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에서 하스모니아 왕조는 다윗 임금 이후로 유다인들은 그들만의 영토를 다스리며 자치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점령 당한 후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갑니다. 이 시기의 역사적 사건을 간단하게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 1.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기원전 152-37년)
- 2. 초기 로마 시대 (기원전 37- 기원후 324)
- 3. 후기 로마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기원후 73-200년대)
- 4. 비잔틴 시대 (기원후 313-640)
1.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기원전 152-37년)
마타티아스의 아들들과 그들을 따랐던 경건한 유다인들은 셀레우코스 왕조가 대내외적으로 약해진 틈을 타 계속 승리 하면서 서쪽의 지중해 평야 지역과 동쪽으로 요르단 강 건너 요르단 땅까지 정복을 합니다(1마카 5장 이후). 당시의 대사제인 알키무스가 죽은 후, 칠 년간의 과도기를 보내고, 마카베오의 후계자이고 동생인 요나탄이 스스로 대사제직에 오릅니다(기원전 153년). 그리고 그는 셀레우코스 왕으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고 하스모니아 왕조를 위한 초석을 세우지요. 요나탄의 뒤를 이은 시므온 때에 이르러 셀레우코스 왕조와 25년 간의 갈등과 분쟁을 끝내고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쟁취합니다(기원전 141년). 이들의 뒤를 이어 요한 히루카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 1세도 왕위에 오르면서 동시에 대사제임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하스몬 가문 (the Family of Asmoneus)의 이름을 따라 하스모니아 왕조 (Hasmonean Dynasty)를 설립하고,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통치 아래 다윗 왕국에 버금가는 영토로 크게 확장합니다. 이는 또한 기원전 587년(바빌론에 의한 멸망) 이전의 유다 왕국의 토양에 세워진 왕국이었지요.
하스모니아 왕조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점점 깊이 헬라 문화와 풍습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편에서는 “반헬레니즘”을 주창할 유다이즘에 관한 요구가 거세어졌습니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위협했던 지독한 적들과 마주하는 것과 같았지요. 밀려오는 헬레니즘에 대항해서 할례와 율법 준수를 통해 백성들이 유다이즘으로 복귀하도록 노력했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 내부에서는 각 종교와 정파간의 갈등과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파들은 서로 정치권을 장악하기 위한 권력 다툼을 합니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알렉산더 얀네우스) 왕의 미망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통치를 하자 그녀의 아들들인 히루카누스 2세를 대사제직에 세우고,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군대 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들의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두 형제는 그녀를 이을 계승권을 두고 싸움을 벌입니다. 국내에서 그들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 사이의 권력 다툼을 서로 이용했습니다. 히루카누스는 이두메아의 행정 장관이고 헤로데 대왕의 아버지인 안티파테르와 이두메아의 왕 아레타스로부터 외교 문제와 군사 원조를 받는 반면에 아리스토불루스는 로마의 칙사인 스카우루스의 도움을 받습니다.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침공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는 히루카누스 2세를 공식적으로 대사제로 복귀시키지만 왕이란 직함은 주지 않습니다(기원전 63).
이 시기에 이두메아 영주였던 안티파테르는 율리우스 시이저와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군사 충돌이 일어나자 시이저를 후원해 그 공로를 인정받아 유대아 행정 장관으로 추대됩니다.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장악한 그는 자신의 아들인 파사엘을 예루살렘 통치자로, 헤로데는 갈릴레아 지역 영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하스모니아 왕가 후손인 안티고누스와 파르티안 군대가 연합하여 헤로데와 왕권 다툼을 벌이고, 예루살렘 주민들의 반란으로 헤로데는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헤로디움, 마싸다, 페트라를 거쳐 로마로 피신합니다. 로마에서 헤로데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지지를 받아 유대아의 왕으로 임명됩니다. 왕이 된 헤로데는 아코 항구에 도착해 군사를 모아 안티고누스와 파르티안 군대, 그리고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안티고누스를 잡아 처형하고, 유대아 지역의 통치자로 자리를 굳히게 됩니다(기원전 37년).
