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 5 (서기 640- 현대 이스라엘)

이스라엘 역사에서 현대 이스라엘이 탄생하기 전, 십자군들이 약 200(서기 1099-1291)여 년간 통치를 했지만, 대부분의 시기를 아랍 이슬람 제국이 점령해 다스렸더랬습니다. 초기 아랍 시대, 십자군, 마믈룩, 오트만 튀르키예, 그리고 영국 식민 시대와 독립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1. 초기 아랍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기원후 640-1099)

모하메드가 죽고 난 뒤에 칼리프들이 지도자가 되어 이 땅을 다스리게 되는데 모슬렘이 아니거나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 특히 유다인과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초토세와 과중한 인두세를 거두어들이는 등 차별정책을 시행하게 됩니다.

제4대 칼리프였던 알리가 다마스커스를 중심으로 한 우마야드 가문에게 그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지요. 우마야드 왕조(Umayyads)는 비잔틴의 문화를 받아들여 성지에 많은 건축물을 남겼는데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성전산에 세워져 있는 오마르 사원과 엘 악사 사원입니다. 그때로부터 예루살렘은 코란에 마련된 새로운 전통에 따라 그리스도교와 유다교에 의하여 신성한 장소로서 여겨지는 것처럼 또한 모슬렘들에게도 중요한 순례의 성지로 바뀌게 됩니다.

691년경에 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산의 황금돔 이슬람 사원

(서기 691년 경에 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산에 위치한 황금돔 이슬람 사원)

그 뒤에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모하메드의 삼촌의 후예들로 치칭되는 아바시드 왕조(Abbasids)가 탄생합니다. 이 시대는 모슬렘의 문화가 가장 번성한 시대로 기록됩니다. 이러한 왕조들이 통치하는 동안에는 거리가 먼 팔레스타인 땅까지 크게 영향력을 미치지 않았으나 그 후에 모하메드의 딸의 후예들로 자칭하는 카이로를 중심으로 하는 파티미드 왕조(Fatimids)가 계승한 뒤에는 잇따른 침공과 많은 세금 부과에 간섭과 종교적인 박해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특히 칼리프 하킴(Hakim)에 의하여 그리스도교회는 강력한 통제와 박해아래에 놓였으며, 이때 성지의 많은 성당들이 파괴됩니다. 11세기는 팔레스타인에서만이 아니라 프랑스, 영국 등지의 유럽에서도 유다인들은 그리스도교의 영향 아래 행해진 수많은 박해와 추방의 불행한 역사의 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형성된 셀죽 터어키 족(Seljuk Turks)이 힘이 강해지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이 땅에서 아랍의 통치시대를 결말짓습니다. 셀죽 터어키족들은 유럽에서 이 땅을 찾아오는 성지 순례자들을 북쪽에서 차단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부과금을 착취해 갔고 아시아에서 이어지는 비단길의 대상 무역을 통제하여 엄청난 통행세를 거두어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유럽은 셀죽 터어키 족의 위협을 받은 동방의 비잔틴 황제의 요청을 받게 되었을 때에 1095년 클레멘트 회의를 소집한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 Ⅱ)의 주창에 의하여 주저하지 않고 셀죽 터어키 족을 몰아내고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십자군을 창설합니다.

2. 십자군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기원후 1099-1291)

십자군들은 제1차 원정으로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게 되자 모슬렘 세력을 대량 학살하고 이 땅에서 축출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동방교회마저도 피해를 입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으로 규정되면서 유다인을 향한 적개심이 불타오르게 되고 그 결과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유다인들이 학살을 당하고 회당은 전소되었습니다.

무장한 십자군의 모습

(무장한 십자군의 모습)

이러한 사상은 유럽 안에서도 고조되어 각 나라 안에서 살고 있는 유다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였고 1215년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Ⅲ)에 의하여 유다인은 예수를 죽인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음의 고통을 담당함이 마땅하다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교회의 공적 권위에 의하여 결정된 사실로 인해 제3차 십자군 원정과 더불어 이 팔레스타인 땅에서뿐만 아니라 유럽 안에서 유다인을 박해하는 분위기는 더욱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십자군은 제1차 원정 후에 당시 고드프레이 드 보월론(Godfrey de Bouilon) 장군을 예루살렘의 초대 비잔틴의 왕으로 추대하였고 그 후에 그의 동생인 발드윈(Baldwin)이 계승하면서 발드윈의 왕가가 예루살렘을 계속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나 100 여 년이 채 되지 못하고 발드윈 4세가 죽고 난 뒤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하여 십자군 세력은 쇠퇴 일로에 접어들게 됩니다. 특히 갈릴레아 티베리우스 근처의 ‘힛팀의 뿔’(the Horn of Hittim)이라 불리는 곳에서 벌어진 사라센의 살라딘 장군파의 전투에서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이 땅의 주도권을 셀죽 터어키에게 내어주고 물러가고 맙니다. 이 땅은 살라딘의 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새로운 세력 아유비드 왕조(Ayyubids), 살렘에는 프랑스를 비롯하여 유럽 등지에서 특히 북부 아프리카의 유다인 공동체가 이주해 정착하게 됩니다. 1193년 살라딘의 죽음 후에 다시 이 땅을 쟁취하려는 십자군 세력은 잃어버린 요새들을 되찾는 등 수차례의 십자군 원정이 있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아유비드 왕조에 의하여 이 땅은 후기 아랍 시대의 문을 열게 됩니다.

