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 3 (바빌론, 페르시아,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586-167)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바빌론, 페르시아, 헬레니즘 시대에 관한 문서 자료는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서도 불구하고 느헤미야, 에즈라, 그리고 마카베오서를 대략 그려볼 수 있지요. 그리고 성경 외의 주변 국가들의 역사 기록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 해 볼 수 있습니다.

글의 순서



1. 바빌론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기원전 586-540)

바빌론의 역사 연대기

(바빌론 역사 연대기, 기원전 600-539))

바빌론과 페르시아 시대의 사마리아와 유다의 역사는 사실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바빌론에 의해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백성들의 일상의 생활이 제대로 유지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유다 땅에서 신아시리아와 이집트에서 신바빌론으로 힘의 이동이 진행되고(기원전 600년경),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사마리아와 유다는 바빌론의 식민 지방들이 되었습니다(기원전 587년 이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기원전 586), 솔로몬의 성전도 함께 파괴되면서 유다인들의 삶과 종교의 구심점도 사라지고 맙니다.

이 때에 바빌론으로 유배되어 온 유다인들의 디아스포라가 시작되지요. 그리고 그들의 회개와 종교적인 순수성을 회복하는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회당’을 만들어 그들의 야훼 신앙과 전통을 지키기 위한 종교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 이집트는 그 힘을 완전히 잃고 고대 근동에서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별 어려움 없이 바빌론의 도시를 점령한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2세가 등장할 때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 지속되었습니다(기원전 539).

함께 읽으면 더 도움이 되는 이스라엘 역사 요약

2. 페르시아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기원전 540-332)

페르시아 시대의 유다인 공동체 역사

유다 땅에서의 바빌론의 통치권은 큰 혼란이 없이 페르시아로 이양되었습니다. 페르시아는 그들의 정치, 경제적 이점이 지중해 연안에 있다고 믿어 그들의 관심을 지중해에 두고 있었습니다. 캄비세스 1세가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을 이집트 정복 출정을 위한 군사 요충지로 삼았지만, 기원전 5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그곳에 경제활동이 이루어질 만한 촌락이 세워지거나 특별한 물질문화가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제국이 표면상으로는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통치를 했지만, 페르시아, 특히 다리우스 1세는 무력으로 정복한 지역의 내정 간섭을 훨씬 더 심하게 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시대의 유다인 연대기)

연대페르시아 시대 아래 예후드의 역사
기원전 538키루스 임금의 칙령 (키루스 원년, 신년 축제)
기원전 538/7바빌론 1차 귀환  (지도자: 유다 제후 세스바차르/즈루빠벨)
기원전 516/5즈루빠벨 성전 봉헌(18년, 아다르 달 3일)
기원전 458제 2차 귀환, 에즈라의 귀환
기원전 445예루살렘 성곽 재건 (느헤미야)

