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순서
- 1. 이탈리아 로마 프라테 성당 성모님 발현 성지 개요
- 2.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 3. 성모님의 발현
- 4. 성모님 발현 장소
- 5.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시현자
- 6. 성모님 발현 성지로의 공인 과정
- 7. 성모님 발현의 의미
- 8. 이탈리아 로마 프라테 발현 성지 소개
- 9. 발현 성지 프라텔 성당 찾아가는 방법
1. 이탈리아 로마 프라테 성당 성모님 발현 성지 개요
유럽에 이성주의가 확산하면서 하느님이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이탈리아 각지에서 일어난 통일 운동과 유럽 전지역에 정착하여 성공을 거둔 유다인들의 막대한 영향력은 교황청과 가톨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가톨릭 교회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성모님께서 파리 뤼 뒤 박에서 발현하신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탈리아 수도 로마에서 발현하셨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중심부인 로마에서 유다계 은행가의 상속자에게 발현하셨습니다. 발현을 목격한 시현자 유대인이 즉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기적이 일어났지요. 이후 그는 가톨릭 사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시온의 성모 여자 수도회를 만들고 평생 유다인의 개종을 위해 힘썼습니다.
2.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통일을 한 이탈리아 정부는 1870년 교회에 관한 법을 제정하여 교황청이 이탈리아에서 갖고 있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바티칸만 교황청의 유일한 재산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또한 교황의 세속권한도 뺏겨 정치적으로도 그 힘을 잃음으로써 바티칸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당시 비오 9세는 이탈리아와의 모든 합의를 거부하고, 자신을 ‘바티칸의 포로’라고 선언했지요.
1840년대 초에 이탈리아의 통일 외에 가톨릭을 위협하는 또 다른 요소가 있었는데요. 이는 바로 유럽 각국에 정착해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직업을 점령하면서 시장을 장악해 가는데, 특히 금융업에 대한 독점이 심화되었습니다. 원래 고리대금업자였던 그들은 금융자본가로 변신했지요. 그간 쌓아 놓은 부를 바탕으로 이들은 왕족이나 귀족 등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이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를 대표하는 금융자본가는 로스차일드 가문이었지요. 마이어 암셀은 로스차일드 가문을 일으킨 사람으로 1800년대 초 금융가로 성장해 왕실의 재산 관리에 관여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그의 다섯 아들들을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에 파견하여 은행 지점을 세우고는 유럽 전역의 금융업을 장악하였습니다. 유대인과 친분을 맺은 권력가들은 유대인과 유대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톨릭도 적잖이 공격을 받았죠.
이런 식으로 가톨릭이 외적인 변화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을 무렵인 1842년, 이탈리아 수도이며 가톨릭의 중심지인 로마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겁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시현자는 가톨릭을 증오하고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친척인 유대인 은행가 상속자였습니다.
3. 성모님의 발현
1842년 1월 20일, 유대인 알퐁스 라티스본(Alphonse Ratisbonne)은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의 제대 앞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친분이 있었던 백작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뷔시에르 남작과 함께 성당에 갔지요. 그는 너무 일찍 도착하여 혼자 성당에 들어가 제대 바로 아래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빛으로 성당 내부가 매우 환해지면서 제대 위에 흰색 비단 옷을 입고 머리에는 흰색 베일을 쓰신 성모님이 맨발로 구름 위에 홀로 서 계셨습니다. 성모님은 알퐁스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셨지요. 늘어진 파란색 망토로 팔을 감싸고, 손가락 끝에서는 빛이 뻗어 나오고 있었답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모습을 알퐁소는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모후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바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알퐁소는 훗날에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살아 있고, 위대하며, 위엄 있고, 아름답고, 자비가 넘치며, 축복받은 한 분이 제단에 서 계셨습니다. 그분은 가장 신성하신 성모 마리아였으며, 제가 목에 걸고 있는 기적의 메달에 새겨져 있는 분과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밝게 빛나는 광채 때문에 제대로 올려다볼 수 없었지만 저는 그분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고 거기에서 용서와 자비의 표현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복되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제게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분의 현존 앞에서 제가 처한 상황과 저의 죄, 그리고 가톨릭 신앙의 아름다움을 깨달았습니다.” 성모님은 파리 뤼 뒤 박에서 발현하신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발현하셨지만 여느 발현과는 다르게 어떤 메시지도 주지 않으셨답니다. 그래서 ‘침묵의 성모님’이라고 불립니다.
약 3분 동안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성모님은 사라지셨습니다. 곧 뷔시에르 남작이 성당으로 들어왔지요. 그때 알퐁소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기억하소서(Memorare)’를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남작도 알퐁스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답니다. 왜 그러느냐고 아무리 물어도 알퐁소가 답하지 못하고 그저 흐느끼자 그는 알퐁소를 성당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마차에 태워 세르니 호텔로 갔습니다. 알퐁소는 울먹울먹하면서 기적의 메달에 입을 맟추고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고해신부에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지요. 자신이 세례를 받지 않으면 더 이상 살 수가 없으니 빨리 세례를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죠. 남작은 예수회의 빌포르 신부를 만나기 위해 제수(예수) 성당으로 갔습니다. 알퐁스는 계속 울먹이다가 진정을 하고 나서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기적의 메달을 벗어 높이 쳐들어 올리고는 “성모님을 보았습니다. 성모님을 보았습니다.”라고 외쳤답니다. 알퐁스는 고해성사를 받고 빌포르 신부의 지도를 받고 예수회에 입회했습니다.
