전 1200-1020)
“해양 민족 (Sea People)”은 에게해 연안 지역에서 가나안 지역으로 침입해 지중해안지역에 정착해 다섯 개의 도시들(아스돗, 아스클론, 에크론, 가드, 그리고 가자: 1 사무엘 5)을 세웠던 온 미노스인들(Minoans)과 미케네인들(Mycenaeans)과 관련이 있습니다. 후에 필리스티아인들로 불렸던 이들은 유다, 사마리아 지역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없었던 철 (iron)을 소유하고 무역을 했지요. 그러나 언어나 문학 또는 비문조차도 남기지 않았던 필리스티아인들은 바빌론이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집트를 정복할 때 함께 멸망을 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맙니다(기원전 6세기).
티글랏 필에세르 1세의 (기원전 115-1077) 지휘 아래 통일 왕국을 이룬 아시리아는 막강한 군대를 키웁니다(기원전 1150).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계속 정복해 나갑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아직 왕이 없었을 때에 판관들을 중심으로 가나안의 성읍들을 정복하고 필리스티아인들과 영토 확장을 위한 전투를 계속하지요.
판관 에훗은 모압의 에글론을 굴복시키고 (판관 3장), 드보라와 바락은 가나안의 우두머리 왕국의 임금 야빈의 군대를 섬멸합니다 (판관 4,5 장).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던 미디안족과 싸워 승리하고 (판관 6-8장), 입타는 암몬 족의 횡포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냅니다(판관 11-12,7).
삼손은 20년 간 판관으로 지내며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다가, 머리를 깎이고 잡혀 죽지만 그가 죽으면서 사는 동안 죽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필리스티아인들을 죽였습니다(판관 13-16장).
단 지파는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영역 싸움에서 결국 밀려나 자신들이 거주할 새 지역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북쪽의 풍요로운 성읍인 ‘라이스’를 점령하고 자신들의 조상 이름을 따서 ‘단’이라고 지었지요. ‘단’은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자리하고 있어 북쪽의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판관 20장 1절에서 이스라엘 땅의 실제적인 북과 남의 경계를 ‘단에서 브에르 세바’로 그려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 판관 시대에 이스라엘 영토가 거의 확정된 것으로 보입니다(기원전 1120년경).
사무엘 시대에 이스라엘은 야포 항구와 근접해 있는 해안 평야 지대를 장악하기 위해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러 나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대패를 하여 많은 군사들이 전사를 하고, 하느님의 궤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이 충격으로 엘리 사제는 죽고, 사무엘이 그의 뒤를 이어 판관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1 사무 4-7장, 기원전 1060 년 경).
사무엘의 나이가 많아지자 자기 아들들을 이스라엘 판관으로 지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들은 (요엘과 아비야) 재물에 눈이 어두워 뇌물을 받고 판결을 그르치게 내리곤 했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날로 높아가고, 원로들은 사무엘을 찾아가 다른 민족들처럼 임금을 세워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결국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웁니다(1 사무 8-11, 기원전 1022년 경). 그리하여 사무엘의 40년 통치가 시작됩니다. 사울은 암몬족과 필리스티아인들, 그리고 아말렉 족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결국 그는 왕위에서 밀려나게 됩니다(1 사무 15).
2. 제 2철기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이스라엘 왕국 시대: 기원전 1000-930)
이 시대는 다윗이 왕으로 등극한 후 여부스 성읍을 점령해 수도 ‘다윗성’을 건설하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시작되고, 솔로몬이 제1성전을 건축합니다. 르하브암 통치 시대에 왕조가 남, 북 왕국으로 갈라지고,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고, 기원전 586년 바빌론에 의해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솔로몬 성전 멸망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남, 북쪽의 강대 제국들이 쇠약해진 틈을 타 이스라엘은 다윗의 통치 아래 북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 부근까지, 그리고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그 영역을 확장합니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은 나라를 12 행정 구획으로 나누고 행정관을 임명하여 공납, 조세와 치안을 관장하게 하였습니다. 게제르, 므기또, 그리고 하초르 등 3개의 병거성과 여러 개의 국고성과 요새를 건설하고 국방을 견고히 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여 민족의 중앙 성소로 삼고, 해마다 3 차례 중요한 축제 (과월절, 추수절, 그리고 초막절)들에 참여 하도록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해안 고속 도로와 왕의 대로의 무역로를 장악하고 엄청난 무역 관세를 거두어 들였으며, 여러 나라 공주들과의 정략 결혼을 통해 외교적으로 안정을 모색합니다. 그리고 엘랏 항구를 통해 국제 무역을 재개하고, 주변국들(에돔, 모압, 암몬, 필리스티아, 그리고 아람)로부터 조공을 거두어 왕국은 부강 해지고 풍요로워졌지요. 그의 통치와 이름은 널리 퍼지고 나라는 태평의 시대를 누립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예루살렘 모습)
1) 다윗의 통치 (기원전 1010-970)
베들레헴 출신 이사이의 여덟 번째 아들 목동이었던 다윗은 사무엘의 기름 부음을 받은 후, 하느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십니다(1사무 16장).