사마리아와 유다는 페르시아의 “유프라테스 건너편”의 한 속주로 전락해서 페르시아의 총독에 의해 다스려졌습니다. 페니키아 해안의 도시들이 왕정 체제를 유지했던 것과는 반대로 두 지방의 내부 행정 구조는 고위 관료들과 사제들로 이뤄진 행정 집행 위원회로 구성되었습니다. 꽤 악명이 높았던 페르시아 우편과 등기 제도가 운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지역의 속주들 간의 통신 교류를 통제하기도 하였지요. 화폐를 주조하여 또한 경제 활동이 더욱 원활하도록 부양했습니다. 아람어는 페르시아 제국의 서쪽 지역의 공식 언어로써 사마리아와 유다 지역에서도 곧 일상어로 통용되었고, 반면에 히브리어 사용은 점점 줄어 거룩한 말씀인 성서 용어로만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중요한 기념이 될만한 일은 다리우스 1세의 지원 아래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한 것 이었습니다 (기원전 520-515; 에즈라 5-6장). 그리고 사마리아의 그리짐 산에 새 성전을 세워 사마리아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게 하였지요. 예루살렘의 성전은 페르시아의 승인 없이 지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의 헌작 시종이었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축하라는 특명을 받고 유다 땅으로 돌아갑니다. 이는 이미 오랫동안 끌어왔던 지루한 그리스와의 분쟁 때에 제국을 혼란스럽게 했던 주변 나라들과 이집트를 견제하려는 의도와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통해 유다가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는지 알 수 있지요. 예루살렘 성벽과 성곽 재건에 관한 묘사와 고고학 유적을 통해 볼 때 사마리아와 유다 지역은-페르시아 통치 중간 시대- 이 건축을 통해 정치, 경제적으로 회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위의 두 건축 사업과 더불어 유다, 사마리아 지역 밖의 바빌론과 이집트의 유다인 공동체의 -바빌론, 페르시아 시대- 중요성은 날로 더해갔습니다. 바빌론으로 유배된 유다인들은 소수 민족 공동체로 정착하고 디아스포라 (흩어진 유다인을 칭함)에서 그들만의 조직체를 만들었습니다. 고대 문서에 의하면 이 유다인 공동체를 알-야후드 (‘유다인의 도시,’ 또는 ‘유다인의 마을’)이라 불렀으며, 이들은 바빌론의 동쪽이나 동남쪽에 거주했습니다. 바빌론에서 발견된 문서들에 의하면 이 공동체는 여러 세대에 걸쳐 자신들의 전통 유산과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상당히 큰 경제 규모를 갖고 있었고, 법률을 집대성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빌론 궁의 감시와 보호를 받고 있었던 여호야킨 가족의 운명은 그 이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엡 (Yeb)에서 발견된 공용과 개인 문서들도 기원전 5 세기 후기에 나일강 변 아스완 옆의 엘레판틴 섬에 위치한 유다 군인 거주지도 같은 상황이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 수비대’이란 공식적인 이름을 지닌 채 그들은 기원전 525년 캄비세스가 정복하기 전에 ‘야훼 (Yahu, Yhwh)’ 주님께 헌정하는 성전을 지어 그곳에서 제사를 바쳤습니다. 페르시아와 연대한 이집트에 의해 그 성전이 무너지자 복잡하고 오랜 기간 동안의 외교적인 협상 끝에 건너편에 성전을 다시 짓게 되었습니다(기원전 410). 유다와 사마리아 지도층들도 이 협상에 가담해 있었습니다. 다른 문서들에 의하면 본국과 디아스포라 거주지와는 개인적인 연락과 서신을 주고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문서들에서 그들의 귀환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에제키엘과 이사야 (40장 이후), 그리고 하깨와 즈카르야와 같이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위와는 전혀 다르게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유다 땅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전통은 ‘모든 이스라엘’ 또는 ‘참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바빌론 유배지에서 귀환하고 있는 거대한 흐름만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전통은 성전 재건축과 세스바차르와 즈루빠벨, 그리고 사제인 예수아를 함께 등장시켜 서술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유다 지방을 재건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세스바차르는 키루스의 칙령이 반포되었을 때 귀환하는 성전 막일꾼들과 함께 관련되어 등장합니다(기원전 539). 귀환 시기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칙령은 성전 재건축과 바빌론의 유다인들의 귀환은 승인된 것으로 보입니다(에즈라 1. 6 장; 이사 44, 28; 45, 1. 13). 성경 전통은 이 역사적 사건을 성스런 역사로, 그리고 기원전 539년을 거룩한 해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으로 볼 때, 이 해는 키루스가 바빌론을 점령한 시기로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꾼 해라고 볼 수 있지요. 하느님의 심판은 추방당했던 이들의 귀환이란 방법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비록 성경은 다리우스 1세 치하에서 스알티엘의 아들 (여호야킨의 손자) 즈루빠벨을 통해 다윗 왕조를 회복시키려는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런 재건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는 희박합니다. 어떤 면에서 페르시아는 유다 지방을 다스릴 왕실 후손들- 즈루빠벨도 포함- 명부를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통은 후대에 이들을 메시아 대망 사상과 연결을 지어 그리고 있습니다(하깨 2, 20-3; 즈카 4장). 느헤미야가 실행했던 임무 또한 성경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것 이외에, 그는 정치와 사회, 그리고 종교적인 부흥을 위해 여러 방도로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유다 총독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한 그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을 비롯해 주변 이웃 나라들(아랍, 암몬, 아스돗)의 훼방과 적개심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느헤 1; 5; 13). 에즈라는 모세의 율법과 규정을 유다와 유프라테스 건너 전 지역의 유다인들에게 가르치도록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보낸 사제이며 서기관이었습니다 (에즈 7-10; 느헤 8). 그는 느헤미야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에즈라의 인도 아래 유다인 귀환

