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포프는 체코의 서북 지역 보헤미아에 있는 마을입니다. 강대국 사이에 위치해 오랜 기간 동안 이웃 나라의 지배를 받아 온 곳이기도 하지요. 이곳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습니다. 발현의 배경과 당시의 상황 및 발현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의 순서
- 1. 체코 필리포프 성모님 발현 성지 개요
- 2.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 3. 성모님의 발현
- 4. 성모님의 발현 장소
- 5. 필리포프 성모 발현 시현자
- 6. 필리포프 성지 공인 과정
- 7. 체코 필리포프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의미
- 8. 체코 필리포프 성모 발현 성지 찾아가는 방법
- 9. 필리포프 주변 성지 소개: 야스나 구라 수도원과 블랙 마돈나
1. 체코 필리포프 성모님 발현 성지 개요
체코의 필리포프 성지는 체코 서부 지역인 보헤미아에 있는 마을입니다. 이곳은 체코와 독일, 폴란드의 국경에서 서로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보헤미아는 강대국 사이에 있던 지역이어서 오랫동안 이웃 나라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지요. 이곳에서 수많은 전쟁과 전투가 치러져 유랑 생활을 하는 집시가 생겨날 수 밖에 없었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필리포프의 주민들은 늘 고단하고 불안한 생활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답니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었던 필리포프에 1866년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거지요. 성모님의 발현은 보헤미아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1930년대 매년 1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찾아와 보헤미아의 루르드로 불렸던 성지이기도 합니다.
(체코의 필리포프: 그리스도이들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 대성당)
2. 성모님 발현의 시대적 배경
필리포프를 포함해 현재 체코의 북서부 지역의 옛날 이름은 보헤미아입니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헤미안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보헤미안’이란 단어는 사회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지식인이나 문학가, 또는 예술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전에는 유랑 생활을 하는 집시를 비하해 부르던 말이었지요. 보헤미안의 유랑 생활은 지정학적인 이유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강대국들이 서로 맞대고 있는 국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죠. 특히 필리포프는 보헤미아의 여러 지역들 중에서도 그러한 환경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마을입니다. 필리포프는 3분만 걸어가면 바로 독일로 이어지고, 차로 30분만 달려가면 폴란드가 나옵니다. 마을의 이름도 체코어로는 필리포프이지만 독일에 속해 있을 때는 필립스도르프로 불려집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일어나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침략했습니다. 그들의 주요 전투가 벌어진 장소들이 모두 보헤미아 지역에 있습니다. 마지막 전투에 약 45만명의 군인들이 서로 싸워 5만 명 가량이 전사를 했답니다. 이렇게 대규모로 전투가 일어나 이 지역은 거의 쑥대밭이 되었고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보헤미안들이 이곳에 정착해 산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떻게든 버티어 살아 간다 해도 정말 고단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늘 열악하고 불안한 환경에 노출되었던 보헤미아 필리포프에 1866년 성모님이 발현하신 것입니다.
3. 성모님의 발현
성모님은 1866년 1월 13일 필리포프 63호 주택에서 막달레나 카데오바(Magdalena Kadova)에게 발현하셨습니다. 막달레나 카데오바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각종 질병으로 침상에만 누워 있던 31세의 여성이었죠. 그녀는 폐렴과 흉막염, 수막염 등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1865년 2월에 또 다른 심각한 가슴 통증이 나타나 그녀의 오빠 요제프의 가족과 두 명의 주치의가 그녀를 돌보았지요. 1865년 11월 두 주치의는 더 이상 막달레나를 치료를 할 수 없고, 곧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점점 더 고동이 심해졌어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자주 의식을 잃곤 했습니다. 1865년 12월 21일 이리코프의 신부 프란티셰크 스토르흐가 그녀에게 병자성자를 집전했습니다. 그녀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모두 죽음만이 그녀를 고통해서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3주가 지난 후 1866년 1월 12일 밤, 옆 집에 살고 있던 막달레나의 오랜 친구 베로니카 킨더만이 찾아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어 주며 같이 기도를 바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 잠을 이루지 못한 막달레나는 새벽 4시경에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밝은 빛이 방에 비치면서 대낮보다 더 환해졌습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옆에 자고 있던 베로니카를 팔꿈치로 깨우면서 “저 아름다운 빛을 봐!”라고 말했지만 잠을 자가다 일어난 베로니카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답니다. 그때 막달레나는 그녀의 침대 앞에서 하얀 옷을 입고 머리에 황금색 왕관을 쓴 빛나는 여인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 그 여인은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막달레나는 몸을 떨면서 두 손을 모아 “저의 영혼은 주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저의 정신은 저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병자들의 치유자이신 성모님 상)
그 빛나는 여인은 여느 사람들의 목소리와는 달리 특별한 음성으로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내 아이야, 이제부터 너의 병이 나을 것이다.” 그러고는 그 여인은 사라졌어요. 그때 막달레나는 즉시 치유되었습니다. 그날 새벽 막달레나는 누구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침대에서 일어나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다시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무한한 행복감을 맛보았습니다. 아침이 되자 막달레나는 빵을 사러 동네 빵집에 갔습니다. 주민들은 그녀가 건강한 상태로 마을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지요.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해서 물었어요. 막달레나는 “지난 밤에 성모님께서 저에게 이제부터 건강을 회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그 순간 병이 모두 나았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식은 즉시 주변 지역에 퍼져 나갔습니다. 막달레나의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은 직접 그녀를 보고 싶어 했지요. 그녀의 집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일부 사람들은 집 안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자세히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런 뒤에 그녀의 집으로 순례를 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 갔습니다.