그 후 사울 임금이 악령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 다윗은 비파를 타서 그를 회복시켜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그 즈음에 필리스티아인들은 군대를 소집하여 이스라엘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유다의 소코와 아제카 사이에 있는 에페스 담밈에 진을 치고, 사울도 이스라엘 군대를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게 했지요. 필리스티아 군대는 골리앗을 앞세워 이스라엘 군을 위협하였습니다. 그의 키는 여섯 암마(1암마: 약 45cm)하고도 한 뼘(1뼘: 22.8cm)이나 더 컸고 (총 292.8cm), 청동으로 만든 갑옷과 쇠 창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위협했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직 므릿매 끈과 돌맹이 하나로 그를 쓰러뜨렸지요. 그 이후로 다윗은 날로 백성들의 인기를 얻어 갔으나, 시기심에 사로잡힌 사울은 그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필리스티아 지역과 세펠 (지중해 평야 지대로 내려가는 언덕 지대), 그리고 유다 산악과 광야 지대로 피신합니다(1사무 16-27장, 기원전 약 1010년경).
그 무렵에 필리스티아인들은 다시 이스라엘을 치려고 부대를 소집해 이즈르엘 평야까지 진군해 옵니다. 사울은 두려운 마음을 갖고, 그의 세 아들을 비롯해 군들을 모아 길보아 산에 진을 치고 그들과 전쟁에 돌입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궁수에게 큰 부상을 입고, 결국 자결을 하고 그의 세 아들도 전사를 합니다(1사무 28; 31장). 이로써 사울의 40년 통치는 전쟁에서의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아말렉족과 전쟁을 벌여 승리를 합니다(1사무 30장).
그 후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성읍들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지요. 그가 칠 년 반 동안 유다의 임금으로 있었을 때,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그를 찾아와 이스라엘 임금이 되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리하여 서른에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다윗은 북쪽의 열 개의 지파와 남쪽의 유다 땅에 자리한 두 지파를 연합하고 통일을 합니다(기원전 1006년 경).
다윗은 여부스 족이 살던 성(시온 산성)을 점령하고, 이름을 ‘다윗성’이라고 하였습니다(기원전 1003년 경).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다윗은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워 승리하고, 그들의 진영에 있었던 ‘하느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옵니다. 그는 필리스티아인, 모압인, 아람인, 암몬인, 그리고 에돔인들과 싸워 이겨서 그들의 성읍을 점령합니다(2 사무 8; 12장). 다윗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통치하면서 지중해안 지역에 진출하고, 북쪽으로는 다마스쿠스,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그리고 서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점령, 통치를 합니다. 이 때 이스라엘의 실제 경계는 북쪽의 단으로부터 남쪽으로는 브에르 세바였지요( 2 사무 24, 1. 2).
다윗은 힛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통정을 하고, 심지어는 암몬 군대와의 전투에서 죽임을 당하도록 합니다. 이 일이 주님께 큰 죄가 되어 그 이후로 다윗 집안에 재앙이 내릴 것이라고 나탄은 예언을 합니다(2 사무 11; 12 장). 다윗은 그의 통치 말년 경에 압살롬의 반란으로 큰 위기를 맞고, 결국에는 압살롬을 잃는 슬픔을 겪습니다. 기력이 많이 쇠약해진 다윗은 솔로몬을 왕으로 지명하고 축복하고 잠들어 다윗 성에 묻힙니다. 그는 헤브론에서 일곱 해, 예루살렘에서 서른 해를 다스렸습니다(1 열왕 2장).