이 시기에 에즈라와 느헤미야 전체에 걸쳐 모세의 율법과 뒤늦게 히브리 성경에 편집된 다른 성서들에 강하게 호소하는 유다이즘이 출현 했습니다. 이는 유다이즘의 한 형태, 즉 “성서 유다이즘”으로 불릴 수 있지요. 성전 건축과 함께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은 모세의 율법에 입각한 신정 정치를 이룩하게 한 거룩한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성서 유다이즘”은 후에 이스라엘 역사를 천지창조부터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종말 (창세기-열왕기서와 역대기)과 계속 이어지는 포로기 이후의 페르시아 시대의 사마리아와 유다 지방의 역사(에즈라, 느헤미야, 그리고 바빌론 포로기 중에 쓰인 다니엘 1-6장)까지를 거슬러 올라가 다룹니다.

에즈라와 느헤미야에 나타난 묘사, 특히 에즈라 4-7장의 아람어 문서와 느헤미야의 회고록은 페르시아 시대의 상황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왕궁 비문들에 기록된 아카에메니드 왕조의 이데올로기의 내용과도 일치합니다. 이 시대의 정황을 기술하고 있는 사료나 고고학 자료들이 희박하여 사회와 문화, 그리고 경제 쇠퇴기로 평가되고 있지만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주도로 종교 개혁이 일어났으며, 구약 성경을 기록하고 , 또한 성경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해석 전통이 수립됩니다.

페르시아 왕국의 종말과 헬레니즘 시대의 태동

3. 헬레니즘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기원전 332-153)

알렉산드로스의 4명의 후계자들

마케도니아 출신의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유럽, 소아시아와 근동 지역, 그리고 페르시아를 정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이스라엘도 그리스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리스의 통치 아래 사마리아와 유다 지역은 큰 변혁기를 맞이합니다. 유다 지역의 이름은 유다(예후드)에서 ‘이유다이아 (Ιουδαια)’란 그리스어와 ‘유대아 (Judaea)’란 라틴어로 불렸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 이후 그리스 제국은 그의 부하들에 의해 네 지역으로 나뉘어 통치됩니다. 이 네 왕조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카산더 왕조 (Cassander Dynasty),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다스리는 셀레우코스 왕조 (Seleucids Dynasty), 비투니아와 트리키아 지방을 중심으로 세워진 리시카무스 왕조 (Lysimachus Dynasty), 그리고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지역을 다스리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Ptolemieus Dynasty)였습니다.