4. 성모님의 발현 장소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필리포프는 지정적학인 위치로 그곳 주민들은 수백 년 동안 박해와 수난을 겪으며 고통스럽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곳이었습니다. 이런 보헤미아 지역의 작고 가난한 마을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거지요. 성모님은 필리포프의 주민 가운데에서도 가장 불행한 삶을 살고, 이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불쌍한 막달레나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녀가 몸져누워 있던 침대 앞에서 발현하신 겁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던 필리포츠 63호 주택)
1866년 1월 이 기적적인 치유의 소식이 널리 전해지자 막달레나 집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날로 증가했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실 당시 막달레나 집 주변에는 초원만 있었을 뿐 어떤 건물도 없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막달레나는 1866년 5월 순례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성모님이 발현하신 방을 깨끗하게 정리해 임시 경당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오래된 책상을 수리하고 막달레나가 성모님을 보았던 침대에는 아름답게 수놓은 베개가 놓여 있었지요. 하루 종일 촛불이 봉헌되었습니다.
프란티세크 스토르흐 신부는 1870년에 막달레나 집을 사서 우선 경당으로 사용했습니다. 이어서 1873년 1월부터 막달레나의 집터에 성당을 짓기 위한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1885년 정면에 2개의 탑이 있는 신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축성했지요. 그런 후 이리코프의 지부 성당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성당을 관리 유지하고 순례자들을 안내하기 위해 1884년부터 성당 바로 옆에 수도원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던 침대가 있었던 자리에는 막달레나의 구술에 따라 90cm의 성모상이 세워졌습니다. 이탈리아산 카라라 댓
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성모상은 폴란드 귀족 카롤리나 라틴스키가 그 비용을 봉헌했다고 합니다.
5. 필리포프 성모 발현 시현자
막달레나는 1835년 6월 5일에 독일어를 사용하는 카데오바 가족의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원래 가난한 집안이었는데, 막달레나가 13세 때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집은 경제적으로 더욱더 어려워지게 되었지요. 1854년 19세가 되면서 건강이 매우 안좋아졌습니다. 여러 중병에 걸렸던 거지요. 특히 폐렴과 늑막염, 나중에는 수막염으로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혼자 힘으로 지낼 수 없었던 막달레나는 오빠 요제프의 가족과 함께 살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12년을 보낸 후 건강이 더욱 안좋아져 병자성사까지 받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야 했지요. 이런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성모님께서 그녀에게 발현하신 겁니다.
성모님의 메시지를 받은 막달레나가 즉시 치유를 받고 일상생활로 복귀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치유의 기적 은총을 입었던 막달레나는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수많은 순례자들을 맞이하면서 성모님의 발현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해주었습니다. 또한 집으로 찾아온 환자들을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또한 교회의 성역화를 자금을 마련하는데 적극 협조하였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팔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후 이리코프에 있는 한 양로원에서 오랫동안 봉사 활동을 하다가 1905년 12월 10일 70세의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병자 성사를 받은 중병 환자가 70세까지 살았던 것은 기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녀의 유해는 이리코프의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가, 1925년 필리포프의 공동묘지로 옮겨 졌다가, 1994년 다시 필리포프 성당으로 이전되었다고 합니다.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시현자 가운데서 막달레나와 같은 특이한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중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던 사례도 없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시현자가 고통과 죽음에서 치유되는 기적을 직접 체험한 경우도 막달레나가 유일하답니다. 물론 성모님을 직접 만나뵈는 것 그 자체도 기적이지요. 그리고 시현 이후 삶이 변화되어 영적인 생활을 하게 되는 것도 분명 기적입니다. 하지만 막달레나 처럼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성모님께서 다른 메시지는 주지 않고 오로지 시현자의 치유만을 언급하는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6. 필리포프 성지 공인 과정
1866년 스토르흐 신부는 발현 이후 성모님과 관련해 은총과 치유의 기적이 11번이나 다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막달레나의 치유 기적 1주년이 다가오던 시기에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867년 1월, 이리코프에서 살고 있던 막달레나 랑한소바는 11년 동안 다리가 꼬여 누운 채 걷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그녀를 데려와 막달레나가 누워 있던 침대에 눕히자마자 다리가 회복되어 일어나 걷게 되었답니다. 이 기적이 일어난 이후, 막달레나의 집에 방문하는 순례자가 급증했지요. 결국엔 리토메르지체 교구의 아우구스틴 파벨 바할라 주교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막달레나를 심문하고, 두 주치의의 증언을 포함해 사건을 아주 면밀하게 조사했습니다. 주교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성모님 발현의 초자연적인 성격과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음을 인정하였습니다.