당시 이 땅은 모슬렘과 십자군의 갈등 속에서 또 다른 주인으로 등장한 새로운 세력에 의하여 짓밟히게 되지요. 아시아에서 힘을 기르고 세계 원정에 나선 몽고의 징기스칸은 동부 유럽을 재패한 후에 1258년 바그다드를, 1260년에는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면서 이 땅 깊숙이 진입해 들어와 이즈르엘 평야에 진을 칩니다. 그러나 1260년 이집트에서 중앙아시아로부터 잡혀온 노예들과 아유비드 왕조 때에 죄수들로 강력한 군대를 형성하고, 이 땅으로 진군한 맘룩 세력에게 벳 산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징기스칸의 남하정책은 좌절됩니다. 그 후 1291년, 아직 십자군 세력이 남아있던 아코, 티로, 시돈, 베이루트, 아트리트의 십자군 요새 성들이 맘룩 세력에 의하여 차례차례 정복되면서 약 200여 년 동안 이 땅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십자군은 역사적 자취만을 남긴 채 완전히 이 땅을 떠나게 됩니다.

4. 마믈룩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기원후 1291-1517)

1260년 벳 산에서 북방으로부터 이집트를 위협하며 남하정책을 시도하던 칭기즈칸의 몽고 세력들을 격퇴한 공헌을 인정받은 당시 장군이었던 바이바르는 이집트의 술탄으로 추대되면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은 그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이 땅은 그때로부터 약 250년간 후기 아랍 시대의 한가운데 놓이게 되지요. 마믈룩은 또 다른 십자군의 원정을 두려워한 나머지 십자군의 주된 항구였던 아코와 야포 항구를 파괴해버렸고 그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국제 사업 무역은 침체되었고 또 아스클론, 티베리아, 다마스쿠스, 예루살렘과 같은 대 도시들을 방치하면서 작은 도시들이 발달하게 되었지만 경제의 구조적 부조화를 가져왔으며, 마믈룩시대 동안 암흑기를 보내게 됩니다. 백성들은 경제적으로 침체된 상황 위에 또 여러 가지 가난하고 척박한 민초들만 남게 되지요. 마믈룩은 경제적인 침체, 전염병, 황충들과 메뚜기 떼가 덮치는 등 여러 재난을 겪었으며 급기야 1458년, 1497년에 두 차례의 대 지진을 겪으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14 세기 말엽, 오트만 튀르키예 족이 소아시아와 유럽의 남동부에서 힘을 규합하고 비잔틴 세력을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1453년에는 오트만 튀르키예는 모하메드 2세의 지휘 하에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린 후에 그 수도를 개명하고 이스탄불이라 명명합니다. 당시 남하하는 신흥세력 오트만 튀르키예를 막기위해 마믈룩은 군대를 거느리고 진군하여 1516년 알렙포 전투에서 한 판 승부를 겨룹니다. 그러나 막강한 화력을 갖춘 셀림 1세가 이끄는 오트만 튀르키예 세력에게 대패하고 이 땅을 그들의 손에 내어주고 맙니다.

5. 오트만 튀르키예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기원후 1517-1917)

1517년 알렙포에서 승기를 잡은 오트만 세력은 이집트의 마믈룩을 정복하고 유럽의 남동부로부터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아라비아의 남단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합니다. 셀림 1세의 아들 슐레이만 대제에 의하여 영토는 확장되었으며 나라는 안정기를 맞게 되지요. 지금 예루살렘 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바로 이 슐레이만에 의하여 수십 년의 작업 끝에 완공을 이루게 됩니다. 다마스쿠스 행정구역에 포함된 이스라엘 땅은 4개의 도로 나뉘고 예루살렘, 가자, 나블루스, 쯔파트가 각 도의 중심지가 됩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분위기를 타고 스페인으로부터 스파라딤, 유럽으로부터 아쉬케나짐, 북부 아프리카의 모그라빔들이 이주해왔고 이 땅을 결코 떠나지 않았던 유다인의 후예들인 무스타아라빈(Musta’arabin)들이 이 땅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게 되었습니다. 쯔파트는 당시 랍비 이삭 루리아(Issac Luria)의 문하생들에 의하여 디아스포라 유다인에게 널리 퍼졌던 유다교의 신비주의 운동의 본산지가 됩니다.