이런 주변 정세에 의해 유대아, 사마리아 지역은 또다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역 분쟁의 쟁점이 되었습니다. 이 두 지방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영향을 끼쳐 온 헬라 문화와 헬라 왕조의 강력한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헬레니즘 시대 초기에 이 지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헬레니즘 제의와 숭배를 소개하지만, 표면상으로는 종교적인 문제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조상들의 전통을 따라 야훼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지만, 유대아와 사마리아 지역에 점점 그리스 신전과 제의식이 늘어나고, 더불어 성서 유다이즘도 이 시기에 가속화되어 유대아 지역을 넘어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까지도 확장 전파됩니다. 전쟁 포로나 병사들, 뒤늦게 온 디아스포라들, 또는 다른 여러 방법을 통해 성경 전통이 톨레마이오스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까지 전해졌습니다.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디아스포라 유다인 공동체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성전을 대신하는 회당이 생겨나고, 히브리어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다이즘의 헬라화는 이미 페르시아 시대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에 이르러 사마리아에서 유대아 땅으로 퍼져 나가 그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계속 남하 정책을 쓰면서, 기원전 200년에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왕조는 결국 충돌을 하게 됩니다. 셀레우코스의 안티오쿠스 3세가 바니야스 (Banias)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이스라엘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에 귀속되고, 통치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경제적 부흥이 일어나고, 구도시들은 재건되고, 이에 더하여 신도시들이 세워 짐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여, 사회 구조가 재편성이 되고, 계층이 형성됩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유다인 연대기)

연대헬레니즘 시대의 유대아 역사
기원전 332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제국 정복
기원전 323그리스 제국의 분열
기원전 301-200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스라엘 통치
기원전 201-198안티오코스 3세에 의한 의 이스라엘 점령
기원전 175-166안티오코스 에페파네스 4세의 유다인 박해
기원전 167마카베오 가문의 항쟁
기원전 164마카베오 가문의 예루살렘 성 탈환 및 성전 재봉헌

정치적인 면에서 두 지방은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시리아-페니키아” 또는 “코엘레-시리아 (시리아 지방)와 페니키아” 란 행정 구획으로 편성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에돔 (‘이두메아’)은 유대아 지방 남서쪽에 깊숙이 그 영역을 확장해 자리를 잡습니다. 한편 아라비아와 에돔의 일부 후손인 무역 대상들의 국가인 나바테아 제국(Nabateans)이 페트라를 중심으로 무역 활동을 왕성하게 펼칩니다.

헬라 제국의 통치를 받는 동안 유대아는 정치적으로 대우를 받아 대사제를 중심으로 산헤드린 공회는 행정, 사법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자율권을 인정받아 야훼 하느님 유일신 사상을 유지할 수 있었지요.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쿠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던 예루살렘의 관료들에게 세금 감면 등과 같은 여러 특혜를 베풀어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많은 이점들을 제공해 줍니다. 희랍어가 그리스 제국의 통용어로 사용되고, 그리스 문명의 세계화 정책으로 백성들은 헬라 문화의 풍요로움과 이민족의 종교 사상에 서서히 물들기 시작합니다.

특히 자신을 “제우스 신의 현현”이라고 믿었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는 열혈한 그리스 문화 신봉주의자였습니다. 자신이 다스리던 식민들을 헬라 문화로 통합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데카폴리스들을 재건하고, 그리스 신전들을 보수 건축하는 등 신전에서의 축제들을 지키도록 장려하였지요. 특히 그의 통치 아래(기원전 175-164), 대사제였던 오니야스 3세가 축출되고, 헬레니즘을 적극 환영하여 받아들였던 그의 형제 야손 (Jason)이 그의 뒤를 계승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야손도 대사제 직에서 쫓겨나고, 차독의 후손도 아니고 대사제 가문도 아니었던 메넬라오스가 그의 뒤를 잇게 됩니다. 대사제직 계승권을 두고 벌어진 이 상황은 예루살렘을 헬라 도시로 바꾸기 위한 열망에 바탕을 둔 근본적인 개혁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이보다 먼저 이집트에서 정치적 개입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통치자로 바꾼 것처럼 야손과 메넬라오스, 그리고 토비야스를 내세워 예루살렘에서도 정치적인 입지를 다지고자 했던 것입니다. 향후에 안티오코스는 몇 번에 걸쳐 예루살렘에서 군사 개입을 하고, 정치계를 개혁, 재편성을 합니다. 사마리아처럼 예루살렘은 그리스 군사 식민지로 바뀌고, 그리스의 신 제우스에게 봉헌된 도시가 되어 버립니다.