2) 솔로몬의 통치 (기원전 970-930)
다윗과 밧 세바의 사이에서 난 아들 솔로몬은 기혼 샘에서 차독 사제와 나탄 예언자에게 임금으로 추대되어 기혼 샘에서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왕국을 통일하고 영토를 확장해 놓은 토대 위에 체제를 정비하고 안정을 누립니다. 그는 먼저 정적들을 다 축출한 후 온 이스라엘에 열 두 지방관을 임명하여 치안과 조세, 그리고 양식을 대도록 하였습니다. 중요한 교통과 군사, 무역로인 게제르와 므기또, 그리고 하초르 등에 병거 요새를 세우고, 여러 개의 요새들과 국고성도 건축하여 나라의 국방을 튼튼하게 하였지요. 그는 통치 전성기에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전은 민족 중앙 성소로 자리매김을 합니다. 전 지역에 흩어진 백성들이 일 년에 세 차례 (과월절, 주간절, 그리고 초막절: 이집트 탈출과 농경, 목축 문화와 연관된 축제들) 예루살렘에 순례를 하여 축제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종교의 중심지가 됩니다. 그 이후 성전과 가까운 “다윗성”에 크고 화려한 궁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벽도 건설합니다.
솔로몬은 북동쪽으로 유프라테스와 남쪽으로는 이집트 국경과 전 필리스티아 지역을 포함해 다스렸습니다(1 열왕 5장). 그리고 활발한 외교 정책으로 주변의 에돔, 모압, 암몬, 필리스티아, 그리고 아람 등으로부터 조공을 거두어 들였지요. 해안 국제 고속 도로와 요르단 동편의 왕의 대로의 무역 주도권을 장악하고 엄청난 통행세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심지어는 남쪽 무역의 관문인 홍해의 엘랏 항구를 통해 국제 무역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가 통치하는 기간에 나라는 부와 풍요를 누렸고, 국내외에 그의 이름을 떨치어 평화로운 시대를 맞습니다. 태평 성대한 시기임을 증명하듯이 더불어 이스라엘 전체 주민도 증가하여 약 오십 만 명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 기원전 9세기)
솔로몬의 지혜와 분별력은 동방의 모든 이와 이집트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 났습니다. 주변 모든 민족들 가운데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요. 그는 잠언을 삼 천개나 지었고, 그의 노래는 천 다섯 편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임금들이 그의 지혜에 관해 소문을 듣고 들으러 오거나 사람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1 열왕 5, 9-14). 그들 중에 스바 여왕은 그의 지혜를 시험해 보려고 찾아 오기도 했답니다(1 열왕 10, 1-13).
(제 1철기 시대와 통일 왕국 시대의 이스라엘 연대기)
연대 | 이스라엘 왕국 역사적 사건 |
기원전 12세기 | 가나안 정착기 (판관들 이야기) |
기원전 1200-1020 | 판관이 다스리던 시대 |
기원전 1010-970 | 다윗의 통치 |
기원전 970-930 | 솔로몬의 통치 |
기원전 957 | 솔로몬의 성전 건축 |
기원전 930 |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국 분열 |
기원전 926 | 이집트 임금 파라오 시삭의 침공 |
3)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국 (기원전 930-587)
솔로몬 이후 르하브암의 시대에 다윗 왕조는 무너져 두 왕국으로 분리됩니다. 남왕국 유다는 다윗 왕조의 전통을 이어받고, 북 왕국 이스라엘은 10여개 지파들의 연합으로 세워졌습니다. 예로보암을 중심으로 세워진 북 왕국 이스라엘은 오므리 왕조 이후 더욱 부강 해지고 특히 군사력이 막강해졌습니다. 예를 들면, 아합이 아람 등 12개국과 연합하여 아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해 다른 동맹국에 비해 비교적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투입 시켰습니다(병거 2,000 승과 보병 1 만명을 ‘카르카르 전투 (the Battle of Qarqar)’에 파병: 살만 에세르 3세 비문에 실림)하여 다른 동맹국들보다 비교적 막강한 군사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기원전 853년 경). 그러나 페니키아 출신 아내 이제벨의 영향으로 바알 숭배 및 이방 신들을 섬기면서 국력이 약해져 갔지요. 예후의 반란 이후 새 왕조가 세워지고, 특히 예로보암 2 세의 통치 아래 다시 국운을 회복하지만 신흥 아시리아 제국이 북쪽을 정복하고 서서히 남쪽으로 향한 정벌을 시작합니다. 결국 기원전 722 년에 북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만다.