1873년, 즉 발현 7년 후에 성모님 발현을 기념하기 위한 성당을 건립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885년 성당이 성모님께 봉헌되었습니다. 1926년 1월 13일 교황 비오 11세는 성모님 발현 60주년을 기념하며 성당을 준대성당으로 승격했습니다. 1926년 9월 12일 교황은 성모님께 봉헌할 왕관을 축복했지요. 대관식은 주교의 주례로 거행되었습니다. 그런데 1945년 무렵 성모님의 왕관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980년 이후 독일의 가톨릭 신자들이 체코의 루비로 장식된 새로운 왕관을 마련했답니다. 1985년 4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티칸에서 새로운 황금 왕관을 축복하여 전달했습니다. 1985년 6월 16일 프란티셰크 토마셰크 대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성모상에 대한 대관식이 성지의 대성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새로운 왕관을 쓰고 계시는 성모상은 대성당 입구에 있는 경당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7. 체코 필리포프에서의 성모님 발현의 의미
필리포프 성지는 보헤미아 지역에 있는 유일한 성모님 발현 순례지입니다. 필리포프는 오래전부터 독일 지역이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계 사람들이었지요. 막달레나 가족도 마찬가지 였어요. 1930년대에는 매 해마다 1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방문해 중부 유럽에서 제일 유명한 성모 발현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헤미아의 루르드라고 불렸지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토지의 소유권이 체코로 주어지면서 예상치 못한 비극이 일어났다고 하는데요. 체코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독일 국적을 갖고 있던 주민들을 필리포프에서 추방했습니다. 대신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체코 사람들을 이주시켰습니다. 더욱이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종교 탄압까지 생겼습니다.
1970년까지 필리포프는 거의 잊혀진 순례 장소가 되었습니다. 대성당을 관리나 유지비용조차 없어 그저 방치되었었습니다. 그런데 프라하의 봄 혁명 후부터 원래의 상태로 점차 회복하고 있습니다. 필리포프를 순례하다 보면 시현자 막달레나는 지정학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수난을 겪었던 보헤미안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들지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모습이 강대국에 억압과 고통을 받고 살아가던 보헤미안의 상황과 많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막달레나를 회복시켜 치유의 기적을 보여 주신 것은 바로 성모님이 고통받는 보헤미안 모두에게 위안과 위로를 주신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필리포스의 성모님은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로 불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지 순례자들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독일과 체코 사람들이 주일 10시 30분에 두 국가의 언어로 미사를 함께 봉헌하면서 이웃 국가 간의 중요한 영적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8. 체코 필리포프 성모 발현 성지 찾아가는 방법
필리포프를 방문할 때 대중교통이나 택시, 또는 렌터카를 이용해 갈 수 있는데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체코 프라하에서 기차나 버스를 이용하여 먼저 가장 가까운 마을인 룸부르크나 이리코프까지 갈 수 있습니다. 룸부르크는 성지까지 5.5km가 되고, 이리코프에서는 2.7km 정도가 됩니다. 그 다음에 이곳에서 택시를 이용하거나 걸어서 성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렌터카를 이용해 가려면, 체코는 프라하에서 2시간 정도 소요가 됩니다. 폴란드는 브로츠와프에서 2시간 30분 정도가 걸리고, 독일은 드레스덴에서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립니다. 이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구글에서는 Basilica minor Penny Marie Pomocnice Filipove를 검색해 찾아 갈 수도 있습니다.
9. 필리포프 주변 성지 소개: 야스나 구라 수도원과 블랙 마돈나
폴란드의 남부 중앙에 위치한 쳉스토호바의 야스나 구라 수도원은 ‘블랙 마돈나’라는 성모화로 유명한 성지입니다. 블랙 마돈나는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이 검은 피부를 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루카가 식탁을 쪼갠 조각에 성모님을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요. 이 성모화가 비잔틴제국 등을 거쳐 1382년 이곳 수도원으로 오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1656년 이 성화가 기적을 일으켜 수도원을 스웨덴의 침략으로부터 구해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 기적으로 1656년 4월 1일 폴란드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는 블랙 마돈나를 폴란드의 여왕으로 선포하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15세기에 성모화를 약탈하려던 군인이 성모화를 두 번 내리쳐 성모님 뺨에 두 줄의 상처가 생겼는데요. 지금까지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모화를 보기 위해 연 600만 명의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성지이지요. 블랙 마돈나는 하루 두 번 미사가 봉헌될 때에만 공개됩니다.