19세기 말엽, 시온주의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많은 이주민들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됩니다. 초창기 키부츠는 이 개척자들이 모여들어 형성한 공동체를 이룹니다.

6. 영국 식민지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기원후 1917-현대 이스라엘 건국)

제1차 세계 대전에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패전한 오트만 제국은 현재의 터키를 제외한 중동 지역 대부분을 영국과 프랑스에 내주었습니다. 트랜스요르단 (지금의 이스라엘이 위치한 곳. 지금은 팔레스타인으로 불림) 지역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지요. 오트만의 세금 정책에 의해 황무지가 되었던 트랜스요르단은 유다인들과 아랍 유민들이 유입되어 여기저기 공동체 마을들을 형성하였습니다.

현대 이스라엘은 19세기의 시온주의 운동과 20세기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생한 유다인 학살을 피해 유다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와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건국되었습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 통치하던 영국은 이중적으로 아랍 측에게 맥마흔 선언을 하였지요. 샤리프 후세인에게 아랍인들이 전쟁에 참여하면 칼리프 중심의 아랍인의 나라를 이 땅에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샤리프 후세인은 1916년 6월 5일을 기하여 봉기를 일으켜 스스로 아랍의 왕임을 자처했습니다.

이후 1917년, 유다인의 지원을 받기 위하여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가 가나안 지역에 유다인 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밸푸어 선언을 하게 됩니다. 1920년 영국의 공식 외교 정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랍과 유다인에게 이중적인 약속을 해서, 후에 유다인과 아랍인 간의 갈등을 촉발하게 되는 하나의 촉매제가 되었답니다. 사실 영국군이 위임 통치령 지역을 철수하기 이전부터 이주 유다인과 아랍인 간 테러와 학살 같은 국지적인 충돌이 있었습니다. 유다인과 아랍인들은 자치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욤 키푸르 전쟁

(이스라엘의 욤 키푸르[대속죄일]에 벌어진 욤키푸르 전쟁, 1973년 10월 6일 ~ 10월 25일)

이후, 영국의 공식적인 철군이 이뤄진 다음날, 이스라엘은 공화국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아랍인들의 물리적인 침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제1차 중동 전쟁입니다. 이후 유다인들은 기존 이르군과 하가나 등 극우 시온주의 민병대를 확대하여 방위력을 증강시켰지요. 이스라엘은 서방으로부터의 무기지원을 받아 아랍 연맹을 물리치고 제1차 중동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중동 전쟁의 경우에는 미국을 포함한 서방의 지원은 없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전후에 영국, 프랑스, 미국 어느 나라도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은커녕 판매조차도 소극적이었지요. 그래서 전후 물자들을 매입하여 방위력 공백을 메꾸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후 제2차 중동 전쟁(시나이 전쟁)과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도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후에서야 중동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서방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국가들은 아라비아 지역에서의 유다인 국가 건설에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유다인-아랍인 간의 충돌은 지속되었습니다.

한편, 팔레스티나 지역(가나안 연안)의 아랍인들은 스스로를 팔레스타인 주민, 그들의 거주 구역을 팔레스타인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본래 토착민으로서 거주하고있던 것이 아니라, 20세기 유다인들의 이주와 동시에 이 지역으로 밀려들어온 아랍인들을 뜻합니다. 장기간에 걸친 팔레스타인과의 분쟁 결과, 1993년에 PLO와 자치에 합의하여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 세워졌지만 현재까지도 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복수를 다짐하던 안와르 사다트가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다시 중동에는 긴장감이 고조되었습니다. 1973년 10월 6일, 드디어 이집트는 유다인들의 속죄일 욤키푸르 당일 이스라엘이 점령 중이던 시나이반도를 기습 공격했습니다 (제4차 중동전쟁). 시나이 반도 지역은 이스라엘과 이집트와의 완충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북부 골란 고원을 넘어서는 시리아군은 바로 본토로 들어오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전략상 시리아군이 포진한 곳을 공습하면서 전세를 역전하기에 이르렀으며 끝내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까지 승리로 이끌어냈지. 하지만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 또한 많은 피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