남 유다 왕국은 르하브암이 수도 예루살렘을 방어하기 위해 주변의 동, 남, 서쪽 지역 성읍들을 재건축하고 축성하였고, 아사와 여호사팟 때에 잠시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지만, 주변 나라들의 끊임없는 침공과 북 이스라엘과의 끊임없는 국경 분쟁, 그리고 동편의 암몬, 모암, 에돔과의 분쟁으로 국력을 소모합니다. 더구나 솔로몬 이후 이방 종교에 영향을 받으면서 국력이 더욱 소모됩니다. 아시리아로부터 강한 위협을 받기는 했으나 히즈키야의 종교 개혁과 재정비로 그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어서 므나쎄가 국력을 키우고, 요시아의 종교 개혁이 성공하면서 잠시 안정을 찾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를 정복한 바빌론 제국이 등장하고, 특히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하여 유다도 멸망하고, 대부분의 지도층들은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유배를 당합니다(기원전 586년).
3. 제 2철기 시대의 분열 왕국 이스라엘 역사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를 다스린 임금들의 통치 연도)
1) 북 이스라엘 왕국 (기원전 930-722)
솔로몬 왕 죽음 이후 르하브암의 통치 방식에 불만을 품은 북쪽의 지파들은 예로보암 1세를 중심으로 그들만의 왕국을 세웁니다. 수도를 스켐과 푸느엘, 그리고 티르챠로 이전을 하면서 왕국의 번영과 안정을 꾀하였지요. 그러나 예로보암 1 세 이후의 나답, 바아사와 엘라, 그리고 지므리는 모반을 통해 왕정을 수립하지만 그들의 재위 기간은 아주 짧은 편이었습니다. 군대 장수 오므리가 왕위에 오르면서 북 이스라엘은 안정기에 접어듭니다(1열왕 12, 20. 25. 26-30; 14, 19-20; 15, 25-8. 31-4; 16, 5-6. 8-10, 14-18, 20-8 참조). 오므리는 열 두 해를 다스리면서 ‘사마리아’성을 건축하고 수도를 그곳으로 이전하여, 국제 해안 도로에 접근 용이성을 이용해 무역을 관장하기 위해 힘씁니다. 그리하여 오므리를 비롯한 그의 후손 아합과 아하즈야, 그리고 여호람 시기에 전성기를 누리게 되지요. 이 왕조는 북 이스라엘 왕국을 대표해 불릴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므로 아시리아 왕립 비문들에 북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로 “오므리의 집,” 또는 단순히 “오므리”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명칭은 오므리 왕조가 예후에 의해 축출되고 난 후에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오므리 왕조의 가장 큰 업적은 뛰어난 외교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아시리아가 서방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시리아와 아람까지 강하게 억압하고 있을 때를 이용해 오므리와 그의 후손들은 막대한 이익을 챙기기도 했지요. 지정학적인 환경을 이용해 북 이스라엘은 북 동쪽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주변국들과 동맹을 맺습니다. 기원전 9 세기에 쓰여진 모압 왕 메사의 비문은 오므리가 40 여 년간 모압을 지배하였으나 오므리 왕가가 예후에 의해 계승될 때 그의 영토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추방했다는 것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아시리아가 영토를 확장해 갈 때 자신들을 방어하면서 아합은 아람과 페니키아와 성공적인 동맹을 맺고 살만 에세르 3세의 지휘 아래 벌어진 카르카르 전투에서 아시리아를 막아 냅니다(기원전 853). 아합은 성경 전통에서 악녀로 악명이 높았던 페니키아 공주인 이제벨과의 결혼을 통해 페니키아와의 정치적 동맹 관계를 확고히 하기도 했습니다(1 열왕 16,31-2).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이 동맹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지요. 내분이 일어나고 외부로부터의 압박이 극심해 기원전 9세기 중반 내내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므리 집안은 예후의 군대에 의해 장악되고 말았습니다.