한편 이런 정책 과정에 반대하고, 성서 유다이즘을 옹호하던 이들은 왕의 정책이 “하늘의 하느님”에 관한 치욕적이고 혐오스런 행위라고 비판했습니다. 사실 이 개혁들은 단순하게 헬라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정책 과정들로써 이미 오랫동안 수행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와 유다 왕족의 유다이즘의 많은 부분에서도 이런 현상들-헬라 신전에서의 제의식이 갖는 정치적 중요성과 그에 따른 반란의 위험에 대비할 군대를 무력으로 주둔시킴-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는 경건한 유다인들에게 종교적으로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는 갖은 방법으로 유다인들이 야훼 유일신 사상을 지키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부정한 동물인 돼지를 희생 제사로 바치도록 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성전에 제우스 신전을 세웠습니다. 백성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리고,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질렀습니다(1 마카 1-2장). 이에 반발하는 많은 백성들은 박해와 순교를 당했지요. 안티오코스 4세와 그를 지지하는 이들에 대항하는 소요와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여러 당파들이 가담했는데, 초기에는 정치와 경제에 관한 이해관계로 그 불만이 표출되었습니다.

첫째로는 토비야스 가문으로써 그들은 초기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결탁을 하여 특혜를 누린 이들이었습니다(기원전 3세기). 그의 후손들 중에 하나였던 히루카누스는 요르단 동편 즉 암만 동쪽에 위치한 아락 엘- 아미르 (Araq el-Amir)에 궁전과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토비야스의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안티오코스 3세 때에 셀레우코스 왕조를 지지하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다른 사제 가문으로는 오니야스가 있었는데, 이들은 토비야스 가문과 결혼을 통해 인척 관계에 있었지만 경쟁 구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차독의 후손들로서 이들은 지금까지 대사제를 배출한 가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통치 초기까지 대사제 직무를 맡고 있었지요. 셀레오코스 왕조 안티오코스 3세의 통치 아래에서까지만 해도 시므온 2세를 비롯해 때때로 그 가문 내에서 번갈아 가면서 대사제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 2세의 후계자로 오니야스 3세가 대사제 직무에 올랐다가 파직 당하고, 그의 동생 야손이나, 또는 오니야스 4세가 그의 뒤를 잇습니다. 오니야스 4세는 후에 이집트로 탈출해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원 아래 레온토폴리 (히에라폴리스 부근)에 성전을 세우고, 그곳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은 성전에서 기원 후 73년까지 제사를 봉헌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안티오코스 4세와 그를 지지하는 무리를 대항해 무장하고 충돌을 했던 또 다른 사제 가문은 요아립 가문 (하스모네우스 집안) 후손으로 모데인이란 작은 마을 출신 마타티아스 였습니다. 마타티아스의 다섯 아들 중 지도자로 뛰어났던 유다는 마카베오 (해머, 망치)란 별명처럼, 그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마카베오 항쟁의 주요 원인은 경제적인 것과 관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 정치적인 것과도 연관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소요와 폭동들은 주로 셀레우코스 왕조 이전의 왕조에서 국고 세금 정책권과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가 빼앗긴 이들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더 나아가 마케베오 항쟁은 성서 유다이즘의 종교적인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고, 야훼 하느님과 율법이란 이름 아래 싸웠습니다. 이방 사상의 침투로 종교가 왜곡되고 율법이 파괴됨에 대한 고발은 이 반란에 대한 정당성을 갖기에 충분했지요. 왜냐하면 율법 (토라)은 헬레니즘 문화와 종교 왜곡에 대항할 만한 권위 있는 유다 전통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카베오가 결국 승리를 해 성전을 재탈환하고 정화해 새로 봉헌을 하게 되는 기원전 164년대까지 이런 항쟁들은 지속되었습니다(키슬레브 월 25일: 성전 봉헌 축일). 그리고 한 때 정치적으로 독립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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