(하스모니와 왕조의 연대기)
연대 |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의 역사 |
기원전 160 | 요나탄의 영토 확장, 북동/요르단 강 동편 지역 |
기원전 155 | 요나탄의 대사제 취임 |
기원전 143 | 하스모니아 왕조의 통치 시작 |
기원전 141 | 시므온의 정치적 완전 독립 쟁취(게제르, 야포 점령) |
기원전 135-104 | 요하난 히루카누스의 통치 |
기원전 67-63 | 하스모니아 왕가의 내분 |
기원전 64 | 셀레우코오스 왕조가 로마에 의해 멸망하다 |
기원전 63 | 폼페이우스의 성전산 점령, 로마의 관할 시작 |
기원전 40 | 헤로데가 로마로부터 유대아의 왕위를 얻다. |
기원전 37 | 헤로데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유대아를 통치하기 시작하다 |
2. 초기 로마 시대 (기원전 37- 기원후 324)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점령으로 유대아와 사마리아는 로마의 관할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로마 총독 가비누스는 정치 구조를 재편성하고, 정책을 복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히루카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 사이의 대립은 지속되었고, 서로 전쟁하며, 폼페이우스와 시이저 사이에 일어난 시민전쟁의 와중에 서로 로마의 총애를 얻으려고 비위를 맞췄습니다. 이 전쟁에서 폼페이우스가 죽고 난 후, 이들의 미래는 승리자인 시이저의 손에 달리게 되었지요. 시이저는 파르티아인들과 손잡은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를 버리고, 그의 동맹군으로 히루카누스 2세를 선택한 이두메아의 행정 장관 헤로데를 선택합니다. 헤로데는 하스모니아 왕가의 공주 미리암네와의 결혼을 통해 그와 그의 후계자가 하스모니아 왕가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부여했지요. 그는 왕위에 올라 로마의 “동맹국 왕”으로서 팔레스타인 전체를 다스립니다(기원전 37). 헤로데는 뛰어난 외교술로 로마와 유다인의 관계 발전을 도모하고, 건축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어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해 새로운 도시들과 여러 요새들을 건축하였습니다.
헤로데의 죽음 이후 그의 영토는 세 아들들에게 나뉘어 상속이 됩니다. 유대아와 이두메아,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은 헤로데 아르켈라우스에게 상속되고, 헤로데 안티파스 (루카 13:32)는 갈릴레아와 요르단 동편의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고, 헤로데 필리포스는 골란과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 (가울라니트 지역), 지금의 시리아 영역에 속하는 나바테아, 드라코니, 아루라니 지방을 다스리게 됩니다. 얼마 후 로마 황제 칼리굴라는 헤로데의 손자 아그리빠스 1세에게 전체 영토를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기원후 37-44). 아그리빠스 1세의 짧은 통치 기간이 끝나고, 그의 아들 아그리빠스 2세가 헤로데 가문의 상속지인 팔레스타인 북쪽 일부를 다스리고 나머지 지역은 로마 총독의 통치 지역으로 편성됩니다.
헤로데 대왕 이후, 정식으로 왕이 추대되지 않았던 상태이므로 로마 총독이 주둔하게 되고, 영주들의 실정으로 인해 백성들은 도탄에 빠집니다. 이로 인해 열혈 당원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 납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총독들의 횡포와 착취는 날로 더해가고, 정치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비호하고, 결탁하여 자신들의 지위 안정과 경제적인 이익만 추구했지요.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레아에 등장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고, 자신의 목숨을 버려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느님 즉 왕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명을 받고 유대아의 5 대 총독으로 임명된 본시오 빌라도에게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 형으로 처형을 받으나 3 일만에 부활을 하십니다.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배경 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를 가진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로마, 소아시아, 그리고 마케도니아 등으로 급속히 전파됩니다. 그 후에 헤로데 대왕의 손자인 아그리빠 1세(사도 12장)가 왕이 되어 그리스교도를 박해하지만 이전의 영토를 회복하고 예루살렘의 제3성벽을 건축하는 등 잠시 유다 민족에게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나라는 다시 로마 총독의 폭정 아래 놓이게 되었고, 계속 이어지는 폭정과 칼리쿨라 황제가 자신의 형상을 성전에 세우므로 시민들의 분노케 하고 바리사이들과 열혈당원들이 합세하여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 데이비드 로버트)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이 땅에 들어온 베스파시아누스가 민란을 진압하다가 로마로 돌아 가자, 그의 아들 티투스는 4개의 로마 군단과 8 만이 넘는 후원 군단으로 기원 후 70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파괴합니다. 마지막으로 항쟁하던 마싸다 요새도 기원 후 73년에 플라비우스 실바누스에 의해 정복됩니다.