오므리 왕가를 축출한 예후와 그의 후손은- 여호아하즈, 요아스, 예로보암 2세, 그리고 즈카르야- 자신의 왕조의 장기 집권과 번영을 위해 먼저 외교 정책의 방향을 바꿉니다. 이웃 나라들과의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에 대항하기보다는 살만 에세르 3세에게 굴복하여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조공을 바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아시리아가 내부 체제 정비를 하는 시기에 계속되었던 동북 주변 나라들과의 갈등은 아시리아의 하다드 니라리 3세가 다시 영토 확장을 시작하면서 종결을 맺게 되지요. 이때 예후와 그의 후계자들의 정책은 큰 결실을 맺습니다(기원전 810-747). 요아스와 예로보암 2세의 통치 시기에 아시리아의 원조로 북 왕국은 영토를 회복하고 정치, 경제의 번영을 잠시 누립니다(기원전 802-747). 하지만 예후 왕조의 잔혹한 몰락은 이스라엘 멸망의 전조였지요. 야베스의 아들 살룸은 즈카르야를 살해하고, 그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겨우 한 달 동안 다스렸습니다. 곧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티르챠에서 사마리아로 올라가 살룸을 쳐 죽이고, 사마리아의 임금이 됩니다(기원전 747-738). 예후 왕조의 외교정책을 이어받아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지만, 므나헴의 아들이며 계승자인 프카흐야는 그의 무관이었던 르말야의 아들 페카의 모반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페카는 그를 이어 사마리아의 임금으로 스무 해 동안 다스립니다. 이렇게 모반이 계속 일어나는 동안, 아시리아는 확고한 왕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페카가 다스리던 시기에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 3세는 왕권을 획득하자마자 그는 즉시 서방 세계로 진출을 시도합니다(기원전 745). 이때에 주변의 국가들은 그에게 굴복하고 조공을 바칠 것인지, 아니면 이집트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그를 대항해 싸울 것인지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정치적인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지요.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은 돌연 정책을 바꾸게 했고, 왕위 계승 문제로 야기된 소요는 북 이스라엘의 종말을 앞당깁니다.
기원전 734-732년, 페카의 모반 이후에 북 이스라엘도 참여한 반아시리아 동맹이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맺어지지만 남 유다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동맹국들 간의 여러 이견 속에서 북 이스라엘은 남쪽으로 영역을 넓히기 위해 남유다를 정복하기 위해 표면상으로는 다마스쿠스와 동맹을 맺기 위한 모색을 합니다. 티글랏 필에세르 3세는 이런 반아시리아 정서를 차단하고, 마침내 사마리아를 예속시켜 북이스라엘의 영토를 제한합니다. 티글랏 필에세르 3세가 직접 세운 마지막 임금인 호세아는 그가 죽은 후에 조공을 중단하고 반란을 꾀했지요. 그 결과로 사마리아는 살만에세르 5세 (기원전 727-722) 또는 사르곤 2세 (기원전 722-705)에 의해 두 번째로 공격받아 점령당하고 맙니다(기원전 722년).
