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성전 시대 말기: 예수님 시대의 상황과 제자들의 전교 활동 이야기:

예수님께서 지상에 사셨던 시대의 정치, 종교, 사회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제2성전 시대의 말기였던 당시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유다인의 현자들(하캄, 또는 라삐)이 활발하게 유다이즘 전파 했습니다. 예수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 강림 체험을 한 제자들도 역시 사마리아를 비롯해 각지로 흩어져 복음을 증거했지요. 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1. 제2성전 시대 말기: 예수님 시대의 상황과 제자들의 전교 이야기

1) 제2성전 시대의 하캄 (라삐 또는 현자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율법(토라)을 받아 여호수아에게, 여호수아는… 크네세트 하그돌라 (최고 의회)에게 주었다. (아봇[Avot]) 1a)”

하캄(Hakham)은 문자적으로 ‘지혜로운 사람,’ ‘현자(賢者 )’를 의미합니다. 바리사이파의 영적 지도자들을 하캄이라고 불렀는데, ‘라삐’ 또는 ‘선생(교사)’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 당시 이들의 주요 역할 중 하나였기 때문이지요. 율법(토라)를 잘 알고 있는 명망이 있는 하캄들은 구전 율법을 자손들에게 전수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면서 권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유다인인 라삐 예수님

하캄은 보통 무상으로 소수의 학생들(하부라, Habura)를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다른 일을 하거나 재산이 있는 경우에는 그 수입으로 생계를 꾸렸고, 낮일 특히 농번기에 방해받지 않도록 주로 저녁에 가르쳤습니다. 수많은 마을에 이러한 공부방이 있었지만, 율법 연구의 중심지는 단연 예루살렘이었지요. 예루살렘에서는 도시 광장이나 성전 뜰에서 모임이 이루어졌습니다. 지역별 공부방 외에 학생들을 데리고 여러 마을을 여행하면서 대중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순회 교사도 있었는데, 예수님이 바로 그 순회 교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2성전 시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이러한 선생들의 영향력이 커졌고, 걸출한 인물들은 민족 지도자나 성전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누가 성전에서 하느님을 섬길 것인가를 두고 사두가이들과 끊임없이 다투었지요. 바리사이들에게는 율법을 아는 것이 최고의 위업이었고, 권력을 얻는 방법이었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바리사이들은 백성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반면, 사두가이들은 공동체와 성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캄에게는 본래 공식적인 지위가 없었고, ‘라삐’라는 칭호도 계급을 나타내는 것이기 보다는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선조들의 어록(Avoth Tractate)에는 ‘학자=교사(수) [scholar-teacher]라는 호칭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이 제2성전 전기에 어떤 역할을 했고, 공식적인 지위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교사들 대부분은 사제들이었지만 그들은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율법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후진 양성”이나 “토라의 수호자” 등의 슬로건은 대대로 교사들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2) 제2성전 시대의 회당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루카 4,16a)” 

회당은 유다인 사회의 주요 공공 기관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이곳에서 업무를 처리했고, 대중들은 여기에 모여서 중요한 문제들을 의논했습니다. 

카파르나움 회당의 모습들

회당은 주중에는 소년들의 공부방으로만 사용되었지만, 안식일과 축일에는 공동체가 모여 토라를 읽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곳이 되었습니다. 본래 기도는 이러한 모임의 주요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보통은 토라를 읽었고 가끔 예언서(하프토라, Haftorah)를 읽기도 했으며, 그 공동체에 학자나 선생이 있을 경우에는 그들이 설교(드라샤, drasha)를 하기도 했습니다. 

카파르나움 등의 갈릴래아 마을을 방문하실 때마다 예수님은 이러한 회당에 초청받아 말씀을 가르치시곤 했으며, 이러한 기회들을 이용하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회당의 전신으로 어떤 제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이집트에는 이미 기원전 3세기에 회당이 있었으며,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회당은 기원전 1세기의 것이었습니다. 기원후 1세기의 회당들이 마싸다, 헤로디움, 가믈라에서 발견되었고, 아르벨(Arbel)에서 발견된 한 건물도 회당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기원후 1세기의 회당 명문(銘文)에는 회당장 테오도토스라는 사람이 이 회당의 전대 회당장들의 아들이자 손자라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 회당이 적어도 기원전 1세기부터 존재했음을 증거해줍니다. 또한 신약이나 요세푸스의 기록을 통해 회당이 유대아와 갈릴래아 전역의 많은 마을들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예수님 당시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루카 2, 5-8)” 