4. 성모님 발현 장소
로마에서 로마제국의 유적이 다른 곳에 비해 적으면서 가톨릭 유산이 남아 있고, 일반 시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은 스페인 광장과 스페인 계단이 있는 지역입니다. 이곳은 스페인 사람이나 프랑스인 등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 합니다. 1945년 트리니타 데이 몬티(삼위일체) 성당과 수도원이 건립되었지요.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는 까닭에 이 지역은 자연스럽게 가톨릭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1854년 교황 비오 9세가 무염시태 교리를 선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57년 바로 이 스페인 광장에 무염시태 원주가 세워진 것입니다. 이렇게 로마에서 가톨릭 문화 분위기가 있었던 스페인 광장 근처에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프라테 성당을 건축한 사람은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이 성인은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미니미 수도회)를 창설한 분입니다. 프라테 성당은 1604년부터 부팔로 가문의 지원을 받아 성당의 개조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658년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에 의해 바로크양식으로 재건되었고, 둥근 천장과 종탑이 완성되었으며, 현재의 성당 정면부는 1826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중앙 제단에는 세 폭의 제단화가 있습니다. 가운데에는 사도 안드레아가 엑스x자 모양으로 십자가형을 당하는 장면이 있지요. 왼쪽에는 안드레아의 죽음, 오른쪽에는 안드레아의 매장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그림으로 보아 이 성당이 안드레아를 위하여 봉헌된 성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당 제단의 좌우에는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천사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원래는 산탄젤로 다리에 전시되어 있었다가 교황 클레멘스 9세에 의해 옮겨져 훗날 성당에 기부되었답니다. 천사상은 각각 가시관과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INRI)라는 글자가 새겨진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데요. 이는 베르니니의 조각 중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성당 내부에는 총 10개의 경당이 있고, 그 중 한 곳이 성모님 발현을 기념하는 기적의 성모 경당입니다.
5.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시현자
알퐁소 라티스본은 1814년 5월 1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출생한 로스차일드 가문과 가까운 친척인 유대계 은행가 가문의 상속자였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로마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사제가 된 형 테오도르를 가족들이 달가와 하지 않자 자신도 형과 말도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가톨릭을 증오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27세 때에 조카인 플로레와 약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기후가 따뜻하고 온화한 곳에서 보내기 위해 1841년 말 나폴리와 몰타를 여행했습니다. 그러던 중 1842년 1월 6일 우연히 로마로 와서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들 중에 하나였던 형인 남작 테오도르 드 뷔시에르는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가톨릭 사제인 알퐁스의 형과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알퐁스는 주변에 지인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남작 뷔시에르에게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여행의 안내를 부탁했는데요. 이 남작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뷔시에르 남작은 알퐁스와 친해지자 그를 개종시키기 위해 작은 제안을 했습니다. 그의 목에 기적의 메달을 걸고, 매일 아침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가 지은 ‘기억하소서’를 성모님께 바칠 것을 제안한 거죠. 알퐁스는 남작의 여행 안내에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유대인들도가톨릭 신자들처럼 융통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남작의 딸이 그의 목에 기적의 메달을 걸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알퐁스는 여전히 남작의 신앙을 경멸하며 호프만의 이야기를 인용해 ‘나에게 좋은 일은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 알퐁스는 ‘기억하소서’를 바쳤지만 그 기도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가톨릭을 증오했지요. 그러다가 며칠이 지난 후 프라테 성당 제단 앞에서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기적의 메달 속 성모님과 똑같은 모습을 한 성모님을 직접 보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알퐁스는 바로 고해성사를 받았다고 해요. 자신이 갖고 있던 세속의 모든 지위와 가업으로부터 물려 받은 은행가라는 직업도 서슴없이 포기하였습니다. 1842년 1월 31일 알퐁스는 콘스탄티노 파트리치 나로 추기경에게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를 받아 모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형 테오도르와 화해했습니다. 그리고 1843년 형이 시온의 성모 여자 수도회를 설립하는 것을 적극 도왔습니다. 1847년 알퐁스는 마침내 사제 서품을 받고 예수회 회원이 되었습니다.