사마리아에 거주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방을 당하고, 그 대신 아시리아 행정 장관의 지휘 아래 이방인들이 들어와 거주를 합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제 더 이상 왕국이 아닌 아시리아에 속한 한 지방으로 전락하고,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의 지방 총독이 주관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오므리와 예후 가문이 통치를 했었던 140여 년의 기간은 북이스라엘이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였지요. 오므리 왕조는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기고, 이즈르엘 평야를 군사 기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요르단 전역에 걸쳐 위치한 다른 도시들은 요새화 되어 방어와 무역로 역할을 하여 왕국을 지탱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고학 유적들-도시 성문들, 성벽들, 물 저장소, 요새들과 그리고 엄청난 건축 구조들-은 예측된 것에 비해 훨씬 더 도시가 발달하고, 인구가 밀집해 있었고, 그에 따른 인프라가 상당히 발전해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후 왕조는 오므리 왕조가 이룩한 업적에 더하여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해 아시리아의 봉신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나라를 부강하고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연대 | 북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적 사건 |
기원전 930-880 | 분열 왕국 첫 50년- 남북 왕국의 갈등기 |
기원전 898 | 에티오피아 제라의 침공 |
기원전 880-841 | 북이스라엘 오므리 왕조의 통치(이스라엘 회복기) |
기원전 874-853 | 아합의 통치 |
기원전 841-753 | 예후 왕조 |
기원전 793-753 | 예로보암 2세의 통치 |
기원전 753-722 | 북왕국 이스라엘의 쇠퇴기 |
기원전 745-727 | 신흥 아시리아 제국의 부흥(티글랏 필에세르 3세의 통치 |
기원전 722/1 |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살만 에세르 5세의 포위, 사르곤 2세의 정복[?]) |
(제2철기 시대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연대기)
2) 남유다 왕국 (기원전 930-587/6)
남유다 왕국은 북이스라엘 왕국보다는 늦게 발전을 하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에 관한 초기 이야기가 전설적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정작 성경 본문은 남유다 왕국의 초기 기원에 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임금들의 실록에 기록된 연대기 발췌문은 아람도 때때로 가담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이의 끊이지 않던 분쟁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열왕 14, 30; 15, 7.16). 이 충돌은 예루살렘 동북쪽에 위치하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경계가 되는 벤야민 지파에 속한 미츠파와 기브아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었습니다. 이 두 장소들은 군사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교통로이므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남유다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벌였던 비슷한 접전들은 서쪽의 필리스티아인들과 그리고 남쪽에 위치한 에돔과도 계속 되었습니다. 유다 왕국의 운명은 결국 이웃나라들의 힘의 역학관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지요.
오므리 왕조의 시대에 두 왕국 간의 국경 분쟁이 끝나고 잠잠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왕조는 안정기에 접어 들어 르하브암과 아비야의 승계자였던 아사 (기원전 980-868)와 여호사팟 (기원전 868-847)의 통치는 순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연대기는 여호사팟과 북 이스라엘 임금과의 화평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열왕 22, 45). 사실 그 때에 두 왕조는 혼인을 통해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여호사팟의 아들 여호람은 아합의 딸 또는 누이인 아탈야와 혼인을 하였습니다(2 열왕 8, 18; 8, 26). 여호람과 아탈랴의 아들 아하즈야의 사망 이후에, 유다는 잠시 오므리 왕가의 아탈랴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됩니다. 북왕국 여호람과 남 유다의 아하즈야는 형제로서 다마스커스의 하자엘이 이끄는 아람 군대와 맞서 전쟁을 하다가 함께 전사를 하는 비운을 맞습니다 (2 열왕 8, 28-9; 2 열왕 9-19장 참조). 오므리 왕조의 통치 시기의 남 유다는 전체적인 면에서 아시리아에 대항할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북이스라엘 왕국에 비해 열악한 동맹국 이었습니다. 예후가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가를 밀어내고 임금이 되어 외교 정책을 바꾼 이후, 남 유다의 정세는 급변하게 돌아갑니다. 아탈랴가 참혹하게 퇴위 당한 후, 다윗의 유일한 생존 후손으로서 아하즈야의 아들인 여호아하즈가 유다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예후가 반아시리아 동맹을 맺기를 거절한 것이 유다에게는 정치적 자치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요. 이를 계기로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이 재현되기도 합니다(2 열왕 8, 20; 12, 18-9; 14, 7-15, 22). 예후 왕조 통치 시기와 동시대에 다스렸던 유다 임금들인 여호아하즈와 아마츠야, 그리고 아자르야/우찌야, 그리고 요탐의 시대는 안정기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교역량에 비교할 수 없지만 남 유다는 필리스티아인들과의 교역과 무역로를 통해 경제적인 이득을 많이 얻었습니다. 유다 왕국에 속한 도시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올리브 오일과 옷감을 생산하고 경제적으로 이윤을 얻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고 무너져 가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유다 왕국은 별 다른 큰 피해를 당하지 않고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극복합니다. 이는 아하즈가 반아시리아 동맹에 가담하지 않았던 정치적 혜안 때문이었습니다.