(초기 로마 시대의 연대기)
기원전 37-4 | 헤로데 대왕의 통치 |
기원전 4 – 기원후 6년 | 헤로데 아르켈라우스의 유대아 사마리아 통치 |
기원후 3 – 기원후 34 | 헤로데 필리포스의 가울라니트 통치 |
기원전 4 – 기원후 39 | 헤로데 안티파스의 갈릴래아 통치 |
기원전 4 – 기원후 30년 | 예수님의 활동 |
기원후 26 – 36 |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의 유대아 통치 |
기원후 37 – 44 | 헤로데 아그리빠 1세의 통치 |
기원후 44 – 66 | 헤로데 아그리빠 2세의 통치 |
기원후 66 – 70 | 유다인들의 대로마 항쟁 |
기원후 70 | 제 2차 성전 파괴 |
기원후 70 | 산헤드린 공의회를 야브네로 옮기다 |
기원후 73 | 마싸다 함락 |
3. 후기 로마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기원후 73-200년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자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루살렘에서 야브네(얌니아)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그 공의회와 유다사회의 주도권은 성전 제사 제도가 무너지면서 사제들 중심의 사두가이들에게서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사이 지도자들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당시 유다의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kai)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의 허락을 얻어 야브네(Yavneh)에 민족의 장래를 책임질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 율법학교를 세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다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예루살렘을 떠나 요르단강을 건너 펠라로 옮겨 갔고 또 사도들이 이끄는 공동체들 중에는 해안 평야와 갈릴레아의 카파르나움과 크파르샤니아 등지로 옮겨 가게 되지요. 당시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반란을 진압한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트라야누스(Trajan, 101-117)가 유대아 통치의 강경노선을 걷습니다. 그 뒤를 계승한 하드리아누스(Hadrian, 117-138)는 131년에 급기야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알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로마의 도시로 건설하여 유다인의 출입을 금지시켰고 그것을 어길 경우 사형을 내리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바르 코크바에 의해 산헤드린이 첫 번째로 옮겨 갔던 현대의 야브네 도시)
기원 후 132년 코지바의 아들이라고 불리던 ‘바르 코크바(Bar Kokoba)’가 당시 위대한 라삐였던 아키바(Akiva)의 후원을 받아 민족의 새로운 정치적인 해방을 가져올 메시아로 지목되면서 이러한 로마의 결정에 항거하는 제2차 반란을 주동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지요. 그러나 라삐들과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다시 산헤드린 공의회를 북쪽 갈릴레아 지방으로 옮겨가면서 민족의 새로운 살 길을 도모합니다. 로마의 셉테미우스(Septemius, 193-211)의 통치 하에 일부 허용된 신앙의 자유와 자치권을 이용하여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장이었던 라삐 유다 하 나시(Judh-Ha-nasi)는 갈릴레아의 벳 세아림, 치뽀리, 티베리아스로 옮겨 다니면서도 갈릴레아를 유다인들의 신앙의 요람으로 탈바꿈시킵니다. 메롬, 발암, 카파르나움, 코라진 등지의 회당 유적과 벳 세아림의 동굴 무덤은 그 당시 유다 공동체 부유함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민족정신의 요람이었던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민족의 신앙 유전을 계승하기 위해 토라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결국 갈릴레아의 티베리아스에서 유다 하 나시의 제자들에 의하여 구전 율법 미쉬나(Mishnah)의 완성(기원 후 210년경)을 보게 됩니다.
4. 비잔틴 시대 (기원후 313-640)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유다인의 사회에서 당시 기득권층과 크게 충돌하였지만 결국 3세기를 넘기지 않아 그리스도교와 함께 이 땅을 바꿔 놓게 됩니다. 기원후 313년,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모든 종교인들에게 동등한 지위를 공인한 밀라노 칙령과 더불어 391년에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면서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화 되었고 이 땅도 그리스도교의 영향권 아래 들어갑니다.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예루살렘의 부활 성당, 골고타 언덕 위에 지어진 돔 양식의 성당)
325년, 제 1차 니체아 종교회의를 필두로 이루어진 공의회에서 체계적인 그리스도교회의 교리화 작업에 들어갑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헤브론은 그리스도교의 성지, 그리스도교회의 중심지가 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에 의하여 거대한 기념 성전들이 설립됩니다. 특히 유다광야를 중심으로 현재 알려진 것만도 73개의 수도원이 이 시대에 세워졌고 이 땅에는 독특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의 자취들을 찾아 수도하며 기념 성당들을 세우는 등, 이 땅 곳곳에 새로운 그리스도교 문화가 꽃을 피울 때에 유다인들은 박해를 받아 극히 제한된 삶을 영위합니다. 그러나 5세기경에 미쉬나의 해석서인 탈무드를 완성합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Justin, 527-565)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의 영화를 마지막으로 그의 죽음 이후에 비잔틴의 문화는 급격히 쇠퇴일로로 접어들게 되지요. 614년 페르시아의 침공 때에 유다인들은 메시야가 그들에게 정치적인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다시 629년에 헤라클리우스가 이 땅을 회복하였고 신흥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부서진 교회들과 무너진 십자가를 다시 세우고 유다인을 이 땅에서 추방합니다. 그러나 다시 “하느님은 한 분이며 그의 예언자는 모하메드이다.”는 슬로건을 걸고 아라비아 사막을 가로질러 나타난 이슬람의 군대는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에 걸친 강력한 모슬렘 왕국을 건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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