1855년 알퐁스는 유대인 전교에 전념하기 위해 교황 비오 9세의 하락을 받아 예수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시온의 성모 여자 수도회를 설립했습니다. 1856년 부속 학교와 소녀들을 위한 고아원이 있는 대규모의 에체 호모 수도원을 건립했지요. 1860년에는 엔케렘 언덕에 성당과 소녀들을 위한 또 다른 고아원과 성 요한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유대인과 무슬림 전교에 헌신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시온의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는1884년 5월 6일 70세의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6. 성모님 발현 성지로의 공인 과정
1842년 2월에 성모님의 발현을 조사하기 위해 교황청은 교령을 내려 직접 조사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성모님 발현 시현자와 관련한 이들에 대한 세밀한 조사와 수많은 증언을 모으면서 조사를 한 것이죠. 이를 바탕으로 알퐁스의 개종이 전적으로 기적이고, 이는 성모님의 강력한 중재를 통해 이루어진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1842년 5월 불과 몇 개월 만에 발현 당시 성모님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성화가 그려져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 내 기적의 성모 경당에 봉헌되었습니다. 이 성화는 화가인 나탈레 카르타가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알퐁스의 자세한 구술에 따라 전통적인 기법을 사용해 그린 거라고 합니다.
1842년 6월 3일 공식적인 심의 과정을 거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총대리 코스탄티노 파트리치 나로 추기경은 프라테 성당의 성모님 발현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개입으로 일어난 신성한 기적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을 기록한 책자의 출판과 배포를 허락했습니다. 프라테 성당의 경우에는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위치가 교황청이 있는 로마이고, 교황의 총대리인 추기경이 발현을 인정한 것이므로 주교의 공인 없이도 교황청의 인정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교황의 지지 의사 표명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습니다.
가) 성모화가 모셔진 프라테 성당에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자 교황 레오 13세가 프라테 성당을 방문해 성모화에 왕관을 봉헌하였습니다 (1892년 1월 17일).
나) 교황 비오 12세가 프라테 성당을 준 대성당으로 승격했습니다 (1942년 4월 25일).
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순방했습니다 (1982년 2월 28일).
라) 교황 프란치스코도 순방했습니다 (2017년 12월 8일).
7. 성모님 발현의 의미
이성주의는 유럽 전역에 강하게 퍼지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통일 운동은 로마 교황청과 가톨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기도 했지요. 또한 가톨릭은 유럽 각국에 정착해 성공을 한 유대인들의 막강한 영향력에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면초가 상황에 놓인 가톨릭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성모님께서 유대계 은행가의 상속자 알퐁스 라티스본에게 발현하신 겁니다.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시현자 알퐁스는 자신이 세속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한뿐만 아니라 유대교 신앙과 약속된 결혼도 포기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알퐁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가톨릭을 배척하는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가 거대 자본가의 상속자였음을 감안한다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알퐁스는 개종만 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 사제까지 되었으며, 더 나아가 유대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전념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여 수도회를 설립하고,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가톨릭을 알리면서 가톨릭을 향안 외부의 공격을 먼저 방어하는 역할을 평생 수행했습니다. 그가 보여 준 이 기적적인 활동을 통해 로마 교황청도 외부 세력에 대항할 힘을 얻었지요. 12년 후인 1854년에는 교황 비오 9세가 무염시태 교의를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858년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당신의 신분을 ‘무염시태’라고 밝히시어 무염시태 교리의 타당성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또한 파리 뤼 뒤 박에서부터 로마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 라 살레트, 루르드로 이어지는 무염시대 성모님의 발현의 연결 고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프라테 성당은 로마의 루르드라고 불립니다.
8. 이탈리아 로마 프라테 발현 성지 소개
유대교 신자였던 알퐁스 라티스본이 파리 뤼 뒤 박의 성모님이 새겨진 기적의 메달을 걸고 성모님을 목격한 후 즉시 개종하는 기적을 보였으므로 프라테 성당의 성모님은 ‘기적의 성모님’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알퐁스가 시온의 성모 수도회를 건립하여 유대인의 개종을 위해 평생 헌신했으므로 ‘시온의 성모님’이라고도 불리지요. 발현 성지가 도시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성지 규모가 성당 한 곳에만 제한되어 있습니다. 성모님을 위한 경당도 독립되어 있지 않고 성당 안에 있는 10개의 경당 중 하나일 뿐이지요. 기적의 성모 경당 양쪽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경당과 성 요셉 경당이 있어서 예수님과 성모님, 성 요셉을 함께 경배할 수 있습니다. 프라테 성당 곁에는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가 창립한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의 수도원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조경이 잘되어 있는 중정이 프라테 성당 내에 있는 출입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9. 발현 성지 프라텔 성당 찾아가는 방법
프라테 성지에 찾아갈 때, 로마에서 지하철을 타고 찾아가는 것이 가장 편리합니다. 빨간색으로 된 지하철 A선을 타고 가스 스파냐(Spagna) 역에서 내립니다. 스파냐역에서 나와 스페인 계단을 내려와 왼쪽으로 돌아 똑바로 앞으로 가면 정면에 무염시태 원주가 보입니다. 이 원주는 무염시태가 선언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스페인 대사관 바로 정면에 세워져 있지요. 원주 상단에는 무염시태 성모상이 있고, 하단에는 십계명을 들고 있는 모세, 이사야, 다윗, 에제키엘의 성상이 있습니다. 이 원주를 지나서 가면 두 갈래 길이 나옵니다. 오른쪽 길로 150m 정도 가면 프라테 성당이 나옵니다.
구글에서는 Basilica Sant’Andrea Delle Fratte로 검색해 찾아 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