예후와 아람의 사말 (Sam’al)이 조공을 바친 것처럼 아하즈도 아시리아 임금한테 조공을 바쳤습니다. 열왕기 하권 16장에 의하면 그는 그의 후견인 티글랏 필에세르 3세를 알현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갔습니다. 그리고 유다로 돌아 온 후 아람 또는 다마스커스에서 세운 제단을 모델로 삼아 예루살렘에 야훼 하느님을 위한 제단을 세웁니다. 이 이야기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아하즈는 아시리아의 비문들에 언급된 첫 번 째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아하즈의 뒤를 이어 히즈키야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 후, 그는 예루살렘의 서쪽으로 영역을 확장해 성벽을 건설합니다. 이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유다로 넘어 온 많은 피난민들로 인해 예루살렘 인구가 증가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는 아시리아가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을 대비해 터널을 뚫어 성 밖의 기혼 샘물을 성안으로 이끌어 들입니다(2 열왕 20, 20).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의 죽음으로 유다 왕국은 잠시 위협에서 벗어납니다(기원전 705). 히즈키야는 필리스티아 등 주변국들과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에 맞서 모반하기위해 이집트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는 조공을 중단하고, 아시리아의 왕실 봉신인 에크론의 파디(Padi)를 감옥에 수감합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아시리아의 세 번째 전투 행군을 하는데, 임금 산헤립은 군대를 이끌고 소요와 반란을 진압하면서, 유다를 침공하여 모든 요새 성읍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위협합니다 (기원전 701). 그는 엘테케 (Elteke)에서 이집트 군과 전쟁을 하여 필리스티아의 에크론을 회복하고 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합니다. 그전에 예루살렘 다음으로 크고 중요한 행정 도시 성읍 라키스를 점령하고 난 후, 그의 부하 랍 사케 등을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합니다. 마침내 히즈키야는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합니다(2 열왕 18, 13-16; 19, 36). 예루살렘이 위기를 모면한 이유를 야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극적으로 외국의 왕과 신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성경 기자는 증언하고 있지요(1 열왕 18-20). 그러나 이에 따른 많은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일부 유다 백성들은 추방당하고, 유다 왕국은 축소되어, 예루살렘의 영역도 줄어들었습니다. 더구나 아시리아는 세펠라 지역을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켜 아쉬돗과 에크론, 그리고 가자 지역으로 연결해 주는 통로로 삼았습니다.
(활과 방패를 든 아시리아 군사들이 라키스를 공격하는 모습의 판화 – 영국 런던 박물관)
그 후로 기원전 7 세기 경의 유다의 나머지 기간은 평화롭고 고요한 시기를 보냅니다. 히즈키야의 후계자인 므나쎄는 그의 선친의 전철을 밟아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며, 이집트에게는 군대를 앞세워 견제를 하지요. 이렇게 함으로, 그는 유다의 임금으로 장기 집권을 하고, 네겝 지역으로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풍요로운 전성기를 누렸던 이 때에 성경 전통은 그를 처참한 우상 숭배자로 악명이 높았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2 열왕 21장).
기원전 6 세기 중반 초기에 아시리아 제국은 내부적인 문제로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이 때를 틈타 이집트가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유다 왕국에서도 역시 반아시리아 분위기가 다시 불어옵니다. 그래서 모반이 일어나고, 결국 이로 인해 므나쎄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아몬은 폐위 당하고, 그의 뒤를 나이 어린 요시아가 계승합니다 (2 열왕 21, 19-20; 23-26; 22, 1-2; 3-7.9; 23, 4). 아시리아 왕 아수르바니팔이 죽자 요시아는 아시리아와의 봉신 관계를 끊고자 시도합니다. 성전을 재정비하고 정결하게 하는 등, 아시리아의 영향으로 그의 선조들이 세웠던 이방 신상들을 파괴하여 아시리아의 잔재들을 제거하였지요(2 열왕 23, 11-12).
이런 상황 중에 신아시리아 제국은 바빌론과 메디아 연합군에 패배하여, 수도인 아수로와 왕국이 있는 니네베는 점령당해 무너지고 맙니다 (기원전 612).
