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탈출과 가나안 땅 입성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이집트 땅에 거주한 후 약 430여 년간 그 땅에 살았습니다. 요셉이 죽고 나자 그를 알지 못하는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박해하였지요. 모세의 인도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해 40년간 광야를 떠돌다가 가나안 땅에 입성하게 됩니다. 탈출 이동로를 살펴보고 가나안 정복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1. 이집트 탈출 당시 이집트와 광야 여정

이집트에 남겨진 여러 비문들에 따르면 피톰(Pr-Atum)은 와디 투밀라트에 있었던 고대 범람호의 서쪽에 위치했었다고 합니다. 성경의 수콧(succoth, Te-ku)은 피톰에서 조금 더 동쪽, 저수지들과 연관된 이름으로, 오늘날의 팀사(Timsah)호수 방향에 있었습니다. 고센 땅은 라메세스와 피톰 사이에 있는 평야였어요. 시호르 시내는 바알 츠폰(다프네, Daphne)과 펠루시움 사이에 있는 고대의 나일 동북쪽 지류를 따라 뻗어 있는 가늘고 긴 호수나 연못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갈대 바다”는 한때 바알 츠폰 남동부에 있었던 거대한 늪지대였습니다. 이 두 수역 사이에는 “호루스의 길” 즉, 호루스의 화신인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이 가나안과 시리아로 군사 원정을 갈 때 길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길을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지나는 길(탈출 13, 17)”이라고 부릅니다.

이집트 탈출과 광야 여정

이집트 탈출 루트 설명

파라오가 가나안이나 시리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서 출정을 하려면 시나이 북부 해안길에 하루 걸이인 약 24km마다 병참 기지들이 있어야만 했지요. 세티 1세는 카르나크에 있는 대열주실 북쪽 벽 부조에 이 경로를 따라 세워진 수원지와 요새들을 묘사해 놓았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지나는 길(탈출 13,17),” 곧 “호루스의 길”은 철통같이 요새화 되어 있어서 이 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제19왕조 동안 샤수 베두윈(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들의 목초지로 알려져 있던 수콧(이집트어로 테쿠,Te-ku)에서 출발하여 술(수르) 광야 언저리에 있는 에탐으로 향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그들은 거기에서 “믹돌과 바알 츠폰(탈출 14, 2.9) 사이의 피하히롯(실레 부근으로 추정) 앞(동쪽)으로 갔으며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자 바알 츠폰 동쪽 늪지인 “갈대 바다(이집트어로 P-Tjufy)를 건너 빠져나갔을 것입니다. 그 후 그들은 수르(Shur of Egypt) 광야로 들어갔고(탈출 15,22), 그 후 남쪽으로 향해 갔던 것이 분명합니다. 시나이 반도에는 고대의 지명들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머물렀던 장소들의 위치를 명확하게 입증하기는 쉽지 않지요.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탈출 경로는 비잔틴 전승을 따른 것인데, 제벨 무사(Jebel Musa)를 시나이 산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데스 바르네아의 위치는 기록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40년 광야 생활을 보낸 것이지요.

1) 카데스 바르네아

카데스 바르네아라는 성경 속의 장소는 유다 지파 기업의 경계를 기록한 부분에서 그 위치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여호 15, 2-4). 여호수아 15장 2-4에서는 유다 지파 영역의 대략적인 경계 지점들이 순서대로 나와 있는데, 동쪽으로 사해와 서쪽으로 이집트 시내(와디 엘아리시) 사이의 중간 즈음에 카데스 바르네아가 있었을 것입니다. 카데스 바르네아로 짐작되는 바로 그 자리에는 아인 쿠데이스(‘Ain Qudeis)라 불리는 샘이 있어요. 철기시대의 *텔(tell)이 가까이에 있는 와디(건천, 비가 올때만 형성되는 시내)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곁에는 아인 쿠데이랏(‘Ain Qudeirat)이라는 또 다른 샘이 위치해 있습니다.

2) 북쪽으로의 진입을 실패하다

가나안 땅에 들어 온 후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쪽에서 직접 진격해 올라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네겝에 거주하는 아멜렉 사람들과 산악지대의 가나안 사람들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어 결국 좌절되고 말았지요. 그들은 이들에게 쫓겨 산지에서 호르마(완전히 멸망하다라는 뜻)까지 퇴진을 했습니다. 호르마는 일종의 언어유희로 그 어원은 히브리어 헤렘(herem)으로 ‘멸망, 멸절’또는 ‘바쳐지다, 성스럽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민수기 21,1과 33,40에서는 가나안 사람 아랏 왕이 네겝(남방)에 거주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민수기 14,44-45에서는 네겝은 아말렉 사람, 산간 지대에는 가나안 사람, 신명기 1,41-44에서는 아모리 사람의 땅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후에 유다와 시므온 지파가 호르마를 점령하고 나서야 비로소 호르마에서의 후퇴를 설욕하게 된 것으로 나옵니다(판관 1,17).