주간절에 예루살렘 방문한 디아스포라 유다인들

기원후 1세기 초 유다 공동체는 주로 로마 제국의 절반을 차지하는 동부그리스어권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외에 두 곳이 더 있었는데, 이 중 하나인 이탈리아 본토의 유다인들은 폼페이우스의 출정 이후 노예로 끌려왔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 아래에서 상황이 나아지고 있었고, 다른 한 곳인 바빌로니아의 유다인 공동체는 파르티아 통치 아래 강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 디아스포라 대부분은 여전히 헬라 문화권에 한정되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가장 부유한 공동체는 이집트에 있었는데, 유다인 공동체들의 중심은 회당이었으며, 완전한 자치권 및 그들만의 지도자와 원로들이 있어 서로 물론 예루살렘과도 교류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바오로의 전교 활동의 흐름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유다인 공동체는 전반적으로 번영했으나, 이방 세력을 의지하고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4) 성령 강림축일 (주간절, 샤브옷)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모두 놀라워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새 포도주에 취했군.” 하며 비웃었다. (사도 2, 1-13)”

시온산 최후 만찬 경당

유다인 디아스포라는 예루살렘과 강한 종교적 유대감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이 건재해 있는 동안은 매년 수많은 순례자들이 해외에서 몰려 들려와 세 차례의 주요 축제 중 한 번은 “야훼의 산에 올라가야 하는” 의무를 이행하고자 했지요. 이 시기의 예루살렘은 동서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다양한 언어들로 떠들어대면서 기묘하게 국제 도시의 분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수많은 순례자들이 사도들의 말을 듣고는 그들이 자신들의 언어들로 이야기하는 것에 놀랐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2, 9-11은 그 당시의 디아스포라를 대대적으로 분석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바벨탑 사건과 율법을 주신 사건을 상징적으로 회고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로마 제국 경계 너머에 있는 동쪽의 파르티아, 메디아, 엘람,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합니다. 이어 유대아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카파도키아와 폰토스를 열거하고 흑해 연안에서 서쪽의 아시아 지방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계속해서 내륙의 프리기아와 팜필리아를 언급한 후 바다 건너 이집트와 그 주변 키레네로 이동했다가, 서쪽 디아스포라를 대표하는 로마(이곳에도 유다인과 유다교 개종자들이 있었다)에 이어 크레타와 아라비아로 기록은 마무리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제2성전 시기의 다양한 동전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과 여러 나라들 사이의 광범위하게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증명해 줍니다.

5) 사마리아와 해안 평지로 간 베드로와 필리포스

“그다음 날 그는 카이사리아에 들어갔다. 코르넬리우스는 자기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드로가 들어서자 코르넬리우스는 그에게 마주 나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를 일으키며,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코르넬리우스와 이야기하며 안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 사람에게는 다른 민족 사람과 어울리거나 찾아가는 일이 불법임을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사람을 속되다거나 더럽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도 10, 24-28)”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선포한 복음이 유다인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치자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 중 일부가 체포되었지만 바리사이파 지도자인 가믈리엘의 현명한 조언으로 얼마 안되어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전에 노예였다가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부제 스테파노를 고발했습니다. 스테파노는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격렬하게 비난받고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이제 사도들은 예루살렘 밖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시선을 돌렸습니다.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에서 전교하여 시몬 마구스라는 사람을 회심시키기까지 했는데, 이 사람은 불순한 동기로 교회에 들어왔다가 이후 사마리아에서 전교하던 베드로와 요한에게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리따로 가서 애네아스의 중풍병을 고쳐주었고, 야포로 내려가서 죽은 도르카스를 살린 뒤, 무두장(가죽 가공업자) 시몬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무아경에 빠져 (속된 동물들을 잡아먹으라는) 지시를 받은 후 로마의 백인대장으로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코르넬리우스의 초대를 받아들여 카이사리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대체로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던 베드로가 유대민족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교회의 가르침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6) 필리포스의 전교 여행 (기원후 36년)

“필리포스는 아스돗에 나타나,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사도 8, 40)”

에티오피아 내시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마차 형태

(에티오피아 내시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마차 형태- 로마의 도시 간 여행용 마차)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후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가자는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에게 파괴당하고 오랜 기간 폐허로 있다가 ‘옛 가자’ 맞은 편에 재건되었는데, 이 신(新)가자’(네아폴리스)는 해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베토가브리스(벳 구브린) 방향으로 출발한 필리포스는 얼마 가지 않아 에티오피아 여왕(칸다케)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내시를 만났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경배하는 이로서 예루살렘에 왔다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필리포스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길가의 샘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이티오피아 내시는 계속해서 (아마도 가자를 지나) 가던 길을 갔으며, 필리포스는 아조도에서 카이사리아에 이르는 해안을 따라가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마리아와 해안 평지로 간 베드로와 필리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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