이집트의 파라오 느코 2세는 북의 아시리아와 전투를 준비해 북으로 진군을 합니다. 이 때 요시아는 므기또에서 그를 방어하다가 전사를 하고 맙니다(2열왕 23, 29).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여호아하즈 2세가 왕위에 오르지만 겨우 3 개 월간의 통치로 막을 내리고 파라오 느코 2세에 의해 끌려가 구금됩니다. 그리고 유다의 왕권은 그의 형제 여호와킴에게 계승됩니다(2 열왕 23, 33-4; 기원전 608-598). 유다가 비록 아시리아의 통제에서 벗어났지만, 다시 이집트의 파라오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2 열왕 23, 31-37). 그러나 이집트의 영향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갈그미쉬 전투에서 이집트 군을 격파하고(기원전 605), 유다 땅은 바빌론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유다 왕국에서는 친아시리아 파와 친 이집트 파로 나뉘어져 어느 나라와 동맹을 맺을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 세가 이집트 정복에 실패를 하자 여호와킴은 친이집트 파의 편에 서서 바빌론에 조공 바치는 것을 거절합니다. 이를 응징하기 위해 네부카드네자르 2 세는 예루살렘을 정복하러 첫 번째 출정을 떠납니다 (기원전 597). 이 시기에 여호와킨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왕권을 이어 받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예루살렘을 포위해 공격합니다. 여호와킨은 목숨은 건졌지만 그는 모후와 왕비들, 내시, 고관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게 됩니다(기원전 562; 2 열왕 24 참조). 여호야킨의 삼촌인 마탄야가 그 다음의 왕위에 오르고, 그의 이름은 치드키야로 불렸습니다. 치드키야도 이집트의 원조를 받아 바빌론에게 바쳤던 조공을 멈추기를 바랐지요. 그러나 이 결정이 유다 왕국의 종말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완전히 멸망시켜 버립니다(기원전 587). 이 때 솔로몬에 의해 지어진 성전도 함께 무너지고 값진 기물들은 약탈 당해 바빌론으로 옮겨졌답니다. 치드키야는 피신하여 간신히 살아났지만, 다시 잡혀 그의 아들들이 죽임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눈이 뽑힌 채로 바빌론으로 유배를 당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도층들이 추가로 바빌론으로 끌려 갑니다. 라키스에서 발견된 토기 파편들은 그 때 당시에 예루살렘이 두 번에 걸쳐 처참하게 정복되는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두 번째 정복 당한 후에 네부카드네자르가 총독으로 임명한 그달야가 미츠파에서 유다 땅을 다스립니다. 그는 친바빌론 파에 속했던 이로서 바빌론 임금을 섬길 것을 주장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댤야에게 가서 그의 조언자와 남은 백성의 대변자 역할을 하였습니다(예레 40, 6).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남은 유다인들의 정치 활동이 이루어 졌으나, 그댤야는 이스마엘의 부하들에 살해를 당하고, 예레미야는 납치되어 이집트로 끌려갑니다(예레 41장). 이 일로 인하여 유다는 정치적 독립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다시 바빌론의 한 속주로 편성이 됩니다.
남유다 왕국은 북이스라엘 왕국과 함께 세워져서 북 왕국보다는 경제적으로 뒤쳐지게 발달했지만, 130여 년 이상 더 왕국이 존속 되었습니다.
유다는 항상 그보다 강국이었던 북왕국 이스라엘과 거대한 제국이었던 아시리아와 이집트, 그리고 바빌론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봉신의 위치에서 충성이나 조공을 바쳐야만 했지요. 적절한 외교 정책을 통해 왕국의 안전과 정치와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독립을 모색하면 작은 유다 땅은 주변의 강대국들에 의해 처참히 보복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 2철기 시대의 남유다 왕국 연대기)
연대 | 남유다 왕국의 역사적 사건 |
기원전 687/6-643 | 므나쎄의 통치 (독립 쟁취) |
기원전 640-609 | 요시야의 통치 (혁신적인 종교 개혁) |
기원전 626 | 신흥 바빌론 제국의 등장 (아시리아의 멸망) |
기원전 609-5 | 이집트의 재등장 |
기원전 605 | 바빌론 네부카드네자르의 유다 침공 |
기원전 597 | 유다 왕국에서의 첫 추방과 포로 |
기원전 597-587 | 치드키야의 통치 (마지막 모반) |
기원전 586 | 남왕국 유다의 멸망과 유배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