2. 가나안 땅 정복 이야기

가나안 땅 정복은 요르단 강을 건너면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지파들이 처음으로 도착한 장소는 예리코 동편의 평지 길갈이었지요(여호 4,19). 길갈은 분명 가나안 땅에서 최초로 거룩하게 성별 된 장소였으며, 한때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이곳에서 기름 부은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1 사무 11,15).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르단 강을 건너다

길갈은 예리코와 아이 성 정복 이야기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들은 전설적인 영웅담과 함께 역사적인 성격이 함께 어우러져 불분명하게 묘사되고 있지요. 이 기간 동안 예리코와 아이 성 정복은 고고학적으로 확인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이성 정복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더 풀기 어려운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도시는 여호수아 시대보다도 천 년 전에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아이성으로 추정되는 데이르 디브완(Dear Dibwan) 근처의 엣텔(Et Tell)은 계속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지만, 다른 뾰족한 장소를 찾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몇몇 학자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 속의 아이성은 근처의 베텔에 종속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아이성 정복 이야기가 그 당시 민간에 널리 회자되던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판관기 1,22-26의 베텔 정복 기사는 고고학 발굴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1) 스켐 지역 정복

정복 이야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고, 이곳에서 언약을 새롭게 하는 의식을 드렸습니다. 이 제단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은 그리짐 산, 나머지 절반은 에발산을 마주 보고 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스켐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고대 성소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스켐은 항상 에프라임 산악 지대에서 가장 중심지에 속했습니다. 스켐은 여호수아 12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정복한 도시들 명단에서 빠져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자손은 비교적 평화롭게 이곳 중앙 산악 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데, 스켐의 가나안 사람들과는 임시로 타협을 맺은 듯합니다.

여호수아의 고별사가 있었던 스캠 전경

2) 남쪽 지역 정복과 기브온 전투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 정복을 재구성할 때에는 성경이 선별된 사건들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사이에는 많은 갈등과 충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록은 사라졌거나 남아 있어도 모호한 것들 뿐이지요. 게다가 어떤 지역에서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가까운 곳의 가나안 도시들을 정복하지 않고 가까스로 정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 한 사람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 전 지파가 단결하여 순식간에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으로 전체 과정을 묘사하고 있지요. 심지어 요르단 동편 곧 트랜스요르단에 정착한 지파들도 시스 요르단(가나안 땅)으로 건너와 형제들의 정복 활동을 도운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헤브론과 드비르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처음에는 칼렙과 옷트니엘(여호15,13-19; 판관 1,12-15)이, 그 다음은 유다 지파(판관 1,10-11)가, 최종적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여호 10,36-39)가 이룩한 일로 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나아란과 벧호론 사이에 있는 베텔 언덕 지역에 살던 브리아 집안 출신이었습니다(1 역대 7,23-40). 여호수아의 중요한 활약은 본래 중앙 산지, 특히 기브온에서의 승리에 국한되어 있는 듯합니다. 여호수아서가 정복 과정을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주고 있다면, 판관기는 각 지파별로 또는 지역 지파가 연합하여 얻은 승리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중앙 산지와 남쪽 지역에서의 활동을 다음의 3 단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i) 기브온 전투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북서쪽 고원에있는 네 개의 성읍들에 거주하는 소수의 히위 사람들, 곧 기브온 사람들을 돕기 위해 여호수아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왕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기브온 사람들을 응징하기 위해 동맹국 왕들을 모았습니다. 그는 이 언약이 해안 평야에서 벳 호른을 경유하여 중앙 산지로 접근하는 주요 도로를 통제하는데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나안 군은 이스라엘에게 처참히 패하여 벳 호른 비탈길로 퇴각해 남쪽으로 “아제카와 마케다까지”(여호 10,10-11) 달아났고, 이스라엘은 이 위세로 계속해서 세펠라 남부까지 정복해 나갔습니다.

ii) 남쪽 지파들의 정복 전쟁

유다 지파는 베젝이라는 곳에서 가나안 왕 아도니체덱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명확하게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베젝은 사무엘 상권 11,8에 언급된 베젝과 동일한 장소로 보고 있지요. 이어서 유다 지파의 예루살렘 정복이 그려지고 있는데 (판관 1,8), 이것은 아마도 편집자가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을 회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와 시메온 지파가 북쪽에서 유대 산악지대로 진입하는 동안 칼렙과 크나즈 사람들은 헤브론과 드비르를 정복해 남쪽에서 공격해 들어온 듯합니다. 카인 사람들은 “야자나무 성읍”을 지나 네겝의 아랏 근처에 정착했는데, 어쩌면 이곳은 예리코가 아니라 아라바의 타마르(판관 1,16). 시메온 지파는 본래 세펠라와 네겝의 에탐, 림몬, 토겐, 에텔, 아산 등 다섯 곳에 가까스로 정착했는데, 호르마는 유다와 함께 정복했습니다(판관 1,17).

iii) 세펠라 남부 정복

세펠라 남부 정복 이야기는 아마 이스라엘이 더 넓은 영토를 점령하는 마지막 단계였던 것 같습니다. 주목할 만한 사항은 세펠라의 세 구역 중 소렉 계곡에서 엘라 골짜기에 이르는 북부(여호 15,33-36)는 분명 별다른 충돌을 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기브온 전투에서 참패한 가나안 사람들이 후퇴했고 이어 산지의 헤브론과 드비르를 정복했다는 이야기를 연결 지어 볼 때 중앙 산악 지대와 남쪽 지역 도시들은 그 노정에 따라 정복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기사는 마케다에서 도망간 가나안(아모리) 사람들의 왕들을 사로잡는 것으로 시작하여 헤브론과 드비르로 올라가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텔 라키스에 있는 문 근처에서 람세스 3세의 카르투슈(cartouche: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이름을 기록할 때 둘러싸서 보호한다는 의미로 그 이름 주위에 둘렀던 곡선)가 그려진 금속 물건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가나안의 도시들이 적어도 기원전 12세기 중반까지는 이집트의 지배 아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전에 이곳에서 발견된 신관 문자가 새겨진 봉헌 그릇은 라메세스 3세의 통치와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정복한 것은 기원전 12세기 후반에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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